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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세종조(世宗朝) - 집현전

Gijuzzang Dream 2008. 10. 22. 11:26

 

 

 

 

 집현전을 설치하고 휴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다

 

 

임금(=세종)은 문치(文治)에 정성을 다하였다.

세종 2년 경자에 비로소 집현전을 두어 문사 열 사람을 뽑아서 채웠더니,

그 뒤에 더 뽑아서 삼십 명이 되었다.

다시 이십 명으로 줄여 열 사람에게는 경연(經莚)의 일을 맡기고,

또 열 사람은 서연의 일을 보게 하여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기되,

고금의 일을 토론하여 아침 저녁으로 쉬지 않게 하니,

문장하는 선비가 배출되어 인재를 많이 얻게 되었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년과 경오년 사이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지어 낳은 새끼가 모두 희더니,

몇해 사이에 요직에 오른 이는 모두 집현전에서 나왔다. 《필원잡기》


○ 집현전에서는 일찍 출근하여 늦게야 끝나서 일관(日官)이 시간을 아뢴 연후에 나가게 하였고,

아침과 저녁에 밥을 먹을 때에는 내관으로 하여금 손님처럼 대하게 하였으니,

그 우대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용재총화(慵齋叢話)》


○ 세종이 인재를 기르는 아름다운 일은 옛 임금들보다 뛰어났다.

집현전 선비들이 날마다 번갈아 숙직을 하는데, 그들을 사랑함과 대접의 융숭함을

사람들이 모두 영주(瀛洲 : 신선이 사는 삼신산 중 하나)에 오른 것에다 견주었다.

 

어느날 밤 이경(二更) 쯤에 내시를 시켜 숙직하는 선비가 무엇을 하는가를 가서 엿보게 하였는데,

신숙주(申叔舟)가 바야흐로 촛불을 켜놓고 글을 읽고 있었다.

내시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서너 번이나 가서 보아도 글 읽기를 오히려 끝내지 않다가 닭이 울자 비로소 취침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서 담비 갖옷을 벗어 그가 잠이 깊이 들 때를 기다려 그 위에 덮어주게 하였다. 숙주는 아침에 일어나서야 이 일을 알게 되었고, 선비들은 이 소문을 듣고 더욱 학문에 힘을 쓰게 되었다. 《필원잡기》


○ 8년 병오에, 임금이

집현전 부교리 권채(權採)ㆍ저작랑(著作郞) 신석견(申石堅 : 뒤에 석조碩祖로 이름고침)

정자(正字) 남수문(南秀文) 등을 불러서 전교하기를,

“내가 듣건대, 너희들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다 하니, 이제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각기 집에서 편히 있으면서 글 읽기에 마음을 전력하여 그 효과를 드러내도록 하되,

글을 읽는 규범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동각잡기》


○ 임금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 몇십 년 동안을 길러서 인재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아침에는 관청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숙직하여 공부에 전념하지 못할 것을 오히려 우려하여

나이가 젊으며 재주 있고 몸가짐이 단정한 몇 사람을 뽑아 긴 휴가를 주어

번을 나누어 들어와 숙직하게 하며, 산에 들어가 글을 읽게 하고 관에서 그 비용을 제공하였다.

경사(經史)ㆍ백가(百家)와 천문ㆍ지리와 의약ㆍ복서(卜筮) 등을 마음껏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 통하지 못한 것이 없게 함으로써 장차 크게 쓰일 기초를 이룩하였으니,

인재를 많이 양성하였기 때문에 집현전에 뽑히는 것을 영주(瀛洲)에 오른 것에다 견주었다.

《필원잡기》


○ 24년 임술에 또 신숙주 등 여섯 사람을 진관사(津寬寺)에 보내었다. 《용재총화》


○ 임금이 말년에 내불당(內佛堂)을 지었는데,

대신이 간했으나 듣지 않았고 집현전 학사들이 간해도 역시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학사들이 모두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가서 집현전이 텅비었다.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황희를 불러 이르기를,

“집현전의 여러 선비들이 나를 버리고 가버렸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신이 가서 달래겠습니다.” 하고,

곧 두루 모든 학사의 집을 찾아가 간청해서 돌아오게 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와 중봉(重峯)의 <소(疏)>


○ 유의손(柳義孫)ㆍ권채(權採)ㆍ신석조(申碩祖)ㆍ남수문(南秀文)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문장으로 일시에 이름을 날렸으나, 사람들은 수문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 한국고전번역원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제3권 /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변계량(卞季良)   

 

 

변계량(卞季良)은, 자는 거경(巨卿)이며, 호는 춘정(春亭)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다.

 

○ 공은 성품이 인색하여 변변치 않은 물건이라도 남에게 빌려주지 않았고,

매양 동과(冬瓜)를 잘라먹은 뒤에 자른 자리에 표를 하였다.

손님을 대하여 술을 마실 때는 그 잔 수를 계산하고 술병을 단단히 봉하여,

손님들이 인색한 얼굴빛을 보고 일어나는 사람이 많았다.

일찍이 흥덕사(興德寺)에 있으면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집하였는데,

세종이 그의 문장을 중하게 여기셔서 사찬(賜饌)이 잇달았고, 재상들도 다투어 술과 음식을 보내었다.

방 안에 쌓아 두어 날짜가 오래되면 구더기가 생기고 냄새가 온집안에 가득하였는데,

썩으면 구덩이에 버리면서도 하인들에게는 조금도 주지 않았다. 《용재총화》

 

○ 공이 문형(文衡)을 맡으니 직전(直殿) 김구경(金久冏)이 공의 단점을 많이 말하였다.

공이 매우 싫어하여 시 하나를 지어 김구경을 비방하였는데

이는 김구경이 젊었을 때 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필원잡기》

 

가도의 문장은 젊었을 때 일이요 / 賈島文章少日事

횡거의 학문은 만년 때이다        / 橫渠學問晩年事

 

○ 공이 과거에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지어 김구경에게 보이니, 김구경이 말하기를,

“이 기문에서 성리(性理)를 논한 것은《중용(中庸)》의 서문과 매우 흡사하다.” 하였다.

김구경의 사람됨이 재주만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고 후진으로서 전배를 경멸하였다.

매양 공이 지은 글을 보면 입을 가리고 크게 웃으니, 공 역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결국 틈이 생겨 김구경은 끝내 좋은 벼슬을 얻지 못하였다. 《용재총화》

 

○ 공의 문사(文辭)는 고묘(高妙)하고 전아(典雅)하였으며,

시를 더욱 잘 하여 맑으면서도 궁기(窮氣)가 없고 담담하면서도 얕지 않았다.

태종이 옛날 친구로 대접하였으며,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을 20여 년 동안 맡았다.

역대 신하들의 말이나 행실로써 경계가 되고 본받을 만한 것을 모아서

《정부상규설(政府相規說)》을 저술하였다. <본집(本集)>

 

○ 공은 성품이 편벽되고 고집이 대단하였다.

중국에서 흰 꿩을 얻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하례하는 표문 중에

‘오직[惟] 이[玆] 흰 꿩’ 이라는 말이 있었다.

공은 이 '자(玆)' 자구를 특별히 띄어서 따로 써야 한다고 하고,

여러 대신들은 윗 구절에 붙이지 않고 어찌 띄어서 쓰는가 하였으나 공은 고집을 세웠다.

세종도 여러 대신의 말이 옳다고 하였더니, 공이 다시 아뢰기를,

“밭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야 되고, 베를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됩니다.

사명(詞命, 외교문서)에 대해서는 마땅히 노신(老臣)에게 맡겨야 할 것이니,

함부로 다른 말을 옳다 할 것이 아닙니다.” 하므로, 세종도 할 수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필원잡기》

 

 

 

 

 

 

 

   정인지(鄭麟趾)   

 

 

 정인지(鄭麟趾)는 자는 백휴(伯睢)이며, 호는 학역재(學易齋)요,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아버지는 현감 흥인(興仁)이다. 정도전(鄭道傳)에게 배웠고,

19세 때 태종 갑오에 문과 장원에 오르고, 정미에 중시(重試)에 장원이 되고,

네 번 공신이 되어 정난 좌익 익대 좌리 하동부원군(靖難佐翼翊戴佐理河東府院君)이다.

계유년에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곧 바로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고, 기로소에 들었으며,

무술년 83세에 죽었다.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 공은 천자(天資)가 호매(豪邁)하고 활달하였다.

일찍이 술이 취하여, 옛사람을 논의하다가 말하기를,

“나 같은 자가 만일 성인[孔子]의 문하에 놀았다면, 안자(顔子)ㆍ증자(曾子)까지는 미처 따를 수 없지만,

자하(子夏)ㆍ자유(子游)의 무리와 비교하는 것은 어떨는지 모른다.” 하였다.

 

예겸(倪謙)의 관반(館伴)이 되어서 주선하고 교제하는 것이 법도에 맞았고,

또 더불어 고금 일을 들추어 평론하며, 시로 수창(酬唱)하매, 예겸이 공경하고 중하게 여겼다.

일찍이 밤에 함께 앉아 있다가 예겸이 말하기를, “달이 어느 분야(分野)에 있는가?” 하니,

공이 답하기를, “동정(東井)에 있다.” 하매, 예겸이 탄복하였다.

공이 돌아갈 때에 예겸이 말하기를, “밤이 깊었으니, 어찌하나”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금오(李金吾)가 두렵다" 하매,

          [당(唐) 나라 두보(杜甫)가 이금오(李金吾)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시를 지었는데

           “술 취해 돌아가면 응당 통행금지에 걸릴텐데, 아차 이금오가 두렵구나"라 하여

           (천홍만자투춘풍 춘진도무일점홍, 醉歸應犯夜 可怕李金吾)

           금오란 직권(職權)을 조롱하였다.] 

예겸이 말하기를, “왕 옥여(玉汝)는 만나지 말라.” 하고,

서로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대 없는 글귀는 없다.” 하였다. 《필원잡기》


○ 세조가 일찍이 정인지의 집에 가서 곧장 침실로 들어가 정인지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공과 혼인을 맺어야 되겠소” 하였다. 정인지가 세조가 비상한 뜻이 있는 것을 알고 허락하였다.

 

큰 일을 거행하던 날, 정인지가 대궐에 들어가기 전에 가사를 처리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을 남기기를, “오늘 오후에 내가 사람을 보내어 성패를 통지할 테니 만일 소식이 없거든,

너희들은 내가 죽은 줄 알아라.” 하였는데, 오후에 큰 일이 성취되니,

과연 사람을 보내어 통지하면서, 입었던 속옷 한 가지를 보냈는데, 옷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축수편(逐睡篇)》


○ 공은 항상 가까이
유악(帷幄 : 장막, 여기서는 임금의 장막 안이라는 뜻)에서 모시어

신임과 사랑을 매우 받았다.

직책이 중추에 있는데도 특별히 명하여 정부에 들어가 국정을 의논하게 하니,

그때 사람들이 내상(內相)이라고 일렀다. 《대동운옥(大東韻玉)》


○ 세조 5년에 공이 영상으로 유가와 불가의 시비를 논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두어 달 동안 부처(付處)되었다가 소환되었다. 《조야첨재》


○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잔치하는데, 공이 임금 앞에 나가서 임금을 태상(太上)이라고 일컬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 경들과 같이 즐기는데, 현직의 임금을 태상이라고 일컬음은 무엇 때문인가?” 하매,

“조정에서 실언을 하였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 하고 귀양을 보냈다. 부여로 귀양갔다.


○ 일찍이, 공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당상에 앉아 있는데,

아전이 문부 수십 상자를 가지고 당 아래로 지나가므로 불러서 보니,

군사에 관련된 해유장(解由狀)으로 각 도에서 보낸 것인데, 여러 해 동안 미결상태로 내려온 것이었다.

공은 아전에게 명하여 분류하여 종류별로 한데 붙여서 각도 감사 수령을 시켜서 분간하여 시행하게 하니,

몇마디 말로 여러 해 밀렸던 중요 사무가 다 처리되었다. 《대동운옥》


○ 공이 예위(禮闈)를 맡으매, 시권(試券)이 산같이 쌓였는데,

손가락으로 틀린 것을 지적하여 추호도 틀림없이 잠깐동안에 등수를 매김이 백여 권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대동운옥》

 

 

 

 

 

 

 

  신숙주(申叔舟)   

 

 

 

신숙주(申叔舟)는 세조조의 상신(相臣)으로 등록되어 있다.

정유생이며 정묘년에 중시(重試)를 거쳐 무자년에 원상(院相)이 되었다.

신숙주는, 자는 범옹(泛翁)이며, 호는 보한당(保閒堂)이요, 또는 희현당(希賢堂)

본관은 고령(高靈)이요, 참판 장(檣)의 아들이다.

진사시의 초시ㆍ복시에 잇달아 장원하였고 생원시에서도 장원하였다.

세종 기미년 문과에 합격하였다.

정난 좌익 익대 좌리 사공신(靖難佐翼翊戴佐理四功臣)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에 봉해졌고

정축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을미년에 죽으니, 나이가 59세이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 공은 천성이 고명(高明)하고 마음을 관대하게 가졌다.

젊을 때부터 큰 뜻이 있어서 세세한 일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

늘 산속의 절에 머물러 글 읽기를 쉬지 않고, 집안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더니

이 때문에 학문이 크게 성취되었다. 어떠한 서사(書史)고 간에 한번 보면 즉시 기억하였다.

 
○ 과거에 오르자, 고서를 널리 연구하고자 하였으나, 집에 서적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러다가 집현전(集賢殿)에서 근무하게 되어 숙직할 때에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

평소에 보지 못했던 책을 가져다가 남김없이 모두 열람하였다.

어떤 때에는 동료 대신 숙직을 청하여 밤이 새도록 잠자지 않았다.

경루(更漏)가 삼경을 알리니 세종이 소관(小官)을 보내어 엿보니

단정히 앉아서 쉬지 않고 글을 읽고 있었다.

경루가 사경을 알리니 또 가서 보라 아니 역시 그러하였다. 곧 어의(御衣)를 하사하여 격려하였다.

《필원잡기》

 
○ 정통(正統) 계해년에 일본에 가는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을 뽑을 때에

두세 번이나 사람이 갈렸으나 마땅치 않아 마침내는 공이 의망되었다.

때마침 공이 오래 앓다가 일어난 뒤라 세종이 접견하고 이르기를,

“경이 병이 나서 여위었다고 들었는데 갈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병이 나았으니 어찌 사양하오리까.” 하고는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 이르니 시를 요청하는 자가 모여들었다.

공이 붓을 들면 곧 지었으되 시와 글씨가 모두 아름다웠으므로 뭇 사람이 탄복하였다.

 

공이 돌아올 때 본국인으로서 포로가 되었던 남녀를 찾아왔다.

오는 도중에 대마도(對馬島)를 떠나 미처 육지에 닿기 전에 구풍(颶風)이 별안간 크게 일어서

배가 거의 뒤집어질 정도에 이르자 여러 사람이 모두 당황하였으나,

공은 태연한 태도로 말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멀리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흉회를 넓혀야 한다.

이번에 큰 물을 건너서 해뜨는 땅을 구경하였으니 족히 장관(壯觀)이 될 것이오.

만일에 바람을 타서 금릉(金陵)에 닿는다면 중국 산천의 경개를 실컷 구경하게 될 것이니

이 역시 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포로되었다가 돌아오는 사람 중에 아이밴 여자 하나가 있었다.

뱃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신한 여자는 물길에서 꺼립니다. 그를 물에 던져서 재앙을 면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공이 굳이 불가하다 하면서 “사람을 죽여 삶을 구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못할 짓이다.”

하고는 몸으로 가로막으며 말렸다. 얼마 뒤에 태풍이 잠잠해지고 배가 순항하였다.

《동각잡기》 《필원잡기》 《추강집(秋江集)》

 
○ 그의 부인은 영상(領相) 윤자운(尹子雲)의 누이동생이었다.

공이 세종조에서 팔학사(八學士)에 참여하여 더욱이 성삼문(成三問)과 가장 친밀하였다.

병자의 난에 삼문 등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그날 밤 공이 집에 돌아오니 중문이 환히 열려 있고 윤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공이 방을 살펴보니 부인이 홀로 다락 위에 올라가서 두어 자 되는 베를 가지고

들보 밑에 앉아 있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당신이 평일에 성학사 등과 서로 형제와 다름없이 사이가 좋았습니다.

오늘 성학사 등의 옥사가 있었다 하니 당신도 반드시 그들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통지가 있기를 기다려서 자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당신이 살아서 돌아오셨습니다.”

하니 그가 무연히 부끄러하며 몸둘 바를 몰랐다. 《송와잡기(松窩雜記)》

 

○ 《식소록(識少錄)》에는 정난(靖難)하던 날이라 하였다.

윤부인이 병자년 정월에 죽었고 육신(六臣)의 옥사는 4월에 있었다.

 
○ 세조가 나라를 얻으니, 신숙주가 공신으로서

노산군(魯山君)의 왕비를 받아서 여종을 삼았다 하는데 이 말은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하였다.

《파수편(破睡篇)》

 
○ 노산의 왕비 송씨(宋氏)가 관비가 되니 숙주가 공신비(功臣婢)를 삼아서 자기가 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그의 청을 듣지 아니하고 얼마 후에 정미수(鄭眉壽)를 궁중에서 기르라 명하였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세조가 모든 정책을 경신하려 하니, 공이 오랫 동안 추요(樞要)를 맡아서 조용히 받들고

풍유(諷諭 : 풍자와 비유)로서 왕의 마음을 열어드리고 곧은 체하여 명성을 얻으려 않으니,

세조가 더욱 중히 대우하였다. 영상이 되고, 문형(文衡)을 맡아서

한 몸으로 국가의 안위를 맡은 지가 거의 20년이나 되었는데,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이 앞에 어지럽게 널려 있어도

좌수 우답(左酬右答)으로 거침없이 잘 처리하였다.

 

세조가 사방 국가에서 오는 객사(客使)를 접견할 때,

공이 미리 객사가 말할 것으로 예상되는 내용과 우리가 회답할 말을 적어서 세조에게 올렸다.

세조가 자리에 앉고 객사가 앞에 있으면 그가 명을 받아 양쪽을 오가면서

임금의 뜻을 전달하는데 주선할 즈음에 그 얼굴과 풍도가 볼 만 하였다.


○ 세조가 매양 이르기를,

“옛날 제 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에게, 한 고조(漢高祖)가 장량(張良)에게,

광무제(光武帝)가 등우(鄧禹)에게, 촉 선주(蜀先主)가 공명(孔明)에게,

당 태종(唐太宗)이 위징(魏徵)에 대한 것과 내가 숙주에게 대하는 것이 모두 똑같다.” 하였다.


○ 일찍이, 열네 차례의 과거를 맡아서 인재를 가장 많이 얻었는데

수많은 인재가 경상(卿相)에 이르렀다.


○ 공이 영의정이 되었을 때 구치관(具致寬)이 새로 우의정이 되었다.

세조가 두 정승을 급히 내전으로 불러서 이르기를,

“오늘 내 경들에게 물음이 있을테니, 능히 대답한다면 괜찮지만

대답하지 못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하매, 둘이 모두 절하며 사례하였다.

세조가, “신정승(申政丞)” 하고 부르매, 공이 곧 대답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나는 새로 임명된 신정승(新政丞)를 불렀다. 경이 대답을 잘못했도다.” 하고는,

커다란 잔으로 벌주를 내렸다.

또, “구정승(舊政丞)” 하고 불르니 구치관이 곧 대답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난 옛[舊]정승을 불렀으니 경이 대답을 잘못했네.” 하고는 커다란 잔으로 벌주를 내렸다.

 

또, “구정승(具政丞)” 하고 불렀더니 숙주가 곧 대답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난 성(姓)을 불렀는데 경이 잘못 대답하였소.” 하고는 벌주를 주었다.

 

또, “신정승(申政丞)” 하고 불러도 신숙주와 구치관 모두 대답하지 않고

“구정승(具政丞)” 하고 불러도 구치관과 신숙주가 모두 대답하지 않으니

세조가 이르기를, “임금이 불러도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니라.” 하고는

역시 벌을 주었다. 이렇게 종일토록 벌주를 마셔서 심히 취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필원잡기》

 
○ 공이 한(漢)ㆍ왜(倭)ㆍ몽고(蒙古)ㆍ여진(女眞) 등의 말에 능통했으므로

때로는 통역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뜻을 통하였다.

뒤에 공이 손수 모든 나라의 말을 번역하여 바쳤는데

통역들이 이에 힘입어서 스승에게 일부러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공이 남으로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고, 북으로는 야인을 쳤는데,

지나는 곳마다 산천 요해지를 기록하고 지도를 만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일본의 관제(官制)ㆍ풍속(風俗)과 그 대신(大臣)의 족계(族系)와

여러 섬나라 왜추(倭酋) 족계들의 강약을 기록하여 바쳤다.

세조가 이내 명하여 우리나라 팔도의 지리와 모든 나라를 아울러 지도를 만들게 하였다.

그러자 공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지어서 드리니

세조가 보고 가상하게 여겨서 상을 후히 내렸다.


○ 성종(成宗) 초년에 공이 영상으로 있다가 사직하였더니

대비(大妃) 정희왕후(貞熹王后) 가 전교를 내리기를,

“세조께서 매양 경을 위징(魏徵)이라 칭찬하셨는데, 이제 그 일을 잊었는가.

어째서 사면하려 하는가.” 하였고,

성종은 전교하기를,

“내, 대비가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세조께서 매양 예종(睿宗)에게 이르시기를,

‘내, 아무개와 더불어 큰 법을 정했으니

너희들에게 이르러서는 반드시 아무개 등과 태평을 누리리라.’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 내 나이가 어리고 학문도 없는데 경이 어찌 사직을 하려 하십니까.” 하였다.


○ 공이 젊었을 때에 성삼문ㆍ박팽년(朴彭年) 제공(諸公)과 더불어 명성이 같아서

함께 문종(文宗)의 탁고(託孤)의 유언을 받았다.

세조가 위에 오르매, 벼슬이 상상(上相)에 이르고 나이가 59세로 임종에 임하자

한숨 쉬며 탄식하기를, “인생이 마침내 여기에서 그치고 마는가.” 하였으니,

대개 후회하는 마음이 싹터서 그러하였다 한다. 《해동악부(海東樂府)》

 
○ 공의 아들 신정(申瀞)이 나이가 서른이 못되어서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일찍이 이조 참판으로서 좌리 공신(佐理功臣)이 되었으며 노비를 받은 것이 이미 수차에 달했다.

고령현(高靈縣)에 사노(寺奴)가 있었는데 부호로서 한 도(道)에 으뜸이었다.

그를 자기의 종으로 얻어내려 하여도 계교가 없었으므로

어보(御寶)를 위조하여 공문을 발송하여 독책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옥에 갇혔다.

성종이 그 아버지의 공훈을 생각하여 그 죄를 용서하려 하여 일찍이 거둥하는 길에

금부(禁府) 앞에서, 연을 멈추고 가두었던 정을 가마 앞에 불러서 간곡히 이르기를,

“네가 훌륭한 훈신의 아들로서 이제 죽을 죄를 지었으니 내 심히 측은하게 여긴다.

네가 만일 실상을 자백하고 허물을 뉘우친다면

이제 곧 너를 석방하여 네 아버지의 훈로를 갚으리라.” 하다.

그러나 신정이 어렸을 때부터 귀하게 컸으므로 몹시 교만하여

말이나 얼굴빛에 격분한 빛을 띠면서 한결같이 사실을 굳이 은폐하였다.

 

성종이 이르기를, “미욱한 고집쟁이다.” 하고는 명하여 도로 옥에 내리게 하고

금부로 하여금 이일에 대하여 의견을 올리라 하니 판부사(判府事) 강희맹(姜希孟)이 아뢰기를,

“신정은 재상의 신분으로 어보를 위조하였으니, 법리상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하니

성종이 곧 윤허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閑話)》

 
○ 공이 강원ㆍ함길 도체찰사로서 야인을 토벌하러 갈 때 하직하니

세조가 편전에서 인견하고 담장 밑에 심어져 있는 넝쿨박을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열매가 잘 맺을까.” 하니 공이 아뢰기를, “무성하지도 못한 채 철이 벌써 지났으니,

신의 생각에는 열매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우연히 열매 하나가 맺혀있는 것을 보고 쪼개어서 술잔을 만들고

어필로 시 한 장을 술잔 가운데에다 쓰고,

경은 비록 내 말에 웃었으나    / 卿雖笑我
바가지는 이내 이루어졌도다   / 我瓢旣成
쪼개어서 잔을 만들어            / 剖以爲杯
그지 없는 정을 보이노라        / 以示至情

대신을 시켜 술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고

이내 도공에게 명하여 그 표주박의 꼴을 본떠서 사기잔을 만들어

어제시를 새겨서 항상 내전 곡연(曲宴)에서 쓰게 하였다. 《명신록》

 

 

 

 

 

 

 

 

 

 

     정창손(鄭昌孫) 

 

 

정창손(鄭昌孫)은, 자는 효중(孝仲)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요, 판서 흠지(欽之)의 아들이다.

갑손(甲孫)의 아우이다. 세종 계묘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병오년 문과에 합격하여

좌익익대좌리공신(佐翼翊戴佐理功臣)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사위 김질(金礩)과 더불어 고변(告變)하고 병자년에 정승이 되었다.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정미년에 죽었는데 나이는 86세이다.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연산군(燕山君) 갑자년 사화(士禍)에 화가 무덤에까지 미쳤다.

 
○ 공은 널리 알고 잘 기억하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문종조에 대사헌이 되어서 일을 논함에 솔직하여 꺼리는 것이 없으니

권귀인(權貴人)들이 모두 꺼리기를,

“예전에 남을 잘 공경하던 정중승(鄭中丞)이 이제 다시 헌장(憲長)이 되었구나.” 하였다.

 《사가집》 <비문>

 
○ 정난(靖難)하던 날에 이조판서에 뽑혔다.

무인에 상제가 세조가 장차 평안도에 거둥하려 하면서 그를 기복시켜 영상을 삼았으나,

얼마 아니 되어 거둥을 정지하였다. 임오에 일로 말미암아 여산(礪山)으로 귀양갔다.

 
○ 임금(단종)이 깊이 신임하여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경을 숙부나 다름 없이 공경하오.” 하고는 공이 잔을 드릴 때면

임금이 반드시 얼굴빛을 고치고 어좌에서 내려 왔다.

공은 술을 마시지 못하므로 술자리에 반드시 단술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