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 삼국지의 주요 인물

Gijuzzang Dream 2008. 9. 28. 01:40

 

 

 

 

 

 삼국시대(三國時代) : 220~280년

 

 

삼국시대는 동한(東漢)의 뒤를 이어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 정립(鼎立) 시기를 말한다.

220년 조비(曺丕)가 한(漢)나라를 대신해서 황제를 칭하기 시작한 때부터

280년 오(吳)나라가 망할 때까지 총 61년에 이른다.

 

 

 

 

삼국의 통치자들은 자기의 실력 확장하여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모두가 각자의 경제발전에 전력을 다했고 그로 인해 이 시기의 농업 생산력은 매우 크게 발전했다.

 

조위(曹魏)는

회하(淮河) 양안 이북의 중원 지역과 진령(秦嶺) 이북의 관롱(關隴)지역,

그리고 서쪽으로는 신강, 동쪽으로는 한반도의 서북쪽에 이르는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군둔(軍屯)과 민둔(民屯)의 발전에 큰 힘을 기울여 중원의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촉한(蜀漢)은

현재의 사천, 운남 대부분과 귀주 전 지역 및 섬서, 감숙성의 일부분을 점유했다.

비옥한 토지가 천 리에 이르는 성도(成都) 평원을 지니고 있어

평소에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강동의 손오(孫吳)는

양자강 중하류와 남쪽으로 복건(福建), 양광(兩廣, 광동과 광서 지역) 및 월남 북부와 중부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 동남의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산월 지역을 경영하여

중국 동남지역 경제개발사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의 경제개발은 장차 다가올 대통일을 위한 물질방면의 준비가 된 셈이었다.

 

삼국시대는 또한 중국의 민족 대융합을 이룬 시기였다.

소수민족이 한족(漢族)의 거주지를 향해 대량 이주하여 한족과 점차 융화가 되니

각 민족 간의 경제, 문화적 교류에 진일보 발전이 있었다.

 

220년 - 조비(曹丕)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함

221년 - 유비(劉備)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촉한(蜀漢)이라고 함

222년 - 손권(孫權)이 오왕(吳王)을 칭하고 효정(猇亭)의 전투를 일으킴

225년 - 제갈량이 남중국의 반란을 평정함

229년 - 손권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오(吳)라고 함

249년 - 사마의(司馬懿)가 고평릉(高平陵) 정변을 일으킴

263년 - 조위(曹魏)가 촉한을 멸망시킴

265년 - 사마염(司馬炎)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진(晉)이라 함

280년 - 서진(西晉)이 오(吳)를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함

 

 

1대

2대

3대

4대

5대

(魏)

제왕

문제 文帝

(조비 曹丕)

명제 明帝

(조예 曹叡)

제왕 齊王

(조방 曹芳)

고귀향공

高貴鄕公

(조모 曹髦)

원제 元帝

(조환 曹奐)

연호

황초(黃初)

220-226

태화(太和)

227-233

청룡(靑龍)

233-237

경초(景初)

237-239

정시(正始)

240-249

가평(嘉平)

249-254

정원(正元)

254-256

감로(甘露)

256-260

경원(景元)

260-264

함희(咸熙)

264-265

(蜀)

제왕

소열제 昭烈帝

(유비 劉備)

후주 後主

(유선 劉禪)

연호

장무(章武)

221-223

건흥(建興)

223-237

연희(延熙)

238-257

경요(景耀)

258-263

염흥(炎興)

263

(吳)

제왕

대제 大帝

(손권 孫權)

회계왕 會稽王

(손량 孫亮)

경제 景帝

(손휴 孫休)

조정후 鳥程侯

(손호 孫皓)

연호

황무(黃武)

222-229

황룡(黃龍)

229-231

가화(嘉禾)

232-238

적오(赤烏)

238-251

태원(太元)

251-252

신봉(神鳳)

252

건흥(建興)

252-253

오봉(五鳳)

254-256

태평(太平)

256-258

영안(永安)

258-264

원흥(元興)

264-265

감로(甘露)

265-266

옥정(玉鼎)

266-269

건형(建衡)

269-271

봉황(鳳凰)

272-274

천책(天冊)

275-276

천새(天璽)

276

천기(天紀)

277-280

 

 

 

삼국지를 다시 말하다 - 이문열작가, 이중톈(易中天) 중국 샤먼대학 교수

 

“유비의 일등 책사는 제갈량 아닌 방통”

 

 

유비와 조조, 손권이 천하를 셋으로 나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중국의 삼국시대.

그로부터 비롯한 역사 기록 『삼국지』와 소설『삼국지연의』는

지금도 동양의 무궁무진한 얘깃거리다.

아시아의 영원한 고전으로 치부되는 이 텍스트를 어떻게 읽을까는 그래서 아직도 중요하다.

 

중앙일보는 15일 중국 고전에 대한 참신한 해석으로

당대의 중국 최고 인기 작가로 떠오른 이중톈(易中天) 샤먼대학 교수,

소설 『삼국지』로 초베스트 셀러를 기록한 한국 작가 이문열씨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으로 초청했다.

이중톈 교수는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구성의 차이점에 주목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문열씨는 20여 년 전 대했던 삼국지의 세계를 지금에 이르러 다시 보게 되는 감회를 털어놓았다.

두 명인에게서 이 시대에 삼국지가 지니는 의미를 들어 본다.

『삼국지강의(品三國)』라는 저서로 중국에 새삼『삼국지』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작가 이중톈은

방대한 삼국시대의 기록 가운데 소설적인 낭만성보다는 역사적 교훈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탄탄한 사실(史實)에 입각해

위(魏) · 촉(蜀) · 오(吳) 삼국이 벌인 경쟁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자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날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주최로 열린 ‘삼국지를 다시 말하다’ 포럼에서

우선 동양식 지혜의 원천이라 평가받는『삼국지』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인류의 역사는 홍수와 지진 등 천재지변과 사람이 일으킨 재앙(人禍)을 딛고 세워졌다”며

“중국의 삼국시기는 대표적인 전쟁의 시대로

우리에게 아직까지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고 말했다.

“고난과 극도로 불안한 시기에 살다간 사람들이 붉은 피로 써 내려간 이 시기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인도주의”라고 말했다.

영웅과 호걸의 지략이 부딪치면서 만들어 내는 낭만성보다는

경쟁과 반목 속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화로부터 뭘 깨우쳐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자는 얘기다.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구성이 부딪치는 정사『삼국지』와

나관중(羅貫中)의 소설『삼국지연의』에 대한 시각차도 드러냈다.

그는 “삼고초려를 하면서까지 제갈량을 채용한 유비의 리더십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역사적 사실로 보면 제갈량의 위치가 그리 높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제갈량이 소설에서는 촉나라를 유지하는 일등 공신으로 그려지지만

그는 사실 실질적인 직무를 제대로 얻지 못했던 사람”이라며

“유비는 제갈량을 그저 친구와 손님으로 대했으며 실제 일등 책사는 방통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비는 제갈량 대해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었다”며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 유선을 부탁(托孤)하는 자리에서도

다른 신하인 이엄(李嚴)을 배석시켰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소설의 큰 단원의 하나인 적벽(赤壁)대전에 대한 장면도 많이 부풀려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조조의 80만 대군은 실제 20만~25만 병력을 과장한 숫자”라며

“조조의 패전 원인도 바람을 빌려 화공(火攻)을 선택한 제갈량의 지략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핵심 원인은 조조의 군대가 얻었던 유행병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촉의 명장인 조자룡(趙子龍)이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왕실로부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 아니냐에 대한 그의 해석도 눈 여겨 볼 만하다.

“소설에서 촉에는 관우와 장비를 비롯 마초와 황충, 조자룡 등 오호상장(五虎上將)이

있었다고 적었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며

“조자룡을 뺀 네 명만 실제 장군에 임명됐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조자룡은 실제 매우 뛰어난 장수이기는 했지만

유비를 향해 쓴소리를 하는 장수라서 미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그는 또 “유비가 죽기 전의 마지막 전쟁에서 오나라 장수 육손에게 대패를 했는데,

조자룡은 이 싸움에 가장 크게 반대한 사람의 하나”라며

“결국 유비의 리더십을 보더라도 지도자가 된 사람은

부하로 하여금 진실과 제대로 된 의견을 말하게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고전에 나타나는 ‘좋은 리더십'
에 대한 견해도 눈길을 끌었다.

그는 “좋은 리더는 결국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아가 인재의 마음을 얻는 인물”이라며

대표적인 사례로『초한지(楚漢志)』의 영웅이자 한(漢) 왕실을 세운 유방을 꼽았다.

그는 “유방의 적장인 항우는 혼자만 뛰어났지 밑에 사람이 없었다”며

“그러나 유방은 스스로 잘 아는 게 없었으나

주변에 사람을 두고 일이 생길 때마다 그들에게 묻는 자세를 취했다”고 말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유방의 직업 자체가 리더”였다는 것.

유방은 인재 선발에도 뛰어났으며 참모들의 아이디어를 긍정적으로 받아줬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유비의 성공 사례도 마찬가지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한번 옆에 둔 사람은 끝까지 형제처럼 챙겼던 사람이 유비”라는 설명이다.

조조는 모든 공과를 부하에게 일임하는 스타일이어서

“공을 세운 부하에게 선물을 줄 때는 입이 딱 벌어질 만큼 크게 주면서도

책임을 묻는 데는 매우 엄했다”는 평가다.

그는 또 “오나라의 손권은 항상 젊은 인재를 등용해 좋은 부하들이 면면히 이어졌다”며

“주유와 노숙, 여몽으로 이어지는 참모가 결국은 손권을 만들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중톈은 강연 말미에 『삼국지』의 반면교재적인 성격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화에 따른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요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삼국지식의 모략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며

“그러나 당대의 역사적 환경은 ‘상대방을 내가 어떻게 먹어치우느냐’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차지한다(一家獨當)’는 사고를 보여주고 있어 경계해야 할 점이 많다” 했다.

그는 이어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사이에 벌어지는 ‘너 죽고 나 살자’식의 싸움 정신은

이제 지양해야 할 것”이라며 “서로가 승리하는 윈-윈의 관점, 조화와 협력으로 상생의 발전을

추구해야 할 시점에서 삼국지의 정신세계는 맞지 않는 측면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는 새로운 시각에서 삼국지의 세계를 다시 살펴 현대인의 교훈으로 되살려야 할 것”

이라고 덧붙였다.

- 이중톈(易中天) 샤먼대학 교수,
1947년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태어났다.

문화대혁명 당시인 1965년엔 신장(新疆)자치구로 하방돼 노동을 했다.

1981년 우한(武漢)대 문학석사 취득 후 줄곧 강단에 섰다.

현재 샤먼(廈門)대학 인문대학원 박사지도 교수.

문학· 예술· 미학· 심리학· 인류학· 역사학 등 학제 간의 벽을 넘나드는 글쓰기와 강연에 탁월하다.

그는 2005년 중국중앙방송(CC-TV)의 인문학 강좌인 ‘백가강단(百家講壇)’에 출연해

『초한지』와『삼국지』를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중국에 고전 열풍을 몰고 온 주인공이다.

무명의 학자가 TV 강연을 통해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는 ‘이중톈 신드롬’을 만들기도 했다.

포브스 중문판이 선정한 ‘2008 명인방’ 42위에 올랐다.

국내에도『중국도시 중국사람』『삼국지강의』『초한지강의』『제국의 슬픔』『품인록』

『삼국지강의 2』등이 번역돼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첫 방한에 맞춰 출판된『이중톈, 제국을 말하다』에서는

중국의 역대 왕조를 망하게 만든 구조적 시스템을 특유의 쾌도난마식으로 설명했다.
- 중앙일보, 2008-05-16

- 유광종기자, http://blog.joins.com/ykj01/

 

 

 

◆◆ 술로 영웅을 논한 조조

 

  

청매정에서 조조와 유비가 당대의 영웅론을 이야기하는 내용의 삼국지 우표.

유비가 조조 진영에 머물 때 하루는 조조가 유비를 청하여 술을 마셨다.

그들은 통쾌하게 술을 마셔가면서 천하의 대사를 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여 금방이라도 큰비가 올 것 같았다.

 

조조는 유비에게 오늘날의 영웅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였다.

유비는 “나는 잘 모르겠소” 말하자

조조가 이어 말하길 “그렇게 겸손해 할 필요 없소”라고 대답하였다.

유비가 “회남의 원술은 병졸들이 정통하고 양식이 충분하니 영웅이라고 할 만하지요”했다.

조조가 웃으며 “그는 무덤 속의 해골과 같소. 언젠가는 내가 수습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유비가 “하북의 원소는 기주를 점거하고 있고,

부하 중에는 유능한 사람이 아주 많으니 영웅이라고 할 만하지요”라고 하자,

조조가 큰소리로 웃으며 “원소는 표면상으로는 대단할 것 같으나,

실제로는 담이 적고 하는 일이 우유부단한 사람이오.

중요한 일을 해야 할 때가 되면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또 작은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을 다하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은 영웅이라 할 수 없소”라고 말했다.

유비는 하는 수 없이 “난 정말로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조가 말했다.

“영웅이란 웅지가 커야 하고 뱃속에는 좋은 술책으로 가득해야 하며

우주의 지혜를 모두 저장하고 있어야 하며, 천지가 하고자 하는 바를 호흡할 수 있어야 하오”

 

유비는 조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반문하길 “그렇다면 누가 영웅이오?”하였다.

조조는 유비를 가리키고, 자신을 가리키면서

“오늘날 천하의 영웅은 오로지 당신과 나 두 사람뿐이오”라고 답했다.

 

유비는 조조가 바로 자신을 사탐한 것임을 알고는

마음속이 서늘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져서 젓가락을 땅 위에 떨어뜨렸다.

이때 마침 하늘에서 번개가 치더니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유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뇌성이 크기도 하구나!”하고는

자신이 마음속으로 놀랐음을 감추었다.

그런 후에 사람들을 시켜 땅에 떨어진 젓가락을 집어오게 하고는

조조와 더 한참을 담론하다가 조조에게 이별을 고하고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 <중국역사박물관 3> 중국사학회 엮음, 강영매 옮김,  범우사, 71쪽

 


<삼국지>에 나오는 세 군주, 즉 조조 · 손권 · 유비는 모두 영웅호걸로서 출중한 인물이다.

군웅이 할거하던 시대에 살아남아 각기 한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하늘이 내린 운과 통 큰 국량, 인품에 각고의 노력이 두루 구비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사실 창업 과정에서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조조는 전쟁터에서 아들과 조카를 죽였고,

유비는 부인과 아들 등 가족들이 몇 차례 포로가 되기도 했다.

나라를 물려받은 손권은 비교적 평탄하게 보냈으나 스스로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조조와 유비가 전장에서 죽을 뻔한 것은 부지기수다.

모든 것을 걸고 건곤일척의 승부에 나서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세 사람은 오늘날로 치면 위대한 경영자의 반열에 오를 사람들이다.

각자 장 · 단점이 달라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나 굳이 서열을 매긴다면 어떻게 될까.

소설 <삼국지연의>에선 유비를 정통으로 높이고 또 가장 위대하게 평가하고 있다.

동정도 많이 받고 인기도 높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선 조조를 더 높이 친다.

사실 이루어 놓은 실적이 그렇다.

그것도 요행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하나씩 쟁취한 것이다.

- Forbes Korea, 15호 (2004.05.12)


 

 

(1) 유비의 리더십

 

 

  

유비(劉備 : 161-223)

탁군의 빈한한 집안 출신으로 자는 현덕(玄德)으로

스스로 전한 경제의 황자였던 중산왕(중山王) 유승(劉勝)의 후손이라 자부했다.

유승은 아들이 120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300년뒤 자손들이란 이미 장삼이사에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는 태양에 비할 수 있는 漢나라의 마지막 자락을 붙잡고 그것을 명분으로 일어선,

그리고 漢의 부흥을 죽을 때까지 갈망한 포의지사(布衣之士)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유비가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식객으로 있던 서주(徐州)의 주인 도겸(陶謙)에게 목(牧) 자리를 승계받은 이후이다.

이후 원술과 조조, 다시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지하던 그는 제갈량을 만남으로써

마침내 천하를 三分하여 그 하나인 촉(蜀)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촉한(蜀漢). 역사가들은 그 나라를 삼국의 하나로 기억할 뿐 정통왕조에 삽입할 것을 거부했다.

유비는 한때 천하를 삼분하여 그 한쪽을 지니고 있었던 패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촉의 유비는 오랜 세월 동안 기억되고 반추되며,

가끔씩 역사 무대의 주인공으로 재등장한다.

 

특히 <삼국지연의>라는 통속 연의소설로 주목받은 그는

장비, 관운장, 조자룡 그리고 와룡선생 제갈량과 하나가 되어

간웅 조조, 우유부단한 손권과 더불어 흥미로운 진영을 펼쳐보인다.

소설을 통해 그들은 새롭게 태어난 셈이다.

역사서에서 유비의 지위는 미비하다. 그럼에도 그가 조조보다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도 신의, 우정, 명분, 자애, 겸손 등 삶의 미덕이

애틋함과 더불어 그의 한 몸에 기탁되어 그려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 불가사의한 유비의 매력 - 한번 보면 심복해 평생을 섬겨

 

유비는 시작부터가 조조와 손권과 달랐다. 유비는 근거지도 없고 무용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유비는 공손찬, 도겸, 여포, 조조, 원소, 유표, 손권에게 신세를 진다.

신기한것은 신세를 지면서도 상대방이 매우 그를 무겁게 대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세를 베푸는 쪽에서 더 못해줘 안달을 하고 애써 붙잡아 두려 했다.

세력에 비해 명성이 높아 군웅들이 유비와 다투어 사귀고 자기편으로 만들려 했다.

그 예는 당시의 실력자 조조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조는 유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했다.

유비가 공궁한 신세가 되어 자기 진영에 와 있을때도 늘 상객 대우를 하여

같은 수레를 타고 같은 상석에 앉았다.

여포 또한 당시 자기 이익에 따라 수시로 주인을 바꾼 매우 의리 없는 사람이었는데,

유비에게만은 호의를 보이고 잘해 주었다.

 

유비를 한번 보면 대개 그의 인품에 반한다.

유비가 그토록 궁핍하게 지낼 때도 천하의 인재들이 유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의형제를 맺고 생사고락을 같이하기로한 관우, 장비는 말할것도 없고

조자룡, 제강공명, 법정,당시  초일류 인재들이 모두 유비가 별 볼일 없을 때 모인 사람들이다.

이상과 원칙을 따지는 바른 선비에서 책략과 패도를 서슴지 않는 책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여들었다. 개성이 독특한 이들을 잘 달래 조화를 이루고 상승에너지를 내게하는 

유비의 능력은 타고난 리더십이고 인간적 매력이다.

 

유비는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이상과 원칙을 지키는 뱃심과 결의를 가졌다.

제갈공명이나 방통 같은 참모가 좋은 계책을 건의해도

유비가 차마 인의상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유비가 평원이라는 조그만 마을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

유비는 그 마을을 잘 다르려 그일대에서 인망이 높았다.

이때 옛날부터 세력을 부리던 사람들이 유비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는데,

자객이 유비를 보고는 '나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 왔지만 막상 백성들이 많이 따르는 당신을 보니

도저히 죽일 마음이 나지 않는다"로 고백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서주의 유지 중 미축이라는 재산가가 있었는데 이때 유비의 인품에 반하여

자기의 전 재산을 군자금으로 내놓고 유비를 지원한다. 또 자기 누이를 유비의 아내로 준다.

미축은 자기 재산과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유비를 따라 천하를 떠돈다.

미축은 촉나라까지 함꼐한 충신중 한명이다.

이렇듯 유비의 인간적 매력은 사람들을 한순간에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유비가 형주에서 조조군의 습격을 받아 도망갈때 많은 사람들이 유비를 따라나서는데

가재도구를 실은 수레가 수천대에 이르고 피란행렬이 몇십 리에 뻗쳤다.

조조의 추격병이 바짝 따라오자 애가 탄 신하들이 피란민은 떼어놓고 빨리 피신하자고 청한다.

하지만 유비는 모든일은 백성이 근본이 되는것인데 백성을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고 한다.

당장의 이해를 초월한 유비의 이런 깊고 넒은 마음은 유비를 촉의 군주로 만든다.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하기 전의 일이다. 유비는 조조와 원소 두사람 모두에게 쫓기고 있었다,

넓은 천지에 몸 둘 데가 없었다. 유비는 울면서 말한다.

'당신들은 천하의 인재들로서 어느 주인에게 가도 환영받을 것이다.

박복한 나를 따라다니느라 너무 고생이 많다.

나의 각박한 운명 때문에 당신들의 전도가 너무 어둡다.

나도 나의 앞길을 장담할 수 없으니 나를 떠나 좋은 주인을 섬기라'

유비가 이 말을 하자 모두가 통곡한다. 유비는 이들의 장래를 위해 떠나라 말한 것이다.

사심 없는 진실된 유비의 마음을 모든 이들에게 전해졌다.

유비는 아랫사람들을 신뢰하였고 이들도 그걸알아 유대감이 두터웠다.

 

유비는 보통때는 매우 관대하고 인자하지만 결정적일 땐 냉정한 면도 보인다.

여포의 경우가 그러하다. 여포가 한때 오갈 데가 없어 유비가 거두어 주었는데,

오히려 유비의 근거지를 뻬앗아 버린다.

이때 유비는 두번이나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여포는 유비의 가족을 보호해준다.

어쩐일인지 의리없기로 소문난 여포라도 유비에게는 호의를 보였다.

이러한 여포가 결국 조조와의 싸움에서 패해 사로잡히고 마는데 이때 유비는 조조의 편에 있었다.

여포가 부하로 받아달라고 애원하지만 유비는 조조에게 정원과 동탁의 일을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이로인해 여포는 죽임을 당한다.

유비는 사소한 인정에 얾매이기보다 천하의 해물은 없애버리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비는 평생  여러 사람의 신세를 져도 고마운 마음 때문에 자기가 가는 길을 바꾸지 않았다.

여러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득이 되는 거래를 했다. 그러면서도 인의군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맨 처음 공손찬의 신세를 크게 졌는데

공소찬이 원소에게 패하여 일찍 망하는 바람에 유비와는 좋은 관계로 끝난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은 적대관계가 되거나 전쟁을 치르기도 한다.

이는 유비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옛날에 신세진 사람들과도 싸우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런 점에서 유비는 매우 냉철했다. 유비는 그저 솜같은 리더자는 아니었다.

솜 속에 싸인 강철을 가진 인물이었다.

 

 

2. 아랫사람 끝까지 신뢰하고 백성을 진심으로 보살펴

 

유비 밑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은

대의명분이 좋고 성심성의로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 기본이 되지만

사람을 감동시키는 감성리더십도 한몫을 한다. 그런 감성도 진실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진실된 마음 없이 연기만으론 일시적으로 사람을 감동시킬지 모르나

많은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

유비는 어찌 보면 바보스럽다고 할 정도로 진실 될 때가 많다.

그 때문에 손해도 많이 보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이익이 됐다.

그렇다고 유비가 욕심과 야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짜 큰 욕심과 야심이 있었기에 작은 것은 양보한 것이다.

 

유비의 경우를 보면 천성인지 전략인지 작게 양보하고 크게 얻는다.

타고난 마음가짐이 없이는 그런 생각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그걸 일일이 계산해서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품성이고 그릇이라 할 수밖에 없다.

보통 땐 그런 흉내라도 낼 수 있을지 모르나 생사가 걸린 위급한 상황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황권(黃權)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유비가 촉나라에 들어가 얻은 장수인데 성질이 곧고 충성심이 강했다.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와 싸움을 벌일 때 같이 갔다가 촉군이 참패하는 바람에

퇴로가 완전히 막혔다. 유비도 목숨만 겨우 건져 백제성(白帝城)에 피신했다.

황권은 할 수 없이 위나라에 항복했다.

위나라에선 환영받았는데 촉나라에서 황권의 가족을 모조리 죽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황권은 “헛소문일 것이다. 우리 주군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태연했다 한다.

과연 촉나라에선 항복한 장수의 가족을 살려 둘 수 없다며 처단하자고 했으나 유비는

“황권이 항복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가족들을 잘 보호해 주어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 후 가족이 잘 있다는 소식을 들은 황권은 유비의 은혜에 거듭 감사하고

주위에서도 군신 간의 깊은 신뢰관계에 감탄했다.

후에 유비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황권은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눈물을 흘렸다 한다.

 

장판파에서 조자룡은 유비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적진 속을 헤매고 다니다가 하늘의 도움으로

먼저 감(甘)부인을 구한 뒤 후주(後主)가 되는 아들 유선(劉禪)을 찾는데 성공한다.

조자룡은 유선을 품에 안고 적진 속을 뚫고 나온다.

조조가 높은 곳에 올라 전장터를 바라보니 한 장수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전장터를 누비는데

이르는 곳마다 위나라 장수들이 피를 쏟고 쓰러진다.

조조가 놀라 옆에 있던 조홍(曹洪)을 보고 저 장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조홍이 내려가 알아보고는 “유비의 부하 조자룡”이라고 복명했다. 사람 욕심이 많은 조조는

“조자룡을 붙잡아 내 부하로 만들 테니 절대 활을 쏘지 말고 사로잡아 데려 오라”고 명령한다.

조자룡으로선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활을 쏘지 않으니 창과 칼로써 싸우면 되는데 그 방면에선 조자룡이 천하무적이었다.

덕분에 조자룡은 손끝 하나 다친데 없이 적진을 빠져 나올 수 있었고 품속에 있던 유선도 무사했다.

 

조자룡이 땀투성이가 되어 후방에서 한숨 돌리고 있던 유비를 찾아가

유선을 품속에서 꺼내니 그때까지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유선을 건네받은 유비는 “이 하잘 것 없는 아이 때문에 나의 귀중한 장수를 잃을 뻔했구나”며

유선을 내던져 버렸다 한다. 조자룡이 얼른 받아 무사했지만 몹시 감격했을 것이다.

이런 주군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새삼 각오했을지 모른다.

 

유비에겐 그런 매력이 있었다.

일찍이 장비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유비가 관우와 같이 전쟁터에 나가면서 장비에게 본거지 성과 가족을 맡기고 갔다.

그리고 술 많이 먹지 말고 잘 지키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처음 며칠은 조심하더니 결국 장비는 술을 마시고 사고를 쳤다.

적군에게 성을 뺏기고 가족을 남겨 둔 채 유비에게로 도망을 갔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유비는 기가 막히면서도 장비를 위로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관우가 몹시 장비를 나무랐다. 그러자 장비는 칼을 빼 스스로 목을 찌르려 했다.

이때 유비는 급히 말리면서 “옛날부터 처자는 의복이고 형제는 손발이라 했는데

의복은 갈아입을 수가 있지만 손발은 갈아 낄 수 없는 것이다. 아우는 너무 상심 말라”며 달랜다.

요즘 같으면 큰일 날 말이지만 당시엔 그런 말이 통했다.

난세이고 매일 전쟁을 치르다 보니 처자는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다.

유비인들 어찌 가족이 소중하지 않겠는가마는 형제간의 의리나 군신간의 관계가

더 무겁다고 본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장비는 감격하여 엉엉 울었다 한다.

 

유비는 말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한마디 할 땐 상대방을 감격시키곤 했다.

삼국지 정사(正史)에 유비가 아랫사람들을 잘 챙기고 말이 적으며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도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위대한 경영자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많은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말이 적을 수밖에 없다.

말수는 적어도 자신의 뜻과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3. 현대적 관점에서 본 『삼국지』의 비합리적 요소들

    인물의 전형성 (유비편)

 

나관중『삼국지』에서 유비는 오직 충의지사로만 묘사되어 있다.

유비의 허물은 대체로 해명도 없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관중『삼국지』를 유심히 읽어보면 여러 가지 미스터리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작자가 아무런 해명도 없이 유비를 비호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보면 유비보다 많은 허물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유비를 정통으로 보고 충의지사로 서술하고 있는 나관중의『삼국지』에도

유비의 허물은 많이 발견되고 있다. 큰 허물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비는 처자식을 버리고 홀로 도주한 예가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 일의 뒷수습은 주로 관우 ․ 여포(呂布) 등이 하고 있다.

유비는 많은 사건들에서 단기(單騎)로 도망하여 일신(一身)의 안전만을 추구하고 있다.

 

둘째, 여포는 여러 번 유비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주는데

유비는 이것을 이용하여 결국 여포를 죽이고 만다.

물론 여포의 죽음이 유비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유비는 조조에게 여포의 죽음에 결정적인 조언을 한 사람이다.

여포는 정사의 기록을 보아도 유비를 끔찍이 생각해준 사람이었다.

유비는 적어도 여포에 관한 한 의리가 없는 사람이다. 만약에 유비를 충의지사로 묘사하려면

결과는 여포가 아주 파렴치한이나 모리배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나관중의『삼국지』는 여포를 인간 이하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셋째, 유비는 유력자들 사이를 오고간 사람이다.

즉, 유비는 여포-원소-조조-유표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 사람이고,

이들 세력을 이간질하여 전쟁에 나서게 한 사람이다.

외형적으로 유비는 의(義)를 숭상한 듯이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 이득을 위해 움직인 사람이다.

만약에 유비가 진정으로 한실부흥(漢室復興)을 하려 했다면

위나라에서 퇴위된 헌제(獻帝)를 다시 데려와 황제가 되게 해야 할 것인데

이 점에 대하여 나관중은 침묵하고 있다.

 

넷째, 유비가 원술을 치러 갔을 때, 서주를 잃은 것에 대해

장비(張飛)가 조표를 구타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유비가 통치를 잘못했거나 국가 경영을 잘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나관중『삼국지』에 나타나는 장비의 캐릭터는

유비의 허물을 덮어주는 좌충우돌형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장비가 그 같은 속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주를 여포에게 전적으로 빼앗긴 이유로는 타당하지 않다.

실제로 나관중의『삼국지』에 나오는 장비가 중앙에서 감찰관으로 파견된 독우를 때리는 장면은

정사에서는 유비가 때린 것으로 되어 있다.

소설에서 다혈질이고 좌충우돌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캐릭터로,

소설가들은 이들을 이용해 어떤 상황이든지 반전시킬 수 있다.

 

다섯째, 유비는 조조와 연합하면서 양봉(楊奉)을 죽였다.

양봉은 나관중『삼국지』의 내용만으로 보면

이각 ․ 곽사의 난 때 헌제를 힘겹게 낙양으로 모시고 온 인물로, 당시로 보아서는 충신인데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노략질을 했기 때문’ 이라는 엉뚱한 이유를 대고 있다.

나관중의『삼국지』는 그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여섯째, 유비는 동승(董承)과 함께 조조를 죽이기로 모의했지만

그것을 방기(放棄)하고 일신의 안위를 위해 황급히 조조를 떠나간다.

동승과 함께 조조를 죽이기 위해 모의한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는데,

결국 유비만이 피신하여 살아남은 것이다.

 

일곱째, 유비가 자신의 양자 유봉(劉封)을 죽인 것도

나관중『삼국지』에서는 유봉이 관우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제갈량과 유비가 합작으로 유봉을 죽인 것이다.

유봉이 무용(武勇)이 뛰어나고 군사상의 공적이 많기 때문에

평범한 후계자인 유선이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을 예상하여 유봉을 죽인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물론 이 같은 허물만으로 유비가 천하를 경영하는 데 부적절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분명히 성군(聖君)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유비는 현대적으로 보더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자수성가형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대세를 기다릴 줄 알고, 무너져가는 한나라를 붙잡으려 애썼으며,

선비를 최대의 예(禮)로써 대하는 존사주의(尊士主義)의 대표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유비는 재능 있는 인물을 만나면 허리를 굽혀 맞이하였기에 천하의 인심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유비의 존사주의는『삼국지』의 다른 영웅들이 따라가기 힘든 유비만의 장점이었다.

아마『삼국지』의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주공(周公)에 비교적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유비일 것이다. 현대적인『삼국지』는 이 점을 얼마든지 밝힐 수 있다.

때문에 인물의 전형성에 집착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완전한 인간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외면당하거나 역사를 엉뚱하게 이해하는 누를 범할 필요가 없다.

- <삼국지해체> 장정일, 김운회, 서동훈 공저/ 김영사

 

 

 

 

(2) 제갈량의 리더십

  

  

 

 

 

 

 

 제갈량(諸葛亮 : 181-234)

자는 공명(孔明)이고 낭야 양도(산동성 기남) 출신이다.

융중산(隆中山 : 호북성 양양)에 은거하고 있었기에 와룡(臥龍)선생이라 일컬어졌다.

207년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응하여

이른바 융중대(隆中對 : 형주와 익주를 손에 넣고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를 물리쳐

천하를 도모해야 한다는 건의)의 건의와 더불어 그에게 몸바칠 것을 결심했다. 

두보는 760년 성도에 머물면서 제갈공명을 추모하며 쓴 <촉의 재상(蜀相)>이란 시에서

"삼고초려를 빈번히 한 것은 천하를 위한 헤아림이었고,

二代의 왕업을 열고 이은 것은 늙은 신하의 마음이었다.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길이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게 하는구나"라고 읊었다. 

 

제갈량은 유비를 도와 촉한왕조를 건립한 뒤 승상에 올랐으며, 수리관개 시설을 건설하는 등

사천 지방의 생산을 발전시키고 다른 한편 후방의 안전을 위해

귀주와 운남성의 소수민족과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이른바 맹획(孟獲)을 7번 잡아 7번 놓아준

칠금칠종(七擒七縱)은 바로 이러한 사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223년 유비를 이어 유선(劉禪)이 즉위한 뒤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을 시도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234년 오장원(五丈原)에서 위나라 대장 사마의(司馬懿)와 결전하던 와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문집 25권이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일실되고

<출사표(出師表)> 등 천하의 명문 등이 남아있을 뿐이다. 

  

 

1. 삼고초려의 정성

 

높은 뜻과 열성에 ‘臥龍’도 감동

평생을 지극한 충성으로 보답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제갈공명을 맞아들인 것은

유비가 평생 한 일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공명이 참가한 후 유비 진영은 전략과 시스템을 갖추고 천하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그 전의 유비 진영은 뜻만 높을 뿐 의리로 뭉친 임협집단에 가까웠다.

친척들로만 구성된 시골 영세기업이 대기업으로 도약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유비의 제갈공명 영입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스카우트이기도 하다.

CEO가 성공하려면 2인자를 잘 만나야 한다.

훌륭하면서도 1인자가 될 욕심이 없는 2인자를 맞아 잘 쓰는 것은 위대한 CEO의 안목이며 통이다.

삼국지 시대엔 위나라 조조의 순욱(荀彧)이나 오나라 손권의 노숙(魯肅)이 비슷한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도 제갈공명이 단연 뛰어나다.

 

유비와 제갈공명은 공식적으론 군신(君臣) 관계지만

실질적으론 같은 이념을 가진 동지요, 가족이며 공동운명체라 할 수 있다.

둘은 맨주먹으로 촉나라를 세운 창업 동지다.

대개 창업 동지도 나중엔 안 좋게 헤어지기 쉬운데 둘은 끝까지 아름답게 갔다.

 

유비의 삼고초려가 그토록 빛나는 것은

좋은 사람을 모시기 위한 유비의 지극한 정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윗사람이 좋은 사람을 끌어올 땐 이 정도의 정성을 들여야 하고,

아랫사람이 좋은 주인을 정하려면 이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해 준다.

삼고초려 이야기는 사실과는 약간 다르다는 주장도 있으나

오랜 세월 사람들의 머리에서 생각해낸 인재 영입의 이상적 모델이라 보면 될 것이다.

 

삼고초려는 가장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이상과 뜻이 맞아야 하고

서로의 전략과 인간성에 신뢰를 가져야 하며

마지막으로 절차에 있어서도 정성과 예의를 다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유비가 공명을 찾아 갔을 땐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 얹혀 지낼 때였다.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하나 근거지도 없고 힘도 없었다.

유비 자신 이미 47세의 장년에 달했는데

뜻만 높을 뿐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어 몹시 초조할 때였다.

 

이때 유비는 형주 명사 사마휘(司馬徽)를 만난다.

사마휘는 형주 지식인들의 대부(代父) 같은 존재로서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비가 자기의 고달픈 처지를 하소연하자 사마휘가 묻는다.

“왜 그렇게 고달픈 줄 아십니까”

“제가 박복해서 그렇지요”

“그게 아닙니다. 수하에 좋은 사람이 없어 그렇습니다”

“제 밑에도 인재들이 많습니다. 무장으론 관우 · 장비 · 조운이 있고

참모로는 미축, 손건 등이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천하를 경영할 만한 전략을 짜고 그 큰일을 만들어 갈 만한 큰 인재가 없습니다.

관우, 장비, 조운은 1만 명을 대적할 수 있는 명장이나

그들을 부릴 만한 사람이 없어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축, 손건 등은 충직하지만 심부름꾼 정도입니다.”

 

유비는 사마휘에게 자기 진영에 참여해 도와달라고 한다.

사마휘는 자기는 그럴 재목이 못된다고 하면서 와룡(臥龍)이나 봉추(鳳雛) 중

어느 한 사람만 얻어도 천하를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형주엔 전란을 피해 온 지식인 명사들이 많았다.

공명도 북쪽 산동성 낭야(琅邪) 사람으로 어릴 때 형주로 와서

양양(襄陽) 부근 융중(隆中)에서 농사를 지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준재로서 명성이 높아 젊은 지식인 사회의 대표주자 격이었다.

공부를 위한 공부만 한 게 아니고 국가경영과 치세에 관한 실용적 공부를 많이 했다.

언젠가는 좋은 주인을 만나 천하 사람들을 위해 뜻을 펴 보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엎드려 있는 용 즉, 와룡(臥龍) 혹은 복룡(伏龍)이라 불렸던 것이다.

 

공명은 자신을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비유하곤 했다.

두 사람 다 좋은 임금을 받들어 나라를 융성케 한 사람들이다.

관중은 재상이고 악의는 장군인데, 공명도 전장에 나가면 장군이 되고 돌아오면 재상이 되는

출장입상(出將入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공명은 창업하거나 왕이 되기보다 좋은 군주를 보좌해 뜻을 펴려는

힘 있는 전문경영인의 길을 처음부터 지향했던 것이다.

공명은 처가가 형주에서 알아주는 명문이었다. 유비에겐 더할 나위 없이 탐나는 인물이었다.

유비가 형주 지식인들을 끌어들이고 널리 인심을 얻는 덴 가장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유비는 서서(徐庶)라는 인물을 만난다.

서서는 공명과 벗하던 인물로 유비의 대의명분과 인품에 반해 한동안 유비 밑에서 일을 한다.

그러나 서서의 어머니가 조조에게 잡혀가는 바람에 유비 밑을 떠나게 된다.

이때 서서가 공명을 다시 추천한다.

유비는 사마휘에게 공명 이야기를 들었다며 한 번 데려오라고 말한다.

서서는 공명은 천하의 인재로서 데려올 게 아니라 유비 자신이 모시러 가는 것이 예의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유비는 공명을 찾아갈 결심을 한다. 아무리 공명이 탐나도

유비의 지위에서 자신보다 20세나 어린 백면서생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세 번씩이나 찾아간다. 그런 유비의 겸허함과 정성이 공명을 움직였는지 모른다.

공명이 은거하고 있던 융중은 당시 형주의 수도 양양에선 한 30리 거리지만

당시 유비가 살고 있던 신야(新野)에선 200리 거리다.

겨울 눈보라 속에 찾아갔다가 허행을 하자 봄철에 다시 찾아간 것이다.

같이 갔던 관우와 장비는 불평이 많았지만

유비는 좋은 사람을 모시려는 나의 정성을 보이는 것이라 말하고 묵묵히 길을 재촉한다.

이런 정성만으로도 공명은 거절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공명으로선 마음속으로 작정을 해 놓고 유비의 정성을 시험해 보았는지 모른다.

어차피 유비 진영으로 가려면

그 정도의 예우는 받고 나가야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을 모시는 덴 절차가 중요하다.

그런 대접을 받고 갔다는 것을 널리 알려야 세상에 권위도 서고 말발도 먹히기 때문이다.

또 모시는 사람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세 번째에야 공명을 만난 유비는

자기의 꿈과 포부를 말하고 자기를 좀 도와 줄 것을 간곡하게 청한다.

유비는 “지금 천하가 어지러워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한나라 왕실은 기울어져 조조가 전횡을 부리고 있지만 말릴 힘이 없습니다.

한실 후손인 저는 한실 부흥을 도모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니

선생의 좋은 재주를 빌려주시기 바랍니다”하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유비의 정성에 감복한 공명은 자기 나름의 시국관과 전략을 이야기한다.

“지금 천하가 어지러우나 차츰 질서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북쪽은 조조가 강적 원소를 깨고 확고하게 터전을 잡아 잘하고 있으니

당분간 그 세력을 꺾기 어렵습니다.

동쪽 강동(江東) 지방은 이미 손권이 삼대에 걸쳐 기반을 닦고

장강(長江)의 천험(天險)에 의지해 웅거하고 있으니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형주 지방은 천하의 배꼽에 해당하는 요지이지만,

형주목 유표는 나이가 많고 패기가 없어 자기 땅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옆에 붙어 있는 익주(益州) 지방도 옥야천리(沃野千里) 좋은 땅이나

지금의 주인 유장(劉璋)은 그 땅을 간직할 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먼저 형주를 차지한 다음 익주를 병탐해

북쪽의 위나라, 동쪽의 오나라와 솥발 같은 3각의 형세를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어 위나라와 대항하면서 차츰 힘을 키워

장차 천하를 통일하는 전략을 써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유명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다.

 

이제까지 눈앞의 일에만 매달리다가 이런 원대한 전략을 한 번 듣고 나니

유비는 눈앞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유비는 몇 번이나 탁월한 안목이고 전략이라고 감탄한다.

두 사람의 뜻과 이상, 전략이 같음을 확인한 것이다.

유비는 공명에게 같이 가서 그 천하 경영의 실행을 도와 달라고 간청한다.

공명은 처음엔 세상으로 내려갈 생각이 없다고 사양한다.

이때 유비는 다시 예의 눈물을 흘린다.

선생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유비가 어떻게 천하전략을 펴 보며 불쌍한 백성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통곡까지 한다. 공명은 마음이 흔들려 유비와 같이 갈 생각을 한다.

그날 밤 유비는 초려에서 묵으며 공명과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다음날 같이 신야로 간다.

드디어 유비는 공명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정말 큰일을 한 것이다.

위대한 경영자는 자기 스스로 바쁘게 일하는 게 아니라 좋은 사람을 찾아 일을 맡기는 것이다.

 

공명은 초려를 떠나면서 “내가 유장군의 간곡한 말씀을 저버릴 수가 없어 같이 가기로 했다.

내가 공을 세우고 난 다음엔 다시 융중으로 올 것이니 그때까지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동생 제갈균(諸葛均)에게 당부한다.

공명으로선 어느 정도 일을 마무리한 다음엔 돌아오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공명은 그 길로 유비를 따라가 54세에 오장원(五丈原) 전장에서 장렬히 병사하기까지

유비는 물론 그 2세, 유선에까지 충성을 다한다.

공명 없는 유비 황제나 촉나라는 생각할 수가 없다.

유비로선 공명을 처음 모실 때 삼고초려의 수고를 했지만 그 수고는 크게 보답받은 것이다.

 

공명은 왜 유비를 택했을까.

유비의 대의명분과 간곡한 정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현실적인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형주의 유표에겐 실망한 뒤고,

남은 것은 조조와 손권인데 조조와는 아무래도 궁합이 맞지 않았다.

조조 스스로 총명하고 치밀하여 공명이 자유롭게 재주를 펼칠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다.

조조 밑엔 이미 많은 인재들이 있어 공명이 들어갈 공간이 별로 없다.

또 공명은 근엄하고 성실한 성격인데

조조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패도(覇道)와 기계(奇計)에 능하다.

조조는 한나라 승상으로서 한실을 받들고 있으나 언젠가는 한실을 폐하고

자기 왕국을 세우리라는 것을 지혜로운 공명은 예상했는지 모른다.

 

손권은 지역적으로 강동을 기반으로 한 수성형 CEO여서 공명의 천하경영엔 아무래도 미흡하다.

또 하나 걸리는 것은 공명의 형인 제갈근(諸葛瑾)이 이미 손권의 참모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명은 한실 부흥을 내세우는 유비가 대의에도 맞고,

무엇보다도 유비의 성실한 인품과 관대함에 끌렸을 것이다.

유비라면 통이 커서 폭넓은 재량권을 줄 것이니

한 번 마음껏 뜻과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게 아닐까.

공명은 결국 사람과 가능성을 보고 별 볼일 없던 유비를 선택한 셈인데, 당시로선 대단한 결단이다.

공명은 세속적 가치보다 일할 보람과 장래에 투자한 것이다.

공명도 물론 어려움이 많으리라는 것은 짐작했을 것이다.

이미 확고한 터전을 잡은 조조나 손권의 세력에 대항해 새 터전을 일으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현명한 공명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되고 안 되고는 하늘의 뜻이고,

한번 최선을 다해보자는 것이 공명의 심경이고 의기였는지 모른다.

뒤에 사마휘가 공명이 유비에게 갔다는 소식을 듣고

“공명이 좋은 주인을 얻었으나 때를 얻지 못해 애석하도다”하며 하늘을 보고 탄식했다 한다.

 

중국에선 공명의 인기가 매우 높다.

싸움터에서의 신출귀몰한 재주와 탁월한 전략, 공평무사한 집무태도도 그렇지만

그 위에 당장의 이해를 초월한 그 같은 선택과 애끓는 충성심, 장렬한 죽음 등이

공명의 인기를 한층 높이고 있다.

그래서 공명이 유비를 만나기 전에 살았다는 와룡강(臥龍岡)은 신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장소를 둘러싸고 오래전부터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하남(河南)성의 남양(南陽)과 호북(湖北)성의 고융중(古隆中)이 대표적인데,

둘 다 청나라 때부터 서로 자기 고장이 삼고초려처임을 주장하고 있다.

양쪽 다 넓은 대지 위에 고색창연한 건물과 유적들을 웅장하게 지어놓고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안에 들어가 보면 공명이 살던 초가집(草廬),

유비와 공명이 만난 방, 옆에서 기다리던 관우와 장비의 조각상, 공명이 독서하던 방,

천문을 보았다는 관측대, 무릎을 안고 생각에 잠겼다는 바위 등이 그대로 있다.

양쪽 다 “유비가 공명을 세 번이나 찾은 곳”이라는 커다란 비석을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또 많은 정치인, 문인들이 찾아와 공명을 기리고 칭송한 시비(詩碑)가 총총히 서있다.

아주 희귀한 것으로 공명부인의 천연색 초상화도 있다.

전설과는 달리 매우 품위 있고 잘 생긴 얼굴이다.

형주 명사 황승언(黃承彦)의 딸로

박색이었지만 매우 현숙하고 내조를 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명이 그토록 분주하게, 또 훌륭히 나랏일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려 신경 쓰지 않게 해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공명부인 초상 위의 현판도 ‘지혜현숙(智慧賢淑)’이라 쓰여 있다.

 

삼고초려처에 대한 정통 시비는 워낙 민감한 사항이라

중국 정부도 지역감정을 고려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오랜 고증 작업을 거쳐 학술적으론 융중 쪽이 맞는 것 같다는 결론이 났으나

정치적 고려와 관광상의 이유 때문에 명백히 발표는 안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남양 편을 드는 학자들도 많으며 남양 사람들은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공명의 인기가 워낙 높기 때문에 그런 시비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관광객이 많이 몰려들고 있다.

- 중앙, Forbes Korea, 최우석 前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2. 사심 없이 아들과 나라 맡긴 유비/ 공명은 목숨 바친 충성으로 보답

 

유비는 세상을 뜨면서도 아들 걱정을 많이 해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했다.

황태자인 유선(劉禪)은 불과 17세에 불과했다.

본래 황족이라 해도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난 유비는 아들을 보호해 줄 유력한 일가 친족이 없었다.

라이벌인 조조나 손권은 집안의 유력자들이 새 황제를 둘러싸고 보호한 것과 대조적이다.

유비가 형제같이 믿고 의지한 관우· 장비는 이미 죽었다. 황태자 유선은 나이가 어린 데다

성격이 온순해 난세를 헤쳐 나가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유비는 임종에 즈음해 황태자 유선에게 유언을 남긴다.

자신을 반성하고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자상함이 가득 배어 있다.

“나의 병은 처음엔 단순한 설사로 생각했으나 이젠 합병증까지 생겨 회복이 어렵게 됐다.

인생 50이면 짧다고 할 수 없는데 나는 60을 넘기고도 몇 년 더 살았다. 한도 없고 후회도 없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너희 어린 형제들이다.

신하들은 황태자의 재능이 뛰어나다 하는데 사실이라면 그보다 더 다행이 없겠다.

중요한 것은 노력하는 것이다.

악행은 아무리 작아도 저질러서는 안 되고 선행은 아무리 작아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움직이려면 현명하고 덕이 있어야 한다. 나는 덕이 부족했다.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서(漢書)· 예기(禮記)· 제자백가(諸子百家)· 신자(申子)· 상군서(商君書)같은 옛 글을

부지런히 익혀 본받도록 하라. 더욱 노력해 힘쓰길 간곡히 당부한다.”

 

유비다운 제왕학(帝王學)의 전수다.

유비가 스스로 부덕했다고 말한 데서 유비의 겸손을 엿볼 수 있다.

또 법가적인 책들을 천거해 시대의 흐름에 맞는 통치를 당부하고 있다.

유비의 후계 포석은 평소의 인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조조는 임종 때 아들들에게 사마의(司馬懿)를 경계토록 신신당부한다.

사마의가 위나라의 기둥으로서 큰 공을 세웠지만

끝까지 안심을 못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위나라의 군사력은 같은 집안인 조씨와 하후(夏候)씨가 장악했다.

사마의는 조조의 손자인 명제(明帝) 때 반란 혐의를 쓰고 삭탈관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견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위나라 조조의 후손은 사마의에게 나라를 뺏기고 만다.

손권도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육손(陸遜)을 핍박해 죽음으로 몰고 간다.

 

유비는 자신의 사후 최강의 권력자가 될 공명을 견제하기보다

아예 유선과 공명의 공동 경영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공명이 결코 아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나라를 대신 차지해도 좋다고까지 말한다.

전폭적인 신임이다. 그것이 오히려 공명을 더 감격케 해 끝까지 충성을 바치게 한다.

유비의 부드러우면서도 위대한 리더십이다. 또 가장 현명한 판단이기도 했다.

유비의 후계자는 다소 모자랐지만 후계 구도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영명한 군주의 자질을 갖췄다고 볼 수 없는 유선이 유비 사후 40년 간 황제 자리를 지키면서

나라를 보전했다. 유비로부터 공명을 아버지와 같이 모시고

모든 것을 상의하라는 간곡한 당부를 충실히 지킨 덕분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결코 황제의 실권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다.

유비가 시킨대로 자신의 분수에 맞게 행동한 것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진수(陳壽)는 유비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유비는 넓은 식견과 포용력을 갖추고 의지가 굳었다.

좋은 인재에겐 허리를 굽혀 가르침을 받았다. 한고조 유방의 풍모를 닮은 영웅의 그릇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아들과 나라를 제갈공명에게 맡겼는데 한 점의 사심도 없었다.

가히 군신 관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조보다 권모술수가 뛰어나지 못했고 따라서 영토가 협소했다.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코 좌절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조조의 신하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안락보다 대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CEO로서 유비의 자질을 보면 확실한 비전을 갖고 불굴의 의지를 갖췄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한나라를 부흥시켜 백성들을 전란에서 구하고 편안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높은 뜻을 갖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작은 성공이나 당장의 안일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조조에게 저항했다.

일의 성패는 하늘에 맡기고 옳다고 생각한 것을 추구한 것이다.

그렇게 원론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니 아무래도 신축성이 모자라 현실적으로는 손해를 봤다.

권모술수가 모자란다는 평을 듣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재가 끌린 것은 넓은 포용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믿었다. 임종 때 제갈공명에게 한 당부를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그 정도까지 이룬 업적을 볼 때

유비는 통 크고 훌륭한 경영자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갈공명은 유비의 영구를 성도(成都)로 옮긴다.

촉나라 사람들은 어버이를 잃은 자식같이 슬퍼했다. 유비는 그만큼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유비의 묘 혜릉(惠陵)은 성도 무후사(武侯祠) 안에 있다.

무후사는 공명이 무향후(武鄕侯)를 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그 안엔 유비의 능과 사당이 있고 뒤편에 따로 공명의 사당이 있다.

 

유비와 공명은 살아서도 ‘물과 고기’같이 붙어 지냈고

죽어서도 한 울타리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유비와 공명을 기리는 참배객들이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상적인 군신 관계에 감탄과 부러움을 함께 보낸다.

유비와 공명은 서민들에게 큰 인기가 있어 196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 때도

홍위병들이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한다. 유비의 묘는 매우 검소한 편이다.

형주에서 죽은 감부인(甘夫人)과 나중에 황제가 되고 나서 얻은 오(吳)부인이 합장돼 있다.

 

황태자 유선이 바로 제위(帝位)에 오르자

공명은 승상에다 익주목(益州牧) 사례교위(司隸校尉)를 겸해 촉나라의 문무전권을 쥐게 됐다.

유비가 살아있을 땐 외교와 국방은 유비가, 나머지 행정 전반은 공명이 맡았는데

이젠 공명이 모든 것을 다 챙겨야 했다. 공명의 힘겨운 역정이 시작된 것이다.

공명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남방의 반란을 진압하는 일과 오나라와의 국교를 다시 여는 일이었다.

촉나라가 오나라에 패하고 유비가 죽은 틈을 타 남쪽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압군을 남방에 보내기 위해선 오나라의 양해가 불가피했다.

공명은 유능한 외교관 등지(鄧芝)를 오나라에 보내 국교정상화에 성공한다.

그 뒤 공명은 대군을 지휘해 남방 정벌에 나선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공명의 위신이 크게 높아졌고

이릉패전으로 땅에 떨어졌던 촉나라 군사들의 사기도 크게 올랐다.

또 풍요한 남방을 평정해 촉나라의 경제적 기반을 크게 확충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국방력을 강화하고 경제를 튼튼히 한 다음 강대국 위나라를 정벌하는 일에 착수했다.

공명인들 국력 차이를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나 가만히 있다가는 약소국 촉나라가 버티기 어려우니 차라리 적극 공세로 나간 것 같다.

또 유비 없는 촉나라를 이끌고 가기 위해선 긴장과 분발이 필요하기도 했다.

 

공명이 북벌에 나서면서 2세 황제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를 보면

공명의 애절한 심정이 잘 드러난다. 출사표는 공명의 굳은 충성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철없는 유선에게 타이르는 충언이기도 하다.

공명은 출정하고 난 뒤 국사를 상의해야 할 사람들을 추천하고

황제로서의 근무 태도와 마음가짐을 간곡히 건의했다.

간신들을 멀리 할 것과 충신들을 가까이 둬 충언을 잘 듣도록 당부했다.

그 중에 궁중과 부중(府中)의 의견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점과

신상필벌(信賞必罰)을 특히 강조했다.

 

공명의 출사표를 보고 울지 않는 사람은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성도 무후사에 가면 송나라 충신 악비(岳飛)가 힘찬 필체로 쓴 출사표가 돌에 새겨져 있어

사람들을 숙연케 한다. 악비는 출사표를 울면서 썼다고 하는데 줏대 없는 황제 밑에서

강적 금나라와 어려운 전쟁을 해야 했던 자신의 처지와 겹쳐져 더 슬펐는지 모른다.

 

공명은 유선의 그릇과 역량 때문에 무척 답답했을 것이다.

촉나라가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인 위나라 조조의 후계자들에 비해선

많이 떨어진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조조(曹操)의 아들인 위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나 그 아들 명제는

어린 나이에도 결정적일 땐 뛰어난 자질을 보이면서 대세를 주도했다.

그러나 유선에겐 그런 황제다움이 없었다.

태성성대(太平聖代)라면 착한 황제가 될 수 있겠지만 난세의 황제로선 아무래도 미흡했다.

유선은 환관의 말에 현혹돼 국정을 문란하게 하기도 하고

심지어 전장에 나가 있는 공명을 소환하기도 했다. 공명은 전장을 떠날 형편이 아니었지만

황제의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대역죄가 되는지라 눈물을 머금고 후퇴하기도 했다.

그래도 유일한 위안은 유선이 공명을 신임하고 끝까지 권한을 맡긴 점이다.

이런 유선 밑에서 나라를 꾸려가려니 공명은 과로사(過勞死)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밑의 부하가 “승상께서 모든 일을 다하려 노심초사하시니 건강이 걱정됩니다.

일을 나누어 맡기시는 게 좋겠습니다”하고 건의하자

공명은 “나도 그렇게 하고 싶으나 선주(先主)의 간곡한 유명(遺命)을 받은 터에

주군이 모든 것을 맡기시니 하나라도 소홀이 할 수가 없다”고 실토했다 한다.

 

공명이 오장원(五丈原)에서 마지막으로 위나라 사마의와 대치할 때의 일이다.

그 땐 아무리 싸움터라도 군 사절(使節)들은 서로 오갔다.

촉나라 군사(軍使)가 위나라 진영에 갔을 때 사마의가 무심한 듯 묻는다.

“승상은 안녕하신가,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시면서 식사는 조금밖에 하지 않으시니 걱정입니다”

“왜 그렇게 바쁘신가”

“어버이 같이 군사들을 대하시어 태형 20대 이상은 직접 챙기십니다”하고 말해버렸다.

 

군사가 돌아간 후 사마의는

“공명이 일은 많고 먹는 것이 적으니 오래 살지 못 하겠구나”하고 기뻐했다 한다.

촉나라 군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명의 건강에 대한 촉나라 최고기밀을 실토했던 것이다.

그 뒤 사마의는 공명이 아무리 도발해도 응하지 않고 공명의 수명이 다하기를 기다려

결국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

공명도 천하의 기재(奇才)였지만 사마의도 그에 버금가는 준걸(俊傑)이었던 것이다.

유비나 공명이 불행했던 것은 조조나 사마의 같은 천하의 강적을 만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유약한 황제 밑에 힘 있는 신하가 있으면 말이 많게 마련이다.

 

2세 황제 주변에선 공명 경계론이 많이 나왔었다. 공명에 대해서도 왕이 되라는 부추김이 있었다.

그러나 공명의 충성심이 한결같고 유선도 유비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는지라 큰 문제는 없었다.

공명이 죽자 부하 한사람이

“강대한 병력을 가진 권신(權臣)이 이제 없어졌으니 폐하의 근심을 덜었다”고 아첨 섞인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유선은 굉장히 화를 내며 당장 그 사람을 잡아다가 처형했다.

우유부단한 유선으로서는 대단한 결심이었는데 그만큼 공명에게 의지했다는 뜻이 된다.

또 촉나라가 모두 공명 인맥인데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다간

앞으로의 나라 통치가 어렵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공명의 후임은 역시 공명이 추천한 장완(蔣琬)과 비의(費禕)가 연이어 맡았다.

군사는 애제자인 강유(姜維)가 맡아 북벌사업을 계속 이어갔다.

공명은 가도 공명의 인맥들이 촉나라를 계속 다스린 것이다.

공명은 전문경영자의 한계를 실감하며 죽을 고생을 하다 생애를 마감했다 할 수 있다.

유비와의 첫 인연 때문에 공명은 뻔히 알면서도 가시밭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공명의 고달픈 운명에 눈물지으면서

위대한 경영자 유비의 통 큰 사후 포석에 더욱 감탄하는 것이다.

- Forbes Korea 30호, 2005-08-11

- <삼국지 경영학>/최우석(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지음/을유문화사

 

 

3. 유비 · 공명의 2인3각 경영

유비, 늘 힘 실어주며 콤비 플레이 / 공명, 2인자에 만족… 정성으로 보필

 

성도(成都) 무후사(武侯祠) 입구엔 ‘명량천고(明良千古)’란 편액이 크게 걸려 있다.

유비와 공명이 같이 이뤄낸 업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현명한 군주와 좋은 신하가 힘을 합쳐 역사에 남을 큰 일을 했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선 시대를 넘어 모두 공감하는 바다. 사실 촉한은 유비와 공명이

2인3각(二人三脚)으로 만들어 간 합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 다 훌륭한 점은 1인자와 2인자가 끝까지 사이좋게 갔다는 것이다.

처음에 잘 시작했다가도 마지막까지 좋게 가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조직이 어느 정도 틀이 잡히고 발전하면 권력 집중화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면 1인자는 2인자가 불편하게 되고 1인자의 측근에서 2인자 격하 작업이 시작된다.

힘 있는 2인자가 있으면 권력을 나눠야 하는데 그걸 1인자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2인자가 물을 먹기도 하고 심할 땐 피비린내 나는 숙청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공명은 27세에 유비 진영에 참가해 54세로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사하기까지

27년을 유비와 그 아들을 위해 충성을 다 했다.

유비가 63세로 죽기까지 최측근에서 보좌했는데

두 사람의 의견이 늘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비는 한결같이 공명을 존중하고 중용했다.

창업자 오너는 싫증을 잘 내 2인자를 오래 두려하지 않는다.

유비가 공명을 16년이나 2인자로 두었다는 것은 공명의 출중한 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비의 통 큼과 후덕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죽을 때가 돼서도 유비는 공명을 신임해 아들을 부탁하고 갔다.

유비의 라이벌인 조조나 손권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점이다.

유비는 유비대로 공명을 정성으로 대하고 의존했고

공명은 공명대로 지극정성을 다해 유비를 모시고 충성을 다했다.

두 사람의 신뢰와 팀워크는 이상적인 군신관계로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공명과 같이 유능하면서도 성실한 2인자를 맞은 것은 유비의 큰 행운이었다.

공명은 2인자 자리에 만족하면서 1인자가 될 욕심이 없었다.

유비를 통해 자기의 뜻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역사에도 이런 인물들이 많다.

위대한 창업주 군주 밑엔 으레 위대한 2인자가 있었다.

한고조 유방 밑에 있었던 명승상 소하(蕭何)가 대표적이고

최근엔 마오쩌뚱(毛澤東) 밑의 저우언라이(周恩來)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유비는 공명을 얻음으로써

국가 통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명사와 지식인층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

당시는 전란과 혼란의 시기였지만 명사와 지식인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들은 천하의 여론을 형성하고 그 여론에 따라 인재들이 움직였다.

나라 간 전쟁 중에도 지식인 명사들은 서로 편지도 주고받고 내왕도 했다.

공명은 형주 땅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고 그 처가가 알아주는 명문이었다.

 

공명이 유비를 위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좋은 인재들을 모으는 일이었다.

유비의 신하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유비를 처음부터 따라다닌 창업 그룹,

두 번째가 형주에서 모인 전문가 명사 그룹,

세 번째가 촉나라에 들어가고 나서 참가한 익주 그룹이다.

 

첫 번째는 관우· 장비· 조운· 미축· 간옹· 서건 등 정과 의리로 뭉친 사람들로서 가신과 다름없었다.

형주에서 처음으로 명사와 지식인들이 참여하는데

이들은 후에 익주에도 같이 들어가 촉나라 정권의 핵심이 된다.

 

두 번째 형주 그룹은 공명이 대표격이고

방통(龐統)· 장완(蔣琬)· 위연(魏延)· 마량(馬良) 형제· 이적(伊籍) 등이 있다.

이들이 참여하는 덴 공명의 역할이 컸다.

방통은 공명과 쌍벽을 이루는 준재로서 익주 점령을 건의하고 주도한다. 그러나 익주 작전 중

유비가 결단을 주저하는 바람에 승기를 놓치고 적의 화살을 맞아 36세로 요절하고 만다.

계략에 능하고 결단력도 있어 요절하지 않았으면 유비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마량은 형주의 명문으로서 다섯 형제가 모두 뛰어났다.

막내가 읍참마속(泣斬馬謖)으로 유명한 마속(馬謖)으로 머리가 좋아 공명이 특히 총애했다.

유비는 나중 백제성에서 죽기 전에

공명에게 마속은 실속보다 말이 앞서니 조심해서 쓰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공명은 계속 마속을 쓰다가 가정(街亭) 전투에서 큰 낭패를 당한다.

 

유비는 사람을 보는 것에 있어서 공명과 약간 달랐지만 대부분 공명에게 그냥 맡겨두었다.

유비의 위대한 점이다. 공명은 빈틈없는 학자 출신이고 이론가여서 그런 타입을 좋아했다.

그러나 한 나라를 경영하려면 다양한 인재가 필요하다.

그 다양한 인재들을 모으는 덴 유비가 큰 역할을 했다.

유비의 후덕하고 큰 인품에 반해 개성 있는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유비와 공명이 서로의 취약점을 잘 보완했다 할 수 있다.

 

후에 촉한의 선봉장으로 큰 공을 세우는 위연이 투항해 왔을 때 공명이 뒷머리에

반골(反骨)이 있어 장차 배반할 것이라며 죽이려는 것을 유비가 살려 잘 포용해 썼다.

유비는 많은 인재들이 모여드는 큰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유비는 한 가지 재주만 있으면 다른 것은 별 문제 삼지 않았다.

유비가 죽고 나서 공명이 인사 전권을 행사했을 때

공정하기는 했지만 다양한 인재를 모으는 덴 성공하지 못했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안 모이는 것과 같다.

촉한이 천하통일에 실패한 것은 이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세 번째 익주 그룹으로는

법정(法正)· 허정(許靖)· 유파(劉巴)· 동화(董和)· 이엄(李嚴)· 왕평(王平) 등이 있다.

익주의 주인인 유장(劉璋) 밑에서 벼슬을 한 명문들이 많다.

유비는 다소 이질적인 이 세 그룹을 잘 견제· 조화시키면서 나라를 통솔해 간다.

유비가 유장을 쫓아내고 익주를 점령하는 과정을 보면

유비의 깊은 속과 뱃심, 그릇이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익주 지방은 유장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사람은 착했으나 큰 인물은 아니었다.

익주 지방은 모두가 탐을 내 손권이 유비에게 같이 정벌해 나누자고 제의한 적도 있다.

비는 유장과는 같은 황실 종친인데 어떻게 뺐을 수가 있느냐며 거절한다.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속셈은 혼자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공명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도 익주 점령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마침 이때 유장이 원조를 요청해 왔다.

조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친척인 유비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한 것이다.

유비가 익주를 뺏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유비 진영에선 익주 점령계획을 은밀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유장의 부하 중에서도 유비 측에 내응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법정이다. 법정은 담대하고 계략에 능했다.

이 난세에 유장으로선 익주를 지키지 못하니 차라리 유비가 주인이 돼야 한다고 작정한 것이다.

익주의 갖가지 정보를 다 주며 유비를 도왔다. 유비 진영의 방통도 적극적이었다.

유비는 유장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군대를 이끌고 양자강을 따라 익주로 들어간다.

공명· 관우· 장비· 조운 등은 형주에 남고 방통과 위연 등이 따라간다.

 

유비가 익주에 들어오는데 대해 유장 진영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잘못하면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장은 유비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익주에 들어가서도 유비는 바로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명분을 살리려고 한동안 뜸을 들인다. 그러다가 야심을 드러내자

유장의 군사와 충돌하게 되고 그 소동 속에 군사(軍師) 방통이 전사한다.

곤경에 빠진 유비가 형주에 구원을 요청하자

공명이 장비· 조운 등과 함께 급히 달려가 유비를 구하고 성도를 포위한다.

이때 신하들이 결사 항전을 주장하자 유장은 우리 집안이 2대에 걸쳐 익주를 다스렸지만

백성들을 편하게 해주지 못하고 전쟁으로 고통을 주었다며 깨끗이 항복해 버린다.

성 안엔 3만 명의 병사와 2년치의 식량이 남아있었다 한다.

유장은 난세에 나라를 지킬 만큼 큰 인물은 아니었지만 선량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유장의 항복을 받은 유비는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시세가 어쩔 수 없었다” 말하고

잘 대접해 형주로 가서 살게 한다.

 

그 뒤 익주를 요리하는 유비의 솜씨를 보면 영웅의 그릇이 그대로 드러난다.

먼저 점령군 행세를 하지 않고 민심을 안정시키려 노력한다.

자기의 고집을 부리지 않고 참모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

유비가 익주에 들어오는 것에 반대한 사람들을 적극 포용하고 끌어들인다.

유장 밑에서 일하던 중신들을 그대로 유임시켜 썼다.

대부분 유비에게 승복했지만 일부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 곧고 강직한 명사 지식인들이었다.

학자로 이름 높은 유파와 저명한 장군인 황권(黃權)이 대표적이었다.

유비는 부하들이 이들을 손볼까봐 만약 유파와 황권을 해치는 자가 있으면 엄벌한다고

경고하고는 직접 찾아가 같이 일하기를 청했다.

서슬 시퍼런 점령군 사령관이 그렇게 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두 사람은 유비의 정성에 놀라 두말없이 나와서는 유비를 극진하게 섬겼다.

 

유장 밑에서 촉군태수(蜀郡太守)를 하던 허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이 높은데 비해 실질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쓰지 않으려 한다.

그 때 익주 사정에 밝은 법정이 와서 “허정은 실력도 별로 없고 처신도 바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름은 높이 나 있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 많습니다.

그러나 집집마다 다니며 허정이 어떤 사람이란 것을 설명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약 허정을 등용하지 않으면 유 장군은 현명한 인재를 쓰지 않는다는 세평을 들을 것입니다.

웬만하면 쓰는 게 어떻습니까”하고 권한다.

그 말을 듣고 유비는 허정을 괜찮은 자리에 등용한다.

이렇듯 유비는 자기 생각과 다르더라도 밑에서 권하면 들었다.

 

유비는 협객 출신으로서 감각적으로 사람을 보고 두루 감싸안는 타입이었다.

타고난 지식인인 공명은 매우 까다롭고 사람을 가려 썼다.

유파에 대해서도 두 사람의 생각이 약간 달랐다.

유비는 형주에 있을 때부터 콧대 높은 지식인인 유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또 유파도 협객 출신인 유비보다 지식인인 조조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공명은 같은 지식인으로서 유파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익주를 점령하고 나서 유비는 공명의 건의에 따라

유파를 중용해 나중엔 상서령(尙書令)까지 시킨다.

상서령은 행정을 총괄하는 요직으로 유비가 총애했던 법정이 맡았던 자리다.

유파는 유비의 의형제인 장비를 무식하다고 괄시해 유비가 몹시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유비는 유파와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지만 정권안정을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감정을 접을 줄 알았다. 그 후 유파는 유비 정권에서 일하면서 처신을 깨끗이 했고

유비가 한중왕(漢中王)과 황제가 됐을 때

하늘에 올리는 제문(祭文)과 중요 외교문서들을 직접 썼다.

유비는 다른 인사도 대부분 공명에게 맡겼다. 2인자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다.

 

익주를 점령하는데 제일 공신은 법정이었다.

그래서 법정을 촉군태수로 임용하고 큰 권한을 주었다.

이때는 법정이 큰 총애를 받았다. 공명은 한걸음 물러나 기다릴 줄 알았다.

법정이 권력을 쥐자 다소 횡포를 부렸다.

옛날 은혜를 입었던 사람은 파격적으로 봐주고 유감이 있는 사람에겐 철저히 보복했다.

누가 공명에게 와서 법정을 좀 견제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명은 “옛날 우리 주공이 형주에 있을 때 북쪽은 조조, 동쪽은 손권이 노리고 있고

집안엔 손권의 여동생인 부인이 버티고 있어 늘 불안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법정의 도움으로 익주를 얻어 이제 겨우 한숨 돌리게 됐는데

법정이 좀 마음대로 한들 어떻게 말리겠느냐”고 타일러 보낸다.

이 말을 전해 듣고 법정은 깨달은 바 있어 행동을 조심했다고 한다.

 

법정은 공명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는데 유비는 이 두 사람을 용도에 맞게 잘 썼고

공명도 법정의 의견을 존중해 팀플레이를 잘 했다.

법정은 개성이 강했지만 전략안(戰略眼)이 뛰어나

후에 유비를 도와 한중 지방을 뺏는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법정도 45세로 요절하고 만다.

유비가 근거지를 마련해 본격적으로 국가경영과 천하통일에 나서려 할 때 죽은 것이다.

법정이 죽었을 때 유비는 매우 슬퍼하며 며칠을 통곡했다고 한다.

만약 법정이 좀더 살았다면 더욱 전략적이고 기발한 계책을 내놓았을 것이고

유비나 촉한의 모습이 좀 달라졌을지 모른다.

법정은 유비에게 직언을 잘 했고 유비도 다소 어려워하며 받아들였다.

방통도 유비에게 할 말은 하는 타입이었다. 일찍부터 친근하고 공손한 공명과는 약간 달랐다.

방통과 법정이라는 두 거물 참모가 요절한 후

유비는 공명에게 더 의존하게 됐고 공명의 짐도 그만큼 무거워진다.

형주에서 시작된 촉한의 2인3각 경영이 익주를 점령하고 나서도 더 큰 스케일로 전개되는 것이다.

- Forbes Korea 32호 (2005.10.11)

- <삼국지 경영학>/ 최우석(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지음/ 을유문화사

 

 

4. 현대적 관점에서 본 『삼국지』의 비합리적 요소들

 

 인물의 전형성(제갈량편)

 

춘추사관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이겠지만, 나관중의『삼국지』에는

인물이 지나치게 전형화되어 있어서 현대적인 인물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는 자신이 편찬한『지림(志林』에서

“『삼국지』처럼 군자와 소인을 구별한 책은 백세가 지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삼국지』가 너무 편협한 시각에 머물러

등장인물의 다양한 측면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 자체는 기본적으로 복합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

문제는 그 본질 속에서 중요한 선택과 판단은

개별적인 도덕성이나 역사관에 의해 한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이다. 그것은 과거나 지금도 마찬가지다.

영웅들만이 자아의식이 있고, 서민이나 노예는 자존심이나 자아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유비 ․ 관우 ․ 장비 ․ 제갈량만이 충의지사(忠義志士)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간특하고 불의한 사람들로 묘사된다는 것은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맞지 않다.

그리고 특정 사람들, 예컨대 나관중은 제갈량을 미화하거나 우상화하기 위해

주유를 속 좁고 질투심 많게 묘사하여 실제로는 도량 넓고 담대한 주유를 죽이면서

“하늘이 주유를 낳고 왜 또 제갈량을 낳았습니까?”하고 탄식하게 했다.

이 일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관중의『삼국지』는 제갈량이 하지도 않은 수많은 일들을 모두 제갈량이 한 듯이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방통이 조조에게로 가서 적벽에 주둔중인 조조의 선단을 모두 묶어서

화공을 사용하게끔 유도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제갈량은 신야땅에서 화공으로 조조를 궤멸시킨 적도 없고,

쾌속선을 가지고 가서 화살 10만 개를 가져온 일도 없으며, 적벽대전의 군지휘관도 아니었고,

적벽대전에서 화공을 제시한 사람도 아니며, 맹획을 일곱 번씩 잡았다 놓아줄 시간도 없었고,

말 한마디로 왕랑(王郞)을 말에서 떨어뜨려 죽인 만화 같은 사건도 없었다.

제갈량은 실제로 군사전략가로서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정치가로 성공한 사람이다.

정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제갈량이 이긴 전쟁이란 실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있지도 않은 수많은 전쟁들이 양산되기도 하였다.

즉, 나관중『삼국지』에 나타나 있는 제갈량과 관련된 수많은 전쟁은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나관중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나관중『삼국지』에서 나와 있는 그 수많은 전쟁에서 모두 패전했다고 해도

그의 위대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유를 속이는 좁은 인물로 묘사하여

제갈량이 주유를 분사(憤死)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정사에서 진수가 제갈량을 평하여

“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로 관중과 소하에 비교할 만하다.

그러나 매년 군대를 움직였으면서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임기응변의 지략이 없었기 때문일것이다.” 라고 한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 <삼국지해체> 장정일, 김운회, 서동훈 공저/ 김영사

 

 

 

 

 

(3) 조조의 리더십

 

      

 

 

조조(曺操 : 150-220)

자는 맹덕(孟德), 패국(沛國, 안휘성 박현) 출신이다.

20세에 효렴에 천거되어 벼슬에 나간 뒤

초평 원년 동탁의 반란군을 진압하는 전투에 참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초평 3년에는 청주 황건군의 투항을 받아들여 이들로 청주병(靑州兵)을 조직함으로써

정치, 군사적 역량을 확장할 수 있었다.

건안 원년(196) 헌제를 납치하여 허창(許昌)에 천도함으로써

황제의 명의로 자신의 세력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 수 있었다.

당시 지금의 하북성 경내에 있는 기주와 유주에 거점을 두고 있던 막강한 원소(袁紹)의 군대와

관도에서 싸워 대승하여 마침내 황하의 중하류 유역을 세력권 아래에 두었다.

이후 205년 북쪽의 오환(烏桓)을 격파하고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을 복종시켜 북방을 통일했다.

208년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형주를 공략하는 한편 손권을 위협했다.

그러나 적벽전투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 대패하여 북방으로 철수했다.

216년 위왕(魏王)에 오른 조조는 220년 낙양에서 사망했다. 

 

조조는 아주 냉철하고 차가운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감성적인 면도 풍부하다.

사람을 심복시키고 감동을 주는 데는 감성적 요소가 꼭 있어야 한다.

위대한 경영자는 엄격한 신상필벌과 이성적 판단이 바탕이지만

그 위에 따뜻한 인간애가 있어야 한다. 이른바 인간적 매력이다.

지도자는 아래로부터 존경과 더불어 사랑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삼국시대와 같은 격변기엔 계산이 잘 안 된다.

따라서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무조건 좋아 따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요, 노력한다고 될 것도 아니다.

사람의 그릇 또는 마음가짐이며 타고난 성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조는 당시 일급의 지식인이고 또 시인이었다.

조조는 시심(詩心)을 지녔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심약(心弱)하고는 다른 것이다.

조조는 원칙과 줏대를 세우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를 자주 나타낸다.

그래서 부하들이 조조를 두려워하면서도 따랐던 것이다.

그 대신 조조의 라이벌인 원소는 인정에 끌려 더러 대소완급을 가리지 못했다.

결단도 늦었다. 리더로서 치명적인 약점이다.

 

조조가 유비를 정벌하러 나가 조조의 근거지인 허창(許昌)이 텅 빌 때가 있었다.

이때 원소의 참모가 좋은 기회이니 허창을 기습하자는 건의를 한다. 원소는 반응이 없었다.

거듭 재촉을 한 즉, 원소는

“사실 내가 가장 귀여워하는 다섯째 아들이 병이 나 지금 군사를 낼 정신이 없소.

다음 기회를 봅시다”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 참모는 “하늘이 준 이런 기회를 어린애 병 때문에 놓치다니”라고 땅을 치며 탄식한다.

이런 원소의 심약함 때문에 막강한 군사력에도 천하의 주인 자리를 조조에 뺏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매우 냉철하다.

장수(張繡)의 기습공격으로 적에게 완전 포위되자 큰아들이 내주는 말을 타고

혼자 탈출하면서 훗날을 기약한다. 큰아들과 조카는 난전 중에 죽는다.

나중에 통쾌한 복수를 하지만 그때도 아들이나 조카가 죽은 것은 뒷전이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장렬히 죽은

호위대장 전위(典韋)를 위해 더 섧게 통곡한다.

조조는 진정으로 전위를 좋아하고 또 아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 전위에게도 전달되어 조조를 위해 기꺼이 죽어갔을 것이다.

그런 광경을 보고 병사들은 감동한다.

 

남이 자기에게 반하게 하려면 자기가 먼저 사람에게 반해야 한다.

조조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천부적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조조가 원소에게 이기고 전쟁 뒤처리를 하는 자리에서다.

원소의 참모로서 전쟁 초에 조조를 비난하는 격문을 썼던 진림(陳琳)이 잡혀왔다.

그 격문은 명문장이었으나 조조에겐 매우 아팠다.

환관 출신인 조조 집안의 약점을 까발리면서 준엄하게 꾸짖었던 것이다.

조조가 매섭게 물었다. “격문을 썼으면 썼지 어찌 그렇게 모질게 썼느냐.”

“제가 하는 일은 화살과 같아서 시위에 올려진 이상 날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측근들이 승상의 집안을 욕했으니 죽여 본보기를 삼자고 떠들었다.

그러나 조조는 “나만 욕했으면 됐지 우리 조상까지 욕할 건 없지 않았느냐.

앞으론 나를 위해 네 좋은 재주를 써라”하며 용서해주고 자기 참모로 삼았다.

진림은 당대의 문장가로 세상이 알아주던 지식인이었는데

그 뒤 조조를 위해 충성을 다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지식인 사회의 인심과 지지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조조는 곽가(郭嘉)의 재주를 아껴 크게 총애했다.

곽가를 만나보고 조조는 내 더불어 천하를 도모할 사람을 만났다고 기뻐한다.

곽가 역시 내 뜻을 알아줄 진짜 주인을 만났다고 좋아한다.

그 곽가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곽가의 주검 앞에 선 조조는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통곡한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고 “여러분은 나와 같은 연배이고 곽가는 한 세대 젊어

우리의 앞날을 부탁할까 했는데 이제 그가 갔으니 누구에게 부탁할꼬”

하고 크게 탄식한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목숨만 겨우 붙어 형주로 도망 갈 때다.

그 절박한 패주(敗走) 길 속에서도 씩씩하던 조조가

안전지대에 도착하여 한숨 돌리자마자 크게 통곡하는 것이 아닌가. 

“곽가가 있었으면 나를 이토록 참패하게 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다시 우는 것이었다. 주위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한다.

 

조조가 원소군을 격파한 뒤 그 잔당을 쫓아 멀리 오랑캐 땅으로 원정을 갔다.

그때 조홍(曹洪) 등이 그걸 말렸다. 그러나 조조는 정벌을 강행해서 겨우 이기고 돌아왔다.

혹한에 양식이 떨어져 병사들이 큰 고생을 했다. 개선을 축하하자 조조는

“이번 싸움에서 비록 이겼다 해도 그것은 요행이지 이치에 맞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싸움을 말린 너희가 옳았다. 앞으로도 옳은 일은 서슴지 말고 말하라”면서

조홍에게 큰 상을 내렸다.

 

조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능력 이상의 힘을 내게 하는 천부적 능력이 있었다.

적벽대전 전 형주성에 무혈입성할 때도 형주 명사 괴월을 보자마자

“내가 형주성을 얻은 것보다 그대를 얻은 것이 더 기쁘다”고 말해 괴월을 감격케 했다.

 

조조가 유비를 정벌하러 갔다가 허창으로 돌아가면서 고향땅 초현(縣)을 찾은 적이 있다.

고향을 둘러봐도 아는 얼굴이 적었다. 오랜 전란 때문에 많이 죽고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조는 유명한 포고령을 내린다.

‘내가 의병을 일으킨 이래로 나를 따라다니다가 죽은 장사가 있으면 그 자녀에게,

자녀가 없으면 가까운 친척에게 논밭을 나누어 주고

그 자녀들에겐 학교와 선생을 두어 공부를 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또 먼저 간 사람들을 위해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주도록 했다.

조조는 그 포고령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 확인까지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조는 고향 사람들을 감격시키면서 부하 장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바로 자신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조조는 원소가 죽자 무덤을 찾아 제사를 드리곤 슬피 울었다.

원소의 미망인에겐 곡식과 비단을 내려 뒤를 돌봐주었다.

비록 길이 달라 싸우긴 했지만 옛날 정의를 소중히 여긴 것이다.

그것을 조조의 뛰어난 연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런 연기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마음속에 한 가닥 정성이 있어야 한다. 거짓말도 성심성의를 다해야 통한다는 말이 있다.

 

조조가 유비의 의형제인 관우(關羽)에게 들인 정성은 눈물겨울 정도다.

조조는 관우를 잘 보고 특히 탐을 냈다. 관우의 뛰어난 무용뿐 아니라

굳은 의리와 곧은 처신을 좋아했다. 어찌 보면 반했다고 볼 수 있다.

조조와 유비가 싸우게 되어 유비는 도망가고 관우는 유비의 가족과 함께 남게 되었다.

관우가 산 위에서 겹겹이 포위되어 최후로 한바탕 싸우고 죽으려 할 때

조조는 관우와 친한 장요(張遼)를 보내 간곡히 산을 내려올 것을 권한다.

조조는 관우를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엔 관우가 완강히 거절하지만

유비의 가족을 들먹이자 마음이 약해져 3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하산하겠다고 말한다.

 

첫째는 한(漢)나라에 항복하는 것이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둘째는 유비 가족에 대해 후한 예우를 해 달라는 것,

셋째는 유비가 있는 곳을 알면 언제든지 찾아 떠나겠다는 것이다.

항복하는 입장으로서 무리한 요구지만 조조는 수락한다.

조조의 통이 컸다고도 볼 수 있고 그만큼 관우를 좋아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조조는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한다.

많은 재물을 내리고 자주 불러 마음을 달랜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은 요지부동이다. 그럴수록 조조는 더욱 관우를 좋아하게 된다.

 

특히 관우의 의연하고 엄정한 생활태도를 보고 존경까지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관도(官渡)의 싸움이 일어나

관우가 원소의 맹장 안량(顔良) · 문추(問醜)를 베는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때 관우는 유비의 소식을 듣고 떠날 작정을 한다.

그동안 조조에게 받은 재물들을 모두 봉해 놓은 다음 하직인사를 하러 승상부로 간다.

조조는 관우를 붙잡아 두기 위해 면회사절 팻말을 걸어 놓는다.

몇 번 허탕을 친 관우는 편지를 써놓고 길을 떠난다.

도저히 잡을 길이 없다고 판단한 조조는 막료들을 데리고 급히 전송에 나선다.

작별 선물로 비단으로 지은 전포(戰袍) 한 벌을 전하면서

“천하의 의사(義士)를 내 복이 적어 붙잡아 두지 못하는구려”하며 거듭 애석해 한다.

조조는 돌아오는 도중에도 내내

“내 정성이 모자랐다”고 탄식해 마지않아 막료들을 감동시켰다.

이런 정성이 어찌 관우에게 전해지지 않겠는가.

나중에 관우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조조를 자기 체면을 걸고 살려 보낸다.

삼국지의 빛나는 장면이다.

- Forbes Korea 2004. 8월호.

- <삼국지 경영학>/ 최우석(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지음/ 을유문화사

 

 

조조는 재사(才士)를 아꼈는데 게다가 그 스스로 문장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체득하고

스스로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많은 이들을 그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재주만 있으면 천거하라는 뜻의 '유재시거(唯才是擧)'는 바로 그 기치였다.

'건안칠자(建安七子 : 건안시대 조조의 막료들이자 조비와 더불어 시가를 읊었던

업하鄴下의 문학집단)'의 한 사람인 진림(陳琳)은

원래 원소의 모사로 조조를 비난하는 격문을 많이 썼지만

조조는 그의 문학적 재능을 아꼈고, 원소가 패망한 뒤 그를 받아들였다.

유비의 의동생 관우를 포로로 삼았다가 결국 놓아준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였다.

'횡삭부시(橫賦詩 : 창을 옆에 뉘어놓고 시를 짓는다)'란 말의 주인공인 조조의 시가는

20여 수가 남아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단가행(短歌行)> <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 <손자략해(孫子略解)> <병서접요(兵書接要)> 등의 병법서와

산문 40여 편이 전해진다.

조조는 자신의 두 아들 조비(曺丕), 조식(曺植)과 더불어 '삼조(三曺)'로 일컬어져

중국 문단사에 길이 이름을 남겼으며, 건안칠자의 실질적 주최자로 특히 4언시에 능했다. 

 

*** 건안(建安)

원래 동한 헌제 유협(劉協)의 연호로 196년-220년에 끝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건안시대 또는 건안 풍상(風尙)이란 이 25년간뿐만 아니라

220년 조비가 즉위하고 위나라 명제(明帝) 조예(曺叡, 조비의 아들)가 즉위한 태화 연간까지

포함하여 232년까지 전체 36년간(196년-232년)을 말한다. 

 

*** 조비(曺丕, 187-226)=文帝

조조는 14명의 부인에게서 25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3번째 부인으로서 정실이 된 변(卞)부인의 소생으로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이 조비, 둘째는 조창, 셋째는 조식, 막내는 조웅이었다.

조조는 조비와 조식을 후계자로 압축하고 천부적으로 시적 재능을 지닌 조식보다

냉철한 장자를 택해 후계자로 삼는데 그가 바로 조비이다. 자는 자환(子桓), 시호는 문제(文帝).

건안 25년(220) 조조가 66세의 나이로 죽자 조비는 그 뒤를 이어 위왕에 올랐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같은 해 11월 헌제(獻帝)에게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랐으며,

국호를 위(魏 : 220-265)라 하고 연호를 황초(黃初)라 하였다.

그러나 아우 조창은 급사하고 조식은 광인처럼 처신할 수박에 없었으며

다른 황족들도 몇 년마다 한 번씩 자신의 봉토를 달리해야만 했다.

이는 조조가 그랬던 것처럼 황실 종친들의 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황권을 강화하겠다는

정책의 일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위나라 정권이 단명으로 끝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조비는 정치적 역량뿐만 아니라 글재주도 뛰어나 시가 40여 수 남아 있다. 

 

*** 조예(曺叡 : 226-239)=明帝

위나라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풍요롭고 인구가 밀집한 지역인

섬서 평원과 낙양의 대평원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조조가 죽은 뒤 조비=문제를 정점으로 하는 황족은

후한시대에 형성된 대토지 소유자집단의 세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최(崔), 하후(夏侯), 이후에 등장하는 사마씨(司馬氏)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위나라 정권은 그들의 지지하에서 유지될 수 있었다.

 

문제 치세 말에 세력을 확장한 사마의(司馬懿, 179-251)를 중심으로 사마씨의 득세는 시작되었다.

문제가 죽자 명제가 즉위했다. 명제는 자식이 없어 황족인 조방(曺芳)을 황태자로 임명했다.

겨우 8세인 조방을 세워놓고 명제는 조씨 일족인 조상(曺爽)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사마의에게 후사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재위 24년만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결국 가평 원년(249) 사마의의 정변으로 조상 일파는 모두 주살되었다.

그리고 3년 뒤 사마의가 죽었다. 세상은 사마씨의 것이었으며,

그 권세는 아들 사마사(司馬師)에게 넘어갔다.

대장군 사마사는 황제 조방을 폐위시키고 문제의 손자인 조모(曺)를 옹립했다.

그 다음해 사마사가 죽고 아우인 사마소(司馬昭, 211-265)가 사마씨 집안을 이어받았다.

조모는 사마씨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 그의 손에 죽고 말았다.

 

감로 5년(260) 명목상의 황제로 조조의 손자 조환(曺奐)이 15세의 나이로 즉위했고,

사마소 자신은 상국인 진공(晉公)이 되고 다음해 진왕(晉王)에 올랐다.

조조가 후한 황제 밑에서 공(公)이 되고 다시 위왕(魏王)에 즉위한 것과 똑같은 절차였다.

263년 촉의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하여 멸망하고, 사마소는 진공(晉公)으로 자칭하다가 죽었다.

그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승계했다.

그리고 위나라 원제(元帝) 함희 2년(265) 선양을 받아 새롭게 왕조를 열었는데 바로 진(晉)이다.

사마염의 시호는 무제(武帝), 아버지 사마소는 문제(文帝),

할아버지 사마의는 선제(宣帝)로 시호를 추존했다.

 

촉(蜀)은 263년 유선이 위나라 원정군의 대장 종회에게 투항했다.

유비와 유선이 통치했던 43년이 촉의 전부였다.

그리고 魏나라도 2년후 망했다.

吳나라는 손권이 죽은 뒤 후사문제로 황족과 조정 중신들이 패가 갈려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蜀이 멸망하고 남방의 교지(交趾, 북베트남)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내외가 혼란한 시기에

오나라는마지막 황제 손호(孫皓)가 황제가 되었다.

<오지(吳志)>에 이르기를 "흉악하고 완고하며 잔인하여 충간하는 자는 주살하고

아첨하는 자는 승진시켰으며, 백성을 혹사시키고 음란과 사치가 극에 달했다.

허리와 목을 잘라 백성에게 사죄함이 마땅하다"라고 하여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악행의 표본처럼 보이는 이,

항복하여 시호가 없는 마지막 황제 손호 때에

晉은 손쉽게 280년 吳나라를 제압함으로써 천하를 통일했다.

  

역사에서 '서진(西晉)'이라 부르는 진(晉)은

무제가 사망한 이후 혜제, 회제, 민제로 이어져 316년 전조의 유총(劉聰)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낙양을 도읍으로 삼아 52년간 지탱했다.

이후 건무 원년(317) 사마예(司馬睿)가

진(晉)왕조를 중건하여 도읍을 건강(강소성 남경)으로 삼았다.

역사는 이를 '동진(東晉)'이라 부른다.

  

*** 조식(曺植 : 192-232)

서슬퍼런 형 조비 앞에서 칠보시(七步詩)를 외워야만 했던 불우한 가냘픈 천재시인에 불과했다.

'칠보시'는 조비가 조식에게 일곱 발자국을 걷는 동안 시 한 수를 짓지 못하면 참수하겠다 하자

조식이 일곱 발자국을 채 걷기 전에 다음과 같이 읊었다고 한다.

" ... 콩을 삶는데 콩깍지를 태우니 콩은 가마 속에서 우는구나.

한 뿌리에서 나왔건만 어찌 이리 들볶는가?"

 

태화 6년(232) 진왕에 봉해져 세칭 진사왕(陳思王)이라 한다.

조조가 죽고 조비가 등극하기 이전까지 형을 능가하는 문학적 재능으로

아버지 조조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그는 세자책봉때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형 조비와의 관계는

조비 등극 후 작위가 자꾸만 낮추어지는 식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조비가 죽은 뒤 그 아들 명제가 뒤를 이었으나 조식에게는 변함이 없었다.

젊은 시절에 "내 비록 덕이 부족하나 제후가 되어 힘써 나라에 보답하고 백성을 보살펴

불멸의 업적으로 영원한 공을 남기고자 한다"고 자신의 정치적 포부와 이상을 밝혔던 그는

태화 6년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시가는 여전히 남아 그의 노래를 그대로 들려주고 있다.

그의 시가는 <시경>과 악부시의 뛰어난 전통을 이어받아 아름답고 풍성한 오언시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이른바 건안 풍골(風骨)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 제갈량 리더십 : 동양 최고의 CEO가 유서로 남긴 리더의 전략 36가지 

 

'때'를 만들어낸다 - 리더의 자기표현

1. 도광양회(韜光養晦) : 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리다

2. 삼고초려(三顧草廬) : 인재를 얻기 위해 찾아가서 예를 다하다

3. 융중대책(隆中對策) :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지계)를 제시하다

4.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 : 나에게 공명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

 

상처 없이 위엄을 세운다 - 리더의 자기 관리

5. 일전입위(一戰立威) : 한 번의 전투로 위엄을 세우다

6. 중계수계(中計授計) : 계략에 빠져 계략을 내놓다

7. 연합항조(聯合抗曹) :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하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긴다 - 리더의 커뮤니케이션

8. 설전군유(舌戰群儒) : 말로써 동오(東吳)의 학자들을 설복시키다

9. 지설주유(智說周瑜)=지격주유(智激周瑜) : 지혜로운 주유를 설복시키다

10. 초선차전(草船借箭) : 볏단을 실은 배로 화살을 빌리다

 

약점으로 무기를 삼는다 - 리더의 갈등 해결

11. 격안관화(隔岸觀火) : 강 건너 불구경하다

12. 장계취계(將計就計) : 상대방의 계략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쓰러뜨리다

13. 기생유 하생량(旣生瑜 何生亮) : 하늘은 주유를 내리고, 왜 다시 제갈량을 내리셨는가!

14. 복룡봉추(伏龍鳳雛) : 제갈량과 방통

 

신뢰와 인내로 내 사람을 얻는다 - 리더의 인재 선발

15. 용인불의 의인불용(用人不疑, 疑人不用) : 

                                    사람을 쓸 때는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말라

16. 의병지계(疑兵之計) : 군사의 수가 많은 것처럼 의심하게 만들다

17. 교병지계(驕兵之計) : 적의 교만심을 키워 격파시킨다

18. 사이후이(死而後已) : 죽은 후에야 비로소 일을 그만두다

19. 안거평오로(安居平五路) : 오로를 평정하고 평안히 지내다

20. 칠금맹획(七擒孟獲) : 일곱 번 맹획을 잡고 일곱 번 놓아주다

 

원칙이 절대 선이다 - 리더의 인재 관리

21. 점적적누(点滴積累) :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서 큰물을 이루다

22. 반간계(反間計) : 이간을 붙이는 술책을 쓰다

23. 읍참마속(泣斬馬謖) :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다

 

마음을 다스려 승리를 얻는다 - 리더의 위기 대처

24. 공성계(空城計) : 아군이 열세일 때 방어하지 않는 것처럼 꾸며 적을 혼란에 빠뜨리다

25. 난공불락(難攻不落) : 공격하기 어려워 좀처럼 함락되지 않다

26. 위위구조(圍魏救趙) :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다

27. 제궤의혈(堤潰蟻穴) : 개미구멍으로 인해 큰 둑이 무너지다

28. 일낙천금(一諾千金) : 한번 한 약속은 틀림없이 지키다

29. 구능식지 하환무인(苟能識之, 何患無人) :

                            만약 인재를 식별할 수 있다면 쓸 만한 인재가 없음을 왜 걱정하겠는가?

 

모험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 - 리더의 오류 극복

30. 목우유마(木牛流馬) : 나무로 만든 움직이는 소와 말

31. 무처여무량(無妻如無梁) : 아내가 없다면 집에 대들보가 없는 것과 같다

32. 금선탈각(金蟬脫殼) : 매미가 허물을 벗듯 위기를 모면하다

33. 반면교사(反面敎師) :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다

 

나아갈 때와 물러갈 때를 안다 - 리더의 권한 부여

34. 방압이득봉(放鴨而得鳳) : 오리를 내주고 학을 얻다

35. 반골(反骨) : 제갈량이 위연의 뼈가 튀어나와 모반을 할 상이라 말하다

36. 절장보단(絶長補短) : 긴 것을 끊어 짧은 것에 보태다

- 저자 : 동팡원뤼(북경엽자작업실, 북경우마문화유한책임공사 집행장)

  역자 : 김효숙 / 랜덤하우스중앙, 2005년

 

 

 

 

 

 장비의 주량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과학의 눈으로 바라본 삼국지, 어디까지 진실인가

심각한 주사는 인간관계를 망치고 화를 부른다.

장비는 심각한 주사로 목숨을 잃었다.

‘장비의 주량은 얼마나 되고, 화타의 뇌수술은 정말 가능한 일일까?’
중국 영웅호걸의 이야기를 담은 동아시아 최고의 베스트셀러 <삼국지>.

긴 세월 동안 중국은 물론 일본과 한국에서도 폭발적인 사랑을 받아온 <삼국지>는 소설과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등으로 재생산되며 동양의 주요한 문화 콘텐츠의 원천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국내에서 수많은 작가에 의해 출간된 소설 <삼국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의 정사로 진나라의 진수가 편찬하고 송나라의 배송지가 주석을 단 <삼국지>가 아니다.

원 · 명시대 나관중이 <삼국지평화>와 정사 <삼국지>, 그리고 배송지의 각주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토대로 소설화한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한 게 국내에서 흔히 보는 소설 <삼국지>다.

소설이기 때문에 당연히 믿기 어려운 황당한 이야기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현대 과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삼국지>의 내용은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일까.

과학저술가이자 고대 문명 탐사가인 이종호씨가 궁금증 해결에 나섰다.

소설 <삼국지>를 과학적 시각에서 새롭게 들여다본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북카라반) 를 통해서다.

 


장비 주량 막걸리로 치면 16병

 
첫 분석 대상은 장비와 술이다.

<삼국지>에는 유난히 술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특히 호걸 장비는 술에 관한 한 <삼국지>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마시는 주당이다. 심지어 술 때문에 부하들에게 죽임까지 당했다.

장비가 술을 마시고 곯아떨어진 사이 단도로 장비를 찔러 살해한 것이다.

저자는 장비가 얼마나 술을 마셨기에 살해당해도 몰랐을까 궁금해하며

장비의 주량 측정에 나섰다.

우선 장비가 마셨던 술은 발효주로 오늘날 막걸리와 비슷한 도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주량은 체구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장비는 8척이었다고 하니 1척을 당대의 척으로 인식되는 20~30㎝로 계산하면 160~184㎝이고

기골이 장대한 것으로 나오니 몸무게는 90㎏ 정도로 추산된다.

일반적으로 50㎏의 성인 몸 속에는 약 4㎏(약 3.8ℓ)의 혈액이 있다고 볼 때

장비의 몸 속에는 약 7.2㎏(약 6.8ℓ)의 혈액이 있을 것이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혈중알코올 농도가 0.5%라고 보면

장비는 몸 속에 최대 34㎖의 알코올을 갖고 있을 수 있다.

이를 현재 시판되고 있는 발효주로 계산하면

맥주(4.5%) 756㎖, 막걸리(6%) 567㎖, 포도주(11%) 306㎖, 청주(12%) 283㎖다.

저자는 장비의 간이 해독할 수 있는 능력과 술 마시는 분위기 등을 고려해

10말을 마셨다는 그의 주량은 막걸리 16병, 맥주 20여 병이라고 계산해낸다.

또 장비가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주사(酒邪)가 있어 장군답지 않게 술을 마신 후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저자가 주목한 두 번째 내용은 동탁의 몸으로 등(燈)을 만들었다는 부분이다.

생전에 남달리 몸이 비대하던 동탁은 죽은 송장도 유난히 크고 기름져

군사들이 그의 배꼽에 심지를 박아 불을 켜서 등을 만들었더니

송장에 붙은 불이 이글이글 끓으며 며칠밤을 두고 탔다는 게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동서양에서 일어난 사건을 근거로

‘심지효과에 의한 인체 자연연소‘가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화타, 환자 마취시켜 개복수술 추정

 

영화 <적벽대전 2>에서 제갈량은 꾀를 내

조조군이 쏜 화살 10만 개를 얻어 돌아온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은 나관중이 각색한 이야기이며, 적벽대전으로 알려진 전투 역시

실제로는 오림에서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오림대전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전쟁에 등장하는 많은 주인공의 생명을 구한 화타의 의술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삼국지>를 보면 관우는 전투중 팔에 독화살을 맞아 중병을 얻는다. 화타는 독이 뼈까지 침투했으니 오염된 살을 도려내고 뼈를 긁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관우는 화타가 시술하는 동안 다른 한 팔로 자신의 진영에 있던 마량과 바둑을 둔다.

 

저자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 따르면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뼈를 깎는 시술을 마취제도 없이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술이 아주 미미한 것이었거나 화타가 요즘의 마약류에 속하는 국부마취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말한다.

<삼국지>에는 또 화타가 두통으로 괴로워하는 조조에게 머리를 도끼로 갈라낸 후 질병의 근원을 제거하면 완치할 수 있다며 뇌수술을 권유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이때의 대화가 조조의 화를 돋워 화타는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면 화타가 살았던 2세기에 과연 중환자를 마취시켜

개복수술, 심지어는 뇌수술을 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중국 정사에 화타가 개복수술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화타의 수술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는 학자들의 견해를 전한다. 또 삼국시대보다 다소 후대이기는 하지만

수나라 때 개복수술한 사례가 많다는 기록도 화타의 의술에 신빙성을 더해준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온화한 영웅으로 알려진 유비가 사람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삼국지>에는 유비가 여포에게 패한 후 조조에게 몸을 위탁하러 가던 길에,

유비를 존경하던 가난한 사냥꾼인 유안이 자신의 아내를 죽여 요리를 만들어

일행을 대접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후 조조가 유비를 만나 유안의 이야기를 듣고

돈 100냥을 손건에게 주며 “유안이란 사람은 과연 의기남아요.

돈 100냥을 줄 테니 유안에게 새 아내를 맞게 하시오”라고 말한다.

아내를 죽여 요리로 만들어 상에 올린 유안을 짐승만도 못한 살인마가 아니라,

의기남아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또 노여워하기는커녕 고맙고 대견하게 생각한 유비나 조조의 반응도

현대인의 시각에선 어처구니가 없다.

여하튼 저자는 이를 계기로 중국인들의 식인(食人) 문화에 대해 기술한다.

오늘날과는 달리 중국에는 아주 먼 과거부터 식인행위와 그에 관한 특별한 도덕관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즉, 중국에서 식인 문화는 당시 보편화된 사회 현상으로,

전쟁으로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전란으로 농경이 피폐해져 식량이 부족하게 됐을 때는

인육이 비상시의 대용식 내지는 주식이 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소개한다.

이 책에는 제갈량이 안개를 이용해 서로 묶어놓은 20척의 배로 조조군을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했고, 이에 속은 조조군이 쏜 화살 10만 개를 회수해 주유에게 줬다는 적벽대전 중

‘초선차전(草船借箭)’ 이야기에 대한 반론도 있다.

저자는 이 이야기 자체는 공상적인 이야기가 아니지만 원본은 다르다고 밝힌다.

그 근거는 <삼국지>가 나오기 전 베스트셀러인 <삼국지평화>에는

제갈량이 아닌 주유가 조조군이 쏜 수백만 개의 화살을 자신의 배에 잔뜩 실어오는 것으로

묘사돼 있고,

<위략>에는 손권이 탄 배에 조조의 군사들이 어지러이 화살을 쏘자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손권이 배를 돌려 반대 쪽에 화살을 받아 돌아온 것으로 표현돼 있는 점이다.

저자는 이것이 ‘화살을 빌린’ 이야기의 원본으로,

사실 화살은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으로 우연히 얻은 것인데

나관중이 후대에 소설로 옮기면서 허구로 각색한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 제갈량이 볏단을 실은 선대를 조직했다면 화살을 얻기는커녕 모두 불에 타 죽었을 것이고,

배마다 1000여 개의 볏단을 싣고 거기에 5000개의 화살이 박힌다면

배의 무게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조조군의 공격에 침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학자들의 견해도 덧붙인다.

이 외에도 이 책은 동남풍을 부른 제갈량의 비밀, 황제를 살린 밧딧불이, 36계 줄행랑 등

소설 <삼국지>에 감춰진 진실을 낱낱이 분석, 소개하고 있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2009 04/21   위클리경향 8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