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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장수의 공이 더욱 큽니다. 하물며 중국의 유자(儒者, 유학자)들도 직해를 보고는 모두 해설한 것이 지당하다고 말하면서도 우러러 공경하므로 설장수의 위인(爲人 : 위대한 인물됨)을 가히 알 수 있사옵니다." <세종실록>
세종과 신료들이 논의하던 대화다. 설장수의 가문은 고려말 위구르족의 고창(高昌)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학문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대성하였다. 설장수는 고려말 학문을 총괄하는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하고, 조선 건국 이후 능숙한 중국어와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외교 분야를 전담하여 8차례나 사신으로 활동하였다. 여말선초 고려와 조선에 중국의 선진문화를 전파하며 귀화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는 여지도(輿地圖)라고도 함. 18세기 말, 채색필사본, 60.5×103.1㎝
다른 나라의 귀화와 달리 한국사의 귀화인과 귀화를 대하는 한국인의 인식을 살펴보면 문화적 다양성과 포용성을 바탕으로 공존을 지향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귀화인은 한국의 입장에서 필요성이 있어 적극적인 귀화정책을 시행한 경우와 국제정세의 변동과 국익차원에서 한국으로 유입되어 귀화한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우월하였던 귀화인을 수용하여 한국사의 다양성을 높이고, 한국사의 우수한 문화 수준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펼쳐 역사적 보편성을 추구하였다.
물론 기자의 동래(東來)를 귀화로 볼 수 있느냐의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고조선에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인물이 와서 고조선 문화를 한층 발전시켰으며, 고조선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귀화라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국가발전을 위해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불교를 도입함으로써 사상적 통일을 시도하면서 적극적인 귀화정책을 전개하였다. 구체적으로 해상무역의 중심이었던 신라에 서역인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처용(處容)은 서역과의 교역, 문화적 번성과 모순, 성문화를 포함한 사회상을 포괄적으로 반영하는 귀화인으로 역사상을 가진다.
처용의 탈을 쓰고 '처용무'를 추고 있는 모습(울산처용문화제)
후삼국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건설한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선진적인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유입하되 고려적인 모습으로 발전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고려 전 시기에 걸쳐 유지되었던 정책으로 고려의 귀화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유교문화의 본격적인 전래와 급격한 국제정세의 변화라는 시대상황에서 과거제의 시행을 촉발하였던 쌍기(雙冀)는 ‘우리’라는 자의식이 형성되었던 시기에 우리 아닌 존재를 용인하였던 고려의 개방성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의 주체성을 상실하였던 원간섭기에 몽골인 훌라타이로 와서 고려인으로 살다간 인후(印侯)를 통하여 대륙의 혼란 속에서 고려로 귀화한 이방인들의 정착노력과 그들을 포용한 고려사회의 개방성을 엿볼 수 있다. 송, 요, 금, 원으로 이어지는 국제정세의 변화는 고려를 보다 개방적인 국제국가로 유도하였으며, 다양한 국적의 능력있는 인물을 적극적으로 고려체제에 유입하여 고려의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향화인(向化人) 3년면세(三年免稅)’라 하여 귀화인의 정착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여말선초 여진족을 이끌고 귀화한 이지란(李之蘭)은 반독립적 여진족이 한국사의 일부로 융화된 성공적인 귀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지란 영정
김충선이 귀화하게 된 계기가 된 '동래성 전투'
조선초기 문화발전과 외교분야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던 설장수, 어문발전과 외교문서 작성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던 당성(唐誠),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조총무기를 도입시킨 김충선(金忠善) 등은 모두 한국사회에 당당한 한국인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또한, 국난극복을 위한 선진문물의 적극적인 도입이 절실하였던 조선은 박연(朴淵)과 표류인을 경계 대상이 아닌 포용해야 할 이방인으로 인식하였다. 조선의 이러한 귀화정책은 대한제국 시기까지 이어져 배재학당, 육영공원 등의 근대교육기관에 외국인 강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 외국인 수는 1991년 인구 대비 4만 9,507명으로 총인구의 0.11%에 불과했지만, 2007년 106만 6,273명으로 늘어나 총인구의 2.2%를 차지할 정도다. 엄격한 신분제와 혈연을 강조하였던 전통시대에 한국에 사는 귀화인의 성공적인 한국화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권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 귀화는 적지 않은 마찰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한국사에 귀화는 단순한 경계인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관직체계에서 중요관직을 역임하는 등 한국사의 다양성과 포용성 측면에서 인정받으며 융화되었다. 차별적인 인식이 엄연히 존재한다. 원래의 조국이 아닌 한국을 새로운 조국으로 받아들이려는 귀화인에 대해 문화적 다양성과 한국사의 포용성으로 ‘다른 너희’가 아닌 ‘같은 우리’라는 인식이 필요할 때다. 귀화인은 영원한 이방인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한국사회를 구성하고 이끌어갈 우리이기 때문이다. - 월간문화재 2008-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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