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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 초상 - 화산관 이명기 筆

Gijuzzang Dream 2008. 10. 31. 03:17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 - (1756-?)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개성(開城). 화원으로 사과(司果)를 지낸 이종수(李宗秀)의 아들이며,

김응환(金應煥)의 사위로, 후사가 없어 동생 이명규(李命奎)의 아들 이인식(李寅植)을 양자로 삼았다.

 

이명기 역시 도화서 화원이었으며 찰방을 지냈다.

특히, 초상을 잘 그려 1791년(정조 15)에 정조어진원유관본(正祖御眞遠遊冠本) 도사(圖寫)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하였고, 1796년에는 김홍도와〈서직수(徐直修)초상>을 합작하였다. 

 

수화는 화중인물과 바위의 모습, 필법 등에서 김홍도의 화풍을 짙게 반영하고 있어

독자적인 개성은 뚜렷하지 못한 편이다.

석양의 뱃놀이를 소재로 삼은장범선유도(張帆船遊圖)> 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을 따르면서도

괴석(怪石)에 명암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양감을 표현하는 등

서양화법을 단편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밖에 채접(彩蝶)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작품은 없다.

유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서직수초상> <관폭도(觀瀑圖)> <산수인물도> 등과

삼성리움미술관 소장〈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등이 있다.

    

槿域書畵徵, 韓國繪畵大觀(劉復烈, 文敎院, 1969)

韓國의 美 12―山水畵 下―(安輝濬監修, 中央日報社, 1980)

韓國繪畵 2(崔淳雨, 陶山文化社, 1980). 〈洪善杓〉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 

 

 

번암 채제공(1720-1799)은 정조의 신망이 두터웠던 조선후기의 명재상이다.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 호는 번암이다.

남인계 출신으로 1748년(영조 24) 탕평을 내세운 영조의 특명으로 선발되어

예문관 사직을 비롯해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772년부터 세손우빈객으로 세손의 교육에 참여하였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788년(정조 12) 우의정, 1790년(정조 14) 좌의정, 1793년(정조 17)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운영하였던 그는 10여 년을 재상자리에서 탕평책을 성공리에 이끌었고

한편으로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고 이른바 문예부흥 정치를 이룩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한다.

 

 

채제공의 초상화에서 지정 대상은 모두 6점이다.

65세상인 금관조복본, 73세상인 시복본전신상, 73세상으로 추정되는 흑단령포본 3점이

관복 정장의 전신상으로 비단에 그린 정본인 셈이다.

그리고 2점의 65세상과 1점의 72세상은 종이에 그린 흉상 초본이다.

흉상 초본 3점은 홍포관복본과 함께 소장되어 내려온다.

흑단령포본은 부여의 도강영당에 모셔졌던 초상이며, 나머지는 후손들이 관리해오던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당시 초상화로 명성을 떨치던 화산관 이명기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체제공을 그린 초상화는 모두 보물(1477호)로 지정될 만큼 가치가 높다.

조선후기에 채제공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이 중요하고,

초상화를 그린 이명기의 회화적 수준 역시 당대 최고로 꼽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후기 문인초상화의 각종 복식 유형을 다 갖추고 있고,

유지초본까지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초상화 연구에서 학술적 의미도 크다.

 

채제공의 초상화에는 정본 3점과 초본 3점 외에도, 2점의 정장본이 더 있다.

그중 1점은 미천서원에 오사모에 단령포를 입은 정장본 65세상이 전해왔는데 분실되었다.

이 초상은 사진으로 볼 때 1784년에 이명기가 그린 65세상이고,

얼굴 왼쪽에 1799년에 최헌중(崔獻重)이 추서한 채제공의 자찬문이 딸려 있다.

 

또 다른 한 작품은 1789년에 이명기가 그린 70세상으로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두 손을 내리고 부채를 든 홍포관복본 73세상과 유사한 복장이나,

편하게 앉아 소매 안에 두 손을 집어넣은 모습이 다르다.

이 <번암 채상국칠십세상(樊巖蔡相國七十歲像)>에는 화면 왼편에 그림에 대한 애달픈 사연이 적혀 있다.

“기유년(1789) 임금(정조)의 어명으로 원본을 제작할 때 한 부 더 그린 여분의 작품인즉,

아들 채홍근(蔡弘謹)에게 보존케 하여 대대로 전하도록 했으나 아들이 먼저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으니,

슬프도다. 이명기의 그림에 몇 자 적자니 눈물이 마르지 않는구나”라는 내용과 함께

“번옹 칠십삼세자필(樊翁七十三歲自筆)”이라고 밝혀놓았다.

초상화를 물려받은 아들이 일찍 죽는 불운을 겪은 탓인지

초상화도 이역 멀리 영국에 가 있음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기록에 따르면 채제공의 초상화는 65세, 70세, 72세, 73세상이 제작되었다.

이처럼 여러 벌 제작된 것은 채제공이 정조와 각별한 사이였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승정원일기> 정조 15년 신해 10월 초이레조에 밝혀져 있다.

 

정조가 <채제공 65세상>을 보며 “병폐의 때였던지라 얼굴에 우울하고 우수에 찬 기색이 있다.

금일 요직에 쓰임으로써 권력을 잡은 후 의형(儀形)과는 크게 다르다. 그러니 지금 다시 그려라”라고

명하셨다. 그러자 채제공은 “신이 그때 이명기로 하여금 그리게 했는데,

그때인즉 실로 우울한 기색이 있어 이렇게 묘사되었습니다.

신이 보아도 태평재상(太平宰相)의 기상이 결코 아닙니다.

이명기는 가히 좋은 화사(畵師)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채제공의 초상화를 전담하다시피 한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 1756-?)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초상화가이다.

정조 시절의 어진과 문인 초상화는 대부분 이명기의 손에 의해 제작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정조 15년(1791)과 20년(1796)에 정조의 어진제작에 두 번이나 주관화사로 발탁되었고,

<강세황초상> <유언호초상> <서직수초상> 등 많은 걸적 초상화를 남겼다.

이명기 초상화의 특징은 안면과 의습에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입체감 표현이 두드러지는 점과

화문석 돗자리나 족좌대와 의자 처리에 투시도법을 활용한 점이다.

- 이태호 교수, 명지대 미술사학과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초상(肖像)

 

 

 (1) 유지초본(油紙草本) 2점(65세상) - 보물 제1477호
이명기 그림, 1784년경, 유지에 흑연, ①72.5×47.2㎝, ②71.5× 47.5㎝

  

정식초상화를 제작하기 전에 유지에 그린 채제공의 65세 흉상 밑그림 두 점이다.

두 점 다 초본을 그리는 데 사용한 도구가 유탄(柳炭)이 아니라

지금의 연필과 같은 흑연재료로 추정된다.

아마도 이명기가 활동하던 때쯤부터 중국에서 이런 소묘 재료가 수입되지 않았나 싶다.

 

 

화면 오른쪽 위에 ‘領議政 文肅公 樊巖 蔡先生 六十五歲眞 草本'이라는 후기(後記)가 적혀 있다.

이 초본을 바탕으로 행방불명된 나주 미천서원(眉川書院) 소장의 흑단령본(黑團領本)과

개인소장 금관조복본 초상이 그려졌을 것이다.

나주 미천서원(眉川書院) 소장의 흑단령본(黑團領本)은 분실되어 지금은 사진만이 전한다.

 

 

 

 (2) 유지초본(72세상) - 보물 제1477호

이명기 그림, 1791년경, 유지에 채색, 65.5×50.6㎝, 수원시 소장

 

초상화 제작을 위해 유지에 그린 밑그림으로 채제공 72세상 흉상이다.

단순히 소묘로 그치지 않고 수묵과 담채로 정본 초상을 그리듯이 한 점이 주목된다.

얼굴, 사모, 흰 속옷 부분에는 배채(背彩)를 시도했을 정도이고,

어깨 부분을 수정하기 위해 의상에는 호분이 사용되었다.

특히 어깨 부분의 수정은 이 초본을 토대로 그린

정본(홍포관복본 73세상)의 어깨 부분 수정과 흡사하여 흥미롭다.

 

화면의 오른쪽에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 어른의 72세 초상화 초본(領議政 文肅公 樊巖 蔡先生 七十二歲眞 草本)’

이라는 후기가 있고,

‘신해년(1791) 봄에 찰방 이명기가 왕명을 받들어 그려 올리자 이를 내각에 수장하였다’라고 밝혀져 있다.

 

 

 

 

 

 (3) 흑단령포본 - 보물 제1477호

이명기 그림, 1792년경, 비단에 채색, 155.5×81.9㎝(그림) / 210×94㎝(전체),

국립부여박물관 보관(도강영당본손유사 채규식)

  

나주 미천서원본

  

 부여 도강영당본

 

오사모에 쌍학흉배의 흑단령포를 입은 전신의좌상(全身椅坐像)이다.

본래 부여 도강영당(道江影堂)에 모셔져 있던 것인데, 지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정장관복본의 ‘채제공 65세상’이 나주 미천서원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분실되었다.

이 초상화와 나주 미천서원본 사진을 비교해보면

도강영당본이 미천서원본에 비해 수염이 더욱 하얗다.

얼굴의 기색으로 볼 때 도강영당본은 분홍색 관복차림의 수원시소장 시복본(채제공 73세상)과 흡사하다.

 

 

 

 

 

이 초상은 호피를 깐 의자에 두 손을 모으고 곡교의(曲交椅)에 정좌해 앉은

조선시대에 가장 전형적이며 관료의 권위를 잘 드러낸 정장예복의 공신상이다.

특히 얼굴과 옷 주름의 입체감 표현, 투시도법이 적용된 화문석과 족좌대 표현, 의자의 사선 배치는

이명기의 전형적인 화법이다. 초상화 제작 당시에 꾸민 족자의 상태로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4) 금관조복본(金冠朝服本)

1784년(65세 초상), 145×78.5㎝(그림)/ 202.9×91.6㎝(전체)

 

  

  

 

면 우측에는

‘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겸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손좌빈객 규장각제학 지실록사 번암 채제공(자는 백규)의 65세 초상'이라 쓰여 있다.

(輔國崇祿大夫 行判中樞府事 兼 兵曹判書 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사 弘文館提學 예문관제학 世孫左賓客 奎章閣提學 知實錄事 樊巖 蔡濟恭 伯規甫 六十五歲眞)

 

65세 시의 관직명만 적혀 있는 점으로 볼 때 1784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주 미천서원 구장(舊藏)의 흑단령본에도 같은 내용의 표제가 동일 필체로 적혀 있어

이 두 본은 동시에 제작된 것으로 믿어진다.

 

또 화면 왼쪽 상단에는 기미년(1799)에 이정운(李鼎運, 1743- ?)이 쓴 채제공의 자찬문(自贊文)이 있는데

이 글은 <번암집(樊巖集)> 권58에도 ‘자제사진찬(自題寫眞贊)’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것은 ‘금관조복본’과 ‘흑단령본’의 문장이 같기 때문에

이 두 본이 바로 체제공이 자제 찬문을 지었던 그 초상화일 것이라 추정된다.

 

이 금관조복본은 누가 그렸는지 그림에 직접 밝혀져 있지 않으나

얼굴과 옷 주름에 짙은 음영을 가미해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살린 이명기식 초상화이다.

이는 이명기가 그렸다고 밝혀진 <채제공 73세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이명기의 솜씨로 보이는 <채제공 65세상> 유지초본 2점이 집안에 내려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금관조복본은 같은 나이의 65세상인 나주 미천서원본과 함께 이명기(李命基)가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채제공이 조정에서 방척되었을 때 이명기가 그렸다는 수심어린 초상화가 바로 그것이라 추정된다.

 

도상은 붉은색 조복(朝服)차림으로 금관을 쓴 뒤 상아홀을 든 채 반우향으로 앉은

전신(全身) 의좌상(椅坐像)이다. 붉은색과 금관의 색조로 고위관료의 권위가 물씬 풍기는 초상화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시대의 초상화 중에서 그 예가 드문 모습이다.

통상 관복본 문신초상화는 호피를 깐 교의자(交椅子)에 앉아 의답(椅踏) 위에 발을 올려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의답도 없이 토끼털 같은 것을 깐 낮은 의자에 앉은 것도 다소 색다른 모습이다.

등받이도 낮아서 하체가 짧아 보인다.

 

바닥에는 사선으로 정교하게 무늬가 들어가 있고 파란색 띠가 둘러진 화문석이 깔려 있다.

화려한 화문석 문양을 정교한 평행 사선 투시로 그려 넣어

화면 전체에 매우 시각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18세기 후반의 초상화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얼굴은 분홍색 배채(背彩) 위에 농담의 변화가 많은 갈색선으로 윤곽선과 주름선을 잡았다.

그 다음 붓끝에 갈색을 약간 묻혀서 짧은 필선을 수없이 비비듯이 덧긋고 엷은 갈색으로 우려서

매우 정교한 명암을 표현하는 필묘법(筆描法)을 구사하였다.

특히 눈 밑의 누당(淚堂) 부분과 뺨 부분에 이런 필묘법의 흔적이 잘 나타나 있다.

주름선의 필선이 18세기 초중반경보다는 다소 약한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름선 옆의 명암을 주름선과 거의 같은 농도로 넣었기 때문에

언뜻 보면 주름선의 갈색 필선이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조복도 세밀하게 옷주름 선을 잡고 붉은색을 후채하였다. 그 뒤 다시 위에서 붉은색을 짙게 칠하였다.

그 다음 옷주름 선 주변을 더욱 붉고 어둡게 여러 번 칠해서 매우 정치하게 명암을 표현했다.

신체의 양쪽 옆 부분은 중앙 부분보다 더욱 어둡게 명암을 넣어

몸이 뒤쪽으로 돌아가며 넘어가는 미묘한 모습까지 매우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이 채제공의 초상화는

특히 정조대에 가장 절정에 달했던 시각적 사실성 표현의 한 극점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관복 표현이 더욱 그런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즉 금관(金冠)과 그 양(梁)의 정교하고 세밀한 표현, 금관의 술 장식 매듭을

금관 뒤에서부터 목잠(木箴)에 걸어 다시 매듭 뒤로 한 바퀴 돌린 다음

어깨 앞으로 내려트린 자연스러운 표현이 그러하다.

 

또한 가슴 부근의 적라의(赤羅衣) · 적색폐슬(赤色蔽膝) · 사색금수(四色錦綬) · 서대(犀帶) ·

상아홀(象牙笏)이 층층이 중복되면서도 빈틈없이 묘사된 공간적 층차의 미세한 표현,

청색 선을 두른 흰색 허리띠가 무릎에 걸쳐 꺾이면서 그중의 한 가닥이 가볍게 말리며 돌아간 표현,

상단(裳端 : 치맛단)이 늘어져 내리면서 의자와 무릎, 흑리(黑履) 등에 의해 접히고 말린

수많은 표정 변화 등도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금관에는 호분을 두텁게 올리고 그 위에 금을 올려 매우 입체적인 채색 효과를 시도하였다.

조선 중·후기에 통상적으로 사용된 금분과 비교할 때 색감이나 질감이 다소 달라

혹 금박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비단은 올이 약간 통통하되 조직이 다소 성근 듯한 통견을 사용했다.

아교와 백반을 많이 올려 반짝임이 많은 편이다.

초상화 제작 당시에 꾸민 정조대의 송식(宋式) 족자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선생자찬(先生自贊)

내가 그대인가

그대가 나인가

나는 내 몸 하나만으로도 버거운데

그대는 어찌하여 다시 내가 되었단 말인가

큰 띠를 드리우고 홀을 바로잡고

해결한 것이 무슨 정책이었나?

머리가 하얗게 되고 얼굴엔 주름이 지도록

이루어놓은 것은 무슨 일인가?

태어나서 늙고 죽을 때까지

나는 즐겁지만 그대도 즐거운가?

문인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연안 이정운은 삼가 쓴다.

聖上 二十三年 己未

門人 資憲大夫 漢城府判尹 延安 李鼎運 敬書

 

 

 

 (5) 시복본(時服本) - 보물 제1477-1호

이명기 그림, 1792년(채제공 73세상), 120×79.8㎝(그림)/ 173×90㎝(전체),수원시 선경도서관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 관복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이다.

우측 상단에 ‘聖上 十五年 辛亥(1791) 御眞圖寫後 承命摸像 內入 以其餘本 明年 壬子(1792) 粧’

이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 ‘화자 이명기(畵者 李命基)’라고 밝혀 놓았다.

이어서 우측 상단에 채제공이 직접 쓴 자찬문이 있다.

 

위의 내용대로 정조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기념을 나타내기 위한 듯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수원시에 함께 소장되어 있는 유지 초본 3점 또한 중요한 자료이며

정조에게 하사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향낭과 영정함도 일괄 보물 지정되어 함께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