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신입관리 신고식 - 신참례(新參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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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자제 기강잡기서 집단 괴롭힘으로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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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시험
문과 3년에 고작 33명 뽑아… 관리되기 ‘별따기’
대학 입학을 위한 수능 시험을 칠 때면 대한민국 사회는 한바탕 큰 홍역을 치른다.
고3 학부모 대부분은 자녀의 대입을 위해 사생활을 1년간 저당잡힌 채 수능에 모든 것을 건다.
때맞춰 방송이나 신문은 수능 열기를 보도하고,
수능 시험의 정답 풀이까지 정규 방송에 편성할 정도이다.
국토와 자원이 한정된 지리적 여건, 인재와 학문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전통 등
이 땅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시험이라는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과연 우리보다 전 세대를 살았던 조선시대 사람들도 우리처럼 시험의 열기에 빠져들었을까?
1. 과거길, 관광길
우리는 TV나 책 속에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메고 한양으로 향하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접한다.
그런데 과거시험의 구체적인 과정과 시험 과목 등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시험으로는 나라에 필요한 관리를 뽑는 과거제도가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면 관직에 진출하여 관리 생활을 할 수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일생을 걸었다.
과거시험에는 관리를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율관 · 역관 · 의관 등 기술직 종사자를 뽑는 잡과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문과(대과라고도 함)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방에서 뽑는 소과에 합격해야 했다.
소과는 다시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뉜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정도를 시험하는 것이었고,
진사시는 문장력을 알아보는 시험이었으니 요즈음으로 치면 논술시험에 해당한다.
고전소설에서 ‘최진사’, ‘허생원’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과거 합격자에게 국왕이 내렸던 합격증(홍패)과 어사화. |
오늘날 논술고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진사시 이외에 본 시험인 문과에서
책문(策文)이라 하여 주제에 맞는 문장 작성 능력을 비중 있게 평가했다.
그런데 문장 시험에서는 종종 직접 생각해낸 글 대신 다른 사람의 문장을 그대로 베껴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인조대의 학자 신흠은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기존의 문장을 그대로 베낀 경우가 거의 반수가 되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생원시와 진사시, 둘을 합쳐서 소과라 했으며,
이 시험에 합격하면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성균관에서는 출석점수인 원점(圓點)이 300점 이상이 되어야 대과인 문과에 응시할 수 있게 해서
성실성을 과거 응시의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지금의 내신 성적과 유사한 셈이다.
문과 역시 초시, 복시, 전시를 거쳐 총 33인의 합격자를 선발했다.
식년시가 3년마다 한 번씩 열렸으니 3년에 33명의 관리가 뽑혔다.
조선시대 공무원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웠다.
따라서 당시에는 과거보러 가는 것을 ‘영광을 보러간다’는 뜻의 ‘관광(觀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는 그토록 멀고도 험하게 느껴졌던 과거길이
오늘날 여행을 의미하는 관광길로 그 의미가 달라진 것이 흥미롭다.
2. 지역별 쿼터제가 실시된 과거시험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는 소과와 문과의 초시에 지역별 인구비례로 인원을 선발한
‘지역별 쿼터제’가 적용됐다.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문과 초시 합격자의 도별 정원을 규정해 놓았는데,
성균관(50명), 한성부(40명), 경기(20명), 충청도 · 전라도(각 25명), 경상도(30명),
강원도 · 평안도(각 15명), 황해도 · 함경도(각 10명) 등이었다.
초시에서는 지역별 인구비례로 인원 안배를 한 뒤 복시(覆試)에서는 시험 성적으로 관리를 뽑았다.
이를 통해 지역적 격차를 해소함과 동시에 개인의 능력을 적절히 반영했다.
과거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것을 방방(放榜)이라 했으며,
함께 합격한 사람은 동기생이라 하여 아무리 나이가 많고 적어도 친구처럼 지냈고,
따로 계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다.
합격자는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삼일유가(三日遊街 · 삼일 동안의 휴가)를 줬으며,
합격자를 배출한 마을에서는 경사가 났다 하여 한바탕 큰 잔치를 베풀었다.
조선 후기에는 ‘평생도’라 하여 자신 일생의 주요 장면을 8폭의 병풍에 담아 집에 보관하는 게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는데, 이때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과거 합격 장면이었다.
그만큼 과거시험 합격은 개인의 자랑이자 가문의 영광으로 인식됐다.
◇문과 응시생이 거쳐야 했던 소과 시험장의 모습. (왼쪽) 마치 관광하듯 자유롭게 시험을 치르는 모습이 이채롭다.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사흘 동안 친척과 선배 급제자, 시험관 등을 방문하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 |
3. 뇌물 받은 이의 자손 영원히 응시자격 박탈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양인 신분 이상의 사람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으며,
노비 등 천인들에게는 응시자격을 제한했다.
제도상으로는 농민 출신이라도 열심히 공부만 하면 시험을 치를 수가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농사일에 종사하는 농민이 시험에 합격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양인 신분 이상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과거 응시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즉 역모죄를 범한 죄인의 아들이나 장리(贓吏 · 뇌물을 받은 관리)의 자손,
재가(再嫁)한 여자의 아들과 자손, 그리고 서얼은 과거의 응시가 불가능했다.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과거시험에 나가지 못한 것은 이러한 제한 규정 때문이다.
뇌물 받은 자손의 과거 금지를 규정한 것은 지금보다도 뇌물에 훨씬 엄격한 시대 분위기를 보여준다.
노비는 원칙적으로 과거 응시가 제한됐지만,
주인에게 배운 학문을 통해 몰래 과거에 합격한 경우가 간혹 있었다.
중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반석평(潘碩枰)은 재상집 가노(家奴)로서
문과에 급제했는데 조선시대에서는 흔치 않은 경우였다.
4. 과거시험장의 부정행위 백태
시험장에서의 부정행위를 통해 성적을 올리려는 생각은 조선시대에도 오늘날 못지않았다.
과거 시험장은 대개 2∼3곳에서 치러졌으며
시험관과 안면이 있는 사람은 다른 시험장에서 시험을 치르게 했다.
시험장에서 거자(擧子 · 수험생)들은 각각 6자(약 1.8m)씩의 거리를 두었으며,
시험장에서는 거자 이외의 출입은 금지됐다.
거자들은 시험장 앞에서 필기도구 이외의 책이나 쪽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점검받았으며,
시험장에 들어가서는 담벼락 밑이나 구석진 곳 등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한 쟁탈전도 불사했다.
시험장 내에서는 갖가지 부정행위도 속출했다.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은 역시 오늘날 컨닝에 해당하는 것이다.
긴 도포자락에 빼곡히 예상 답안을 써온 사람,
담장 주변의 장소에 자리를 잡고 하인을 시켜 종이쪽지를 건네받는 사람, 붓뚜껑에 답안을 숨긴 사람,
심지어는 콧구멍에 답안을 숨겼다가 적발된 사람도 있었다.
이외에 차술(借述)이라 하여 남의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 경우도 있었으며,
시험관을 뇌물로 매수하거나 시험장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요즈음의 학교장 추천제나 기여입학제 문제도 종종 불거졌다.
과거제도가 지나치게 시험성적에만 의존하고 유력한 집안의 자손에게 유리하다 하여
천거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수시로 있어 왔다.
그러나 기본 방향은 시험성적, 즉 실력에 의한 인재 등용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과거는 비록 제도 문란과 늘어가는 합격자 수로 회의적인 의견이 다수 제기됐지만,
조선시대 내내 존속하면서 이 땅을 살아간 선비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최고의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 숙명처럼 다가오는 시험에 대한 공포는 지금도 여전하지만
공포뒤의 희망이 있기에 먼 미래에도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험 열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부정행위 방지 어떻게
조선시대에도 시험이 한 인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평가수단이었던 만큼
부정행위 방지를 위한 노력도 만만치가 않았다.
시권이라는 시험 답안지의 옆에는 3대조(父, 祖, 曾祖)와 외조부의 성명을 쓴 부분이 있었는데,
채점을 할 때는 이 부분을 오려 놓아 답안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했다.
이어 역서(易書)라 하여 글씨만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안지를 옮겨 쓰게 했다.
답안 작성자의 필체를 모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상피(相避)는 응시자의 친인척은 시험관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이었는데,
오늘날 수험생 자녀를 둔 사람은 출제위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배송(背誦)이라 하여 등을 돌리고 유교 경전을 외는 시험에는
천막으로 뒤를 가려 응시자를 몰라보게 하였다.
이 역시 오늘날 음악 같은 실기시험에서 응시자를 모르게 하고 시험을 치는 것과 흡사하다.
컨닝이라도 해서 점수를 얻으려는 응시자와 이를 방지하게 위해 다양한 방법을 총동원하는 모습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 신병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 shinby@snu.ac.kr
조선시대 신참으로서의 시련은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과거합격자의 집에서는 관에서 '방군(榜軍)'이라는 말단심부름꾼을 보내어 합격소식을 알렸는데,
문 앞에서 고성을 질러대며 소란을 피운다.
때로는 집안에 떼로 몰려들어와 한 상 크게 차려내라고 아우성을 치기도 한다.
합격했으니 '행하(行下)'로 한 턱 내라는 것이다.
집주인은 술과 음식을 내어 잘 대접하고 돈이나 쌀을 주어 보냈는데,
만약 대접이 시원치 않으면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이 풍습은 고려 말에 권세가의 나이 어린 자식들이, 권력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기고만장하는 콧대를 꺾어 놓고자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나중에는 무관직, 군대는 물론 아전들, 심지어는 종들도 이와 비슷한 풍습을 가지게 되었다.
방군이 이러하니 선배, 생원, 진사들이야 오죽하랴.
'접방례(接榜禮)'를 청탁해서 후배 집에 쳐들어가 뜯어먹는다.
생원 진사가 성균관에 들어가면 다시 '신방례(新榜禮)'를 치르는데,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션배들을 대접하고 온갖 희롱과 모욕을 참고 견뎌내야 한다.
신방례를 끝내고 나서도 규율을 잡으려는 선배들 등쌀에
유생들이 성균관 기숙사 입소를 기피하는 풍조까지 있었다고 한다.
신래(新來) 불리기
과거에 급제했다고 해서 곧 정식관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신은 예문관, 성균관, 교서관, 승문원 등 4관(館)으로,
무신은 내금위, 선전관청, 훈련원 등에서 임시직인 권지(權知)라는 직책으로 배속되어
정식 관직을 받을 때까지 수습기간을 거쳤다.
이때부터 고달픈 신참생활이 시작된다.
대과라 부르는 문과에 합격한 사람은 새로 왕의 은혜를 입었다 해서 '신은(新恩)'이라 불렀는데,
우선 배치된 부서의 관리들 앞에서 '신래불리기(唱新來)'라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때는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구경꾼들 앞에서 선배 두 사람이 신참의 양옆에 1명씩 붙어서
복두(복頭)에 어사화를 꽂은 신은의 겨드랑이를 끼고 북소리에 맞추어
앞으로 당겼다 뒤로 끌었다를 되풀이하다가,
얼굴에 먹물로 고양이를 그리는 묵희(墨戱 : 먹장난)를 하였다.
이를 거부하면 합격 후에 하는 유가행진(遊街行進)도 못하게 했다.
허참례(許參禮) 및 면신례(免新禮)
'허참례'는 처음 관청에 나갈 때 치르느 예비신고식이고
'면신례'는 정식신고식이다.
허참례가 끝나기 전까지는 동료관원으로 끼워주지 않아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했다.
또 면신례를 거치기 전까지는 관직 이름도 부르지 않고 무조건 '신래(新來)'라고 불렀다.
조정에서는 신래라는 말이 '신출내기'라고 조롱하는 말투라
여러 차례 그 말을 쓰지못하게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것이 관례가 되어 신래라고 불러주지 않는 것을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허참례와 면신례 때에 신래는 '선진(先進)'들에게 크게 주연을 베풀어야 했다.
이 때 차리는 잔치음식을 그들끼리의 은어로 '용두봉미(龍頭鳳尾)'라 불렀는데
용두는 생선을, 봉미는 닭을 말한다.
술은 청주면 성(聖)이라 하며 탁주면 현(賢)이라 하며 그 수량도 한이 없었다.
또 여러 신래들로부터 거두어 모은 재물은 철 따라 대규모로 술파티를 벌이는데 썼으니,
봄에는 교서관에서 홍도음(紅桃飮)을, 초여름에는 예문관에서 장미음(薔薇飮)을,
여름에는 성균관에서 벽송음(碧松飮)을 치렀다.
허참례에는 고관이라도 예외가 없다. 관직이 아무리 높아도 처음 다른 부서에 가면
한턱을 내기 전에는 아랫사람들이 예도 갖추지 않고 함부로 이름을 불러댔다.
허참례와 면신례 중간에 수시로 연석(宴席)을 베풀었는데 중일연(中日宴)이라 하였다.
허참례 때는 선임자들에게 술잔치를 크게 내야 했으며
어떤 때는 돈을 거두었다가 회식을 하기도 하였다.
매번 연석에는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성대한 음식을 시켰고 반드시 어두워져야 왔었다.
아무리 고관이라고 하더라도 새로 부서를 옮기면 한턱을 내야 대우를 받았다.
처음 허참례를 치르고 면신례를 치르기까지는 짧게는 10일, 길게는 50일이 걸렸는데
만일 불만을 품고 공손히 굴지 않으면 면신 날짜만 늦춰지게 되었다.
면신례를 마쳐야 완전한 동료로 인정해 주는데,
면신례는 내부규율이 엄하기로 이름난 예문관이 사관 중에서도 가장 심했다.
예문관에서는 서열이 다르면 같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했고
선배에게 조금이라도 버릇없이 굴면 매를 쳤다. 그러니 면신례도 가장 혹독했다.
선배들에게 크게 잔치를 벌여 각기 기생을 하나씩 안기고,
고참 관원들에게는 기생을 둘을 안겨서 좌우보처(左右補處)라 하였으니
부처님 양옆의 좌우협시보살을 두고 있는 것을 빗댄 것이다.
선임자들은 신래에게 한 손으로는 기생 손목을 잡고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상관 이름을 부르는 게임을 시켜 이를 호종례(呼鐘禮)라 했고,
뒷짐을 진 채 서서 머리를 숙이고는 머리에 쓴 사모를 쳐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직속상관의 직함과 성명을 외우게 하여 이를 예수(禮數)라 했는데
게임에 지거나 관등성명을 틀릴 때마다 벌을 주었다.
그 외에 신래자를 괴롭히는 유형은 아래와 같은 것이 있었다.
시궁창의 오물을 얼굴에 칠하고는 중국의 향내 나는 분(당향분, 唐香粉)이라고 불렀다.
관(冠)과 의복을 찢고는 더러운 물 속에 밀어 넣어 뒹굴게 함으로써
사람이 차마 못 볼 귀신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사현부에 말단 감찰이 들어오면 우선 홀들기(경홀, 擎笏)라 하여 서까래만 한 기둥을 들게 하는데,
들지 못하면 맨 윗사람부터 차례로 아랫사람의 무릎을 주먹으로 때리니 이를테면 줄빳다인 셈이다.
연못에 밀어넣어 사모(紗帽)로 물을 퍼내서 물고기 잡는 놀이를 하게 하였다.
또 거미잡기놀이라 하며 검댕투성이 부엌 벽을 손으로 문지르게 하고
그 물에 손을 씻게 한 뒤 그 물을 마시게 했다.
음란한 이야기를 하며 하루 종일 춤추게 하고는
이를 ‘맑은 노래에 예쁜 춤(청가묘무, 淸歌妙舞)’이라고 하였다.
명함 돌리기(回刺)
면신 전까지 신래는 매일 밤 선배들 집을 돌며 회자(回刺)를 해야 했다.
회자란 명함을 돌리는 것을 말한다. 옛날 명함은 두터운 종이조각에 이름을 쓴 것으로
대개 명자(名刺)라 불렀는데 때로는 자서(刺書), 자지(刺紙), 명함(名銜)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옛날의 명자는 상대방을 만난 자리에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집을 찾아가 면회를 청할 때나, 정월초하루 세배갈 때 그 집 청지기 종을 통해
안에 들이미는 것으로 이를 통자(通刺), 투자(投刺), 납자(納刺)라 하였다.
결국 회자란 두루 돌아다니며 인사를 드린다는 말이다.
밤늦게까지 회자가 계속되기 마련이다보니 밤중에 부서진 관에 낡고 찢어진 옷을 입고 돌아다니니
꼬락서니가 귀신몰골이라 이들을 '신귀(神鬼)'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시대에는 야간통행금지가 있었지만 순라꾼도 신귀는 붙잡지 않았다 한다.
짓궂은 선배들은 신귀를 서리들이 집무하는 장방(長房)에 가두어 출입을 못하게 하고는
저녁 늦게야 풀어주곤 하였다. 또 숙직하는 명부인 성기(省記)에 매일 신래 이름을 적어넣어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게 해서 길면 한 달 까지 끌었으니 이를 '초도(初度)'라 했다.
그런데, 회자에도 비용이 제법 들어갔는데
명자 석장 만드는데 무명 한 필이 드는 최고급 명자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 일도 있었다.
또 신귀들이 납자를 할 때면 그 집 종까지 수고비를 요구해서 말썽이 일곤 했다.
1553년(명종 8) 윤 3월 4일에는 명함돌리는 폐가 많으니 그 횟수를 줄이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
회자도 단순히 잘못된 관례가 아니라 신참들에게 예의를 가르치는 중요한 행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영조 때 회자를 거부한 한유와 안식의 경우,
안식을 굴복하여 별 탈이 없었지만 유독 한유만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은 유배당하고 말았다.
허참례, 면신례의 풍습은 <고려사>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말 우왕 때 권세가 집안의 젖비린내 나는 어린 자제들이 부형(父兄)의 권력에 기대어
과거에 합격하자, 그때의 과거를 어린 아이들이 분홍옷을 입는 것에 빗대어
홍분방(紅粉榜) 또는 분홍방(粉紅榜)이라고 비아냥대었는데,
기성관원들이 이 철모르는 어린 것들의 기를 꺾어놓겠다고 시작한 일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풍습이 계속되면서 별별 새로운 면신절차들이 덧붙여져서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면신례 시키지 마라, 못하겠다.
면신례는 수많은 신참 관원들을 고달프게 해서 아예 관직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집까지 팔아 가산을 탕진한 자도 있었으며, 부자 장사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크고 작은 말썽도 끊임없이 일어나 중종 때에는 의정부 관원들이 신래를 닦달하여
소를 잡아 삶다가 불이 난 일도 있었고
대궐 안 선전관청에서 관원들이 신래에게 술을 얻어먹고는 거꾸로 매달아놓고 발바닥을 때리다가
한밤중에 비명소리가 왕의 귀에까지 들려 처벌을 받은 일도 있었다.
때로는 신래다루기가 도를 넘어서서 병약한 신래들이 기절하고 죽는 사태도 벌어졌다.
국초부터 면신례를 법으로 금지하여 간혹 선배 관료들이 탄핵을 받고 파직되는 사례도 있었다.
효종 때는 군대에서느니 면신례에 대해 규제를 가해
면신례를 핑계로 술과 음식을 토색하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려 곤장을 치게 하였으며,
숙종 때 강릉에서는 새로 들어온 군졸들에게 화지가(畵紙價)라는 명목으로
꿀과 쌀을 받아낸 기총의 목을 베어 군중(軍中)에 효수한 일도 있었다.
한편, 중종 때 현량과롤 급제한 조광조 일파 젊은이들이
썩은 훈구파 기성관료들의 조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으로 면신례를 거부하자
사관(四館)의 관원들이 이들에게 관서 배정을 해주지 않아 정치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다.
9번 장원을 했다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이름을 날린 율곡 이이도
처음 승문원에 배속되었는데 이 두뇌명석한 선비가
면신례를 추잡한 풍속이라 거부했다가 쫓겨나고 말았다.
퇴계 이황은 이 소식을 듣고는 뭐 그럴 것 까지 있느냐고 율곡 이이의 행동을 은근히 꼬집기도 했다.
율곡은 벼르고 벼르다 훗날 홍문관 교리가 되어 왕에게 상소를 하여 면신례를 못하게 했고,
병조판서에 오르자 병조에서만은 신래를 괴롭히는 풍습을 사라지게 했지만, 그저 그때 뿐이었다.
케케묵은 악습은 끝내 사라지지 않아
고종 때 간행된 <대전회통>에도 면신례 금지조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첫 벼슬은 패가의 관문
면신례를 치르고 나서도 목돈 들어갈 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당시 첫 벼슬인 초입사(初入仕)를 초년에 패가한다 하여 '초년패(初年敗)'라 불렀다.
지방관직에 제수되면 예복을 입고 대궐에 들어가 왕과 왕비가 계신 곳을 향해 4배를 올리고
세자가 있는 곳에 재배를 올리는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해야 하는데
그때 차려입는 관복 흑단령이나 허리띠인 오각대, 머리에 쓰는 사모, 신발인 흑화 따위는
나라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서 처음 관직을 받을 때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영조 때 이름을 날린 황윤석은 나이 38세에 가까스로 종9품 능참봉 자리를 얻었는데
강원도 영릉의 장릉(莊陵 :단종릉) 참봉에 배정되어 사은숙배를 하러
전라도 흥덕에서 서울에 올라와 관복을 살 돈이 없어 겨우 수소문하여 빌려입게 되었다.
그러나 겨우 구한 사모는 머리가 유난히 커서 맞지 않아 간신히 머리에 얹은 꼴이라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면 자꾸 벗겨지므로 사모에 끈을 매달아 턱 밑으로 묶고 대궐에 들어가야 했다.
숙종 때 서필원도 과거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에 임명되었는데도 교대 근무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아
처벌을 받게되었는데 알고보니 발이 너무 큰 탓에 빌려올 만한 신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왕이 상의원에 명을 내려 커다란 신발을 만들어주었다고 전한다.
지방으로 관직을 나가게 되면 그래도 빚을 조금 지지만,
여기저기 얼굴 내밀 일이 많은 서울의 관료생활은 아예 빚더미에 앉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일찍이 오성부원군 이항복이 준마는 외방으로 보내야 하고 선비는 서울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지금은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로 약간 뒤바뀌었지만,
그 유래를 살펴보면, 지방 선비는 미리미리 서울에서 터를 닦아두어야지 그렇지 않고
갑자기 서울에 올라와서 벼슬살이를 하려다가는 겪어야 할 고난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방의 수령이 사은숙배를 하러 대궐에 들어가면
대전별감이나 승정원 사령이 예전(禮錢)을 뜯어내는데 만약 주지 않으면 욕지거리를 퍼붓기도 했다.
재상과 판서들에게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신원조회라 할 수 있는 서경(署經)을 한
사헌부, 사간원 관리들에게도 인사를 하면서 종이값 지채(紙債)를 바쳐야 했으며,
또 인사권을 담당하고 있는 이조 또는 병조의 관리 등등 여러 관서에 예물을 올려야 한다.
이런 것들로는 필채(筆債), 예목(禮木), 포진채(鋪陳債), 조사채(朝仕債) 등이 있는데
뇌물이 아니라 정식으로 내야하는 예물로서 총액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므로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 경향(京鄕)간의 연락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경저리에게 청탁하여
빚을 얻어쓰게 되니 이를 저채(邸債)라 하였는데,
저채가 많아지면 결국은 고을 백성들로부터 돈을 긁어내서 메꾸어 비리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도총관 변종인이 아뢰기를 “신이 군사 훈련 때문에 훈련원에 앉아 있었는데,
훈련원의 권지(權知) 등이 신에게 ‘허참례를 행하지 않았다’ 하고는 공경하여 맞이하지 않고
이름을 들어 욕하였습니다. 청컨대 혐의를 피하게 자리를 옮겨주소서” 하니,
권지 이극달 등 14인을 불러 물으니, 모두 대답하기를
“무과 출신인은 당상관, 당하관을 묻지 않고 모두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훈련원의 관리들과 서로 만나본 연후에야 선생안(先生案)에 이름을 올리고,
선생이라고 일컫습니다. 이것은 옛 풍습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권지 등이 신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비록 옛 풍습이라고 하나 혁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494년(성종 25) 9월 22일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제 대궐 안으로 들려오는 고함 소리를 듣고서 지극히 해괴하여 물으니,
선전관이 신래를 묶어놓고 때린 까닭이었다.
일찍이 신래를 침학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확실히 알지 못한다.” 하매, 승정원이 아뢰기를,
“변한정, 박지화 등이 신래에게 술을 내게 하고 부장 김극달이 와서 함께 마시다가 취하게 되자
박지화가 김극달도 앞으로 신래가 될 것이라 하여 거꾸로 매달고 발바닥을 때린 것이나
취중에 한 일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신래를 침학하는 일은 이미 사헌부에 말하여 금지하게 하였거니와,
술을 마시고 마구 때려 아프다고 외치는 소리가 대궐 안까지 들리는 것은 매우 옳지 않으니,
우두머리인 변한정 등은 파직하고 의금부에서 조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20년(중종 15) 7월 20일
“오늘 신래 감찰 조한정이 침해받다 기절하므로 떠메고 갔는데 죽었다고 한다.
실지로 그랬다면 마땅히 선임자를 조사해야 할 것이고,
만일 일제히 모여서 침해했다면 마땅히 모두를 조사해야 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면 형조와 한성부가 반드시 먼저 알았을 것이니, 이런 뜻으로 사헌부에 물어보라.”
하므로, 대사헌 박호 등이 미처 몰랐다며 사직하니, 사직하지 말도록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26년(중종 21) 1월 24일
“신래를 침학하는 일은 내금위가 더욱 심하여 면포 500필이 있어도 감당하지 못하니
이는 심한 폐풍입니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28년(중종 23) 8월 12일
“의정부에 불이 난 것은 녹사가 신래를 닦달하여 소를 잡아 삶다가 이러한 변고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니 녹사와 선임자 등을 별도로 조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이 일은 매우 중대하니 의금부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35년(중종 30) 4월 11일
“예문관의 신래가 된 자가 전지(田地)와 주택 등 가산을 모두 팔아서 그 비용으로 쓰고
빚을 갚지 못하고 죽자 과부가 된 그의 아내가 눈물로 일생을 보낸 경우도 있습니다” 하였다.
“연회까지도 전부 신래에게 마련하여 베풀게 하는데 하루에 3-4군데에 나누어 베풀기도 합니다.
선생들은 기생을 끼고 앉아 후한 뇌물을 요구하다가 조금이라도 뜻에 차지 않으면
신래의 종을 때려서 혹 죽이기까지도 합니다.
또 선생이 데리고 온 노비들이 거리낌 없이 횡포를 부리는데,
뜻에 차지 않으면 그릇과 음식을 모두 깨뜨리고 밟아 뭉개는 등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칩니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40년(중종 35) 3월 26일
한편,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보면
“세종 때 참판 박이창이 처음에 예문관에 들어가니
예문관의 풍속이 처음 들어오는 자는 신래라 하여 술과 안주를 내게 하기도 하고
혹은 여러 가지로 괴롭히다가 만 50일 만에야 자리에 앉기를 허락하는데, 이를 면신이라 하였다.
공은 면신례 때 행동이 조심스럽지 않아서 여러 번 선배에게 실수하여
기한이 지나도 자리에 앉기를 허락하지 않으므로 분노를 참지 못하여
스스로 그 자리에 올라앉아 옆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같이 하니
그때 사람들이 스스로 허락한 면신(자허면신, 自許免新)이라고 하여 화제가 되었다.”
-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 정연식, 청년사, 2001, p 171-188 중에서 정리
조선시대 신참관리 ‘호된 신고식’
귀신 · 풀벌레 호칭 쓰며 희롱
土公 토지박물관 '면신첩' 2점 공개
"신귀(新鬼 · 새로운 귀신) 양정(暘鄭)은 듣거라!
넌 별 볼일 없는 재주로 외람되게도 귀한 벼슬길에 올랐겠다.~
전해 내려오는 고풍(古風)을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으니,
거위, 담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즉각 내어와 우리에게 바치도록 하라. 선배(先進)들이 쓴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관장 조유전)은 최근 수집한 '면신첩(免新帖)',
즉 관직생활에 처음 입문한 신참들에게 선배들이 신고식을 하면서 작성한 문서 2점을 공개했다.
처음 인용한 문서는 18세기 새내기 관리 정양(鄭暘)의 신고식에 대한 것이다.
정양은 아마도 호된 면신례(免新禮), 즉 신고식을 치렀을 게다.
국사편찬위원회 박홍갑씨의 기존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정양의 온몸을 숯 검댕으로 만든 뒤 씻은 물을 마시게 했거나,
사모관대를 한 채 연못에 뛰어들어 고기잡이 흉내를 내게 했거나,
더 심하게는 얼굴에 오물을 발라 광대놀음을 시켰거나….
그런 신고식을 다 치른 뒤 선배 3명은 정양에 대한 이른바 합격증을 내어주고
어서 "거위와 담배, 돼지고기, 닭고기를 가져오라"고 호통친 것이다.
정양의 문건을 더 살펴보면 당대 면신례의 실체를 읽을 수 있다.
고참들은 정양의 이름을 일부로 '양정(暘鄭)'이라고 거꾸로 불렀고,
거기에 '신귀(新鬼)'라고 하면서 마음껏 희롱한다.
"더러운 너를 거둬들이고, 버르장머리를 덮어주는 것은 우리가 천하의 도량을 가진 까닭이요,
너의 과오를 사면하고 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성현의 큰 기량을 본받았기 때문이다."
정양이 얼마나 심한 모욕을 당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고참 3명은 문건의 말미에 차례로 수결(手決), 즉 사인을 해준다.
이제는 '신참을 면하고(免新)' 동료로 인정해준다는 의미다.
토지박물관이 공개한 면신첩 가운데는
마치 공식문서의 형식을 빌려 작성한 '영방입안(營房立案)'도 눈에 띈다.
재판의 판결문이나 상속 · 거래 · 입양 등의 공증서 기능을 했던 '입안'의 형식을 고스란히 따서
신참이 면신례를 통과했음을 인증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서는 면신입안(免新立案)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데,
이런 형태의 입안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건륭(乾隆) 23년(1758) 초충(草蟲 · 풀벌레) 정국량(鄭國良)은
면신례 관례대로 한 차례 시행했고, 이에 의거하여 입안을 발급한다."
영방(營房)은 각 군영이나 도 단위의 감영에서 관리가 집무를 보는 사무소를 말한다.
아마도 정국량이라는 새내기는 '초충', 즉 풀벌레 같은 인사라는 모욕을 들어가면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을 것이다.
그런 뒤 영방의 수장과 방장(房丈) 및 유사(有司) 3명의 결재가 담긴 '합격증명서'를 받은 것이다.
요즘도 대학가의 과도한 신고식으로 사람이 죽는 등 사회적인 물의를 빚기도 한다.
하지만 인류학 혹은 민속학에서 통과의례로 이해되는 신고식(면신례)의 역사는 깊다.
박홍갑씨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 중종 36년(1541) 사헌부 상소에 면신례의 유래가 나오는데,
고려말 조정이 혼탁한 시절에 처음 관직에 나간
권세가 자제들의 교만하고 방자한 기세를 꺾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갈수록 폐해가 커졌다.
요즘의 신고식은 그래도 선배들이 비용을 부담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모든 비용을 신참들이 대야 했다.
빚을 내서라도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리지 않으면 그 집단의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른바 왕따를 당한 것이다.
단종시대에는 승문원에 배속된 정윤화(鄭允和)라는 인물이
다른 9명의 신참과 함께 면신례에 참석했다가 사망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 때문에 연루자 3명이 50대의 태(笞)를 맞고 파직되는 등 엄청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김성갑 토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1758년 정국량의 면신입안은 경국대전에 정해놓은 공증서이자 판결문의 형식을 빌렸다"면서
"면신례를 선후배 사이에 공식적인 행사로 여겨
법정양식을 발급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 2008.12.10,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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