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김명국 - 달마도

Gijuzzang Dream 2008. 10. 30. 22:18

 

 

 

 

 

 

 연담 김명국의 <달마도>

 

 

 

 

 

  

 17세기, 김명국 필, 종이에 수묵, 83×5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달마(達磨)는 누구인가

 

달마는 인도의 스님으로 인도선(印度禪)의 제28대 조사였다.

520년경 중국에 건너와서 숭산(崇山)의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다.

당시 이론 중심의 교종(敎宗)이 대세였던 중국 불교계에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다(以心傳心)’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을 최초로 전하여

중국선(中國禪)의 제1대 조사가 되었다.

 

원래 달마대사는 독실한 불자였던 양무제(梁武帝, 464-549)의 부름을 받고

중국 남조(南朝) 양(梁)나라에 들어왔다가

정치는 돌보지 않고 지나치게 종교에 빠진 양무제와 뜻이 맞지 않자

몰래 양자강을 건너 북위로 가서 낙양 숭산의 소림사로 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미화되면서 보통 달마의 모습은

갈대 한 가지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는 신통력있는 인물로 그려졌는데

점차 배경이 강에서 바다로 바뀌는 과정이 일어나게 된다.

 

달마는 9년 동안이나 벽을 마주하고 수련하였다고 전해지는 대표적인 선승(禪僧)으로

예불(禮佛)행위와 경전에 얽매어 주석다는 등의 일을 일체 반대하였다.

교조적인 형식과 논리를 중요시하는 기성 종단의 승려들은

달마 때문에 자신들의 불사에 지장이 많다고 여겼으며

자신들보다 달마의 인기가 더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달마에게 올리는 공양에 독을 탔다.

달마는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독이 든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처음엔 음식 색깔이 변하는 것을 보고 먹고,

두 번째는 숟가락 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먹고,

세 번째는 그릇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다 먹은 후 열반하였다는 것이다.

 

 

◯ 그림 귀신, 김명국(金明國, 1600(선조 33)~ ? )

 

달마대사의 모습을 그린 김명국은 누구인가?

조선 후기의 문인 남태응(南泰膺, 1687-1751)이 지은 <청죽화사(廳竹畵史)>에

김명국에 대한 일화와 인물평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김명국에 대한 면모를 잘 알 수 있는 내용을 발췌하면,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었다.

그 화법은 앞시대 사람을 밟으며 따른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자유분방하게 멋대로 하면서 주어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으며,

포치(布置)도 규범을 밟지 않았으니 그 어느 덧 하나 천기(天機) 아님이 없었다.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그림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술부터 얘기하고,

취하지 않으면 그 화재(畵材)를 다할 수 없고,

이미 취해 버리면 그 공교로움에 다다를 수 없었으니,

오직 취하고는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때(欲醉未醉之時)에만 정교하게 할 수 있었으나

그런 것은 아주 드물었다.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술이 덜 취하거나, 아주 취해버린 때 작품들이니

용과 지렁이가 서로 섞여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명국이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더니 온 나라가 물결일 듯 떠들썩하여

(김명국의 그림이라면) 조그만 조각이라도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귀하게 여겼다.

한 왜인(倭人)이 잘 지은 세 칸 별채의 사방벽을 좋은 비단으로 바르고

천금을 사례비로 하여 연담을 맞아 벽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김명국은 술부터 찾았다. 실컷 마신 다음 취기에 의지하여 비로소 붓을 찾으니

왜인은 금가루(泥金) 즙을 한 주발 받들어 올렸다.

김명국은 그것을 받아 들여마셔 한 입 가득히 물고서 벽의 네 모퉁이에 뿜어서 그릇을 다 비워 버렸다.

이어 김명국은 크게 웃으며 붓을 잡고 벽에 뿌려진 금물의 분말가루를 쓸면서 그려가니

혹은 산수가 되고 혹은 인물이 되며, 깊고 얕음과 짙고 옅음의 설색(設色)이

손놀림에 따라 천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더욱 뛰어나다.

 

 

문장가에 삼품(三品)이 있으니 신품(神品), 법품(法品), 묘품(妙品)이다.

화가에 비유한다면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1600(선조 33)~ ? )은 신품(神品)에 가깝고,

허주(虛舟) 이징(1581, 선조 14~?)은 법품(法品)에 가깝고,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현종 9)~1715(숙종 41)는 묘품(妙品)에 가깝다.

 

학문에 비유한다면

김명국은 태어나면서 아는 것,

윤두서는 배워서 아는 것,

이징은 간신히 아는 것이나, 이루기는 매일반이다.

 

김명국은 배워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윤두서는 배워서 될 수는 있으나 불가능하고,

이징은 배워서 될 수 있고 또 가능하다.

 

이처럼 극적인 삶을 산 달마대사의 모습을

천재화가 김명국은 어떻게 그려냈는가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회화실, 이수미

- 국립중앙박물관, 2008년 10월29일(큐레이터와의 대화 제 112회)

 

 

 

 

 

 

 

 달마도<達磨圖>

  

   

<달마도>는 김명국이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곳에서 그려서

일본에 남겨 두고 왔던 작품 중 하나인데, 그것을 국립중앙박물관이 사들여 와 소장하고 있다.

    

선종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로 손꼽히는 달마도는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를 그린 그림이다. 

불교적인 소재지만 옛 선비들은 이 그림을 즐겨 그리고 또 애호하였다.

김명국(1600-1662년 이후)의 현존하는 그림 가운데 걸작으로 손꼽힌다.

 

<달마도>는 상반신을 짙은 먹색의 간결하고도 속도감 있는 필선을 사용하여 그렸다.

측면을 향한 달마대사는

극도로 절제된 묵선을 단숨에 그어 내린 듯한 힘찬 운필로 처리된 두건(頭巾)과 옷,

팔자(八字)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 주먹 같은 매부리코,

짙은 콧수염과 구레나룻, 텁수룩한 턱수염 등의 생김새는

선승(禪僧) 달마의 호탕무애한 성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국적인 풍취를 보여준다. 9년 동안 벽(壁)을 향해 좌선(坐禪)하였던 달마의 진면목,

피안의 진리를 깨닫고자 힘쓴 그의 정신세계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빠른 붓놀림과 과감하게 생략한 표현 등은 김명국이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음을 말해준다.

    

산수와 인물을 모두 잘 그린 김명국은 사람됨이 호방하고 해학에 능했다.

도화서 화원이었던 그는 술에 몹시 취하여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어서

대부분의 그림들은 취중에 그려진 것이라 한다.

그의 호방한 성격은 거칠고 힘찬 필치의 작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인물화인《달마도》에서도 명대 절파계의 후기양식인 광태사학파의 화풍에서와 같은

거칠고 활달한 필치가 보인다.

필선에 농담과 살을 붙이고 할필과 독필을 사용하여 강렬한 인상을 준다.

자하 신위는 "인물이 생동하고 필묵이 혼융하여 백년 이내에는 겨룰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담묵으로 처리된 달마의 표정에서 고도로 응결된 내면적 정신세계가 표출되어 있다.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자화상'을 볼 때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

가슴 저리는 그 강렬한 눈동자이다. 정체 있는 그 눈동자는 처절함을 담고 있다.

고흐가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 눈동자에서 읽는다.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이 김명국의 '달마도'를 본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자화상'의 눈동자처럼 '달마도'의 눈동자도 피할 수 없는 정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달마의 눈동자에서는 공허함이 느껴진다.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은 무서운 속도의 시선이 거기에 담겨 있다.

   

"제행이 무상이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은 무상하지만,

그 무상까지 초월하는 곳에 영원의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니

그렇게 한 우주를 열어젖히는 것이 김명국의 '달마도'요, 달마의 눈동자였던 것이다."

  

 

김명국은 자 천여(天汝). 호 연담(蓮潭) ․ 국담(菊潭) ․ 취옹(醉翁). 일명 명국(命國).

도화서 화원을 거쳐 사학 교수를 지내다가

1636년(인조 14)과 1643년 두 차례나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인물, 수석에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하였는데,

굳세고 거친 필치와 흑백대비가 심한 묵법, 자유분방한 감필법, 날카롭게 각이 진 윤곽선 등이

특징이다.

유작은 안견파의 화풍을 따른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절파 후기의 광태파(狂態派)에 속한다.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를 비롯《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노엽달마도(蘆葉達磨圖)》

《기려도(騎驢圖)》《관폭도(觀瀑圖)》《투기도(鬪碁圖)》《은사도(隱士圖)》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이 밖에《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가 함께 소장되어 있다.  

 

최소한의 붓질로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는 감필법(減筆法)의 대가 김명국은

연담(蓮潭 ․ 연을 심은 못)이란 그의 호가 말해주듯 천민으로 태어나

신들린 듯한 붓 하나로 종6품 도화서 교수직에까지 올랐는데,

타고난 성품이 대범하고 호방하며, 해학적이었다.

또 다른 호는 말술도 마다 않는다는 취옹(醉翁)이다.  

취하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데,

어느 스님이 큰 폭의 비단을 가지고 와 「지옥도」를 그려달라며, 예물로 삼베 수십 필을 놓고 갔다.

예물을 부인에게 주며 몇 달 술이나 실컷 마시게 해달라고 했다.

얼마 후에 스님이 그림을 찾으러 왔으나, 그릴 뜻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돌려보냈다.

 

하루는 술이 취해 한달음에 「지옥도」를 풀어냈다. 무간지옥의 고통스런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스님이 와서 보고는 깜짝 놀랐다, 지옥에 떨어진 인물들은 전부 스님의 모습이었다.

스님은 숨을 몰아쉬며 불사(佛事)를 그르쳐 놓았다고 버럭 화를 내니,

화가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악업을 쌓아 지옥으로 가야 하는 건 너희들 중이 아니냐" 며

되레 호통을 쳤다. 스님은 그림을 포기할 생각으로 예물이나 돌려 달라고 하자,

그림을 완전하게 해 줄 테니 술이나 더 받아오라고 했다.

거나하게 취흥이 돌자, 붓을 들어 머리카락을 그려 넣고 옷에 채색을 하며,

신들린 듯한 빠른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감쪽같이 새 그림처럼 바꾸어 놓았다.

스님이 그걸 보고는 감탄을 하며, "참으로 천하의 神筆이로다" 하고는 대만족하며,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 한다.

  

달마가 갈대를 타고 강을 건너는 그림인 「달마절로도강도」에도

김명국 특유의 전광석화 같은 놀라운 필법은,

갈대 한 가지에 몸을 싣고 홀연히 바람처럼 강을 건너는 달마선사(禪師)의 전설적인 모습이

필력(筆力)만큼이나 신묘(神妙)하다.

어쩌면 달마대사의 깨달음을 말하는데 가장 적절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명국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葦渡江圖). 종이에 수묵, 97.6 x 48.2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온 몸을 가사로 감싸안고 한 줄기 맥없는 갈대 위에 올라 있다.

그 불같은 눈이 닿는 곳은 강 너머 이리라. 굳건한 다짐을 갖추었는 듯 몸가짐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마구 뻗은 선들, 불규칙한 비수와 농담을 가진 선들이 허물없이 형을 이루고

또 어디로 뻗어가려 하는 것일까. 붓질에는 어떠한 구애됨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활달하고 밝아 보는 이의 답답한 가슴을 후려쳐 털어주는 것만 같다.

 

김명국은 조선 중기 화원이다. 생몰년이 확실하지 않은데 생년은 1600년으로 비정되어 있고

몰년은 1662년 이후로 알려져 있다. 김명국은 활달하고 거침없는 필법으로 그려낸 그림들로 유명하다.

달마도, 달마절위도강도, 수노인도와 같은 감필법의 도석도가 남아 있는데

하나같이 필치가 웅장하면서도 쾌활하여 기운생동이란게 어떤 그림을 말하는지 잘 보여준다.

산수화로도 유명하여 여러 점의 산수가 전하나 거칠다고 하여 흠이 잡히기도 한다.

 

이러한 감필화의 시작은 중국 남송으로까지 올라간다.

남송의 화원에서 대조를 지낸 양해는 인물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 쓸데없는 선을 덜고 또 덜어

불과 몇번의 붓질로 그 대상을 그려내는 감필법을 창안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원체 화풍에 구애받지 않아 자유분방하고 간결하다는 평을 얻었다.

이러한 양해의 감필화의 대표작으로는 이백행음도가 있다.

이러한 양해 그림의 영향이 조선에서는 400~500년 후인 김명국에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김명국은 달마도 류의 선종과 관련이 깊은 그림을 여러점 남기고 있는데

아마도 불교, 특히 선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던 듯 하다.

이리하여 그의 호  연담(蓮潭) 역시 불교적 향취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김명국의 일화로 유명한 지옥도 이야기도 선종에 대한 이해가 깊은 김명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보리달마(菩提達磨, 470년경~ 536)는 본래 남인도의 향지라는 대바라문국의 세번째 왕자였다.

어려서 불교에 귀의하여 도를 깨닫고 스승 반야다라의 명에 따라

3년의 세월을 걸려 배를 타고 캄보디아를 거쳐 527년 9월 1일 중국 광주에 도착하였다.

달마는 양나라를 거쳐 장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서 낙양 동남똑에 위치한 숭산 소림사에 들어간다.

숭산 오유봉 정상의 동굴에서 9년 동안 좌선을 하여 교종 일색이던 중국 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9년의 좌선으로 인하여 그는 벽관(壁觀) 바라문이라고 불렸으며

그가 9년 동안 참선 삼매에 빠졌던 동굴을 일러 달마동(達磨洞)이라 불렀다. 

달마는 그렇게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된다.

 

이 절위도강은 그 중에서도 양무제와 만난 이후의 일을 그린 것이다.

달마가 처음 중국에 도착하여 만난 사람은 황제보살로 불리었던 양무제(梁武帝, 502 ~ 549)이다.

여기서 달마와 양무제는 그 유명한 문답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이 문답을 주고 받다가 서로 용납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고 달마는 양나라를 떠나

양자강을 건너 북을 향하게 된다. 양자강을 건널 때 달마는 갈대 잎을 타고 건넜다 한다.

 

이 절위도강(折蘆渡江)의 그림은 나중에는 절로도해(折蘆渡海)로 확장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후 화승들의 주요한 그림소재가 되었고 나중에는 중국의 화원화가들도 그리게 된다.

아울러 이 주제는 선종의 파급과 함께 고려, 일본 등지에도 전해져 적지 않게 그려지게 된다.

이 절위도강은 절로도해, 노엽달마도(蘆葉達磨圖) 라고도 한다.  

 

 

 김명국  달마절위도강도. 종이에 수묵, 96.7x39.1cm, 일본 소재

 


심사정  지두달마절로도해도(指頭達磨折蘆渡海圖). 종이에 수묵담채, 28x18cm, 개인 소장.

 

 

우리나라는 고려 문헌에 달마도에 관한 기록이 여럿 있어

이미 13세기 경에는 달마도가 그려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하는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김명국의 달마도들이다.

이후에 이 달마절위도강도를 비롯한 달마에 관한 많은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현재 볼 수 있는 작품으로 현재 심사정의 <절로도해(간송미술관)>,<지두절로도해(개인 소장)>,

단원 김홍도의 대폭 <절로도해(간송미술관)> 등의 명작이 있다.

그리고 달마가 선동으로 대체되어 그려진 심사정의 <선동도해(간송미술관)>,

김홍도의 <좌수도해(간송미술관)> 등의 소품의 명작도 나타난다.

이후에 백은배, 조석진, 이도영 등도 절위도강의 그림을 그렸다.

 

또한 김명국이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그린 걸로 알려진 '절위도강도'가 한폭 더 일본에 현존하고 있고

또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그려진 '달마도'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 '우리 그림 백가지 중에서' 현암사, 박영대 지음, 2002

-  http://paper.cyworld.nate.com/purene   단출한 한국미술사 산책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