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풍속화] 김홍도, 김득신 - 자리 짜기 / 김득신 - 병아리 훔치기

Gijuzzang Dream 2008. 10. 26. 20:58

 

 

 

 

 

 양반의 ‘자리 짜기’

 

김홍도의 그림 ‘자리 짜기’ 를 보면
아내는 물레로 실을 뽑고 있다. 무명을 짜기 위해서다. 무명을 짜는 것은 여러 목적이 있다.

조선 후기 양반이 아닌 상민은 16세부터 60세까지는 군역을 지고,

직접 군대에 가는 대신 군포를 바쳐야 한다.

백성들에게서 군포를 받아내는 것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물리는 백골징포니 젖먹이 어린아이도 군포를 내라는 황구첨정이니 하였다.
하지만 이 여성의 남편은 양반이니, 아마 군포를 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방관을 쓴 양반이 자리를 짜는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풍속화 '자리짜기'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부분 육체적 노동을 기피했지만, 조선 후기 들어 경제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양반이 속출하면서 '일하는' 양반들도 생겨났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오른쪽 아랫부분의 자리를 짜는 남자다.

자리와 돗자리는 같다고 해도 그만이지만, 굳이 구별하면 할 수도 있다.

돗자리와 자리의 재료가 왕골이거나 골풀이라는 점은 같다.

하지만 돗자리는 베를 짜듯 날줄을 미리 걸어두고 바디를 움직여 짠다.

자리는 고드랫돌에 날줄을 감아두고 왕골 가닥을 더하고 고드랫돌을 앞뒤로 옮겨가며 짠다.

김홍도의 그림 ‘자리 짜기’와 김득신의 그림 ‘병아리 훔치기’는

모두 고드랫돌이 보이니, 돗자리가 아닌 자리 짜기인 것이다.

 

 

조선 후기로 오며 경제적 기반 잃은 양반 속출

 

각설하고, 자리를 짜는 사람은 사방관을 쓰고 있다.

사방관은 양반이 아니면 쓰지 못한다. 그런데 양반이 웬일로 노동을 하고 있는가.

양반 노릇을 하자면, 한문을 읽고 쓸 줄 알고,

좋은 풍경을 만나거나 친구들과 어울리면 한시도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성리학을 이해해야 하고 ‘소학’을 익혀 점잖은 말과 행동이 몸에 배어야 한다.

여기에 봉제사(조상의 제사를 지냄), 접빈객(손님 접대)을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 모든 양반다움을 실천하려면, 토지와 노비 소유라는 경제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토지와 노비가 없으면, 자연히 양반 행세를 할 수가 없다.

한데 조선 후기로 오면서 경제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양반이 속출하였다.

대부분의 양반은 육체적 노동을 기피하였지만, 이 그림에서 보듯 일하는 양반도 있다.

당연히 이 자리는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자리를 짜는 데 생계가 달려 있을 것이다.

 

양반이 자리를 짜는 그림은 김득신의 ‘병아리 훔치기’에서도 볼 수 있다.

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자, 마루에서 자리를 짜고 있던 남자가

담뱃대를 휘두르며 마당으로 뛰어나오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마당에 자빠져 있는 것은 이 사내가 짜고 있던 자리다.

사내의 오른손 아래에 있는 검은 물건은 바로 사내가 쓰고 있던 사방관이다.

역시 양반으로서 자리를 짜고 있었던 것이다. 

  

 김득신 '병아리 훔치기' - 간송미술관 소장

 

 

이원익이 귀양살이 하며 짠 자리 영의정 되자 보물로

  

생각이 트인 양반들은 자리를 짜는 것을 천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원익은 훌륭한 재상으로 알려진 분이다.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있다가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이이첨 일파에 대해 반대하다가 쫓겨났다.

심심하니 할 일이 없다. 이원익은 정치가이지 학자가 아니다.

이미 벼슬이 오를 대로 올랐고, 책도 읽을 만큼 읽었다. 귀양살이는 한편으로는 오랜만의 휴가다.

이 휴가에 무엇을 하겠는가.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리를 짜기 시작한다.

노동이라고는 해 보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솜씨랄 것도 없다.

한심한 작품이 나왔으나, 손수 노동한 결과물이라 소중하기 짝이 없다.

 

아는 사람에게 선물을 하기 시작했다. 받기는 했지만, 그 한심한 물건을 즐거이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

한데,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이원익이 다시 재상이 되자,

그가 짰던 한심한 물건은 영의정이 짠 자리가 되어 보물처럼 여겨졌다는 것이 아닌가.

자리도 누가 짜는가에 따라 이렇게 보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떤 분에게 듣고 과연 그랬을까 했는데,

장현광의 문집 ‘여헌집’에서

“완평(完平, 이원익)은 여주 호장(戶長)의 집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자리를 짜고 있다.”는

기록을 보고 허언이 아님을 알았다.

 

이런저런 기록을 보면 양반들이 생활고에 몰리면 더러 자리를 짜기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문인인 김낙행은 공부를 많이 한 분인데, ‘직석설(織席說)’ 이란 글 한 편을 남기고 있다.

번역하자면, ‘자리 짜기의 이로움’ 정도의 뜻이 된다.

 

어느 날 김낙행의 아내는 남편이 그저 밥만 축내고 하는 일이 없다면서

형제간을 돌며 왕골을 얻어와 자리를 짜란다. 이웃 영감까지 불러 짜는 방법까지 전수시킨다.

아내의 말을 이기는 남편은 드문 법. 내키지 않았지만 해 본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갈수록 손이 익고 재미가 난다.

이런저런 고민을 아주 잊고, 밥을 먹거나 소피를 보거나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가 아니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로지 자리 짜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드디어 자리 짜기의 찬미자가 되어 자신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짜겠노라 선언한다.

 

급기야 자리 짜기의 이로움을 설파한다.

첫째, 자리 짜기란 노동을 하기 때문에 공밥을 먹지 않는다.

둘째, 집 밖으로 공연히 나들이하는 일이 줄어든다.

셋째, 무더운 여름날 졸음을 잊을 수 있다.

넷째 공연한 근심거리에 마음을 쓰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다섯째, 잘 짠 자리는 늙으신 어머니께 올려 어머니를 편히 모실 수 있고,

좀 거칠게 된 것은 자신과 아내, 아이들이 깔기도 하고,

또 어린 계집종에게 주어 흙바닥에서 자는 것을 면하게 한다.

그러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자신처럼 살림살이가 딱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리로 인한 깨달음인데, 아주 괜찮다.

 

다시 김홍도의 그림 ‘자리 짜기’로 돌아가자.

자리를 짜고 있는 남자 위쪽에 아이가 글을 읽고 있다.

큰 책을 펴 놓고 작은 막대기로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고 있다.

이제 막 글자 공부에 들어간 꼬맹이인 것이다.

서당에서 혹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을 소리 내어 다시 읽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아이가 아랫도리를 벗고 있다. 아마 가난 때문일 것이다.

자리 짜는 아버지, 아랫도리를 벗은 아이라.

 

이 그림처럼 조선후기 양반사회의 분화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그림은 없다.

가난한 양반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짜게 되었다.

하지만 양반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여전히 사방관을 쓰고 있다.

벌거벗은 아들의 독서는 아직 양반의 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람들의 무서울 정도로 집요했던 교육열은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 했던 자리를 짜던 아버지,

길쌈을 하던 어머니의 열망에서 혹시 나온 것은 아닌가.

 

 

정조 때 자리 짜던 장인들 열에 여덟·아홉은 유랑민으로

 

 

긍재 김득신의 풍속화  '자리 짜기'

 

지금 세상은 자리 또는 돗자리라는 것을 쓸 기회가 많지 않지만, 조선시대에 자리는 생활필수품이었다.

지금은 맨바닥에 앉아서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집에서도 소파에 앉아서 지낸다.

또 결혼식 등의 의식이 있어도 모두 의자에 앉는다. 하지만 조선시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모두 바닥에 앉아 생활하고, 의식이 있어도 모두 바닥에서 한다.

앞서 김낙행의 글에서도 보았지만, 노비의 경우 흙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이 예사였으니,

자리가 생활필수품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리가 가장 많이 필요한 곳은 역시 국가와 왕실이었다.

고려와 조선은 '장흥고'란 관청을 두고 국용(國用) · 왕실용 자리를 관장했다.

관장한다는 것은, 지방에 공물로 배정한 자리를 받아들여 보관하고 사용할 때 내어주고 하는 것이다.

 

지방에서 장흥고에 바치는 자리의 양은 얼마나 되었을까?

‘세종실록’ 7년 8월 22일조에 의하면, 1년에 5148장을 바치고 1년에 소용되는 것은 2216장이라고 하였다.

자리는 모든 지방에서 다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주로 경상도 안동 일대, 즉 순흥 · 예천 · 영천(榮川) · 영천(永川) · 풍기 · 의성 · 용궁 일대가

자리의 주 생산지였다. 여기서 매년 2월, 8월에 장흥고와 상의원에 자리를 바쳤던 것이다.

장흥고가 일반 자리를 받는 곳이라면, 상의원은 꽃무늬를 넣은 매우 고급스러운 자리,

예컨대 용문석이나 만화석 등을 거두는 곳이었다.

그런데 안동 일대에서 자리를 짜서 바치면 장흥고나 상의원에서 퇴짜를 놓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자리를 짜는 석장(席匠)들이 땅을 팔고 집을 팔아 열에 여덟, 아홉이 유랑민이 되었다고 한다.

(‘정조실록’ 5년 12월28일조)

 

돗자리에도 이렇게 슬픈 역사가 어려 있다.

한데 요즘은 중국산 수입 자리 때문에 자리 짜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하니, 더 딱한 일이다.  

-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서울신문,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돗자리를 짜다

 

시골 사람들의 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시골 선비가 젊어서 과거 문장을 익히다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풍월(風月)이나 짓고,

그러다 기운이 빠지면 자리 짜는 일을 하다가 마침내 늙어 죽는다.”

이 농담은 그런 처지의 선비를 천시하고 업신여겨 하는 말일 것이다.

선비다운 풍모에서 멀리 벗어나고, 풍류와 아치를 손상시키기로는 자리를 짜는 일이 가장 심하다.

그래서 자리 짜는 일을 특히 천하게 여겨서, 빈궁하고 늙은 사람이 마지막에 하는 일로 생각한다.

사람으로서 이렇게 하다가 인생을 마친다면 참으로 불쌍히 여길 일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주어진 분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느닷없이 비난하고 비웃을 일만은 아니다.

 

이제 나는 과거 문장도 풍월도 일삼지 않는다. 산속에 몸을 붙여 살아가므로 궁색하기가 한결 심하다.

따라서 농사짓고 나무하는 일이 내 분수에 맞는다.

더욱이 자리를 짜는 일이야 그다지 근력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잖은가?

집사람이 그저 밥이나 축내고 신경 쓸 일이 없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 형제의 집에서 자리 짜는 재료를 얻어다가 억지로 내게 자리라도 짜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웃 사는 노인을 불러서 자리 짜는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나는 속을 죽이고 그 일을 하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손은 서툴고 일에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서 몹시 어렵고 더뎠다.

종일토록 해봐야 몇 치 길이밖에 짜지 못했다.

그러나 날이 지나고 일이 조금씩 익숙해지자 손을 놀리는 것도 저절로 편해지고 빨라졌다.

짜는 기술이 머릿속에 완전히 익자 자리를 짜면서 곁에 있는 사람을 보고 말을 나누더라도

씨줄과 날줄이 번갈아가며 엇갈리는 것이 모두 순조로워서 조금의 오차도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이제는 괴로움은 다 잊어버리고 즐겨 자리를 짜게 되었다.

식사를 하고 소변을 보러 가거나 귀한 손님이 올 때가 아니면 쉬지를 않았다.

따져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자 길이를 짰는데

솜씨가 좋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서툴다고 하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크게 나아진 것이다.

 

천하에 나만큼 재주가 없고 꾀가 부족한 자가 없다. 열흘 한 달 배워서 이런 정도까지 이른 것을 보니

이 기술이란 것이 천하의 보잘것없는 기술임을 얼추 알 만하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참으로 적합하다.

비록 이 일을 하다 내 인생을 마친다고 해도 사양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 분수에 알맞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하여 내게 보탬이 되는 것은 다섯 가지다.

일하지 않고 밥만 축내지 않는 것이 첫 번째이다.

일없이 괜한 출입을 삼가는 것이 두 번째이다.

한여름에도 찌는 듯한 더위와 땀이 나는 것을 잊고, 대낮에도 곤한 낮잠을 자지 않는 것이 세 번째이다.

시름과 걱정에 마음을 쏟지 않고, 긴요하지 않은 잡담을 나눌 겨를이 없는 것이 네 번째이다.

자리를 만들어 품질이 좋은 것으로는 늙으신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실 수 있고,

거친 것으로는 내 몸과 처자식이 깔 수 있다. 또 어린 계집종들도 맨바닥에서 자는 것을 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로는 나처럼 빈궁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다섯 번째이다.

정축년 여름 5월 아무 날에 쓴다.

 

<원문>
俚謔云: “村措大少習科文, 不成名, 爲風月. 又稍衰, 則業織席而遂老死.” 蓋賤侮之言也. 而遠於儒雅, 損於風致, 織席其甚者也. 故尤鄙下之, 爲窮老者之終事. 人如是而終, 誠可哀已. 然亦循其分而已矣, 不必遽非笑之也.

今余科文風月, 皆非所事, 寓居山中, 其窮益甚. 耕耘樵採, 乃其分也, 况織席之不甚費筋力者哉! 家人悶余之徒食而無所用心, 乞席材於其兄弟家, 強要之, 且請隣翁授其法. 余不獲已, 抑而爲之. 始也手澁而心不入, 甚艱以遲, 終日而得寸焉. 旣日久稍熟, 措手自便捷, 心與法涵, 往往顧語傍人, 而經緯錯綜, 皆順其勢而不差. 於是乎忘其苦而耽好之, 非飮食便旋及尊客來則不輟焉. 計自朝至暮, 可得尺, 自能者視之, 猶鈍矣, 而在余可謂大進矣. 天下之短於才而拙於謀者, 莫如余, 學之旬月, 能至於是. 是技也, 爲天下之賤也, 可知也, 余業之固其宜哉! 雖以是終吾身, 亦不辭焉, 分所當也.

爲之有益於余者五, 不徒食一也, 簡閒出入二也, 盛暑忘蒸汗, 當晝不困睡三也, 心不一於憂愁, 言不暇於支蔓四也, 旣成而精者, 將以安老母, 粗者將以藉吾身與妻兒, 而使小婢輩亦免於寢土, 有餘將以分人之如余窮者五也. 丁丑夏五月日書.

※ 김낙행(金樂行)〈직석설(織席說)〉《구사당집(九思堂集)》

<해설>
김낙행(金樂行, 1708~1766)은 의성 김씨로, 경상도 안동에서 태어나 안동과 봉화 등지에서 살았다.

부친은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낸 김성탁(金聖鐸)이다.

그 자신은 글에서 밝힌 대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채

향촌에서 선비로 한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영남의 큰 선비인 이재(李栽)에게 배웠고,

당시의 저명한 선비인 강좌(江左) 권만(權萬),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등과 교유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교유하고 글을 쓰며, 학문을 연마한 모범적인 선비이다.

하지만 선비 김낙행도 생활전선에서는 무능한 남자에 불과하였다.

그저 밥이나 축내는 사람에 불과했고, 집안 살림에는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 선비였다.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집사람이 자리라도 짜라고 억지로 등을 떠다밀었다.

그렇게 해서 자리를 짜고, 또 자리 짜는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된 사연이 이러한 글로 나왔다.

 

귀한 선비 신분에 가장 천한 일을 하는 자괴감이 글의 바탕에 깔리기는 했지만,

하는 일 없이 밥이나 축내는 사람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족감이 드러나 있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선비가 노동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거칠게나마 담겨 있다.

자리를 짜는 일이 자기에게 다섯 가지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이 일을 등 떠다밀려 억지로 하는 단계를 벗어나 재미도 붙이고, 의의도 인정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선비는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았다.

이 글은 그런 선비의 완고한 의식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를 보여준다.

저자 : 김낙행 / 역자 : 안대회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222집 《구사당집(九思堂集)》8권 잡저(雜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