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조희룡 - 홍백매(紅白梅)

Gijuzzang Dream 2008. 10. 30. 21:28

 

 

 

 

 

  매화도(紅白梅圖)

 

 

 

 

 19세기, 우봉 조희룡, 124.8×46.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조희룡과 매화(梅花)

 

우봉(又峯) 조희룡(趙熙龍ㆍ1789-1866)은

조선후기 시서화(詩書畵)에서 독자적 작풍을 확립한 인물이다.

 

경기도 양주(지금의 서울 노원구 월계동) 출생인 우봉은

중국의 남종(南宗) 문인화에서 당시 침체됐던 조선 문단의 활로를 찾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수레는 뒤따르지 않겠다'(不肯車後)라는 자세로 새로운 작품세계를 개척했다.

그의 문인화풍은 정통 중국 남종 문인화를 따르고자 한

동시대 김정희와 그의 제자 허유의 흐름과 대비를 이루는 것으로 평가된다.

조희룡은 그가 주도한 문단 및 화단 모임인 '벽오시사'(碧梧詩社)를 발판으로

작품활동을 활발히 펼쳤으며 조선최초의 화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화실 '이초당'에서

그림 감정과 중개활동을 병행하기도 했다.

우봉은 1851년 예송논쟁에 개입했다가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 유배되었으나

유배지에서 집필과 작품활동을 정력적으로 펼쳐

당호가 있는 그의 현존 그림 19점 중 8점이 이 때 완성됐다.

1853년 유배생활을 마감한 그는 서울로 돌아와 후학들을 지도하다 1866년 78세로 사망했다.

 

조희룡은 누구보다도 매화를 사랑한 인물이었다.

매화에 대한 각별한 애호로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고, 많은 매화 그림을 그렸다.

호(號)도 우봉, 호산(壺山) 외에

매수(梅), 매화두타(梅花頭陀)를 사용하여 매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조희룡의 문집인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에 의하면

자신이 그린 매화병풍을 방안에 둘러치고, 매화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으며,

또 ‘매화시백영(梅花 詩百詠)’을 지어 큰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의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이름하고

매수(梅叟)라는 호를 즐겨쓰기도 하였다.

 

조희룡의 매화그림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던 화가이다.

조희룡의 서예나 난초 그림은 스승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매화그림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보여 주었다.

우봉은 특히 매화도와 묵란도에 뛰어나 '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과 같은 걸작을 남겼다.

 

 

 

 

■ 홍백매화도 8폭

 

이 작품은 원래 병풍용 여덟 폭 그림으로

한 그루의 매화나무에 핀 붉은 매화와 흰 매화꽃을 그린 그림이다.

늙은 나무의 굵은 줄기가 힘찬 용의 꿈틀거림처럼 서너 번 크게 휘어지면서

화폭의 높이를 가득 채우고 매화를 가득 피운 가지들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 있다.

붓자국에 흰 공간이 표현되는 비백법(飛白法)을 사용하였고,

매화꽃은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바로 표현하는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매화도' 그림은

두 그루의 매화가 가로로 긴 화면 전체에 펼쳐진 모습으로

굵은 매화줄기는 마치 용의 꿈틀거림처럼 구불거리며 올라가 모진 세파를 견뎌낸 듯하다.

S자 모양의 굴곡을 이루며 뻗어 오른 매화가지는 힘차고 약동적인 느낌을 준다.

줄기 내부에는 붓질을 가하지 않고 윤곽선에 농묵을 찍어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다.

또 가느다란 가지들이 부드럽게 나부끼며 사방으로 뻗어 아름다운 꽃망울을 터뜨렸는데,

이러한 매화가지는 나빙(羅聘) 등 청대(淸代) 묵매화의 영향을 엿보인다.

 

줄기들은 좌우로 긴 가지를 뻗어내고 가지에 백매와 홍매가 가득 피어 있다.

매화들은 꽃봉오리, 반쯤 핀 꽃, 활짝 핀 꽃들을 점을 툭툭 찍어 표현하고,

꽃받침과 꽃술을 농묵으로 나타내었다.

꽃잎은 경쾌한 붓놀림으로 하나하나의 윤곽선을 그린 다음 예리한 선으로 꽃술을 장식하였다.

줄기의 내부에는 필선을 가하지 않고, 윤곽선 부분에 농묵으로 먹점을 찍어 입체감을 살렸다.

 

중인 출신인 조희룡은 글씨와 그림 내면에 스며든 인문적 교양을 강조한 추사를 사사했다.

하지만, 그는 스승도 어찌할 수 없는 화인 특유의 감각적 화풍으로

근대회화의 지평을 열어준 선구자이자 시서화 모임을 주도했던 풍류가였다.

조희룡은 특유의 근대적 감각으로

매화, 난초, 대나무 등의 사군자의 자태 자체를 세련된 손맛으로 표현했다.

 

곧, '문자향' '서권기'로 무장한 선비의 고고한 인품이 담긴 매화가 아니다.

그래서 선비들의 이념을 상징하는 매화처럼 체형이 앙상하지 않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한바탕 큰 소리로 웃는 것처럼 호방하다.

이런 매화는 조희룡의 감각적인 매화('홍매대련')와 통한다.

조희룡은 당시 문인화론의 대세였던‘문자향’과‘서권기’에 제동을 걸며,

손재주의 중요성을 역설한 인물이다. 화론의 이념보다 화가의 기량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했다. 

 

매화그림으로 자신의 뛰어난 기량과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굵은 매화나무 등걸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에서 화가의 신명이 느껴진다. 매화가 매우 감각적이다.

뻗쳐나가는 굵은 매화줄기는 윤곽선 안에 굵은 먹점을 퍽퍽 찍어 질감을 투박하게 표현한 반면,

꽃잎은 슬쩍 백점 찍은 뒤 섬세하고 앙징맞게 꽃술을 묘사해 감각적인 대조를 살렸다.

생동하는 듯한 8폭 대형그림의 파노라마를 지켜보노라면

매화향이 진동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작품을 오른편에는 자신의 매화그림의 독창성에 강조하는 제시를 적었다.

이 그림에 추사체로 화제(畵題)를 곁들여

견고한 매화의 분위기와 문인화다운 운치를 더욱 북돋우고 있다.

  

 

  

 

 

 

 

 

 

 

 

 

 

不省六枝七鬚八結九變直從篆隸奇字中來向

在禹碑魯壁周鼓秦山之內又不在周玉文八十字之

外來畵以前是何境界蒼苔繡石焚香坐鐵孤舟

抱膝聽旣畵以後是何境界古篆纔廻成劒氣明河

迸墮倒星文雪白猩紅是何境界五色羅浮之蝶放

繭滿山先飛紅白兩種是日也天晴日晶秋氣肅肅忽復

風雨驟至紙墨俱覺潤澤此有喜神亦辭方能事借此方便

   

六枝, 七鬚, 八結, 九變을 살피지 않고,

  **[석중인(釋仲仁)의 <화광매보(華光梅譜)>에 적힌 것으로

      매화 그리는 방법을 음양오행설에 따라 풀이한 용어이다.

      여섯 번 가지를 치고, 일곱 번 뻗고, 여덟 번 마무리를 짓고, 아홉 번 변화함]

 

바로 전서와 예서의 기이한 글자 가운데서 온 것이다.

  

우(禹) 임금이 치수를 하면서 남겼다는 구루비(岣嶁碑),

 **[禹碑 : 형산(衡山) 운밀봉(雲密峰)에 있는 비, 구루비라고도 함, 칠십칠 자의 전서로 이루어졌다.]

 

공자(孔子)의 집을 헐다가 나왔다는 고문(古文)으로 쓰여진 경전(經典),

  **[魯廦 : 漢代에 공자의 옛집을 헐다가 발견했다는 이른바 고문경서(古文經書)가 있었던 벽을 말함.

                이들 고문경서는 모두 과두문자로 씌어졌다고 함]

 

주(周)나라의 석고문(石鼓文),

진(秦) 시황제가 순행하면서 새겼다는 높은 산의 돌(역산각석, 태산각석 등)안에도 있지 않으며

그리고 주총(周) 옥문(玉文)의 80자 에서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주총(周冡)은 <급총주서(汲冢周書)>를 말함. <급총주서>는 晉나라 태강 2년에 급군(汲郡) 사람인 불준(不準)이 위양왕(魏襄王)의 무덤을 도굴할 때 출토된 75편의 고문죽서(古文竹書)를 말한다. 이들 죽서는 모두 선진시대의 과두문자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옥문(玉文)은 미상]

 

그림을 그리기 이전은 어떤 경계인가?

푸른 이끼가 수를 놓은 듯한 돌에 향을 피우고 있으며,

외로운 배에서 철적(鐵笛: 철로 만든 피리)소리 퍼질 때 무릎을 감싸고 들을 때이다.

 

이미 그림이 그려진 후에는 어떤 경계인가?

고전(古篆: 小篆 이전의 오래된 전서)이 겨우 돌아 칼날같은 기운을 이루었고,

은하수는 쏟아내려 거꾸로 별무늬가 되었네.

 

눈의 흰색과 선홍색(붉은 매화꽃)은 어떤 경계인가?

광동(廣東) 나부산(羅浮山)의 오색빛깔 신비로운 나비를 산 가득 풀어놓은 듯하면서

앞에 홍매화 백매화 두 종이 날아간다네

 

오늘은 하늘이 맑고 해가 밝아 가을기운이 쓸쓸하더니

홀연히 북쪽에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쳤지만

종이와 먹을 갖추어 윤택함을 일깨우니

이는 길사를 담당하는 귀신(喜神)이 또한 능한 일을 사양하는지라, 이를 빌리고자 한다.

- <조희룡전집>, 조희룡 지음,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 한길아트,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