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김홍도, 김득신 - 대장간

Gijuzzang Dream 2008. 10. 26. 18:56

 

 

 

 

 

 

 

 대장간의 추억 

김홍도의 그림 ‘대장간’이다. 대장간은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장간에서 만들어 내던 물건이 사용되는 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장간에서 만들었던 물건들은 대개 농업사회에서 쓰던 물건들이다.
호미, 낫, 괭이 등의 농기구가 그렇지 않은가.

 

  

 

 

대장장이가 메질과 담금질을 하는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대장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간적 친밀감 짙게 배어 있는 수공업

 

대장간은 이따금 티브이 방송에 사라지는 ‘풍물’쯤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 프로그램에는 산업화된 사회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는 수공업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그 수공업이 갖는 인간적인 친밀감이 짙게 배어 있다.

 

대장간 그림은 이 그림 말고 김득신의 ‘대장간’이 남아 있는데,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모본으로 삼은 것일 터이다. 아마 김득신 쪽이 뒤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솜씨로 보자면 나는 역시 김홍도 쪽에 한 표를 던지겠다.

 

김홍도의 ‘대장간’ 을 보자.

먼저 그림의 위쪽을 보면, 흙으로 쌓아 올린 화로가 있다.

높이가 어른 키보다 높은 것이 흥미로운데, 요즘은 이런 화로를 볼 수가 없다.

지금의 대장간에서도 이런 방식의 화로는 없을 것이다. 화로의 앞쪽에 화구가 있다.

그 속에 쇳덩이를 넣어 온도를 높인 뒤 꺼내어 두드리는 것이다.

 

화로 뒤에 고깔을 쓴 소년이 막대기를 잡고 있는데, 풀무질을 하고 있다.

풀무는 바람을 불어 넣어 불을 지피는 데 사용하는 도구다.

손으로 밀고 당기고 하는 손풀무가 있고, 발로 밟는 발풀무가 있다. 이건 손풀무다.

소년이 막대를 아래로 당겼다 놓으면 그때 바람이 화로로 들어간다.

풀무질을 계속해 주어야 화로 속의 온도가 쇠를 달굴 정도로 높아진다.

 

한 사람이 집게로 달군 쇳덩이를 잡고 있고,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메질을 한다.

이렇게 치는 도구를 쇠메, 치는 동작을 메질이라 한다. ‘메’라고 하면 못 알아들을 사람도 있는데,

찰떡을 만들 때 안반에다 찹쌀밥을 해 놓고 커다란 나무 몽둥이로 내리친다.

그 나무 몽둥이를 떡메라고 하는데, 나무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대장간에서는 쇠로 만든 쇠메를 사용한다.

다시 그림을 보면 쇠메 하나는 벌건 쇳덩이를 막 내려치고 있고,

다른 쇠메는 다시 힘껏 치기 위해 먼 곳에서 힘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앉아 있는 대장장이는 집게로 벌건 쇳덩이를 꽉 집고 있다.

벌건 쇳덩이를 손으로 집을 수 없으니, 이 집게 역시 대장간의 필수품이다.

쇳덩이는 쇠메를 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요령껏 돌려야 한다.

사내 앞에는 긴 쇠자루가 있는데, 앞이 꼬부라진 것으로 보아

화로에 재를 긁어내는 물건일 것이다. 불에 불린 쇳덩이가 놓인 곳은 모루다.

쇳덩이를 메질해야 하니 모루 역시 쇠로 만드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렇게 해서 메질을 한 뒤 다시 물에 집어넣어 급격히 식히는 담금질을 한다.

담금질과 메질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물건의 형태가 잡히는 것이다.

 

그림의 아래쪽에는 한 젊은이가 숫돌에 낫을 갈고 있다.

지게가 뒤에 있는 것으로 보아 농사꾼이 분명하다.

대장간은 연장을 새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이처럼 날이 무뎌진 연장을 벼려주기도 하였다.

 

김득신의 풍속화 ‘대장간’. 간송미술관 소장

긍재 김득신은 김홍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화가다.

전체적으로는 김홍도의 선을 따르고 있는데, 구도에서도 김홍도와 유사하다.

김홍도의 그림에 비해서 긍재 김득신의 먹선이 가늘고 부드러우나 

인물의 화면배치 상태나 움직이는 자세 등은 매우 유사한 데가 있다.

김홍도의 <대장간>에는 배경이 생략되어 있으나,

김득신의 <대장간>에는 배경이 그려 있다.

 

발디딤 풀무질을 하고 있는 소년의 표정도 매우 밝을 뿐만 아니라

웃통을 벗어 제치고 메를 휘둘러 치는 총각 일꾼과 중년 일꾼,

그리고 집게를 잡은 주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동작과 감정이

모두 가락 잡힌 율동 속에 분명하게 질서잡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림 속 일꾼들이 쓰고 있는 머릿수건들이

모두 불꽃처럼 하늘로 치솟으려 남실거리는 맵시라든지

불 튀기는 화덕 앞에서도 오히려 탯가락이 잡힌 외씨버선의 맵시라든지

모두가 신명나는 조선 서민들의 멋과 가락을 보여주는 것이다.

 

총각 일꾼이 메를 휘두르며 보여주는 흥겨운 몸의 자세도

말하자면 일하는 조선 서민들 공통의 즐거워하는 몸짓 같은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 서민들이 일하는 생태 속에서 자연스럽게 풍기는 멋과 가락은

서민이 보여주는 민족미의 소박한 참모습임이 분명하다.

 

 

18세기 후반 관청의 속박에서 벗어난 대장장이

 

<대장간> 그림은 대장장이가 메질과 담금질을 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고,

정작 쇠를 만드는 곳은 아니다. 쇠를 만드는 곳을 야장(冶場)이라 하는데,

‘경국대전’ 공전(工典)의 철장조(鐵場條)를 보면,

여러 고을의 철이 나는 곳에는 야장(冶場)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장부를 만들어

공조와 해당 도(道)와 고을에 비치한 뒤, 농한기에 쇠를 만들어 상납하도록 하였다.

국가에서 필요한 쇠를 농민을 동원하여 만들어 바치게 한 것이다.

물론 모든 농민이 쇠를 만드는 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고, 특별히 쇠를 만드는 기술자가 있다.

이 사람이 수철장(水鐵匠)이다. 수철은 무쇠다. 처음 야장에서 얻은 쇳덩이를 판장쇠라 하는데,

이 판장쇠를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다양한 물건으로 가공하는 것이다.

   

쇠는 강도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이규경(李圭景 ·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연철변증설(鍊鐵辨證說)’에 의하면,

쇠를 처음 불려 광물을 버리고 부어서 기물을 만드는 것을 생철(生鐵), 곧 수철(水鐵)이라고 했다.

수철은 무쇠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경도가 워낙 높기 때문에 때리면 쉽게 부서진다.

그래서 녹여서 틀에다 부어 물건을 만든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곧 ‘주물’로 만드는 것이다.

수철을 불리면, 곧 불에 달구어 탄소를 제거하면 숙철(熟鐵 · 시우쇠)이 된다.

 

이규경은 불린 쇠를 모두 숙철이나 시우쇠로 말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탄소함량이 0.035∼1.7%인 것은 강철,

0.035% 이하인 것은 연철(시우쇠, 순철, 단철)이라고 한다.

연철은 너무 물러 사용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가 아는 호미와 괭이 등의 농기구, 칼 창 따위의 무기는 모두 강철로 만든다.

이 그림에서 지금 막 달구어 두드리는 것은 강철이다.

 

대장장이는 청동기를 사용하면서부터 생겼을 것이다.

청동기를 이어 나온 철기는 인류의 문명을 크게 바꾸어 놓았으니,

대장장이는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을 것이다.

예컨대 대장장이 출신의 석탈해가 신라의 네 번째 왕이 되기도 했으니,

대장장이의 위세를 알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조선시대로 오면, 대장장이는 천한 신세가 된다.

그들은 대개 기생이나 무당과 같은 부류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들은 꼭 필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천하게 여겨졌다.

지배층은 그들의 기능과 노동을 남김없이 짜냈다.

조선시대의 수공업자로서 일정한 일수를 의무적으로 국가를 위해 노동을 해야 했고,

일을 하지 않는 날은 대신 세금을 바쳤다.

 

예컨대 대장장이는 서울에서는 공조, 상의원, 군기서, 교서관, 선공감, 내수사, 귀후서 등에,

지방에서는 관찰사영, 병마절도사영, 수군절도사영,

그리고 기타 지방관청에 자기 이름을 올리고는 무보수로 일을 해야 하였다.

관청에서 일을 하지 않는 날은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높은 세금을 내어야만 했으니, 대장장이의 삶이란 고달프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후반에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즉 대장장이를 비롯한 수공업자들은

관청에 모두 이름을 등록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제도가 없어진 것이다.

여기에 수공업자들로부터 받는 세금 역시 점차 없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변화로 대장장이는 국가와 관청의 속박에서 벗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하기야 관청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대장장이의 삶이 전보다 자유로워진 것은 사실이겠지만,

벼락부자가 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대장장이의 힘찬 메질 소리가 사라진 세상은…

 

필자가 어릴 때 대장장이는 드물지 않았다.

나는 대장간 앞에 쪼그리고 앉아 풍로의 세찬 바람에 괄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쇳덩이를 집어내어 꽝꽝 하고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모습을 넋이 빠져라 쳐다보곤 했다.

그 쇳덩이는 이내 칼이 되고 호미가 되었다.

단단한 쇳덩이를 맘대로 주무르는 대장장이가 정말이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도시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군 소재지, 읍 소재지에서

무슨 공작소니 철공소니 하는 이름에서 겨우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대장장이의 힘찬 메질 소리가 사라진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인가.

대장간에서 만들었던 칼과 호미가 기계로 매끈하게 뽑아낸 칼과 호미로 바뀐 것처럼,

사람 역시 그렇게 제품화되지 않았을까.

  

 

             傳 김홍도, 풍속도, '대장간' 모시에 채색, 57.0×34.5㎝,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1778년, 행려풍속도 8폭병풍 중 '노변야로(路邊冶鑪)',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광규 시인의 ‘대장간의 유혹’을 읽으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정말 그렇다. 나는 이미 규격화된 상품이 된 것이다.

다시 대장간을 찾아가 다시 단 한 사람의 나로 단련되고 싶다.

-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서울신문,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긍재 김득신의 풍속화 ‘대장간’이 주는 의미

 

조선조 22대 국왕인 정조시대에는 병란이 없었던 평화스러운 시기였다.
이 시대에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농사꾼이 논둑에서 즐거워하고,
장사꾼은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던 태평성세(太平盛世)였다.
이것은 현명한 군주였던 정조가 백성들이 실제로 잘 살 수 있는 정치를 하고자 항상 노력했던
위민정치(爲民政治)의 결과였다.

정조는 백성들이 사는 모습과 그들의 여론을 살피기 위해
능원참배라는 형식을 취해 궁궐 밖 행차를 가장 많이 하였던 군주였는데,
이는 민본주의(民本主義) 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으로
왕과 백성이 함께 어우러져 일체감을 조성하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갑오 동학농민들이 봉기할 때 ‘전주 이씨 왕조 물러가라’고 외치지 않고
정조 때의 훌륭한 정치체제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특히 정조시대에 농사가 잘 될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부터 발달된 농업기술인
이앙법(移秧法 : 못자리를 만들어 그 곳에서 자란 어린 벼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는 농사방법)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앙법은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농사법이어서 정조는 수리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쳐
전국적으로 6,000여개의 저수지가 분포되었고 이로 인해 해마다 풍년이 들게 되었다.

또한 농민들은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져
동일한 토지에서 수확고를 크게 증대할 수 있으니 논둑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정조시대의 화가인 긍재 김득신의 풍속화 ‘대장간’을 보면
대장장이들이 신바람나게 농기구를 제작하는 모습이 보인다.
농업을 국본(國本)으로 삼아온 조선시대에 농사가 잘 되어 농민들은 더 많은 농기구가 필요해졌고,
대장장이들은 밀려드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신나게 일하는 광경을 담은 이 그림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제대로 반영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긍재는 집게를 잡고 있는 대장간 주인의 흐뭇한 표정과
주인의 아들처럼 보이는 소년이 해맑은 표정으로 화덕에 발디딤 풀무질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바로 정조시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즐거움을 찾아 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웃통을 벗은 젊은이와 중년의 일꾼이 흥겹게 하모니를 이루면서
번갈아 메를 치는 몸짓은 일하는 아름다움을 저절로 느끼게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주인이 신고 있는 외씨버선의 탯가락 잡힌 맵시와
대장간 화덕의 불꽃처럼 남실거리는 머릿수건은
대장장이들이 멋을 부릴 줄 아는 일꾼이란 것을 표현한 듯하다.
긍재는 ‘대장간’이란 풍속화에서 서민들의 사는 즐거움과 노동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면서
정조시대의 평온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정조는 문화국가를 지향하는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인재양성이 목적인 작인지화(作人之化)란
2대 명분으로 규장각을 운영하면서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이와 같이 정조 자신이 노력하여 쌓은 민본의 덕이 백성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에,
세종시대와 견줄 수 있는 번영과 평화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파당을 배격하고 박제가와 같은 서얼 출신도 능력과 학식이 있으면
과감히 등용하여 조정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화합된 사회분위기를 만든 군주였다.

정조 자신도 사도세자의 아들이란 어려운 입장을 딛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부단한 노력으로 문무양면의 교양을 쌓아
세종대왕 이후 가장 뛰어난 치적을 남긴 철인군주(哲人君主)가 된 것이다.
국가지도자의 능력과 철학이 일반 백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는
정조시대 긍재의 풍속도 ‘대장간’에서 배울 수 있다.
백성 앞에 자기 자신을 낮춘 정조와 같이 겸손과 섬김의 자세로 국
민의 소리를 듣고 덕치를 실천한다면,
고달픈 서민의 삶을 ‘대장간’ 그림과 같이 흥겹고 즐겁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 김대식, 울산대학교 생명화학공학부 교수

- 울산매일신문, 2008/01/07

  

 

 

 

 

 

 

 

- Verdi : Il trovatore, Anvil Chorus(일 트로바트레 2막 중 - 대장간의 합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