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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이나 귀양을 간 조선의 코끼리

Gijuzzang Dream 2008. 10. 1. 13:01

 

 

 

 

두 번이나 귀양을 간 조선의 코끼리

연쇄살인범 코끼리의 최후

 

코의 옛말은 ‘고’였다.

감기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인 ‘고뿔’은 코에 불이 났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한편 코끼리의 옛말은 ‘고키리’였다.

고에 히읗 종성이 붙은 ‘고ㅎ기리’가 변한 것으로서,

이는 '고'에 길다의 ‘길’과 어미 ‘이’가 붙여진 말이다.

즉, ‘코가 긴 짐승’이라는 뜻이 바로 코끼리이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코끼리의 서식지가 아니다.

요즘에야 동물원에 가거나 그림책에서 수없이 코끼리를 대할 수 있지만,

과거 우리 조상들은 코끼리의 코가 그처럼 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아시아 코끼리 

먼 이국의 동물로만 여겨졌던 코끼리가 우리나라에 그 모습을 처음 선보인 것은 1411년(태종 11) 2월이었다.

일본 국왕이던 원의지(源義持)가 사신을 보내 태종에게 코끼리를 선물로 바쳤던 것이다.

일본 역시 코끼리가 서식하는 곳이 아닌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그 코끼리는 당시 항국(港國 : 현재의 인도네시아)이라는 나라의 왕이 일본과 국교를 맺기 위해 일본 국왕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일본의 우에노 동물원장이 쓴 책에 의하면 “1408년 6월 22일 코끼리 한 마리가 일본으로 들어와 조선 국왕에게 바쳐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항국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일본 국왕이 살짝 포장지만 바꿔서 3년 후 다시 조선에 선물한 셈이다. 그런 내막을 알 길이 없었던 태종은 기꺼이 그 희한한 선물을 받았고,

궁중의 말과 가마, 목장 등을 관장하던 사복시에서 맡아 기르라는 명을 내렸다.

인도네시아에서 보내온 코끼리라면 당연히 아시아 코끼리인데,

대체로 아시아 코끼리는 몸길이가 약 3미터에 이르고, 몸무게는 약 3톤에 육박한다.

또 아프리카 코끼리에 비해 귀가 작고 상아도 훨씬 짧은 편이다.

이에 비해 아프리카 코끼리는 몸길이 약 3.5미터에 몸무게는 4~5톤에 이를 만큼 몸집이 훨씬 크다.

아프리카 코끼리. 

조선에 들어온 코끼리는 당연히 어릴 때부터 사람에게 길들여진 코끼리였다. 그런데 길들여진 코끼리의 경우 가격이 매우 비싸서 코끼리의 왕국인 인도에서도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끼리를 소유할 정도가 되려면 귀족 중에서도 재산이 아주 많은 귀족이어야 했다. 사료비 등 코끼리를 사육하는 데 드는 비용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인도에서는 왕이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귀족이 있을 경우 코끼리를 선물했다고 한다.

왕이 하사한 코끼리이니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없고 잘 보살펴야 하는데, 막대한 사육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안 될 경우 패가망신까지 각오해야 했으니 말이다.

더운 열대 지방의 고향을 떠나 일본을 거쳐 조선이라는 낯선 땅까지 옮겨온 코끼리는 처음엔 그런대로 대접을 잘 받았다.

임금이 타는 말인 어승마들 사이에 섞여서 하루에 콩 네댓 말씩과 여물을 먹으며 아쉬움 없이 지냈다.

그런데 일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다음해인 1412년 12월 10일 공조전서를 지낸 전직 관리 이우(李瑀)는 코끼리를 구경하기 위해

사복시에 들어갔다. 직접 보니 참 희한한 동물이었다.

소 같은 몸통에 나귀 같은 꼬리가 달렸고, 거기다 귀는 어찌나 큰지 구름장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또 애벌레의 몸통처럼 구부려졌다 펴지는 커다란 코는 정말 가관이었다.
이우는 그 모습을 보며 침을 몇 번이나 퉤퉤 뱉으며 한껏 비웃었다.

그러자 멀뚱멀뚱 서 있던 코끼리가 갑자기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이우는 코끼리의 그 육중한 발에 짓밟혀 죽고 말았다.

정3품의 전직 관리를 죽인 코끼리에 대한 판결은

1년이나 지난 1413년(태종 13) 11월 5일에 내려졌다.

병조판서 유정현이 임금 앞으로 나아가 전라도 순천의 장도(獐島)로 코끼리를 귀양 보내자고 아뢰니,

태종은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

 

새끼 코끼리는

맹수들의 사냥 표적이 된다. 

야생 상태의 코끼리는 나이 많은 암컷을 우두머리로 해서 10마리 정도 무리지어 사는 모계중심사회 생활을 한다.

암컷 우두머리는 새끼는 물론 무리의 구성원들을 모두 긴 코로 어루만지는 등 항상 애정을 표현하며, 상처를 입거나 병든 코끼리의 경우에도 따뜻하게 보살핀다.
서로에 대한 이런 세심한 보살핌 덕분인지 코끼리는 큰 몸집에 비해 매우 온순한 성미를 지니고 있다.

 

사실 코끼리에 대적할 만한 포식동물은 없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도 코끼리 앞에서는 어쩌지 못한다. 코끼리의 우두머리는 사자나 호랑이가 눈에 띌 경우 무리 중의 수컷들과 함께 긴 코와 육중한 몸으로 위협을 가해 그들을 멀리 쫓아버린다.
하지만 지상 최대의 몸집을 지닌 코끼리라고 해서 완전한 안전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새끼 코끼리의 경우 맹수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1950년대 미얀마의 새끼 코끼리 중 1/4이 호랑이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보고도 있다.

다 자란 힘센 코끼리라 할지라도 결코 난공불락은 아니다.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있을 경우 코뿔소나 물소의 뿔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도 하고,

오랫동안 굶주린 사자 떼나 하이에나 떼에게 희생당할 수도 있다.

또 악어나 왕코브라 같은 동물에게 코를 물려 죽는 코끼리도 종종 있다.

야생에서 코끼리는 암컷을

우두머리로 하여 무리를 지어 산다. 

이와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코끼리는 상대방을 공격할 필요가 없는 유순한 초식동물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먹이인 숲이 파괴될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는 인간들의 벌목으로 숲이 야생 코끼리들이 마을을 습격해 인간을 공격하고 곡식을 약탈해간 사건이 있었다.

또 하나, 이우를 밟아 죽인 코끼리의 행태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은 바로 코끼리의 청력이다.

코끼리는 초저음파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인간들이 들을 수 있는 낮은 음의 한계가 약 30헤르츠인데 비해 코끼리는 무려 12헤르츠의 낮은 음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때문에 바닷물이 움직이는 소리나 해저의 지진 소리 등 자연이 내는 초저음파도 들을 수 있다.

2004년 약 30만 명의 실종자와 사상자를 낸 동남아의 지진해일 때도

태국에서 사육 중이던 코끼리들이 모두 산으로 달아나는 이상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다.

사복시의 코끼리가 갑자기 이우를 공격하게 된 이유도

혹시 이처럼 소리에 대해 매우 민감한 특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혀를 끌끌 차며 자신을 비웃는

이우의 목소리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공격 본능이 터져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코끼리의 지능지수는 50~70 정도로서,

인간으로 치면 2~3살 난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능지수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일 뿐,

실제로 코끼리들이 얼마만한 지적 능력을 지녔는지는 알 수가 없다.

2006년 미국의 야생동물보호협회 연구팀은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에서 살고 있는 해피라는 이름의 아시아 코끼리 앞에 거울을 비춰주었다.

그러자 해피는 긴 코로 자신의 이마를 자꾸 건드렸다.
왜냐하면 해피의 이마에는 연구팀이 미리 그려 넣은 이상한 표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표시는 해피의 눈 위에 그려져 있어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거울을 통해서는 볼 수 있으므로 해피는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이다.

이는 해피가 거울에 비친 상을 다른 개체의 코끼리가 아니라 자신임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코끼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모습을 인식할 만큼 영리하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자기 자신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동물은 침팬지와 고릴라, 오랑우탄 같은 유인원과 돌고래뿐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인간의 경우에도 생후 30개월 이하의 유아들은 거울 속 모습이 자신임을 알지 못한다.

그럼 혹시 동물원에서 오래 산 해피의 경우 특별히 똑똑해진 것은 아닐까.

2007년 일본 도쿄대학의 연구팀이 발표한 타이의 야생 지역에 방목되어 있는 코끼리들에 대한 실험에서도 코끼리의 자기 인식능력이 입증되었다.

장난감에 익숙해지게 훈련시킨 다음 코끼리 앞에 거울을 비춰준 결과,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머리 위의 장난감으로 한번에 코를 뻗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밖에도 코끼리의 지능과 관련된 보고는 무척 많다.

자기 새끼를 학대한 사육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가

10년 후에 그 사육사에게 복수를 했다는 어미 코끼리의 사례가 보고되는가 하면,

케냐의 코끼리연구소에서는 어릴 때 어떤 고통을 당한 새끼 코끼리들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경험하게 되어

후에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문제 코끼리로 성장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전 공조전서 이우를 살해해 전라도 장도로 귀양살이 간 조선의 코끼리도 꽤나 영리했던 모양이다.

그 코끼리는 귀양 간 지 6개월 만에 태종의 특별 사면령을 받아 유배지에서 풀려나게 된다.

코끼리는 과연 태종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인 것일까.

1414년 5월 3일 태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그 비결이 나와 있다.

전라도 관찰사는 태종에게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 장도에 방목하는데, 수초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라고 보고했다.

즉, 코끼리는 유배지의 맛없는 먹이를 거부하며,

만나는 사람들한테 애절하게 읍소하는 전략을 사용했던 셈이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코끼리를 불쌍히 여겨 육지로 돌아오게 해 처음과 같이 기르게 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풀려난 코끼리가 한양의 사복시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유배지의 관할지역인 전라도 내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숙식을 해결하는

처량한 유랑자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졸지에 코끼리를 떠안게 된 전라도 관찰사는 도내의 여러 마을에 돌려가면서 먹여 기르게 했다.

하지만 코끼리가 먹어대는 엄청난 사료비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유배지에서 풀려난 지 6년 후인 1420년(세종 2) 12월 28일 전라도 관찰사는

중앙에 보고하여 코끼리를 먹여 기르느라 도내 백성들의 괴로움이 크니

충청도와 경상도를 포함하여 순번제로 코끼리를 사육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상왕인 태종은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명했으며,

그날 이후부터 코끼리는 충청도와 경상도까지 출장 사육을 떠나는 신세가 되었다.

자신의 그런 신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코끼리는 출장 사육을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또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1421년 3월 충청도 공주에 가 있던 코끼리는 자신을 보살피는 종을 발로 차서 죽여 버렸다.

전직 관리인 이우의 살해사건은 우연한 사고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코끼리가 두 번씩이나 그런 우연한 사고를 일으킬 수 있을까.

만일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면 이 코끼리에게 혹시 연쇄살인범의 피라도 흐르는 것일까.

코끼리의 눈과 귀 사이의 측두골에서 분비되는 머스트. 

앞에서 코끼리가 소음에 유난히 민감하다고 지적했지만,

그로 인해 인간을 공격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그럼 이 코끼리의 연쇄살인 행각을 설명할 수 있는 원인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수코끼리가 발정했을 때 분비하는 머스트(musth)다.

코끼리의 눈과 귀 사이에 있는 측두골에서 분비되는 머스트는 오일성의 분비물로서 몹시 역겨운 냄새를 낸다.

머스트가 분비될 때 코끼리는 매우 난폭해진다.

그런데 머스트는 반드시 발정기와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 나온다고도 하고 애정의 표시라는 설도 있는 등 머스트에 관한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아프리카 코끼리보다 아시아 코끼리에서 더 빈번하게 발생하고,

특히 길들여져 가축화된 코끼리에서 더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는 머스트 때문에 코끼리가 난폭해져 사육사를 살해하는 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때문에 인도에서는 머스트를 코끼리들이 걸리는 일종의 정신병으로 생각하고,

머스트를 분비하는 코끼리들은 굵은 쇠사슬로 묶어놓곤 한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조선의 코끼리가 두 번씩이나 연쇄살인을 저지른 원인도 머스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코끼리 사육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터에 머스트가 분비되어 공격성이 높아져 있는 것을 모르고

괜히 코끼리를 자극하여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우가 코끼리를 향해 침을 뱉은 것도 머스트의 고약한 냄새 때문인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럼 두 번씩이나 살인을 저지른 이 문제 코끼리에 대해 세종은 어떤 처분을 내렸을까.

조선시대의 형벌에는 태형과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의 5형이 있었다.

태형과 장형은 곤장으로 때리는 형벌이고, 도형은 강제노동, 유형은 귀양을 보내는 형벌이다.

처음 살인을 저질렀을 때 유형을 받았으니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른 코끼리는 당연히 최고 형벌인 사형감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 코끼리에 대해 물과 풀이 좋은 섬을 가려서 유배시키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연쇄살인을 저지른 위험한 코끼리를 왜 끝내 처형시키지 않았던 걸까.

그 이유는 이 코끼리가 보통 신분이 아닌, 일본 국왕으로부터 선물 받은 특별한 동물이었다는 점이다.

왕건이 낙타를 묶어두었다는 개성의

약대다리. 지금은 야다리로 불린다. 

당시에는 외국으로부터 받은 희귀한 선물을 소홀히 대할 경우 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수도 있었다.

실제로 고려 때 그런 일로 인해 전쟁으로까지 확대된 사건이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거란이 낙타 50마리를 선물로 보내오자 사신을 섬으로 유배시키고 낙타는 개성의 만부교라는 다리에 묶어두어 굶겨 죽였다.

거란이 맹약을 어기고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를 멸망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를 빌미 삼아 결국 거란은 서기 993년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해 고려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그때 왕건이 낙타를 묶어둔 만부교는 그 이후 ‘탁타교(橐駝橋)’로 불리게 됐다.

지금은 ‘약대(낙타를 일컫는 우리 고유어) 다리’라는 이름으로 변해, 개성의 명승지로 남아 있다.

세종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 다시 섬으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된 코끼리는

그 이후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만일 코끼리가 귀양을 살다 죽었다면 한번쯤 임금에게 보고되었을 터인데 그런 기록도 찾을 수 없다.

또 코끼리가 죽었을 시 그 커다란 시신의 처리가 수월치 않았을 텐데 그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섬들 중에 혹시 코끼리와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면,

아마 그 곳이 조선 최초 코끼리가 여생을 끝마친 섬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 이야기 과학 실록 (12) 2008년 07월 03일2008년 0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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