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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 제갈량의 출사표

Gijuzzang Dream 2008. 9. 25. 13:04

 

 

 

 

 

제갈공명(諸葛孔明=諸葛武侯)의 출사표(出師表) 

    

 

 

 

출사표(出師表)

 

 

 

출사표는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로 출발하기 전에 임금에게 상주하는 문장을 뜻한다.

周나라때는 군사 2,500명을 일러 사(師)라 했는데

사(師)라는 글자가 지금처럼 '스승'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대략 주나라 말기 사(師)와 부(傅)라는 관직이 설치된 이후라고 한다.

 

<출사표> 가운데 중국 삼국시대의 촉한 승상이었던 제갈량(諸葛亮)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魏나라를 토벌하기 위한 전쟁에 나서기 전 촉제(蜀帝) 유선(劉禪)에게 바친 문장으로 전후 두 편이다.

제갈량은 북벌을 위해 전후 6차례 출사(出師)했는데 이를 일러 '유출기산(六出祁山)'이라 한다.

<전출사표>는 처음 북벌에 임했던 227년에 쓴 것이고,

<후출사표>는 그 이듬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三國志)'제갈량전'과 <문선(文選)>에 실려 있으며,

천하 명문으로 알려져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수록되었다.

 

제갈량의 ‘출사표’는 나라를 걱정하는 제갈량의 진정을 토로한 정열적인 명문으로 유명하다.

제갈량의 출사표로는 <전출사표>와 <후출사표> 두 가지로 나뉘어 있는데

이 글을 읽고 울지 않았다는 이가 없다 할 정도로 빼어난 문장과 나라에 대한 애국심,

그리고 그 당시의 죽은 선제 소열제 유비(劉備)에 대한 충성심이 담겨 있는 글로

오늘날까지 크게 칭송받고 있다.

제갈량은 지혜로움과 충성스러움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27세에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받은 이래 54세로 전장에서 죽을 때까지,

국가와 주군(主君)을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고 끝까지 본분을 지키며 충심을 견지했다.

지혜롭기도 했지만 언제나 자신의 안일을 꾀하지 않고 근면했고 또 공손하고 신중했으므로

모든 이의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제갈량의 전출사표(前出師表)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AD220~280) 당시 촉한(蜀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제갈량(諸葛亮 : 181-234)이

촉제(蜀帝) 유선(劉禪, 유비의 아들)에게 제갈량이 위나라와의 전쟁에 출전하기 앞서 올린 표문이다.

제갈량이 蜀漢 건흥(建興) 5년(227년) 중원 회복을 목표로 위(魏)를 정벌하러 군대를 이끌고

한수(漢水)가에 주둔하다 출발에 즈음하여 촉(蜀)의 두 번째 군주인 유선에게 올렸다.

흔히 출사표라 하면 전출사표를 말하는 것이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나라를 다스리는 바른 길을 열정적으로 토로한 내용은,

후세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전해지며

천하의 명문으로 회자되는 그 원문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 공명초상출사표(孔明初上出師表)

제갈량이 촉의 황제 유선에게 처음 출사표를 올리다. 

2007.12.02 ⓒ 국제신문(www.kookje.co.kr)

 

위나라에서 옹주(雍州 · 지금의 시안 일대)와 양주(凉州 · 지금의 간쑤성 일대)를 지킬 관리가 결원되자

사마의가 자원하였다.

평소 사마의를 경계하던 제갈량은 사마의가 촉의 북쪽에서 군사를 통괄하게 되자 크게 염려하였다.

제갈량은 마속의 반간계(反間計)를 받아들여, 사마의가 모반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위나라에 퍼뜨렸다.
과연 유언비어를 들은 조예는 크게 놀랐다.

 

화흠(華欽)은 사마의의 눈매가 이리와 같아 조조가 살아있을 때도 국가의 화근이 될 것이라 경계하여

병권을 맡기지 않았다며 죽이자고 하였다.

이에 반해 왕랑(王朗)과 조진(曹眞)은 사마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조예는 그래도 의심이 가 사마의의 관직을 삭탈하고 귀향시켰다. 대신 조휴에게 임무를 맡겼다.
사마의가 제거되자 제갈량은 곧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

227년 출전에 앞서 황제 유선(劉禪)에게 '출사표(出師表)'를 올렸다.

출사(出師)는 출군(出軍)과 같은 말로, 전투에 나간다는 뜻이다.

출사표는 먼저 촉나라가 직면한 위기를 지적하고 이에 적합한 조치로

법치(法治), 납간(納諫), 용현(用賢)을 제시하였다.

후반부에선 자신이 중원을 평정하고자 한 이유를

유비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국가에 대한 충성 때문이라 하였다.

제갈량은 노장 조자룡을 선봉에 세우고 30만 대군을 이끌고 한중(漢中)으로 나갔다.   

 

 

 출사표(出師表 = 前出師表) - 제갈량(諸葛亮)

 

先帝創業未半而中途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然侍衛之臣不懈於內 忠志之士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선황제(열조 소열제 유비)께옵서는 창업하신 뜻의 반도 이루지 못하신 채 중도에 붕어하시고,

 

이제 천하는 셋으로 정립되어 익주가 매우 피폐하오니, 참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때이옵니다.

하오나 폐하(후주 유선)를 모시는 대소 신료들이 안에서 나태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런 무사들이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음은, 선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대우해주시던 황은을

잊지 않고 오로지 폐하께 보답코자 하는 마음 때문이옵니다.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폐하께서는 마땅히 그들의 충언에 귀를 크게 여시어 선황제의 유덕을 빛내시오며,

충의지사들의 의기를 드넓게 일으켜 주시옵고, 스스로 덕이 박하고 재주가 부족하다 여기셔서

그릇된 비유를 들어 대의를 잃으셔서는 아니되오며, 충성스레 간하는 길을 막지 마시옵소서.

 

宮中府中 俱爲一切 陟罰臧否 不宜異同 若有作奸犯科及爲忠善者

 

宜付有司論其刑賞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 使內外異法也

 

궁중과 부중이 일치하여 잘한 일에 상을 주고 잘못된 일에 벌을 줌에 다름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며,

 

만일 간악한 짓을 범하여 죄 지은 자와 충량한 자가 있거든 마땅히 각 부서에 맡겨

 

상벌을 의논하시어 폐하의 공평함과 명명백백한 다스림을 더욱 빛나게 하시고,

 

사사로움에 치우치셔서 안팎으로 법을 달리하는 일이 없게 하시옵소서.

 

 

侍中 侍郞 郭攸之 費褘 董允等 此皆良實 志慮忠純 是以先帝簡拔以遺陛下

 

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然後施行 必能裨補闕漏 有所廣益

시중 곽유지와 비의, 시랑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진실하오며 뜻과 생각이 고르고 순박하여

선황제께서 발탁하시어 폐하께 남기셨으니,

아둔한 신이 생각하건대 궁중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그들에게 물어보신 이후에 시행하시면

필히 허술한 곳을 보완하는 데 크게 이로울 것이옵니다.

 

將軍向寵 性行淑均 曉暢軍事 試用於昔日 先帝稱之曰 能 是以衆議擧寵爲督

 

愚以爲營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必能事行陣和睦 優劣得所也

장군 향총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에 밝은지라

지난날 선제께서 향총을 시험삼아 쓰신 뒤 유능하다 말씀하시었고,

그리하여 여러 사람의 뜻을 모아 그를 도독으로 천거했사오니,

아둔한 신의 생각으로는 군중의 대소사는 향총에게 물어 결정하시면 반드시 군사들 사이에서 화목할 것이오며,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모두 적재적소에서 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다할 것이옵니다.

 

親賢臣 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 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

 

先帝在時 每與臣論此事 未嘗不歎息痛恨於 桓靈也.

전한 황조가 흥한 것은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멀리했기 때문이오며,

후한 황조가 무너진 것은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한 때문입니다.

선제 폐하께서는 생전에 신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일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하셨사옵니다.

 

侍中 尙書 長史 參軍 此悉貞亮死節之臣 願陛下親之信之 則漢室之隆 可計日而待也.

 

시중과 상서, 장사와 참군 등은 모두 곧고 밝은 자들로 죽기로써 국가에 대한 절개를 지킬 신하들이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들을 가까이 두시고 믿으시옵소서.

 

그리하시면 머지않아 漢 황실은 다시 융성할 것이옵니다.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咨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신은 남양의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선황제께옵서는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려 세 번씩이나

몸을 낮추시어 몸소 찾아오셔서(삼고초려)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황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그 뜻에 응하였사옵니다.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間 爾來二十有一年矣

 

先帝知臣謹愼 故臨崩寄臣以大事也

그 후 漢 황실의 국운이 기울어 싸움에 패하는 어려움 가운데 소임을 맡아 동분서주해온 지

어언 스무해 하고도 한해가 지났사옵니다.

선황제 폐하께옵서는 신이 삼가고 신중한 것을 아시고

붕어하실 때 신에게 탁고의 대사를 맡기셨사옵니다.

 

受命以來 夙夜憂歎 恐託付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獎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興復漢室 還于舊都 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褘允之任也

신은 선제의 유지를 받은 이래 조석으로 근심하며

혹시나 그 부탁하신 바를 이루지 못하여 선제의 밝으신 뜻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끝에,

지난 건흥 3년(225년)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었사옵니다.

이제 남방은 평정되었고 인마와 병기와 갑옷 역시 넉넉하니,

마땅히 삼군을 거느리고 북으로 나아가 중원을 평정시켜야 할 것이옵니다.

늙고 아둔하나마 있는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漢 황실을 다시 일으켜

옛 황도로 돌아가는 것만이 바로 선제 폐하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드리는 신의 직분이옵니다.

손익을 헤아려 폐하께 충언드릴 일은 이제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몫이옵니다.

 

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若無興德之善責攸之褘允之咎 以彰其慢

 

陛下亦宜自謀 以諮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원컨대 폐하께옵서는 신에게 흉악무도한 역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킬 일을 명하시고,

만일 이루지 못하거든 신의 죄를 엄히 다스리시어 선황제 폐하의 영전에 고하시옵소서.

또한 한실을 바로 일으키는 데 충언이 올라오지 아니하거든

곽유지, 비의, 동윤의 허물을 책망하시어 그 태만함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옵소서.

폐하께옵서도 마땅히 스스로 헤아리시어 옳고 바른 방도를 취하시고,

신하들의 바른 말을 잘 살펴 들으시어 선황제 폐하께옵서 남기신 뜻을 좇으시옵소서.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臨表涕泣 不知所云

臣이 받은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옵나이다!

이제 멀리 떠나는 자리에서 표문을 지어 올리려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씀을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후출사표(後出師表)

 

제갈량(諸葛亮)이 당시 위(魏)나라와의 1차 북벌에서 실패한 후,

전세를 재정비한 후에 유선(劉禪)에게 올린 두번째 상소문이다.

1차 북벌 이전에도 제갈량은 후주에게 출사표를 올린 적이 있기 때문에

후세에선 이 출사표를 후출사표라 부른다.

내용이 전출사표와 더불어 매끄러우나 후세 사람의 윤색이라는 평이 있고

조작된 위작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 공명재상출사표(孔明再上出師表)

제갈량이 양의를 보내 촉의 황제 유선에게 후출사표를 바치고 있다.

2007.12.14 ⓒ 국제신문(www.kookje.co.kr)

 

동오가 위를 대파했다는 소식을 들은 제갈량은 2차 북벌을 준비하였다.

이때 조자룡이 병으로 죽었다는 전갈을 듣자

제갈량은 국가로서는 동량(棟梁 , 대들보)을 하나 잃었고 자신은 한 팔을 잃었다며 통곡하였다.

촉에는 관우, 장비, 황충, 마초, 조자룡 등 오호장군(五虎將軍)이 모두 죽고,

이후에는 강유, 위연, 장포, 관흥 등이 주로 활약하게 된다.

 

漢中에 있던 제갈량은 성도의 유선에게 두 번째 '출사표' 곧 '후출사표(後出師表)'를 올린다.

이 표문(表文)에서 제갈량은 주로 위나라 공격의 필요성을 밝혔다.

당시 촉의 조정에서는 백성들이 곤궁하고 병사들이 피폐해 있는 상황에서

출군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촉과 도적은 양립할 수 없고, 왕업(王業)은 한 지역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고 전제한 후

"도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였다.

말미에 "국궁진췌(鞠躬盡췌), 사이후이(死而後已)"라고 하여 자신의 충성과 높은 기상을 요약했다.

"삼가 몸이 부서지도록 힘쓰며 죽은 뒤에야 비로소 멈추리라"는 뜻이다.

유선은 출사표를 읽고 제갈량에게 30만 군사를 일으켜 위연을 선봉으로 삼아

진창(陳倉)으로 나가게 했다.

 

 

 

  후출사표(出師表) - 제갈량(諸葛亮)

 

先帝慮漢賊不兩立 王業不偏安 故託臣以討賊也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固知臣伐賊 才弱敵强也

선제께서는 한(漢)을 훔친 역적과는 함께 설 수 없고 왕업은 천하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것에 만족해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 여기시어 신에게 역적을 칠 일을 당부 하셨습니다.

선제의 밝으심으로 臣의 재주를 헤아리시어

臣이 역적을 치는 데에 재주는 모자라고 적은 강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然不伐賊 王業亦亡 惟坐而待亡 孰與伐之 是以託臣而弗疑也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않으면 도리어 왕업이 망할 것이니

어찌 일어나 치지 않고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그 일을 臣에게 맡기시고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臣受命之日 寢不安席 食不甘味

思惟北征 宜先入南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幷日而食 臣非不自惜也

顧王業不可偏安於蜀都 故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 而議者謂爲非計

신은 선제의 명을 받은 이래로 잠자리에 누워도 편안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입에 달지 아니했습니다.

북의 위(魏)를 치려면 먼저 남쪽을 평정해야겠기에 지난 5월에는 노수를 건너 거친 땅 깊숙이 들어가 하루 한 끼를 먹으며 애쓴 것은 臣이 스스로를 아끼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왕업을 돌아보고 성도에서 만족할 수는 없다고 여겨 위태로움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제께서 남기신 뜻을 받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게 좋은 계책이 못된다고 말했습니다.

 

今賊適疲於西 又務於東 兵法乘勞 此進趨之時也

謹陳其事如左

이제 적은 서쪽에서 지쳐있고 동에서도 힘을 다 쓴 끝입니다.

병법은 적이 수고로운 틈을 타라 했으니 지금이야말로 크게 밀고 나아갈 때입니다.

거기에 관해 아뢴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高帝明幷日月 謀臣淵深 然涉險被創 危然後安

今陛下未及高帝 謀臣不如良 平 而欲以長策取勝 坐定天下

此臣之未解一也

高帝께서는 그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고, 곁에서 꾀하는 신하는 그 슬기로움이 깊은 못과 같았으나

험한 데를 지나고 다침을 입으시며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비로소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는 고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곁에서 꾀하는 신하도 장량이나 진평만 못하면서도

긴 계책으로 이기고자 하며 편히 앉으신 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臣이 알지 못할 첫 번째 일입니다.

 

劉繇 王朗各據州 論安言計 動引聖人 群疑滿腹 衆難塞胸 今歲不戰

明年不征 使孫權坐大 遂幷江東

此臣之未解二也

유요와 왕랑은 큰 고을을 차지하여 평안을 의논하고 계책을 말할 때 성인을 끌어들였으되

걱정은 배에 가득하고 이런저런 논의는 그 가슴만 메우게 하였을 뿐입니다.

올해도 싸우지 아니하고 이듬해도 싸우러 가기를 망설이다가

손권에게 자리에 앉은 채로 강동을 주고야 말았습니다.

이것이 臣이 풀지 못하는 두 번째 일입니다.

  

曹操之計 殊絶於人 其用兵也 彷彿孫吳

然困於南陽 險於烏巢 危於祁連 逼於黎陽 幾敗北山 殆死潼關 然後僞定一時耳

況臣才弱 而欲以不危而定之

此臣之未解三也

조조(曹操)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고 용병하는 데는 손자, 오자를 닮았으나,

남양에서 곤궁에 빠지고 오소에서 험한 꼴 당하며 기련에서 위태로움 겪고 여양에서 쫓기고

북산에서 지고 동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뒤에야 겨우 한때의 평정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臣같이 재주가 미약한 사람이 어찌 위태로움을 격지 않고 천하를 평정하려 들겠습니까.

이것이 臣이 알지 못할 세 번째 일입니다.

 

曹操五攻昌覇不下 四越巢湖不成 任用李服 而李服圖之 委任夏侯 而夏侯敗亡

先帝每稱操爲能 猶有此失 況臣駑下 何能必勝

此臣之未解四也

조조는 다섯 번 창패를 공격했으나 떨어뜨리지 못했고 네 번 소호를 건넜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복(李服)을 써보았으나 이복이 오히려 뺏어버렸고

하후(夏侯)에게 맡겼으나 하후는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선제(先帝)께서 매번 조조가 능력 있다고 말씀하신바 오히려 그 같은 실패가 있었는데,

하물며 신같이 재주 없는 사람이 어찌 반드시 이기기만 바라겠습니까.

이것이 臣이 알지 못할 네 번째 일입니다.

 

自臣到漢中 中間期年耳

然喪趙雲 陽群, 馬玉, 閻芝, 丁立, 白壽, 劉合, 鄧銅等, 及曲長屯將七十餘人

突將 無前, 賓叟, 靑羌, 散騎, 武騎一千餘人

此皆數十年之內 所糾合四方之精銳 非一州之所有

若復數年 則損三分之二也 當何以圖敵

此臣之未解五也

臣이 한중(漢中)에 온지 아직 한 해가 다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운(趙雲), 양군(陽群), 마옥(馬玉), 염지(閻芝), 정립(丁立), 백수(白壽), 유합(劉郃), 동등(銅鄧) 등 그 아래 장수 칠십여 명을 잃었습니다.

맨 앞애서 돌진하던 빈수(賓叟), 청강(靑羌), 산기(散騎), 무기(武騎)등 천 여명도 잃었습니다.

이들은 수십년 동안 각지에서 모아들인 정예병이요 한 고을에서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약 다시 몇 년이 지난다면 이들 셋중 둘은 줄어들 것이니 그때는 어떻게 적을 도모하겠습니까.

이는 臣이 알지 못하는 다섯 번째입니다.

 

今民窮兵疲 而事不可息 事不可息 則住與行 勞費正等

而不及早圖地 欲以一州之地 與賊持久

此臣之未解六也

지금 백성들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지만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멈추어 있으나 움직여 나가나 수고로움과 물자가 드는 것은 똑 같습니다.

차라리 일찍 적을 도모함만 못합니다. 그런데도 한 고을의 땅에 의지해 적과 긴 싸움을 하려 하시니

이것이 臣이 알지 못하는 여섯 번 째입니다.

 

夫難平者 事也

昔先帝敗軍於楚 當此之時 曹操拊手 謂天下已定

然後先帝東連吳越 西取巴蜀 擧兵北征 夏侯授首

此操之失計 而漢事將成也

무릇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일입니다.

지난날 선제께서 초(楚) 땅에서 조조와 싸움에 졌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며 말하길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는 동의 오월(吳越)과 동맹하여 서쪽의 파촉(巴蜀)을 점령한 뒤 북정하시어

마침내 하후연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는 조조의 잘못된 계책으로 우리 한(漢)이 천하통일 과업을 이룰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然後吳更違盟 關羽毁敗 秭歸蹉跌 曹丕稱帝凡事如是

그러하되 뒤에 오(吳)가 맹약을 어기매 관우는 싸움에서 패하여 죽고

선제께서는 자귀(秭歸)에서 일을 그르치시어 조비(曹丕)는 다시 천자(天子)로 칭할 수 있었습니다.

 

難可逆見 臣鞠躬盡力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竟睹 左者右見也.

무릇 모든 일이 그러하니 미리 헤아려 살피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다만, 臣은 몸을 엎드려 모든 힘을 다하여 죽은 후에 그만 둘 것입니다.

그 성패와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臣이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