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김홍도, 조영석 - 편자 박기

Gijuzzang Dream 2008. 10. 26. 20:54

 

 

 

 

 

 

 괴로운 편자 박기

 

 

  

 

 

김홍도의 그림 ‘편자 박기’ 이다. 말의 편자를 박고 있다.

편자의 이름은 여럿이다. 말편자, 말굽쇠라고도 하고,

한자어로는 제철(蹄鐵), 영어로는 ‘horseshoe’라고 한다.

말의 편자는 대장간에서 서 있는 말의 발을 들게 하고 박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말의 발을 모두 묶어 땅바닥에 자빠뜨리고 편자를 박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하면 말이 무척 괴롭지 않겠는가.

 

 

중국에선 말을 세워둔 채 발굽 갈아

 

조영석의 그림 ‘편자 박기’ 역시 편자를 박는 것이다.  

 

두 그림을 보건대, 조선시대에는 말의 네 발을 묶어 땅바닥에 자빠뜨리고 편자를 박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말을 타는 모든 문화권에서는 모두 이런 식으로 편자를 박는 것인가.

 

이게 늘 궁금했는데, 이덕무의 에세이집인 <앙엽기>에 편자 박기에 관한 글을 읽고 보다

정확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의 네 다리를 묶어 하늘을 보게 눕히고 칼로 발굽의 바닥을 깎아낸 뒤 못을 박는다.

중국에서는 말을 세워두고 고르지 않은 발굽을 끌로 깎아낸 뒤에 말굽을 들어 무릎에 얹고 못을 박는다.”

 

중국에서는 말을 세워둔 채 발굽을 갈고 그 뒤에 편자를 박지만,

조선에서는 말 다리를 묶어 하늘을 향하게 하고 박았던 것이다.

말은 발굽이 있는 짐승이다. 발굽은 발가락에 있는 발톱의 한 종류다.

발굽이 있는 짐승은 여럿인데,

말은 발굽짐승 가운데서도 첫 번째, 다섯 번째 발굽은 퇴화하여 없어지고

3번째 발굽만 발달한 짐승이다. 당연히 편자를 박는 것도 3번째 발굽이다.

편자는 발굽이 닳는 것을 막고, 몸의 균형을 잡아, 걷거나 뛰는 데 편리하게 하는 도구다.

편자를 박을 때 쓰는 못을 '대갈' 또는 '다갈',  ‘징’이라고 한다.

 

말 징박기 / 풍속화첩(필자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편자가 있었다는 기록

 

편자는 언제 생긴 것인가.

19세기의 문헌인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편자(대갈)에 대한 그럴싸한 유래가 있다.

 

이유원에 의하면, “옛날에는 말의 발굽에 쇠편자를 박지 않아서

얼음 위에서 말이 잘 걷지 못해 칡의 줄기로 말의 발굽을 쌌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종 때 윤필상이 여진족을 정벌하러 갔을 때 얼음 언 땅을 말이 디딜 수가 없었으므로

쇠로 발굽 모양의 편자와 편자를 고정시키는 대갈을 고안해 냈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기술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고,

이후 이 방법을 따라 여름이나 겨울이나 말의 발굽에 편자를 붙이고 대갈을 박았다는 것이다.

칡은 한자로 ‘갈(葛)’인데, 그것을 대신하게 되었기에 그 못을 대갈(大葛)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성종실록’ 10년 윤10월 4일조를 보면

윤필상이 여진족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에 평안도 관찰사와 절도사에게

전다갈(錢多曷) 2000부(部)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임하필기’의 주장이 그럴듯도 하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서 ‘태종실록’ 18년(1418) 3월 21일조에

사헌부에서 진주목사 유염이 백성들에게 군량과 가죽, 마제철 등을 징수한 것을 탄핵하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마제철, 곧 편자는 성종 이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편자가 있으면 곧 편자를 고정시키는 못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대갈이 성종 이전에 있었던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편자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인가.

이익은 ‘성호사설’의 ‘마제(馬蹄)’라는 글에서

중국 요동은 우리나라와 접해 있어 우리나라 말의 대갈을 분명 보았겠지만,

대갈을 채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1832년 청나라에 갔던 김경선은 자신의 여행기인 ‘연원직지’에서

중국의 말에 튼튼한 쇠로 만든 편자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또 편자는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장인 이목이 고안한 것이라 하였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덕무의 ‘앙엽기’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말굽에 징을 박지 않고 짚신을 신긴다 하였다.

1811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던 유상필의 ‘동사록’을 보면

5리나 10리마다 말의 짚신을 갈아 신겨야 하기 때문에 짚신을 짊어진 사람이 따라 다닌다 하였다.

편자는 말에 신긴 쇠신발인 셈인데, 과연 이게 말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이익은 ‘성호사설’ ‘마제(馬蹄)’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을 기르는 것과 부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말을 부리는 일은, 그 뜻이 오직 사람을 편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에 기구들을 아름답게 꾸민다.

재갈이며 굴레, 안장, 뱃대끈, 채찍 따위는 옛날부터 있던 물건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기다 편자와 대갈까지 더 박는다.

장사꾼들은 ‘말이 잘 달리는 것은 본래 그런 것이 아니고, 편자의 대갈이 있어 잘 달리는 것´이라고 한다.

말이 길을 잘 가는 것은 편자의 대갈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말을 기르는 것으로 말하자면,

모름지기 말을 편하게 해 주어야만 싹이 트듯 자라나는 본성을 잘 길러줄 수가 있는 법이다.

‘장자’에 이르기를, ‘말에게 해로운 것을 없애야 한다.’고 했는데,

말에게 해로운 것으로 말하자면, 편자의 대갈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만약 말에게 물을 수 있고, 말이 대답할 수가 있다면, 반드시 편자의 대갈이 가장 해롭다고 할 것이다.  

말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길을 오래 가면, 발굽에 구멍이 나고

발굽에 구멍이 나면 쉬어야 하는 법이고, 사람의 힘으로 도와줄 수가 없는 것이다.

대갈이란 물건이 나오고부터는

가깝거나 멀거나, 춥거나 덥거나, 편하거나 험하거나에 관계없이 며칠도 편히 쉬지 못하니,

말이 어떻게 지치고 여위며 노쇠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대갈로 편자를 고정시켰기 때문에 말이 잘 달린다고 하지만,

이익은 그 일반적 상식에 반대한다. 길을 오래 걸으면 말의 발굽은 닳기 마련이다.

발굽이 다 닳으면 살과 땅이 맞닿으니, 말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발굽이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고, 사람은 발굽이 자라나는 그 기간을 기다려야 한다.

말 역시 쉴 수가 있다.

 

 

말을 쉬지 않고 부릴 수 있게 만든 편자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다른 존재의 고통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대상을 파멸시키고, 자신의 이익도 잃고 만다. 말에게서 최대한의 노동을 짜낸다.

곧 “놓아먹이는 말을 보면, 배가 부르면 누워 자는 것이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말을 몰아 부릴 때면 낮에는 길에서 내달리다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여물을 먹이니,

편히 쉬며 잠을 잘 틈조차 없다.”는 것이다.

말을 이렇게 부릴 수 있는 것은 모두 편자와 대갈 때문이다.

 

이익은 또 말이 채 자라지 않아 힘이 여물기도 전에 무거운 짐을 날라야 하는 것 역시

대갈을 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조선시대 문집에서 말에 관한 이야기, 특히 마정(馬政)의 개혁을 주장하는 글이 숱하게 나온다.

하지만 말을 생명의 차원에서 논한 것은 이익의 글이 거의 유일하다.

짐승을 부리되, 고통을 주지 말라는 말은 지금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끝으로 말 편자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

백사 이항복 선생이 어렸을 때 젊은 대장장이 사내가 살았는데, 어린 눈에도 좀 멍청하게 보인다.

소년 항복은 글방을 다녀올 때 식히느라 늘어놓은 말 편자 위에 앉았다가 편자를 엉덩이에 끼고 나온다.

대장장이는 대갓집 도련님에게 말은 못하고

어느 날 불에서 꺼낸 지 얼마 안 되는 말 편자 하나를 던져 놓는다.

항복이 모르고 앉았더니 살이 타는 냄새가 난다.

대장장이는 다시는 훔쳐가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여전히 편자는 없어진다.

세월이 흘러 대장간이 망하고 말았다.

밥을 굶고 있는데, 항복이 찾아와 다시 대장간을 열라며 말 편자 한 자루를 내놓는다.

깜짝 놀라 물으니, 그렇게 망할 줄 알고, 도와주려고 하나씩 편자를 훔쳤다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어릴 적에 짐을 끄는 조랑말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 말은 우리 동네 대장간에서 편자를 박았다.

김홍도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서울신문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