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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청(海東靑)' - 세종의 스트레스이자 유일한 놀이거리

Gijuzzang Dream 2008. 10. 1. 13:06

 

 

 

 

 

 세종의 스트레스이자 유일한 놀이거리 '해동청'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아니, 고민이라기보다는 조선의 왕으로서 꼭 처리해야 할

업무적인 스트레스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해동청’이라는 매 때문이었다.

개국 초기부터 친명정책을 표방한 조선은 직접적인 정치 간섭을 받는 대신

조공을 통한 형식적인 종속관계로서 명나라와의 유대관계를 이어갔다.

즉, 명나라는 조공을 통해 황제국이라는 위신을 지켰으며,

조선은 국방의 안정과 더불어 조공에 대한 회사품을 통해

선진문화를 수입하는 경제적 이득을 누렸던 셈이다.

다시 말해 조공은 일방적인 진상이 아닌, 국가와 국가 간의 관무역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조공품은 주로 금ㆍ은ㆍ인삼 등이었고,

이에 대한 명나라의 회사품은 견직물ㆍ약재ㆍ서적 등이었다.

 

 

단원 김홍도가 연풍현감 시절 매사냥을 묘사한 '호귀응렵도(豪貴鷹獵圖)' 

 

그 중 조선의 '해동청'은 최고의 사냥매로서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중국 황제들이 특히 좋아하는 조공품이었다.

그런데 이 매는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든지

세종실록 곳곳에서 해동청을 구하기 위한 세종의 고민을 자주 대할 수 있다.

1426년(세종 8) 8월 명나라에 바칠 해동청을 잡기 위해 함길도와 평안도에 장수들을 파견했으나,

그해 10월까지 한 마리도 잡지 못해 세종은 걱정한다.

다음해 2월 세종은 결국 도화원에 명해 전국 각도에 나누어줄 매의 몽타주를 그리게 한다.

이를테면 매의 전국 수배령을 내린 셈인데,

그 전단지에는 귀송골, 거졸송골, 저간송골, 거거송골, 퇴곤, 다락진, 고읍다손송골 등

7가지 종류의 매에 대한 그림과 그 형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었다.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인 이조년이 지은 <응골방>이란 책을 보면

사냥매는 골속과 응속의 두 분류로 구분된다.

즉, 골속은 현대의 매목 매과에 속하는 조류이며, 응속은 매목 수리과에 속하는 조류로 보면 된다.

매목 매과에는 송골매, 백송골, 해동청, 쇠황조롱이, 세이커매 등이 속하며,

매목 수리과에는 참매, 새매, 뿔매, 검독수리, 헤리스매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매과와 수리과를 모두 다 사냥에 이용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매과보다는 수리과의 참매가 매사냥의 주축이 되었다.

그것은 매과와 수리과의 특성에 따른 자연적인 선택이었다.

매과의 조류들은 날개의 폭이 좁은 대신 길이가 길어 공중에서 빠른 스피드를 낸다.

따라서 사냥을 할 때도 공중에서 기류를 타고 급강하하면서 사냥감을 낚아채

일격에 목뼈를 부러트려 즉사시킨다.

이에 비해 수리과의 조류들은 날개의 폭이 넓은 대신 길이가 짧다.

따라서 산속이나 들판에서의 순발력이 특히 뛰어난데,

낚아챈 사냥감을 땅위에 놓고 발톱으로 숨통을 조이며 부리로 심장을 터뜨려 죽인다.

 

즉, 매과의 조류는 넓은 공간에서의 사냥 능력이 뛰어나고,

수리과의 조류는 우리나라의 지형처럼 좁은 장소에서의 사냥 능력이 뛰어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냥 매라고 하면 대개 송골매를 뜻하는데,

비행 속도 및 비행 기술이 매속의 조류 중에서도 최고다.

백송골은 추운 북극권에서 사는 북극매로서, 덩치가 매우 큰 물새를 잡아먹고 산다.

예로부터 아주 귀한 매로 여겼는데,

요즘은 겨울철이 되어도 한반도에 도래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고의 사냥매로 유명했던 '해동청(海東靑)'은

말 그대로 '해동에서 나는 푸른빛의 매', 즉 우리나라에서 나는 질 좋은 사냥매를 뜻한다.

옛 기록에 의하면 해동청은 영리하고 사냥능력이 매우 뛰어나

특별히 훈련시키지 않아도 봉황의 새끼나 고니, 기러기, 황새, 토끼 등을 잡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16년 함경북도 매사냥꾼. 

또 서식 장소는 소련의 연해주 해안에서 함경남도 함흥 해안가까지인 것으로 드러나 있다. 하지만 현재는 한반도에서 이 매를 찾을 수 없다.

 

과연 해동청은 어떤 매였을까.

매사냥 기능보유자인 박용순 전통매사냥보전회 회장에 의하면

송골매의 경우 등의 깃털이 청회색인데 해동청은 이보다 더 진한 검푸른색이라고 한다. 또 개체의 크기도 해동청이 송골매보다 1/3 정도 더 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전설로만 남아 있는 해동청의 정체는

북극매의 일종이거나 송골매의 아종인 덩치가 큰 바다매일 가능성이 크다.

중국에서는 조선에서 가져간 해동청으로 대형 물새인 고니를 잡아 뱃속의 진주를 얻곤 했다고 한다.

사냥감뿐만 아니라 보석까지 가져다주니 중국의 황제들이 특히 좋아했을 법하다.

한편 요즘도 우리나라에서 매사냥에 주로 이용되고 있는 참매는

월동하기 위해 초겨울에 우리나라를 찾는 철새로서, 사냥을 잘하고 매우 용맹하다.

그러나 신경질적이며 경계심이 많아 다루기가 까다로운 편이다.

수리과에 속하는 조류 중 검독수리는 여우나 노루 또는 다 큰 늑대까지 사냥하는 무서운 새다.

우리나라에서는 검독수리를 매사냥에 이용한 기록이 없으나,

몽골이나 카자흐스탄에서는 지금도 검독수리를 이용한 수렵 풍속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매의 호칭은

이런 종류별 분류뿐만 아니라 매의 나이와 습성에 따라서도 각각 다르다.

 

먼저 공군의 상징인 ‘보라매’는 알에서 부화한 지 채 1년이 안된 젊은 매를 일컫는다.
야생이 발달하기 전에 일찍 사람 손에 길들여져 다루기가 쉽고, 활동성이 강해서

사냥에 매우 적극적이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해 사냥에서 성공하는 확률은 떨어지는 편이다.

보라매가 자라서 두 살이 된 매는 ‘초지니’, 3살이 된 매는 ‘재지니’라고 불렀다.

또 이렇게 사람 손에 길들여진 매는 ‘수지니’라고 부른 반면

산에서 자유로이 자란 매는 ‘산지니’라고 했다.

보라매도 경험이 쌓이면 차츰 사냥 성공 확률이 높아지는데,

나이가 많이 들면 활동성이 떨어져 꿩 같은 사냥감을 보고도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나이가 많이 들어 둔해진 사냥매는 산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검독수리의 야생 여우 사냥 모습. 

 

시계 바늘을 다시 세종 때로 되돌려 본다.

전국에 내린 몽타주 수배령의 효과 덕분인지 해동청 1연과 황응(누런 매) 5연을 마련한 세종은 1427년(세종 9) 11월 초 상호군 이사검을 진응사(進鷹使 ; 중국에 매를 바치는 사절)에 임명해 명나라로 보냈다.

 

그런데 이사검이 명나라로 가던 도중 큰 사고가 터졌다.
먼 길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 해동청이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그토록 힘들게 구한 해동청을 죽여 버렸으니 이사검은 중국 황제에게는 물론 세종에게도 벌을 면하지 못할 위기에 빠졌다.

허나 이사검은 그 위기를 곧 기회로 삼는 재치를 발휘했다. 이사검은 과연 어떻게 대처했던 것일까.

다음해인 1428년 2월 16일 이사검이 돌아와서

북경에서 있었던 일을 세종에게 보고한 기록 속에 그 정답이 들어 있다.

“신이 황제의 조정에 나아가서 죽은 해동청을 받들어 올리면서 꿇어앉아 아뢰기를,

‘우리 전하께서 지성으로 해동청을 구하여 바쳤사오나, 불행히도 중도에서 병들어 죽었습니다’고

하니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었으니 하는 수 없지 않겠는가’ 했습니다.”

즉, 이사검은 죽은 해동청을 버리지 않고 북경까지 그대로 가져갔던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 황제 앞에서 절을 하며 울었다. 황제가 그를 달래며 말했다.

“사람이 죽는데도 오히려 능히 살릴 수 없는데, 하물며 짐승이겠는가.

짐이 그대를 허물하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에 대해 이사검은 “신이 우는 것은 다른 일이 있음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임금님의 충성을 온전히 하지 못한 일이 한스러울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사검의 충정에 감동한 황제는 장군모를 내리면서 오히려 그를 칭찬해주었다.
그 후 이사검은 조정에서도 승승장구를 달렸다.

중추원부사와 공조참판, 지중추원사 등을 지내며 죽을 때까지 세종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 남았다.

 

맹금류의 사냥 습성을 이용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수렵기술 가운데 하나인 매사냥은

중앙아시아의 평원 지방에서 기원했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나 페르시아 등지에서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고,

고대 인도 지방에서도 크게 성행해 인도 기원설도 있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는 고조선 시대 만주 동북부 지방의 수렵 민족인 숙신족으로부터 전해져,

고구려 고분벽화에까지 등장할 만큼 삼국시대 이후에 크게 성행했다.

그러다 고려 충렬왕 때는 매사냥을 전담하는 ‘응방’이라는 관청이 등장했다.

 

매사냥을 주도하는 수할치. 

충렬왕이 즉위하자마자 응방을 설치한 까닭은 본인이 매사냥을 좋아한 것도 있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몽골의 해동청 조공에 대한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수렵과 목축을 업으로 하는 몽골에서는 매사냥이 일반화되어, 매를 중요한 재산 목록으로 여겼다.

고려에서는 응방을 경영하기 위해 몽골에서 기술자인 응방자를 불러오는 등 몽골의 매사냥 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였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매사냥 관련 용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몽골어의 흔적이 마치 화석처럼 박혀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송골매의 송골은 몽골어 송귤(songquor)에서,

보라매는 몽골어 보로(boro)에서 각각 유래된 말이다.

송귤은 방랑자 또는 유랑자란 뜻이며,

보로는 보라색을 의미한다.

또 매를 부리면서 매사냥을 지휘하는 사람을 뜻하는 ‘수할치’라는 우리말도 몽골어에서 음을 그대로 차용해온 경우이다.

 

한편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시치미 떼다’라는 말도 매사냥에서 유래한 재미있는 표현이다.

시치미는 매의 꼬리 깃털 12개 가운데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중앙의 깃털 2개에 매다는 이름표를 말한다.
가로 1센티미터, 세로 3센티미터 정도로 납작하게 깎아 만든 쇠뿔에

매 소유자의 주소와 이름을 새겨 넣은 다음, 방울과 함께 하얀 거위 깃털로 치장한 것이 시치미이다.

이처럼 정성 들여 시치미를 만들어 매에게 다는 이유는

사냥에 성공한 매가 꿩을 다 먹어치우기 전에 방울소리와 퍼덕이는 하얀 깃털로

얼른 매를 찾기 위해서이다.

만일 시치미를 빨리 찾지 못하면

사냥감으로 배를 채운 매는 주인에게 돌아오지 않고 멀리 날아가 버린다.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매는 자기 주인에게 먹이를 얻어먹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민가로 돌아오게 된다.

매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표시했던 시치미. 

이때 자기 주인집을 정확히 찾아가면 문제가 없지만 자칫 잘못하여 남의 집으로 들어가는 매도 있다. 이런 매를 발견할 경우 매에게서 시치미를 떼어 버리고 슬쩍 가로채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치미를 떼어버리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알면서도 모른 척 한다는 뜻의 ‘시치미 떼다’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웃의 매를 시치미까지 떼어내며 가로챈 이유는 당시 매의 값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길을 잘 들인 사냥 매 한 마리가 말 한 필 값과 맞먹었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면 승용차 한 대 가격에 해당했던 셈이다.

흔히 한량들의 소일거리를 말할 때 ‘일응(一鷹) 이마(二馬) 삼첩(三妾)’이라고 했다.

즉, 돈 잘 쓰고 잘 노는 양반 계층의 인기 소일거리로는

첫째가 매사냥이요, 둘째가 말을 타는 일, 셋째가 첩을 두는 일이라는 뜻이다.

매를 길들여서 사냥에 나서는 과정을 살펴보면 매의 값이 왜 그처럼 비쌌으며,

세상에서 제일 가는 소일거리로 꼽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야생에서 사는 매를 사냥매로 길들이기 위해 잡는 것을 ‘매를 받는다’라고 말한다.

매를 받는 방법 중 가장 널리 사용된 것이

비둘기를 미끼로 매를 유인한 후 그물로 덮쳐서 잡는 ‘사수잡이’가 있다.

조망이 좋은 능선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가 매가 하늘 위로 지나갈 때 줄을 잡아당겨

비둘기를 푸득거리게 하여 매를 유인하는 방식이다.
이때 사람은 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사수막이라는 움막에 숨어 있는데,

매가 올 때까지 며칠이건 꼼짝하지 않고 그 좁은 움막에서 기다려야 한다.

매를 잡기 위해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사수막. 

 

또한 매는 자기가 사냥한 꿩을 먹다가 남길 경우 풀숲에 몰래 숨겨두는 습성이 있다. 그처럼 먹다 남은 꿩을 발견했다가 매가 다시 먹으러 왔을 때 덮쳐서 잡는 방법도 있었다. 그밖에 닭을 미끼로 하여 대나무로 성기게 엮은 소쿠리 같은 덫으로 잡거나, 매의 둥지에서 새끼 매를 몰래 가져오는 방법 등으로 매를 받았다.

이렇듯 사람이 생매를 잡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아서, 매사냥 중 가장 힘들고 중요한 과정이 바로 매를 받는 것이었다.

매를 받으면 다리를 끈으로 묶어서 달아나지 못하게 해 항상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훈련을 시킨다.

그리고 집안에만 두면서 외부 세계와 차단시켜 매의 집중력을 높인다.

또 매의 몸에 남아 있는 야생 먹이의 기름기를 빼내는 훈련도 동시에 진행한다.
이때 2~3일간 물에 담가 피와 기름을 뺀 닭고기를 먹이는데,

처음엔 거들떠보지 않던 매도 배가 고프면 그 먹이를 먹게 된다.

이렇게 어느 정도 길들여지면 산에 데리고 가서 매를 놔줬다가

손에 든 고기로 유인해 다시 주인의 팔에 내려앉게 하는 훈련을 거듭한다.
이 과정을 마치면 드디어 실전을 치르게 되는데, 사냥 전날 매를 적당히 굶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너무 굶기면 힘이 없어서 사냥을 못하게 되고, 많이 먹이면 배가 불러 사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사냥이 시작되면 여러 명의 몰이꾼들이 산중턱에서 꿩을 몰아붙인다.

그때 시야가 넓은 산봉우리에 있던 수할치가 “애기야!”라고 외치며 매를 날린다.

500미터 거리의 신문 글씨를 볼 만큼 시력이 뛰어난 매는 즉시 날아가 꿩을 낚아챈다.
그러면 매가 어디로 내려앉는지 보고 있던 망꾼이 재빨리 매를 찾아 꿩을 빼앗는다.

고기 맛을 보다가 먹이를 빼앗긴 매는 더욱 사냥 본능을 발휘하게 되어

또다시 다른 사냥감을 노리게 된다.

꿩을 여러 마리 둘러맨

옛날의 매사냥꾼. 

 

고려 시대의 응방은 조선에서도 계승되어

태조 이성계는 1395년(태조 4) 3월에 응방을 한강변에 만들었다.

그 후 태종과 세종은 조선 최고의 매사냥 마니아가 되었다.

아마 매사냥이 가장 성행했던 함경도 출신의 무장인 태조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매사냥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모두 354건이 검색되는데,

이 중 세종 때의 기록이 172회, 태종 때가 112회이다.

즉, 조선 전체의 매사냥 기록 중 약 80%가 세종과 태종 때에 몰려 있는 셈이다.

무인 기질이 강한 태종은 그렇다쳐도 매번 해동청이라는 조공품을 마련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던 학자 이미지의 세종이 그처럼 매사냥을 즐겼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에는 분명 세종이 스스로 매사냥 마니아임을 자처하고 있는 대목이 나와 있다.

1437년(세종 19) 2월 10일 세종이 창덕궁 서쪽에 있던 예전의 이조를 수리해 해동청을 기르려고 하자

사간원의 김문기가 들고 일어나서 흉년에 새를 위해 집을 수리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아뢴다.

그러자 세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성품이 사냥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비록 강무하는 때를 당하여도 활과 화살을 갖지 아니하고,

음악ㆍ여자ㆍ개ㆍ말ㆍ화초 등의 물건도 또한 좋아하지 않으나

다만 이 해청은 준일하고 불범하여 보통 매와 달라서, 놓는 데도 말 달리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보는 데도 눈의 시력을 피로하게 하지 않아서 나의 말 타고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뜻에 꼭 맞는다.

그러므로 일찍이 길러서 하나의 놀이거리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세종은 해동청을 기르는 것이 베 한 자와 쌀 한 말의 비용도 들지 않는데,

매 중에서도 유독 해동청만 기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김문기는 스스로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었다며 뒤로 물러난다.

이처럼 해동청은 조공 때마다 매번 세종의 스트레스이기도 했지만

조용한 성품의 성군인 세종의 유일한 놀이거리이기도 했던 것이다.

- 이야기 과학 실록 (8-9) 2008년 06월 05일, 06월 12일

ⓒ ScienceTimes

 

 

 

 


 매사냥(hawking)

 

 

사냥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매를 길들여 들짐승을 잡는 매사냥은

인류가 가축을 사육하는 데 익숙해진 신석기시대에 비롯된 고대의 사냥 방식이다.

매사냥은 초원에서 방목하던 양과 가축을 잡아먹는 늑대나 여우를 잡는 방법이기도 했으며

토끼, 꿩 등의 고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나

점차 오락으로 발전되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중국에서 매사냥이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한(漢), 당(唐) 시대이며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매사냥을 말리는 신하들에게 들킬까봐

아끼는 매를 곤룡포 속에 숨겼다가 매가 죽어버린 일도 있었다.

 

중국의 매사냥은 둥베이(東北;만주)와 중앙아시아로부터 배워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중국은 서쪽 변방에 위치한 곤륜산이 매사냥 역사의 발원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자연적인 조건과 매사냥의 유희성으로

역대 영웅호걸과 민중들이 지속적으로 매사냥을 즐기며 전승해왔으나

사회주의가 된 후 문화대혁명 때 매사냥이 부정노동행위라고 비판 받자 전면 금지령을 내렸다.

매사냥은 명맥이 끊어졌다가 등소평이 집권하여 개혁개방 노선으로 돌아선 후

만주족 등 소수민족에 의해서 매사냥이 부활되어 계승되고 있다.

 

일본의 매사냥은 서기 355년 백제 귀족인 주군이 일본에 건너가

‘인덕천황’에게 매사냥 기술을 처음 전수해 준 이래 지속적인 전승을 해오다

태평양전쟁 때 먹이조달의 곤란을 겪으며 잠시 중단되었다.

전후 신정부가 들어선 후 궁내성(황실)에서 귀빈 접대용으로 다시 전통 매사냥을

부활시켰으나 자연보호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단되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호색한(好色漢)이었던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멀리까지 매사냥을 나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면 손발이 민첩해지고,

식욕도 증진되며, 잠도 잘 오기 때문에" 자신의 호색기질을 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매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한국의 매사냥 

  

우리나라에는 고조선 시대 만주 동북부 지방의 수렵 민족인 숙신족으로부터 전해져,

고구려 고분벽화에까지 등장할 만큼 삼국시대 이후에 크게 성행했다.

<삼국사기>에 백제의 아신왕이 매사냥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러나 고려 때에 와서 비로소 사회 지도층이 몽골 매사냥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어 상류층에 매사냥 문화가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고려 충렬왕 때 매의 사육과 사냥을 다루는 전문기관인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을

설치해서 운영하게 되었다.

 

 

 

 

한편, 고려 우왕 시기에 명(明)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매를 보고

감탄한 명승 범기의 詩.

‘고려해동청행(高麗海東靑行)’도 전한다.  

 

고려해동청(高麗海東靑)

 

고려가 이 매를 천자에게 바치어

그 용맹함에 모두 바로 보기 무섭네

옥발톱과 금눈을 따른 님이 없고

팔위에 있어도 그 마음만은 하늘을 날으니

평생 그 사나운 기 따를 님이 없으며

홀로 날으면 공중의 봉황 앞에 고르매

그 날카롭고 사나움이 고니를 능사하며

오늘 찬서리 산야를 짚으니

높이 날아올라 숲속을 내려보며

구름과 안개를 뚫고 석양으로 날라드니

교활한 토끼와 고상한 두꺼비 꼼작못하며

몸은 묶여 돌아오면 닭이나 같아라

많은 새가 고공을 다투어나니

너희가 그 재주 없으면

대궐 부엌에는 고기가 없으리라.

 

 

충렬왕이 즉위하자마자 응방을 설치한 까닭은 본인이 매사냥을 좋아한 것도 있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몽골의 해동청 조공에 대한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해동청은 가장 우수한 사냥매다.)


고려에서는 응방을 경영하기 위해 몽골에서 기술자인 응방자를 불러오는 등

몽골의 매사냥 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였다. 수렵과 목축을 업으로 하는 몽골에서는

매사냥이 일반화되어, 매를 중요한 재산 목록으로 여겼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매사냥 관련 용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몽골어의 흔적이 마치 화석처럼 박혀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고려 충렬왕 때 문신이었던 문열공 이조년은 충렬왕의 시종으로

몽골이 지배하던 중국에 가서 10년간을 머무르면서 그곳 사람들과 교류하며

매사냥에 심취했었다. 정복자들의 실력자들과 외교적인 교제를 하는데 있어서

매사냥은 지금의 골프와 같은 기능을 했던 것 같다.

이조년은 매를 다섯 마리나 소유한 매사냥 애호가 이기도 했다.

이조년이 고려로 귀국한 후에 매의 사육과 매사냥의 교본인 <응골방(鷹?方)>이란 책을

펴냈다. 나중에 성산후라는 칭호까지 받은 거물이 이런 책을 쓴 것을 보면

그 무렵 고려 사회에 매사냥이 차지하는 문화적 무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저술한 <응골방>은 매의 종류, 감식, 사육, 훈련등에 상당히 수준 높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일본 도쿠카와 막부 시절 일본으로 수출되어

장군家의 매사냥 교본으로 쓰이기도 했다. 

 

 

세종대왕과 매사냥 

 

고려시대의 응방(鷹坊)은 조선에서도 계승되어

태조 이성계는 1395년(태조 4년) 3월에 응방을 한강변에 만들었다.

그 후 태종과 세종은 조선 최고의 매사냥 마니아가 되었다.

조선 왕조 500년간 태종과 세종처럼 매사냥을 열심히 즐긴 임금은 거의 없다.

태종과 세종이 있을 뿐이다.

 

실록에 나타나는 세종의 재위 첫 3년간은 세종보다 상왕이 된 태종의 매사냥 기록이 더 많다.

이 기간동안 세종이 단독으로 매사냥을 나갔다는 기록은 없다. 세종이 매사냥을 갔다 해도

태종이나 왕자들과 같이 동행하는 수준이었다.

왕이 되었지만 아버지를 의식하고 조심하는 기미가 역역하다.

 

아버지 태종이나 세종을 뛰어 넘는 매사냥의 매니아가 있었으니 바로 양녕대군이다.

그가 부린 말썽의 상당부분 역시 매사냥과 관련 된 것이다,

양녕은 왕위를 이을 왕세자로서 그냥 보고 둘 수만은 없는 말썽을 너무 많이 부려

속을 끓던 태종은 셋째 충녕(세종)을 왕위에 앉히고 양녕을 불러서 훈계하며 궁에서 내보낸다.

태종은 더 이상 나무라지 않을테니 네가 경기도 광주로 물러나서 거기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는 부탁을 하면서 양녕에게 제시한 문제 해결의 종착역이 ‘사냥매’였다.

그러나 양녕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속을 끊이지 않고 썩히게 된다.

근신으로 물러간 경기도 광주에서도 매사냥을 다니며 사가에 침입해서 남의 첩을 빼앗는 등,

말썽을 부리자 내렸던 매 세 마리 중 두 마리를 다시 회수 해버린다.

 

매사냥 매니아 태종은 세종 4년 승하한다.

상왕 태종이 세종 4년에 승하하고 세종은 꼬박 3년 상을 지내는 동안

정종의 매사냥에 두어 번 수행한 것을 빼놓고는 매사냥을 삼갔다.

 

세종 7년부터 세종은 혼자 매사냥을 다니기 시작한다.

태종 때 끊임없이 태종의 매사냥을 만류하던 신하들의 간섭은 세종 때 발견되지 않는다.

개성 강한 태종이 매사냥을 두고 신하들과 벌리는 전쟁에서 승리를 얻어내

매사냥이 왕실의 공식 스포츠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실록에서는 상감의 매사냥을 그저 매사냥을 했다라고 기록하지 않고

매사냥을 구경했다라고 기록 되어있다. 상감은 매사냥 같은 험한 짓을 몸소 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신념이 아직도 속에 깊이 스며있는 표시이다.

 

세종은 그냥 매사냥을 혼자 다닌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태종이 하듯 신하를 데리고 나가 군신간의 우의를 다지기도 했지만

형제인 효령은 물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까지 괴롭힌 양녕을 극진히 모시고 다니기도 했었다.

전하는 말로는 세종은 자기에게 왕위를 건네준 양녕에게 무척 미안하게 생각하며

성실하게 동생의 예를 다 했다는데 이 매사냥에서도 그런 형제의 우의를 다 한 것이다.

세종의 매사냥 거동은 이른 가을부터 춥기 이를 데 없던 그 무렵의 12월이나 1월을 거쳐

늦은 봄까지 행해졌다.

 

세종과 그의 아버지 태종 그리고 태조 이성계가 매사냥을 다닌 곳으로 압도적으로 기록된 곳이

동교(東郊)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교라고 막연하게 써놓았는데 이것은 동대문 밖을 말하는 것이다.

살곶이 중랑천 광나루 마전포 등의 명칭이 나오는데 지금 성동구와 광진구 일대로 추측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서 왕들이 왜 매사냥을 동교로만 가는지 세종 18년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 25년 종친들에게 살곶이 일대 사냥을 허용하는 문제로 지시와 상소로 다툼이 있었다.

이 기록은 동교 일대가 아무나 함부로 사냥할 수 없는 임금의 전용사냥터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태종 때 태조 이성계가 혼자 매사냥을 나갈 때는 동교가 아니라 서교로 나갔다고

되어있는데 비록 왕의 아버지라도 아들인 왕의 권위를 존중해서

임금전용 사냥터를 사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종의 매사냥은 성 밖의 백성들이 사는 것을 살피는 목적도 있었던 듯하다.

임금이 궁궐 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은 신하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은 매사냥을 핑계로 자주 교외로 나가 백성들의 삶을 살폈던 것 같다.

세종 17년 3월 매사냥을 가던 길에 낡은 옷을 입은 아이를 보고 측은히 생각하여

광목 한 필을 내리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그가 매사냥 길에 백성들의 삶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는 기록이기도 하다.

 

세종은 평생 즐기던 매사냥을 그의 재위 24년부터는 손을 떼고

붕어했던 세종 32년(1450)까지 전혀 하지를 않는다.

세종은 평생 당뇨병과 안질로 크게 고생했었다.

몸의 병이 늙어가는 그에게 야외에서 기동해야 하는 매사냥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었던 같다.

 

세종 이후 조선왕조에서 가장 호화로운 매사냥을 즐긴 인물은

온갖 잡기를 마다않던 연산군이다.

그는 1504년 응방을 좌우로 나누고 10년(1504)에 800명의 갑사와 정병을 딸려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겸사복(兼司僕) 열 명과 내금위(內禁衛)의 군사 70명을 더 붙였다.

그리고 80명의 관원을 전국에 보내서 매를 거두었다.

그 결과 응방의 매와 개는 수만 마리에 이르렀고, 진귀한 새와 짐승까지 길렀다.

이들이 하루에 먹는 식량도 어마어마하여 백성의 원성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그는 그 해 11월에 한성부와 경기도에 사냥터를 새로 만들었다.

이에 쫓겨난 주민이 550여 명이고, 묵은 밭 570여 결(結)이 들어갔다.

연산군이 매사냥을 경기도 청계산으로 자주 나갈 때마다

매번 한강에 부교를 설치해야 하는 백성들의 원성은 끝이 없었다.

 

중종 12년(1517)에 응방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음에도,

내시부(內侍府)에 정5품관을 두고 대전응방(大殿鷹坊)의 책임을 맡겼다.

이언적(李彦迪)은 매를 잡는 사람이 비록 신역(身役)을 면제를 받기는 하지만, 잡지 못하면

집과 땅을 팔아 한 마리에 베 50~60필을 주고 사 바치는 폐단을 지적하였다(중종실록).

명종 때도 폐해는 줄지 않았다. 이 뒤로도 응방을 없앴다가 다시 두는 일이 거듭되었다.

 

우리 매는 중국뿐 아니라, 일본인도 탐을 냈다.

임란 때 남원의 의병장이었던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의

“함경감사 유영립의 온 가족이 사로잡혔다가... (중략)

영립만 도망 나오고, 어머니는 매를 주고 빼내왔다"는 내용(임진년 10월 18일)이 그것이다.

또 “부산 동래의 왜적이 우리와 더불어 함안에서 시장을 열었다. 저들은 우리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을 내고, 우리는 표범 가죽과 매를 팔았다"(을미년 6월)는 내용도 보인다.

 

응방이 없어진 것은 선조 때이며, 현종 이후 매사냥 기록이 뚜렷하게 줄었다.

매사냥은 조선시대까지 귀족이나 왕가집안의 놀이문화로 발달했지만

수렵으로서 민중들의 생업으로 발달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 A Festival In The Forest (숲속의 축제) - Ralf B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