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신윤복 - 손목(少年剪紅) / 봄날(춘의만원春意滿園)

Gijuzzang Dream 2008. 10. 26. 21:01

 

 

 

 

 

 

 신윤복 손목(소년전홍, 少年剪紅)

 신윤복 -  봄날(춘의만원, 春意滿園)

 

 

 

신윤복(1758년, 영조 34- ? )의  ‘손목 : 소년전홍(少年剪紅)’ 이다. 

 

장소는 으슥한 후원이다. 왜냐고? 오른 편에 허물어진 담장이 있지 아니한가.

담장 위에 풀까지 듬성듬성 자라 있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양반가의 으슥한 후원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양반가인가. 아낙네의 손을 잡아끄는 사내의 얼굴을 보자.

아직 수염도 안 자란 앳된 사내다. 그런데 사내는 사방관을 쓰고 있다.  

사방관은 점잖은 양반네들이 주로 실내에서 쓰는 관이다.

집 주변은 쓰고 돌아다닐 수 있지만, 그렇다 해서 먼 곳으로 나들이할 때 쓰는 것은 아니다.

이 젊은 사내는 지금 후원 으슥한 곳에서 여자를 꼬드기고 있는 것이다.

 

  

신윤복 - 손목(少年剪紅)

      양반가의 으슥한 후원을 배경으로 은밀한 에로티시즘을 묘사한 그림, 간송미술관 소장. 

 

  

 

“봄의 생명력은 곧 성적인 힘이다”

 

그렇다면 여자는 누구인가.

여자의 신분 처지를 아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여자의 입성이다.

위에는 흰 저고리를, 아래는 푸른 치마를 입었다.

삼회장은 어림도 없고 다만 고름만 자주색으로 했을 뿐이다.

여기에 신발을 보라. 짚신이 아닌가. 입성으로 보아 보잘것없는 양반가의 계집종인 것이다.

하기야 입성을 따지지 않아도 후원에서 남정네에게 손목을 잡힌 사람이라면 알 만하지 않은가.

아무리 간 큰 양반이라 해도 같은 양반 부녀자의 손목을

이렇게 거만한 얼굴로 덥석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여자는 앳되고 고운 얼굴이고,

손목을 잡히자 엉덩이를 뒤로 잔뜩 빼고 얼굴에는 수줍음이 가득하다.

손목을 잡는다는 것은 성적 행위의 시작을 알리는 징표다.

남녀의 사랑은 결국 성행위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그 단계는 어떤 동물보다도 복잡하다.

얼굴을 바라보고 눈을 맞추다가 손을 잡고 어깨에 손을 올리고 껴안고 가슴에 손을 대고,

그리고 최후로는 관계를 맺는다. 즉 손을 잡는 행위는 최후의 행위에 도달하기 위한 최초의 행위다.

 

말하자면 그것은 애정의 시작이요, 상징이다.

예컨대 이미 상대에게 익숙해진 연인들이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을 보라.

고려가요 ‘쌍화점’은 예외 없이 손목을 잡는 것으로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그 첫 부분을 모아서 읽어보자.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가고신댄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

삼장사에 불 혀러 가고신댄

그 절 사주 내 손목을 쥐여이다

두레우물에 물을 길러 가곡신댄

우물 용이 내 손목을 쥐여이다

술 팔 집에 술을 사러 가고신댄

그 집 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

 

과연 사랑은 손목을 잡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다시 그림을 보자. 그림의 오른쪽 하단과 왼쪽에는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봄은 일시 죽었던 천지에 다시 생명의 기운을 돌게 하는 계절이다.

봄이 되면 처녀 총각이 바람이 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그림의 오른쪽 상단의 화제를 옮기면 이런 뜻이 된다.

“빽빽한 잎사귀 푸른 빛을 쌓아가고/ 무성한 잎사귀에 붉은 꽃잎 조각조각 떨군다"

(密葉濃堆綠,繁枝碎剪紅)”

 

봄의 생명력은 곧 성적인 힘이다. 꽃은 식물의 성기다.

그런 고로 그림 속에 붉은 봄꽃을 그린 것은

성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신윤복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자, 이제 배롱나무 옆에 있는 거대한 괴석을 보자.

괴석을 정원에 두는 것은 오래된 풍습이지만, 이렇게 거대한 괴석은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그림 속에서 괴석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크다.

거기다 괴석은 땅에 뿌리를 박고 위로 치솟아 있다.

직선으로 솟은 것이 아니고, 왼쪽 뿌리 부분이 옆으로 불룩 나와 있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것은 남성의 성기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의미는 분명하다.

이 그림의 꽃과 괴석은 각각 여성과 남성의 성욕을 상징하는 것이다.

 

 

서얼의 탄생을 알리는 그림

 

현실로 돌아오면, 양반 남성이 자기 집안의 계집종을 건드리는 것은 허다하게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자란 그렇게 해서 나는 것이었다.

즉 양반 남성이 정식 아내가 아닌 양인의 여성과 관계하여 자식을 낳으면 서자가 되고,

만약 관청이나 사가의 여성과 관계하면 얼자가 된다.

그 둘을 합쳐서 서얼이라 한다. 조선시대의 무수한 서얼들은 바로 그렇게 세상에 나왔던 것이니,

이 장면은 바로 그 서얼의 탄생을 알리는 그림이기도 한 것이다.

양반들은 계집종을 건드리는 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성여학이 지은 ‘속어면순’에는,

 

어떤 선비가 계집종을 건드리는 데 능란했는데, 어느 날 아내에게 들키고 말았다.

선비는 계집종을 건드리고 그 흔적을 감추고자 하였으나,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오래된 친구에게 그 고충을 토로하였다.

“한밤중에 종년을 덮치는 것보다 재미있는 것이 없지만,

마누라에게 들킬까봐 이게 가장 큰 걱정이야.”

“묘한 방법이 있으니, 한 번 시험해 보지 그래.”

“그래, 제발 좀 일러 주어.”

“계집종을 건드리는 데 열 가지 격식이 있어.

첫째, 굶주린 범이 고깃덩이를 탐하는 격이니, 계집종을 건드리겠다는 마음을 먹는 단계지.

둘째, 해오라기가 물고기를 엿보는 격이니, 목을 빼고 계집종을 몰래 살피는 단계지.

셋째, 늙은 여우가 얼음 아래 물소리를 듣는 격이니, 마누라가 잠이 들었는가를 살피는 단계지.

넷째, 매미가 허물을 벗는 격인데, 이불 속에서 몸을 빼는 단계지.

다섯째는 영리한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격이니, 여러 방법으로 계집종을 희롱하는 단계지.

여섯째는 푸른 매가 꿩을 덮치는 격이니, 재빨리 계집종을 덮치는 단계지.

일곱째는 옥토끼가 약을 찧은 격이니, 그 환희의 순간을 형용하는 단계지.

여덟째는 용이 여의주를 토하는 격이니, 비유컨대 정(精)을 토하는 단계지.

아홉째는 소가 달을 보고 헐떡이는 격이니, 피곤하여 숨을 몰아쉬는 단계지.

열 번째는 지친 말이 집으로 돌아오는 격이니, 몰래 자기가 자던 방으로 돌아오는 단계지.”

다음날부터 선비는 이 방법을 써서 다시는 들키지 않았기에

마음속으로 무척 다행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수신 교과서 ‘소학´은 남녀 분리 강조

   

신윤복의  '봄날 : 춘의만원(春意滿園)' 을 보자. 

   

   

 

          신윤복 ‘봄날(춘의만원春意滿園) ’  간송미술관 소장.

 

  

나뭇가지에는 연녹색 잎이 솟아나오고 있다. 그림 왼쪽의 남자와 여자를 보자.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은 철릭이다.

주로 무관이 입던 옷이니, 이 남자는 무반에 속한 양반으로 보인다.

여자는 짚신을 신고 앞치마를 두르고 봄날 나물을 캐러 갔으니,

양반이 아닌 계집종이거나 민간의 여염집 여자다. 그런데 웬일인가.

사내가 나물바구니에 슬쩍 손을 대고 있지 않은가.

사내의 얼굴을 보라. 벌겋다. 이 사내는 낮술에 취해 있다.

봄날 어디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가 아는 계집종(혹은 동네 여자)을 만났다.

캔 나물을 보자며 말을 붙이고 손을 바구니에 댄다.

여자가 해사하게 웃고 있으니 싫지 않은 눈치다. 이 둘은 이미 감정의 교환이 일어난 상태다.

남녀의 일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철석같이 믿고 따랐던 수신교과서 ‘소학’은

남자와 여자의 분리를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물건을 건넬 때도 직접 주고받지 않는다.

남자가 물건을 내려놓고 가면 여자가 와서 그것을 집어가야 한다는 것이 ‘소학’의 주문이다.

 

한데 어떤가. 이 그림을 보면 양반은 후원에서 계집종의 손을 덥석 잡고,

낮에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나물 뜯는 아낙네의 바구니에 손을 대면서 수작을 건다.

어떤 것이 양반의 리얼리티인가.

‘소학’의 지시를 따라 사는 것이 양반의 실제 모습의 한 축이라면,

그 축이 배제했던 욕망의 지시대로 사는 것도 한 축이다.

다만 나는 후자가 보다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 도덕은 사라질 수 있지만,

인간의 욕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서울신문 [그림으로 보는 조선풍속사]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 ~ ?, 일명 申可權)은 조선후기 풍속 화가로 
자는 입부(笠父), 호는 혜원(蕙園),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중인출신의 화가 집안으로 

부친은 신한평 (申漢枰) 모친은 홍천피씨(洪川皮氏)이다.

중인의 가계를 모은 <성원록>에 의하면 신윤복은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의 11대손이다.
신윤복의 아버지 일재(逸齋) 신한평(申漢枰, 1726~?)은

영조, 정조, 순조 초년까지 궁중의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했으며 초상화와 풍속화에 빼어났다.

  

신윤복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몹시 희귀하여 관찬문서나 개인문집류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우나
그에 관한 기록과 연구를 종합하면 

신윤복 父子 모두 회화를 관장하는 국가기관인 예조 산하의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라는 것과  

첨사(僉使)벼슬을 한 혜원은 너무 비속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난 후 

직업화가로서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며 부인이나 후손 등에 관한 것은 전혀 알 수 없다.  

혜원의 아버지 신한평에 대한 기록은 여러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임금의 초상인 어진제작과 

기년(1774)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이광사(李匡師) 70세 초상』과 같은 명품과 

삼성리움미술관에 소장된 『화조도』와  간송미술관 소장 『자모육아(慈母育兒)』와 같은 

풍속화가 있어 혜원을 연구하는데 도움을 준다.

 

  신한평의 그림(이광사 초상,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의 풍속화는 기녀와 여속, 에로티시즘으로 유명하다.
그는 주로 어른의 놀이문화와 성의 문제를 다뤘는데, 이는 조선사회가 간과한 문제였다.
성과 유희는 그의 작품에 주조를 이룬다.
신윤복이 아버지로부터 영향받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양반이 젊은 종년을 희롱하거나 성적 노리개로 삼는 것은 조선시대에 흔히 있던 일이었다.

'여사당 자탄가(女社堂 自嘆歌)'에서 여사당은

'이내 손은 문고리인가. 이놈도 잡고 저놈도 잡네'라고 노래한다.

몸 파는 여인의 슬픈 자조적 노래이지만 이처럼 손목을 잡혔으니 여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작품에는 양반의 강제성이 나타나 있지만,

<봄날: 춘의만원春意滿園>에서는 여인이 이미 양반의 희롱을 겪은 눈치이다.
여기서도 나무에 새잎이 나는 봄의 춘정이 나타나 있다.
화제는 “봄빛 뜨락에 가득 차니 꽃은 흐드러지게 붉게 피었구나”이다.
나무를 보면 연녹색의 푸른 잎새가 올라오고 있을 뿐

붉은 꽃은 피지 않았는데 화제에는 피었다고 한다.

 
낮술을 마신 사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그의 얼굴을 꽃이 핀 것으로 적은 것이다.
사내는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있고 철릭을 입은 모습이다.
철릭을 악공이나 별감, 무당도 입었으므로 이것만으로 사내의 신분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사내가 갓을 쓰고 합죽선을 쥐고 있어 양반임을 알 수 있는데

합죽선은 양반만 휴대할 수 있었다.


여인은 어염집 여자다.

머리를 틀어올리고 앞치마를 두르고 봄날 홀로 나물을 캐러 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내는 여인의 나물바구니에 손을 대고 있고 여인은 전혀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
여인의 바구니에 사내의 손이 들어가 있는 것은

프로이트식으로 설명하면 이미 통정을 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여인의 얼굴에 색기가 흘러 더욱 그렇게 보인다.
오른편 초가지붕 위에 불쑥 솟아오른 것은 사내의 성기가 발기했음을 상징한다.

  

혜원 신윤복혜원 신윤복(1758~?)의 그림에 기생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대상이 곧 양반들이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의 정점에 서 있었던 양반들은 성리학을 외치는 근엄한 얼굴과

한편으로는 향락과 유흥에 빠진 이중적인 모습의 양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

바로 이러한 양반들을 화폭에 담아 냈던 것.

혜원은 그림을 통해 에로티시즘을 표현하는 것으로 양반들의 실제생활의 이면을 들추어 냄으로써

양반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이야기한 도덕과 배치되는 인간이었음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 김광우의 <신세계> 기고문 -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중에서
- 미술문화(
www.misulmun.co.kr ) 김광우의 그림이야기

 

 

  

 

 

신윤복 미스터리  

 

출생에서 사망까지 베일에 싸인 신비로운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인 신윤복을 소재로 한 전시, 드라마, 영화 등이

인기를 끌면서 그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하지만 2008년 문화계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는 신윤복에 대한 정보는 '0'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풍속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 정도가

'설'로 남아 있을 뿐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에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 신윤복은 도화서 화원이었나 ?

 

= 신윤복은 화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신일흥과 종증조부 신세담은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화원(畵員)으로 알려졌다.

부친 신한평은 영조 때 임금의 어진(御眞) 제작에 참여한 화원이었다.

하지만 신한평은 정조시절 낙마해 정조 12년(1788) 귀양을 간 기록이 있다.

하지만 신윤복이 부친이나 조부처럼 도화서에서 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원복 국립전주박물관장은 "각종 의궤에서 신윤복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며

"그가 화원으로 활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어느 문헌을 찾아봐도 신윤복이 화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다"며

"또 조선시대에는 부자가 같은 곳에서 근무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신윤복을 소재로 한 소설 '색, 샤라쿠'의 저자 김재희 씨도

"아버지가 화원이었으니 신윤복도 시험 정도는 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있다"고 말했다.

 

화원이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해도 그는 수많은 풍속화를 그렸다.

국보 제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를 비롯해

'탄금(彈琴)', '미인도(美人圖)' 등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걸작을 많이 그렸다.

 

반면 신윤복이 화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조선시대 화원은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직업으로

신윤복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화원이었다"며

"또 오세창이 정리한 '근역서화징'에 신윤복이 화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 김홍도와의 관계는 ? 

 

= 김홍도와 신윤복은 조선후기 시대 동시대 인물이었지만

그 둘이 사제관계였다는 기록은 역사에 남아있지 않다.

화풍으로 봤을 때 신윤복이 김홍도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할 뿐이다.

조선시대 기록에 신윤복과 김홍도가 사제관계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 둘이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는 견해도 있다.

 

이태호 교수는 "김홍도와 신윤복은 동시대 살았던 화가들"이라며

"둘의 화풍을 비교해봤을 때 신윤복은 김홍도의 화풍을 따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김재희 작가 역시

"두 사람의 작품을 비교해 볼 때 신윤복이 김홍도를 모사한 부분이 굉장히 많이 보인다"며

"그림 원본을 접하기 어려웠던 당시를 돌이켜 보면

신윤복이 김홍도의 제자였거나 최소한 가까운 사이였을 가능성은 크다"고 밝혔다.

 

 

◆ 신윤복은 플레이보이였나 ?

 

=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는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 등 남녀 사이 정을 주로 그렸다.

그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여인들은 틀에 박힌 캐릭터가 아니라

자유 연애를 즐기는 관능적인 여성상으로 그려졌다.

이는 신윤복이 활약하던 사회 분위기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화법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에서 그가 플레이보이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미술작품은 대부분 본인의 경험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김재희 작가는 "금기시되던 기방에 대한 그림도 많고 작품의 필치를 볼 때

신윤복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남자인가? 여자인가?

 

=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은 남장여자로 등장한다.

문근영이 연기하는 신윤복은 중성적인 매력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TV에서는 신윤복이 여자로 설정돼 있지만 그는 남자다.

남존여비 사상이 심했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여성이 화가로 사회 일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김달진 미술연구소장은 "신윤복이 남자라는 사실은 모든 미술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라며

"당시 사회분위기상 여성이 풍속화가를 그리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  2008-10-22 ⓒ 매일경제 & mk.co.kr, 정승환 기자 / 손동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