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세계를 누빈 원조 한류 스타들

Gijuzzang Dream 2008. 11. 8. 12:37

 

 

 

 

 

 

 

일본을 비롯해 중국, 베트남 등을 여행하다 보면 낯이 익은 얼굴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바로 ‘욘사마’와 같은 한류 스타들이다. 거리의 광고판은 물론 TV, 서점 등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종합적인 문화 발전이 이뤄낸 쾌거다. 하지만 한류 열풍에 따른 스타 등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옛날에도 성격은 다르지만 한류 스타는 엄연히 존재했었다.

이름하여 ‘원조 한류 스타’들이다.

 


일본 아스카 문화를 꽃피운 백제 왕인

 

1년 전의 일이다. 일본 여행 중 우연히 일본 지식인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일본인이 자연스럽게 백제 왕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 무렵 왕인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던 필자로서는 그저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만큼 왕인은 일본인에게는 친숙한 인물로,

역사를 얘기할 때 자주 회자되곤 한다.


한반도의 한류 기원은 1700년도 더 오래 전 백제 근초고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초고왕은 왜국과 선린 관계를 맺어 많은 문물을 전했다.

그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 문화를 꽃피운 왕인

그야말로 한류를 낳은 원조 스타다.
왕인은 오경에 통달해서 18세에 진짜 박사라는 벼슬을 받았던 대학자였다.

한국에서는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정사에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역사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왕인은 32세 때인 405년(한국과 일본의 설이 분분하나 이것이 가장 유력)에 전라도 영암의 상대포(당시는 국제 무역항)에서 일본 오진왕의 공식 초청을 받아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현해탄을 건넜다.

그 후 왕인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줬을 뿐만 아니라,

왕실의 태자를 가르치며 한학과 유학을 널리 알렸다.

이를 통해 일본은 문화국으로서의 기틀을 다지고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게 됐다.

그 후 왕인은 일본 학문의 시조이자 큰 스승으로 추앙받게 됐다.

지금도 도쿄의 우에노 등 여러 곳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을 만큼 일본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도자기로 일본 열도를 감동시킨 이삼평

 

일본 큐슈의 사가현에 가면 인구 1만 4,000여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 있다.

전세계에 일본 도자기의 명성을 떨치게 한 아리타 야키(도자)의 본고장인

아리타다. 아리타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 정상에 올라가면,

사람 키의 서너 배쯤 되는 기념비가 있다.

비의 전면에는 ‘도조 이삼평 비’라는 비문이 크게 음각되어 있는데,

정유재란 때 충청도 금강 유역에서 일본으로 끌려가

오늘날까지도 신처럼 받들어지고 있는 조선 도공 이삼평의 비다.


일본에 끌려온 이삼평과 그의 일행은 초기에는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아리타의 이즈미산에서 자기의 원료가 되는

백자광(고령토광)을 발견한 후, 조선 도공들만이 가졌던 최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도자기를 만들게 된다. 즉, 가마온도를 1,300도까지 올리고

한 번에 많이 구울 수 있는 오름가마 및 도침이라고 하는 받침대 등을 사용하여

일본 최초의 도자기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도자기 장인으로 또한 조선 도공 집단의 지도자로서 그의 명성은 큐슈 전체로 퍼져 나갔으며,

일본에서 그와 그 일행에 대한 대접도 극진했었다.

첨단 기술을 배우려 몰려드는 일본인들을 통제하고 좋은 작업 여건을 주기 위해

집단 거주지를 마련해 주었고, 기본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봉급을 주었다.

그 당시 일본에서 봉급을 받는다는 것은 사무라이 이상의 특권층을 뜻하므로

사회적 지위와 함께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러한 조선 도공은 이삼평 외에도

가고시마의 심당길, 하기의 이작광, 이경 형제 등 여러 명이 있었으며,

그들에 의해 일본 열도로 전파됐으니 그때의 한류 열풍을 가히 짐작해볼 수 있다.

 


‘욘사마’의 인기를 능가하는 조선통신사와 마상재

 

원조 한류 스타에는 조선통신사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의 정식 요청으로 열두 차례나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통신사

‘욘사마’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매회 평균 약 500여 명의 대단위 구성원(정사, 부사, 종사관, 제술관, 사자관, 군관, 화원, 역관, 의원, 마상재 재인, 소동, 뱃사공 등등)으로 편성된 통신사는 일본 땅에 조선의 발전된 문화, 문물을 전하며

각계 각층과 만나 양국의 우호를 증진시켰다.

일본에서도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융숭한 대접을 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한일 관계의 귀감이 되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인기는 막부의 쇼군, 고관, 번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참으로 대단하였다.

조선의 글, 그림 솜씨는 물론이거니와 조선 기마술의 진수인 마상재(마상무예의 일종으로 달리는 말 위에서 부리는 각종 기교) 등에 대해서도 무예를 숭상하는 사무라이 나라답게 끝없는 찬사를 보냈었다.
생애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조선통신사에 열광했던 당시 일본 열도의 모습은,

1719년에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방문했던 신유한이 쓴 ‘해유록’의 두 구절만으로도

대략이나마 추측해 볼 수 있다.

“에도(지금의 도쿄)에서는 통신사의 행렬을 보기 위해

다리 아래에는 작은 배들이 마치 고기 비늘처럼 모였고

주변에는 구경하는 사람들이 꼭 고슴도치 털처럼 둘러 있었다.”


 

“오사카에서는 글을 써달라는 방문객들이 다른 도시보다 두 배나 더 됐다.

닭이 울도록 자지 못하고, 밥을 대하여도 입에 넣었던 것을 토할 지경이었다.

대마도 왜인들이 돈까지 받아 챙기면서 선별한 인원이 그 정도였다.”

이외에도 일본 열도를 후끈 달아오르게 한 원조 한류 스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삼국시대의 담징과 아직기, 근대에 와서는 10여 년의 일본 망명 생활 중에 글과 풍류로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김옥균 등이 그렇다.

 


대륙을 감동시키고 울린 한류 스타

 

중국 대륙을 감동시킨 원조 한류 스타들도 많았다.
통일신라 시대 장보고는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모든 노예와 포로를 해방시키고 안전한 무역로를 건설하였다.

이로써 중국에 법화원을 건설, 신라 문화를 유행시켰고

일본과 중국의 지식인과 승려들이 이곳에서 한반도 문화를 배워 자기 나라에 전했다.
신라의 최고 문장가 고운 최치원은 13세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후

‘계원필경’과 황소의 난을 진압하자는 ‘토황소격문’을 발표해

중국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최근 그의 기념관이 그가 당나라에 머물 때 벼슬을 했던 양저우에 설립되었다.


조선 퇴계 이황은 그의 학문이 중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그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중국에선 근세 개화기에

이황의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하여 병풍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생애와 학문의 명성은 현대까지 이어져 대만 국립사범대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고 워싱턴, 뉴욕, 하와이, 함부르크, 본 등에 퇴계연구회가 조직될 정도다.

그를 연구하는 학자만 전세계적으로 1천 명이 넘는 한류의 진정한 본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 주자학의 원류가 됐다.


이외에도 대륙을 감동시킨 원조 한류 스타에는,

스물 일곱으로 짧은 인생을 마쳤지만 아름답고 애상 어린 시만으로

수많은 중국인의 가슴을 울렸던 허난설헌이 있다. 그녀는 중국 땅에 발을 디딘 적이 없지만,

그녀가 쓴 시들 중 일부가 동생인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에 의해 수습된 후

명나라의 시인 주지번이 중국에서 ‘난설헌집’으로 간행하여 격찬을 받게 된 것이다.

또한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야 지로란 사람에 의해 간행되어 호평을 받았다.

한류의 역사는 이토록 오래됐고, 그 스타들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우월성을 나라 바깥에 널리 떨쳤다.

지금 우리는 옛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 속의 한국 바람’이 식지 않도록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글  : 진병팔 역사여행가 / 사진 : 왕인박사유적, 경남 하동군

- 2008-11-06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