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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최고의 북 마케터(책쾌) - 조신선(曹神仙)

Gijuzzang Dream 2008. 11. 9. 22:38

 

 

 

 

 

 

 

 

세상에 있는 책이 모두 자기 책이요, 책을 아는 이 또한 자신뿐이라며 호언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영 · 정조 대에 ‘조신선(曹神仙)’으로 널리 알려진 책쾌(다른 말로 서쾌, 책거간) ‘조생(曹生)’이

바로 그런 위인이다.

유만주(兪晩柱, 1755~1788)의 일기 『흠영(欽英)』은 물론,

정약용(1762~1836)의 「조신선전(曹神仙傳)」, 조수삼(1762~1849)의 「죽서조생전」,

조희룡(1789~1866)의 「조신선전(曹神仙傳)」, 서유영(徐有英, 1801~1874)이 쓴 『금계필담(錦溪筆談)』,

그리고 장지연의 「조생(曹生)」과 강효석이 편집한 『대동기문(大東奇聞)』,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등 여러 문헌에서

거듭 조선 후기 최고의 책장수이자 북 마케터였던 조신선의 개인적 행적과 책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적어놓을 만큼 그의 명성은 자자했다.


한양서 책쾌 ‘조신선’을 모르면 간첩

 

조신선(曹神仙)이라는 자는 책을 파는 아쾌로

붉은 수염에 우스갯소리를 잘하였는데, 눈에는 번쩍번쩍 신광(神光)이 있었다.

모든 구류(九流) · 백가(百家)의 서책에 대해 문목(門目)과 의례(義例)를 모르는 것이 없어, 술술 이야기하는 품이 마치 박아한 군자(博雅君子)와 같았다.

 (정약용, 「조신선전(曹神仙傳)」, 『국역 다산 시문집』 7)

“박식한 君子와 같다.”고 할 만큼 조신선은 지식과 학식을 갖춘 인물이었다.

책쾌 노릇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문자를 깨치고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했는데, 조신선은 책쾌 중에서도 책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위인이었다.

그는 한양 곳곳, 즉, 시장이나 관청, 의원집, 양반집 등을 막론하고

책을 원하는 이가 있는 곳이라면 고위 여하를 막론하고 달려갔다.

 

책쾌 중에는 한양에서만 활동하던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전국을 무대로 지방과 한양을 오가며 서적을 팔던 이들이 있었는데, 조신선은 한양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한양에서 그것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기 위해선 책을 옷소매에 잔뜩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게 상책이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금계필담』에서는

『강목(綱目)』한 질(帙)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혹 그것을 보기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즉시 품속에서 꺼내 방안에 수북이 쌓아 놓을 정도였다고 했을까?


장서가 유만주는 그의 단골 고객

 

조신선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거래처를 뚫던, 오늘날의 서적외판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단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익힌 뒤 고객이 서책 매매에 관심이 생기면 실제로 필요한 서책을 구해 와 첫 거래를 성공시킨 뒤 단골 고객으로 만들어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방법을 썼다.

이때 그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상대하던 고객은 주로 사대부 남성들이었다. 특히 장서가들이 조신선의 주요 고객이었다.

대를 이어 거래할 만큼 신용에 기초한 관계를 돈독히 유지해 나갔다.

 

“책보기를 혹독하게 즐기는 건 벽(癖,=버릇)의 하나다.”라고 말할 정도로 책에 깊이 빠져 지냈던

유만주와 같은 장서가야말로 책쾌들이 쾌재를 부르며 모여들던 단골 고객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니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그럴듯한 서점 하나 없던 시기에,

책 거래마저 부정시 하던 조선사회에서 유만주 같은 애서가들에게,

필요한 책을 필요할 때마다 구해다 주던 조신선 같은 북 마케터가

오히려 고맙고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으리라.


 

책쾌 조씨가 왔다.

『통감집람(通鑑輯覽)』과 『한위총서(漢魏叢書)』를 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명사明史』는 결국 선본(善本)이 없고,

『경산사강(瓊山史綱)』역시 구하기 어렵다고 했다.

듣자니『정씨전사(鄭氏全史)』는 춘방(春坊)에서 새로 구입했고,

『김씨전서(金氏全書)』는 일찍이 서각(徐閣)의 소유였는데

그것의 값이 모두 합해 사만 여 문이나 된다고 했다.

그 밖에 『절강서목(浙江書目)』을 구했다.

『합강(合綱』을 내어서 보여 주며 돋보기를 대고

글자 모양과 크기를 들여다보니 마치 사정전(思政殿)의 각본(刻本)같았다.

그래서 이와 같은 판본이면 경사(經史)와 제자서(諸子書) · 잡기(雜記) · 소설(小說)을 막론하고 한 책이든, 열 책이든, 백 책이든 구애받지 말고 다만 힘써 구해오기만 하라고 했다.

 (『흠영』, 1784년 11월 9일자)

유만주의 일기 속에 포착된 책쾌 조씨(조신선)와 유만주의 대화 장면을 보라.

이것이야말로 중국을 넘나드는 동아시아 지식의 확산과 정보 교환의 원천임을 감지할 수 있다.

사회 전반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던 조선의 유리창이었다고나 할까.

여기서 우리는 책에 대한 당대 지식인의 관심과 서적 구입에 대한 열의,

책쾌들의 서지 정보에 대한 박학 정도가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실제 유만주는 조신선으로부터 중국 총서나 문집 · 전기 · 소설 뿐 아니라

『사변록(思辨錄)』·『구운몽(九雲夢)』 등의 조선의 유교사상서와 소설책을 구해보고자 했다.

프로 정신과 자부심 하나로 천하를 소유하다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책을, 그것도 신속하게 고객에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책 거래에 관한 한 최고라는 그들만의 프로 정신과 자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하기에 수백 명의 책쾌들이 체포되어 참수당하거나 유배당하고,

또는 노비로 전락하는 ‘명기집략(明紀輯略)’ 사건이 영조 대에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을 때도 조신선을 비롯한 책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잠시 피했다가 이내 다시 책을 들고

고객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특히나 불행을 미리 알고 피할 수 있었던 조신선의 예지력에 대해

사람들은 그를 가히 ‘신선(神仙)’이라 부를 만하다고 감탄했다.

거기에다 세월을 먹지 않는 그의 외모, 귀천(貴賤)과 현우(賢愚)에 관계없이

모두 그를 알아볼 정도로 평생 수많은 문사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왕성한 북 마케팅을 편 그를 신비스런 인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조신선에 대해 조희룡은 책쾌 노릇을 좋아해 평생 책과 함께 동거동락하다 보니

문자선(文字仙)의 경지에 이른 데 있지 않겠느냐며 그의 신비한 면모를 칭송해 마지않았다.

책이 팔리면 그는 그 돈으로 술을 마시는 데 썼다.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그저 술을 마시며 삶을 즐기고자 했던 신선, 그 자체였다고 할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조신선은 책 거래에 관한 한 당대를 대표하던 최고 명인이었다.

책의 내용은 잘 몰라도, 책의 저자가 누구며, 주석을 단 이가 누구며, 몇 권 몇 책인지,

또한 문목(門目)과 의례(義例)에 관한 서지정보는 물론, 누가 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얼마 동안 어떤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지까지 환히 다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하의 책이 모두 내 책이요, 이 세상에서 책을 아는 이는 오직 나뿐”이라는

자부심 하나만으로도 천하를 소유하고 자신의 직업에 당당할 수 있었던 위인이었다.

“내 비록 책은 없지만, 아무개가 어떠어떠한 책을 몇 년 소장하고 있다가

그 중 어떤 책 일부를 나를 통해 팔았소. 그 때문에 책의 내용은 모르지만 어떤 책을 누가 지었으며,

누가 주석을 달았고, 몇 권 몇 책인지 까지 다 알 수 있다오.

그런즉 세상의 책이란 책은 다 내 책이요, 세상에 책을 아는 사람도 나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오.

세상에 책이 없어진다면 나는 달리지 않을 것이요,

세상 사람이 책을 사지 않는다면 내가 날마다 마시고 취할 수도 없을 것이오.

이는 하늘이 세상의 책으로 나에게 명한 바이오. 그러니 나는 내 생애를 책으로 마칠까 하오.”

(유재건, 「조생」,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 이민희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 2008-11-06, 월간문화재사랑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두 일본인의 독서법에 대한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한 사람은 독서를 통해 해당 전문가보다 더 많은 지식을 지니고 전문 토론에 임한다는 문화비평가

‘다치바나 다카시’, 또 한 사람은 현대사회의 병폐를 섬세하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묘사해 보이는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다. 다치바나는 수많은 책을 순식간에 읽으면서도 주제를 명료하게 파악하기

위해 독특한 속독법을 개발했으나, 히라노는 행간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느리고 꼼꼼하게 밑줄을 그으면서 읽을 것을 권한다.
두 사람의 책이 모두 우리 출판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다.

아마도 그때그때 필요한 정보를 빨리 집적하고 싶은 욕망과 독서를 통해

진정한 교양을 쌓아가고 싶은 바람이 우리들 모두에게 공존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런 고민은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선인들도 그러한 욕망과 바람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두 가지 성향의 독서가 모두 존재했다.

선인들이 말하는 효과적인 독서법


선인들은 자료를 얻기 위해 오늘날 백과사전의 전신이라고 할 유서(類書)를

이용해서 필요한 정보만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또 많은 책들을 독파하면서 필요한 부분만 초록(抄錄)해 두었다.

이에 비해 한 개념을 이해하고 사색의 결과를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느린 독서를 했다.

 

지금 흔히 사용하는 ‘독서’라는 말은

주자학에서는 ‘행간을 파악해가는 꼼꼼한 읽기(close reading)’를 가리켰다.
그런데 속성으로 독파하기와 꼼꼼한 읽기의 두 가지 방법은

어떤 책을 어떤 목적으로 읽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어느 한 쪽만 옳은 것은 아니다.
고전자료를 주로 다루는 필자는 꼼꼼한 읽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속독을 병행한다.

다만 속독은 날림으로 훑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속독은 비디오테이프를 2배속, 4배속으로 틀어놓고 줄거리만 따라가는 것과 같으므로,

전체 흐름을 이해하거나 특정한 요소를 적출하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

다치바나도 유사한 책들을 서너 권씩 사서 읽어야 하므로 속독이 필요하다고 했지,

모든 책을 속독으로 읽으라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소설보다 기록문학을 중시했는데,

삶의 생생한 국면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날림 훑기는 전혀 도움이 될 리 없다.

 

서포 김만중은 안맥(按脈)하듯이 독서를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서를 할 때, 이를테면 의술(醫術)을 배우면서 단지『맥결』만 읽고

자기의 삼부(三部)는 짚어보지 않는 것처럼 한다.”라고 지적하면서,

그러한 병폐는 선배나 큰 선생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의술을 공부할 때 의술을 체득하기 위해 스스로 맥을 짚듯이, 독서를 할 때도 글의 생성적 의미와

문맥적 의미를 파악하고 내 관점에서 감상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스스로 맥을 짚어보지 않는 독서는 남의 설을 본뜨거나 뇌동(雷同)하는 것과 같다고도 말했다.

오늘날, 줄거리나 이해하고 표면의 주제나 파악하려면 인터넷 정보나 관련 블로그를 검색하면 되지

시간을 쪼개 책을 읽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지식의 대상은 너무도 많다.
교양과 지식의 세계가 이렇게 확장되기 이전,

불과 다섯 수레 분량도 안 되는 책만 잃어도 박학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에도 장자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한계가 있건만, 앎의 대상은 무한하다[人之生也有涯, 其知也無涯]”라고 말했다.

포괄적이고 참된 지식을 얻으려면 세세한 대상들에 대한 앎을 아예 끊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들은 부득이 세세한 지식을 쌓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책을 빠르게 읽어내야 한다.

그렇지만 내 삶에 양식이 될 책들과 내 사유체계를 쌓기 위해 필요한 책들은,

김만중이 말한 ‘안맥(按脈)’의 방법으로 차근차근 읽어나가야 할 것이다.

-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  2008-11-06, 문화재청, 월간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