고려청자의 탄생
자기는 표면이 유리처럼 매끄럽고 장식적인 면에서도 뛰어나,
자기를 성공적으로 만드는 일은 인류의 커다란 숙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흙과 불을 조화롭게 조절하여 아름다운 광택의 유리질 자기를 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찍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자기는 발전을 거듭하여 안정적인 생산 단계에 접어들게 되지만
여전히 중국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자기를 만들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중국과 더불어 자기 문화를 꽃피운 우리나라는
'언제, 어떻게 도자기를 제작하게 시작했을까?' 라는 물음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도자문화의 시작을 간단하게나마 되짚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자기 생산 단계 이전에는 도기 문화를 일구었다.
이미 삼국시대 말기부터 저화도(低火度), 연유(鉛釉) 도기를,
통일신라시대에는 고화도(高火度) 회유(灰釉) 도기를 제작했던 환경에서
유리질의 자기를 만들 수 있는 제작 여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왕족과 귀족을 비롯한 특정계층은 이미 중국의 명요(名窯)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들을 수입하여
도자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또한 통일신라 마에는 음다(飮茶)의 확산과 더불어 표면이 거칠고 수분을 흡수하는 도기보다는
자기를 선호하는 풍조가 확산되어 자기 수요가 급증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통일신라에서 후삼국시기를 거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후백제와 고려를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 중서부 지역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지속함으로서
중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처럼 고화도 도기 제작에 자신감이 있었고, 자기에 대한 수요가 꾸준하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중국 절강성의 월요(越窯)로부터 청자 제작기술이 도입되면서
한반도 내 요업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요지 발굴조사를 통해서도 입증되었다.
그동안 용인 서리, 북한의 황해도 원산리, 봉암리의 요지 발굴조사에서
전축요(塼築窯)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시흥 방산동에 위치한 고려 초기의 청자가마 조사는
중국 월요(越窯)와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시흥 방산동 가마는 우리나라 초기 청자의 제작 상황을 알려준다.
가마의 길이는 40m 에 이르며 벽돌을 쌓아 만든 전축요로,
측면에 출입구를 만들어 사람이 드나들고 자기를 적재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이러한 가마 구조는 이전까지 한반도에는 없는 새로운 것이었지만
대신 중국의 월요 구조와는 매우 유사하였다.
시흥 방산동 요지와 같이 초기 전축요의 유형으로 볼 수 있는 가마로는
경기도 용인시 서리, 시흥시 방산동, 양주군 부곡리, 고양시 원흥동,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봉천군 봉암리, 충남 서산시 오산리 등이 있다.
이 시기의 전축요가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서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이유는
당시 정치적 환경이 혼란스러운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라는 틀 안에서 안정적이고 효과적으로 요업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공간은
경기도 중심의 중부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기술 도입에 있어서도 지리적으로 근접하였으며,
주 소비 계층이 개경에 거주하고 있다는 점도 생산지의 입지조건에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자기 양식은 꾸준한 발굴조사로 인해 자료가 축적되어 있어 이해가 비교적 쉽다.
용인 서리의 요지 발굴 결과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초기 청자의 표식 유물로 볼 수 있는 완(碗)은
내저원각이 없고 굽지름이 넓으며, 접지면이 좁은 형식인 선해무리굽완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완은 만당(晩唐) 말기부터 오대(五代) 전기 사이에 유행한
월요(越窯)의 옥환저완(玉環低碗) 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자 완, 고려 10세기, 높이 5.7
청자 병, 고려 11세기, 높이 21.5
이와 같이, 한국 청자는 9세기 말에서 10세기 전반에 중국의 청자기술을 도입하여 자기 문화를 열었다.
물론 자기 제작 기술의 도입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반도 내에서 활발했던 도기 생산이 밑거름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후 고려는 꾸준하게 자기 제작 기술을 발전시켜
상감청자(象嵌), 동화청자(銅畵), 금채청자(金彩)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도자 문화를 꽃 피우며
고려인만의 미감을 유감없이 표현한 아름다운 청자를 제작하게 된다.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청자실, 강경남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85회>, 2008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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