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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화약기술 이야기

Gijuzzang Dream 2008. 9. 26. 01:01

 

 

 

 

 중국사신도 깜짝 놀란, 조선의 화약 기술 이야기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謀)가 연출하여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의 주제는

 ‘중국의 4대 발명품’이었다.

‘종이’를 상징하는 초대형 두루마리가 스타디움에 펼쳐지고,

거기서 상형문자로 된 수많은 활자가 솟아오르며 ‘인쇄’를 알리는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또 명나라 정화 장군이 개척한 바다 실크로드를 ‘나침반’과 함께 무용으로 표현해내는 장면은

 가장 중국적인 아름다움으로 칭송받을 만했다. 그 중 개막식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천둥 같은 소리로 29개 지역에서 차례대로 베이징의 밤하늘을 수놓은 폭죽은

중국이 가장 내세우는 ‘화약’의 저력을 잘 보여주었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때의 화려한 불꽃놀이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화약은 예로부터 국방력과 직결되는 물품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화약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중국에서 화약을 도입했던 조선의 화약 제조기술 역시 수준급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화약 기술은 중국 사신도 깜짝 놀랄

정도였으며, 세종 때는 오히려 중국보다 낫다고 자부할 만한 경지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진주대첩, 행주대첩, 한산도대첩의 ‘3대 대첩’ 역시 강력한 화약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시민 장군이 지휘하는 3,800명의 조선군과 2만명의 왜군이 맞선 진주대첩은

수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던 왜군에 대해 성문을 굳게 닫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진 끝에 거둔 승리였다.

2,300명의 군사로 왜군 3만여 명을 9차례에 걸쳐 격퇴한 행주대첩 역시 아낙네들의 행주치마보다는,

‘뛰어난 화차가 있었기에 승전보를 남길 수 있었다’고 권율 장군이 스스로 밝힌 바 있다.

한산도대첩을 비롯한 이순신 장군의 활약도 막강한 대형 화약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총 같은 개인 화약 무기의 성능은 왜군이 앞섰지만, 해전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형 대포의 성능은

조선 수군이 훨씬 앞서 있었다. 따라서 일본 군선들은 조선의 판옥선과 거북선 근처에 감히 접근도

해보지 못한 채 격침당하기 일쑤였다.

화약의 시초는 중국의 연단술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연단술이란 불로장생을 위해 단약(丹藥)을 조제하여 복용하던 고대 중국의 신설 도술이다.

과학과는 거리가 먼 신비 사상이기는 했지만,

서양의 연금술처럼 화학과 약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 또한 적지 않았다.

연단술 관련 서적 중 화약의 재료가 정확히 기재되어 있는 서적은

한무제 때 지어진 ‘회남자(淮南子)’이다.

이 책을 보면 “초석과 황, 탄(炭)을 섞어 만든 진흙에서 금이 생성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 언급한 초석과 황, 목탄이 바로 흑색 화약의 성분과 일치한다.

초석과 황, 목탄은 예로부터 병을 치료하는 약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화약(火藥)은 알고 보면 ‘불이 붙는 약’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화약의 기원과 관련이 매우 깊다.

이후 후한의 순제 때 화약의 성능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단약을 만드는 어떤 방사의 집에 두자춘이 방문했는데 마침 방사가 외출 중이었다.

두자춘은 방사를 기다리며 단약로 옆에서 졸았는데, 갑자기 로에서 큰 불이 일어나

화염이 지붕까지 닿으며 집이 타버렸다고 한다.

이 일화는 ‘태평광기’라는 설화집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승리는

강력한 화약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일화로 미루어 보아 초석과 황, 목탄에 대한 연소 성능은 이미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폭발을 일으키는 정확한 배합 비율은 알지 못했다. 그러다 당나라 때부터 점차 폭발성을 갖는 배합 비율의 조성에 관심을 갖게 되고, 당나라 말기인 9세기 무렵부터 흑색 화약을 군사적으로 응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으로부터 화약이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시기는 고려 말기 무렵이었다.

당시 고려는 왜구들의 노략질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최무선 장군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서 화약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중국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무조건 만나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마침 이원이라는 중국 강남의 상인이 화약 제조법을 대강 안다고 하여

최무선은 그를 자기 집에 데려다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극진히 대접하여 요령을 알아냈다.

화약의 재료 중 목탄과 황은 쉽사리 구할 수 있는 물품이었다.

그러나 초산(질산칼륨 ; 염초라고도 함)은 여러 화학공정을 거쳐야 만들 수 있으므로

당시의 기술로는 제조가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화약의 제조 중 가장 어려운 것이

염초를 만드는 기술이었고, 최무선이 이원으로부터 배운 기술도 염초 제조법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염초의 제조 비법을 터득한 최무선은 조정에서 자신이 만든 화약으로

수차례 시험을 보인 끝에 1377년 화약 및 화기의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의 설치를 이끌어냈다.

그로부터 3년 후 왜구들이 탄 300여 척의 배가 전라도 진포에 침입했을 때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포로 그 배를 모두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최무선은 자신만의 화약 제조비법을 적은 책 ‘화약수련법’을 저술하여

아들인 최해산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화약수련법’은 그 뒤로 전해지지 않아,

최무선이 염초를 제작한 비법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염초는 높은 온도에서 열분해하면서 산소를 발생시켜, 황과 목탄이 계속 산화할 수 있도록 만든다.

따라서 염초와 황ㆍ목탄의 구성비가 75 :15 :10 정도 되어야

화약은 빠른 속도로 불꽃과 연기를 내면서 연소ㆍ폭발하게 된다.

현재 소시지나 햄 등 식육가공품의 색을 보존하는 식품첨가물로 많이 사용되는 질산칼륨(염초)은

염화칼륨과 질산나트륨을 반응시키거나 탄산칼륨ㆍ수산화칼륨을 질산에 녹여 만들기도 한다.

영천시 금호읍에 세워진 최무선 장군의 기념비 

 

그러나 화학 지식이 모자랐던 당시에는 자연적으로 질소화합물이 포함된 흙을 찾아내 분뇨 속의 질산암모늄과 재의 탄산칼슘을 반응시켜 질산칼륨을 만들어내야 했다. 때문에 염초의 제조는 원료가 되는 흙의 조달이 가장 중요했다.

 

부엌 아궁이나 흙으로 만든 담벼락ㆍ화장실 주변의 흙이 대체로 재료로써 적합했는데, 그 중 가장 적절한 것이 집의 마루 밑 흙이었다.

조선시대 들어서 화기의 규격화와 더불어 독자적인 화기 기술을 선보이기 시작한 세종은 화약과 화약무기 개발에 일대 전기를 마련한 임금이다. 따라서 세종은 염초의 확보에 특히 열을 올렸는데, 그로 인해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도 많았던 모양이다.

1418년 12월 10일자의 ‘세종실록’을 보면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박은이 아뢰기를, ‘염초(焰硝)를 만들기 위하여 흙을 취하는 자가 평민을 침요(侵擾)하니,

이를 정지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부득이하다면 다만 원관(院館)에서만 취하고 백성을 소란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여기서 흙을 취하는 자란 염초약장을 말한다.

염초약장이 염초 제조에 필요한 흙을 채취하기 위해 민가에 들어가 마루 밑을 파헤쳐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말을 듣고,

세종은 원관, 즉 관아 및 정부 건물에서만 흙을 채취하라는 명을 내리고 있다.

1448년(세종 30) 2월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생원 김유손이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틀 전에 염초약장이 흙을 판다고 핑계하고 문묘에 들어와 눈을 부라리고 팔뚝을 걷고서

관노를 구타하므로 신 등이 대의로써 몇 번이나 타일러도 들으려 하지 않고

서리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섬돌 위에 걸터앉아 여러 생도들을 거만스럽게 꾸짖으니,

그 방자하고 독살스러움을 가히 말할 수 없는 것이오라 신 등이 깊이 유감스럽습니다.

어찌 장인의 천한 신분으로 감히 함부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법대로 엄히 다스리소서.”

염초를 만드는 장인인 염초약장이 염초토를 채취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행패를 부린 사실을

낱낱이 고하는 상소문이다. 민가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관아 및 정부 건물에서만 염초토를

채취하라는 명을 내린 이후 나타난 또 다른 부작용 사례에 해당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일개 장인이 양반 앞에서 행패를 부릴 만큼

당시 염초토 채취는 중대한 국가 사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의 화성행차시 행해졌던 불꽃놀이를 그린 그림 

염초토를 채취하던 장인의 위세는

뇌물을 받아 챙기는 부패행위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1450년(문종 즉위년) 10월 10일 ‘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문경현감 조추가 염토약장의 부정부패 사례에 대해 상소문을 올린 내용이 있다.

그에 의하면 장인이 뇌물을 받은 지역에서는 염초토가 있어도 없다고 하며 조금만 채취하고, 뇌물을 주지 않는 곳에서는 염초토가 없어도 있다고

하면서 잡토까지 파내 주민들을 피곤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작용은 있었지만
조정의 염초 확보에 대한 집념으로

조선의 화약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외국에서 온 사신들의 반응을 보면 조선의 화약기술 수준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399년(정종 1) 일본국의 사신들에게 군기감에서 불꽃놀이를 구경시켜 주었다.

그러자 사신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신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화약의 종주국으로 자부하는 중국 사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419년(세종 1) 1월 21일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이 중국에서 온 유천과 황엄이라는 사신을

수강궁으로 초청했다.

그러나 유천은 만약 상왕께서 나를 보시려면 자신의 처소로 오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이에 태종은 중국 사신들의 처소인 태평관에 나아가 위로연을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중국 사신들은 화포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는데,

막상 태종과 함께 화붕에서 터지는 불꽃을 구경한 사신들의 반응이 매우 흥미롭다.

‘유천은 재미있게 보다가 놀라서 들어갔다 다시 나오기를 두 번이나 했고,

황엄은 놀라지 않는 체하나 낯빛이 약간 흔들렸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불꽃놀이가 끝난 후 태종이 사신에게 안장을 갖춘 말을 선사하자 황엄은 받았지만

유천은 끝내 받지 않았다.

그로부터 12년 후 조선은 중국 사신에게 화붕 놀이를 아예 보여주지 않을 만큼

중국보다 강력한 화약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1431년(세종 13) 중국 사신이 오자 조정은 이번에도 화붕 놀이를 보여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그때 허조가 앞에 나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화약이 한정이 있는데 한 번의 불꽃놀이에 허비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더구나 본국의 불을 쏘는 것의 맹렬함이 중국보다도 나으니 사신에게 이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저들이 비록 청하여도 마땅히 이를 보이지 마십시오.”

임진왜란 때 선조는 바닷물을 졸여서

염초를 만드는 방법을

중국에서 배워오라는 어명을 내렸다 

화약기술의 유출에 대한 이 같은 우려는 특히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에 대해서 두드러지게 표출되곤 했다.

 

1426년(세종 8) 병조에서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강원도에서 바치는 염초는 영동 연해의 각 고을에서 구워 만드는 것이므로 사람마다 그 기술을 전해 배웠는데, 만약 간사한 백성이나 주인을

배반한 종들이 울릉도나 대마도 등지로 도망가서 화약 만드는 비술을 왜인들에게 가르치지나 않을지 염려된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대해 세종은 그때 이후로 연해의 각 수령들로 하여금 화약을 구워 만들지 못하게 했다.

성종 때에는 화약기술의 유출에 대한 우려로

염초약장을 일본으로 가지 못하게 막는 모습도 보인다.

 

일본통신사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성종이 화약을 합성할 줄 아는 염초약장을 데려가게 하자,

강희맹이 나서서 염초약장이 일본에 가서 화약 제조술을 혹시 누설할지도 모르니 보내지 말 것을

간청한다. 그러자 성종은 총통군 중에서 화약을 모르는 자를 대신해 보내라고 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중국에서 얻은 화약을 속이 갑자기 아플 때 먹는 약으로 여길 만큼

화약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조선의 화약 제조 기술은 중종 말기 무렵 일본에 흘러들어 가고 말았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들이 대거 침략해온 임진왜란 때에는

이에 맞서기 위해 더 많은 양의 화약이 필요했다.

그러나 화약의 주재료인 염초토의 채취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화약의 증산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자 '중국에서 바닷물을 졸여서 염초를 만든다'는 말을 들은 선조가

그 비법을 배워오는 자에게 큰 포상을 내린다는 어명을 내렸다.

그 당시 전쟁으로 인해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었고 무역을 하기도 어려워

염초를 구하기가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때문에 선조는 매번 바닷물을 달여서 염초 만드는 법을 배워올 것을 격려했는데,

1595년(선조 28) 5월 마침내 낭보가 날아들었다.

서천에 사는 임몽이라는 자가 여러 가지 꾀를 내 시험하다가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훈련도감에서 즉시 관리를 보내 사실 여부를 확인했는데,

임몽은 5일 만에 바다흙으로 염초 1근을 만들어 보였다.

임몽이 다른 염초장과 더불어 염초를 계속 만들어내자, 1개월 후 선조는

군보(軍保 ; 현역으로 복무하는 대신 농작을 하거나 군포를 바치며 군역 의무를 하던 사람)였던

임몽에게 문관 6품의 벼슬을 내렸다.

 

김지남이 화약 제조 기술에 대해 저술한 '신전자초방' 

그 후에도 조선의 화약 제조 기술은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1638년(인조 13)에 이서가 저술한 ‘신전자취염초방’과

1698년(숙종 24)에 역관 김지남이 저술한 ‘신전자초방’이

그 뚜렷한 증거들이다.

병조판서였던 이서는 군관 성근의 연구를 토대로

저서에서 15개의 공정을 기술했다.

성근의 초석 제조방법은 가마솥과 마룻바닥ㆍ담벼락ㆍ온돌 밑의 흙을 긁어내어 재와 오줌을 섞고, 말똥을 덮어서 마르면

불로 태운 다음 다시 물을 붓고 그 용액을 가마솥에 넣어

끓이기를 세 번 거듭하여 초석을 결정시키는 것이다.

역관이었던 김지남은 사신과 함께 중국을 드나들면서 목숨을 걸고 중국의 화약제조법을 연구하여 새롭고도 효율적인 방법을 완성했다.

그가 지은 ‘신전자초방’은 화약 제조 과정을 10개의 공정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특정한 흙뿐만 아니라 길바닥의 흙을 이용할 수 있어 초석의 결정 방법이 간편해졌으며,

염초와 황ㆍ목탄의 조성비도 현재의 비율과 비슷할 만큼 새롭게 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게 만든 화약은 땅 밑에 10년을 두어도 습기가 차지 않을 만큼 질이 좋았고,

흙과 재도 예전의 1/3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정치적인 혼란으로 인한 조정의 무관심과 계속되는 염초의 조달 곤란 등으로

더 이상 화약의 근대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2008년 09월 18일 / 09월 25일, 인터넷 과학신문, 과학 실록 (22)

이성규 기자 | 2noel@paran.com

저작권자 ⓒ ScienceTimes

 

 

 

 

 

화약의 탄생지 중국에서는

‘전쟁 코드’인 포화보다 ‘축제 코드’ 폭죽이 더 친숙

 

Q :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는 베이징의 29곳에서 지구 최대의 불꽃 쇼가

펼쳐진다고 한다.

‘종이’ ‘나침반’과 함께 중국의 세계 3대 발명품으로 꼽히는 ‘화약’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데.

A : 화약에는 ‘전쟁과 평화’라는 모순되는 두 문화코드가 있다.

그중 평화의 축제코드에 속하는 게 불꽃놀이의 원조인 중국의 폭죽(爆竹) 문화다.

전설에 따르면 ‘연(年)’이라는 귀신이 매년 섣달 그믐마다 마을에 내려와 사람을 잡아먹었다.

그 귀신은 붉은 색과 벼락 소리를 두려워했다.

이에 사람들은 문에는 붉은 종이로 춘련(春聯)을 써붙이고 폭죽을 터뜨려 새해를 맞았다.

특히 폭죽의 竹은 경축의 축(祝)과 운이 같아 그 축제의 문화코드를 한층 더 강화시켰다.

그리고 대나무는 소나무, 매화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하나로 찬미돼 왔다.

Q : 그럼 화약은 전쟁무기로 발명된 것이 아닌가.

A : 중국의 화약 발명은 연금술, 특히 불로장수의 약을 만들려고 한 연단술(煉丹術)의

부산물에서 생겼다는 설이 있다. 기원전 2세기의 ‘회남자’에 ‘소(消) · 유(流) · 탄(炭)을 써서

진흙을 개어 쇠와 납과 은을 만드는 법’이 적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초석(硝石) 75%, 유황 15%, 목탄(木炭) 15%’로 된 가장 오래된 화약의 기원이다.

Q : 역사적으로 중국에서는 화약의 전쟁코드인 포화보다

축제문화 코드인 폭죽이 더 우세했다는 말인가.

A : 송나라 때 본격화한 화약은 폭죽 재료만이 아니라 군사용 무기로서 금나라 군대를 물리칠 정도였다.

14세기 초 청동제 대포를 만들기도 했지만 명(明)이 중국을 통일한 뒤엔

대포가 공격용으로 사용된 예는 거의 없었다.

정월마다 폭죽소리는 요란했지만 성벽 위에 설치된 대포는 위력적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화약의 힘으로 강력한 ‘불의 제국’을 만든 건 오스만 튀르크를 비롯한
이슬람 제국이었다.

중국의 화약이 13세기께 화약 지식이 전혀 없던 이슬람에 전해졌을 때

그들은 화약의 원료인 초석을 “중국의 눈(雪)”이라 불렀다.

터키는 유럽 여러 나라와 싸우면서 꾸준히 화약무기를 발전시켜

1453년엔 무게 680kg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거포를 포함해 69개의 대포를 사용,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부수고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다.

Q : 유럽의 근대화 역시 화약에 의한 것이 아닌가.

A : 유럽의 근대문명을 만든 3P로 화약(powder), 인쇄술(printing), 청교도(Puritanism)를
든다.

이슬람권을 통해 14세기 이후 처음 화약이 들어오지만 그 주원료인 초석을 인도와 이슬람 지역에서

들여왔던 관계로 유럽은 화약 경쟁에서 불리했다.

그러나 분요에서 초석을 얻는 방법을 개발한 뒤 과학의 힘을 입어 화약 강대국이 되고

이윽고 함포를 이용한 세계 식민지 개척에 나선다.

화약의 종주국인 중국 대륙은 바로 영국 해병대의 함포 사격에 무릎을 꿇게 된다.

Q : 화약의 전쟁놀이와 불꽃놀이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A : 원자폭탄 실험과 인공위성까지 쏘아 올린 불의 대국인 중국의 화약 문화코드가

앞으로 전쟁과 축제 중 어느 쪽으로 기울게 될지를 알기 위해선

세계 최대인 올림픽 개회식의 불꽃놀이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전쟁과 평화의 모순하는 두 화약 코드가 ‘창조적 파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개돼 나갈 때

21세기의 새 문명은 등장할 것이다.
- 2008-08-04 중앙일보
- 이어령 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