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넘치는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흐르며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문화는 살아 숨쉬며 생명력이 넘친다. 한류는 이미 1,700년도 더 되는 역사를 갖고 있다. 한반도의 문화가 밖으로 흘러나가 동아시아 문화를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또 다른 나라 문화가 한반도에 들어와 우리 고유 문화로 어떻게 정착, 발전해 왔는지 알아보자.
일본 고대사에서 한류의 흔적을 찾기란 쉽다. 그 중에서도 불교 문화에서 단연 돋보인다. 일본 열도에 불교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아스카 시대. 이 때부터 1백년간을 일본 불교, 특히 한반도 전래 불교의 황금기라 부른다. 뒤를 이은 나라시대 1백년간 무려 1천여 개의 사찰이 창건되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찰이 호류지다. 607년에 완공된 호류지는 일본 미술사의 보고이자 동양미술계의 큰 족적이다. 55동의 건축과 60여 점의 불상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림이나 조각, 경전, 문서 등 5백여 점의 보물도 있다. 이 문화재들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이 백제의 한류 문화였다. 신라가 백제식 기술을 받아들여 황룡사를 만들고 일본이 이를 흉내낸 것이다. 특히 5중탑은 부여 정림사 5층 석탑과 양식이 똑같다. 팔각당 역시 한반도의 건축 기술이 그대로 녹아 있다.
건축 기술뿐 아니라 공예 기술에도 백제의 한류 문화가 전해졌다.
대표적인 백제의 공예 기술이 전파된 것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칠공예품, 다마무시노 즈시(玉蟲廚子다). 비단벌레 불상궤라고 부르는 이 상자는 호류지에 가는 일본인들이 꼭 보고 오는 유물로, 높이 2m x 32.7㎝의 네모난 2층 구조에 칠공예를 했다. 한 채의 미니어처 전각이나 탑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백제의 뛰어난 세공기술과 회화, 건축, 조각술의 총집합체라 할 만하다.
문화재 창고 쇼소인(正倉院)은 한류의 보물창고다. 이곳에는 일본 국보가 30여 점, 중요문화재만 70여 점이 된다. 일본 국립박물관을 빼고서는 일본 최고, 최대의 보물창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백제의 공후(고대 비파, 일본에서는 백제금), 고구려의 횡적(橫笛, 구멍 6개 짜리의 놀라운 고대 악기), 신라의 가야금 등이 그렇다. 고대 한국 문화의 일본 진출을 입증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한반도가 삼국시대일 때 일본에는 원시적인 토기류밖에 쓰지 못했는데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들이 다수의 도기와 도기 제작술을 전파해 일본에도 멋지고 튼튼한 도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여기엔 또 가면탈 171점도 있는데 고구려 가면무에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 왕실은 아악료라는 궁중음악 관청을 만들어 왕실에서 공연하며 고구려 것을 차용한 것이다.
큐슈는 백제 문화의 전파지로 소문난 곳이다. 쿠마모토에서 백천강을 건너가면 야쓰시로시가 나타난다. 백천(白川)은 사비성 옆의 백강(금강)을 본딴 것이다. 백제식 산성이라고 추측되는 국지성은 구마모토에서 약 20㎞에 위치한 곳으로 남향의 토축성이다. 여기서 십리도 안 되는 곳에 후나야마 고분과 백제식 횡혈식 고분이 수십 기나 있다. 이곳에서 가까운 야쓰시로시 사카모토라는 곳에는 구다라키라는 지명이 있다. 구다라키의 옛이름은 백제래(百濟來). 곧, 백제에서 왔다는 뜻이다. 이 마을 가운데 백제천이 흐르고 우체국 이름은 백제래, 스포츠센터도 백제래다. 가까운 곳에 백제 스님 또는 군장으로 추즉되는 일라의 묘가 있다. 이 모두가 6세기 말에 일본에 크게 유행한 백제의 한류 문화 유적들이다.
한류의 제철 기술이 일본에 전해진 대표적인 사례다.
대장경과 같은 학문적인 문화전파를 비롯, 빗살무늬 토기의 영향을 받은 소바다식 토기를 비롯하여 청동기 시대의 석관묘, 오키나와 각지에서 출토되는 상감청자와 고려 광종대에 제작된 동종, 우라소에 성터에서 출토된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명문 기와장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한류를 입증하는 고고학적인 증거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중고대사에선 주변국의 전쟁이나 기근, 홍수, 정치적 격변기에 한반도로 집단 이동하는 일이 잦아 대륙 문화의 전파가 자주 이루어졌다. 남방 불교 전래설을 낳은 귀중한 유물이다. 실크로드의 동단에 위치한 한반도의 신라에도 많은 이방 문화가 전해져 유행을 만들어냈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나온 유리병은 서역 문화의 전파로 한반도에 들어와 귀족 사회의 전유물이 되었다.
뿔잔, 서역식 단검 등은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아랍의 문물이었다. 특히 뿔잔의 경우는 김해, 창녕, 마산, 부산, 경주 일대에서 골고루 출토됨으로써 서역 문물이 신라에서 크게 인기를 모을 만큼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포도 무늬를 쓰는 장식도 서역 문화의 산물이고 이 지역서 출토된 토우와 토기에선 납작머리, 긴꼬리 원숭이, 개미핥기 등이 나타나고 있다.
언어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우리 결혼 문화에 남아있는 신부가 쓰는 족두리는 몽골 여인들의 외출용 모자 ‘고고’가 한국에 들어와 잡리잡은 것이다. 송골매, 보라매 등도 몽고에서 들어와 우리말로 정착된 경우다. 진지를 ‘수라’라고 하는데 이 역시 원나라 시절 중국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제주도 방언 가운데 ‘녹대(祿大)'와 ‘가달(加達)'은 아직도 몽고의 잔영이 남아 있는 말이다. 녹대는 서울말의 굴레에 해당되며, 고삐줄을 뜻하는 것이다.
살구씨속을 가리키는 행인을 넣어 빚은 행인자법주, 유목민들이 마시던 술인 양주(羊酒), 마유주, 상존주와 백주 등의 도수 높은 술이 소개되어 인기를 모았다.
고려에 탕류나 고기국 종류가 제대로 등장한 것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고나서부터였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귀화인들이 많았는데 발해에선 무려 수만 명이 들어와 발해 문화를 유행시켰다. 여진족 족장이던 이지란이 조선 건국의 기초가 되면서 귀화 이후 많은 후손을 퍼뜨렸고 약재와 의복, 여진의 문화도 국내에 전파시켰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파견된 명나라 병사들을 통해, 그리고 이후 명청 교체기에 유입된 명나라 유민들을 통해 더욱 한반도에 깊이 확산되었다. 한반도엔 청나라 변발과 복식이 크게 유행했다.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문화가 그리고 지금은 글로벌 시대임을 입증하듯 다문화 문물들이 국내에 유입돼 한국의 문화를 변모시키고 있다. - 박기현 역사소설가 - 2008-11-06, 월간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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