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
- 지정번호 : 시도유형문화재 제139호
- 지정연월일 : 2001년 12월 31일
- 시 대 : 조선시대 후기
- 小 액자 : 세로 230.0×가로 138.6㎝
大 액자 : 세로 230.0×가로 170.5㎝
- 재 료 : 종이 바탕에 채색 총 9점
큰 폭의 화면에 《삼국지연의》의 각 장면들을 묘사한 중국 민화풍 그림으로,
각 화폭에는 편액의 형식으로 제목을 적어 놓아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이런 삼국지도는 한국에서 임진왜란 이후 관우를 ‘관왕’ 혹은 ‘관성제군’이라 하여
무신(武神)으로 모신 관성교(關聖敎) 신앙과 관련이 있다.
당시 그를 모신 사당이 경북 성주(星州)와 안동(安東) 지방에도 남아 있다.
그 중에서 1602년(선조 35) 명나라 신종(神宗)의 칙령(勅令)으로 만든 서울 동대문의 동묘(東廟)는
관제를 사주(祀主)로 모신 대표적인 사당이다.
관제를 받드는 관성교 등에서는 그를 지상지존(至上至尊), 삼계(三界)의 복마대성(伏魔大聖)으로
받들고, 병을 고쳐주고 자손을 주는 수음자(授淫者)이며 소원을 달성케 하는 축복자로 여긴다.
이 그림의 전체구성은 총 10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9폭이 서울역사박물관에 남아 있다.
각 주제는 다음과 같다.
<제갈공명초용병(諸葛孔明初用兵)>
<와룡선생설전군유(臥龍先生舌戰群儒)>
<와룡선생용기계차전(臥龍先生用奇計借箭)>
<지성단제갈제풍(志星壇諸葛祭風)>
<방사원의연환계(龐士元議連環計)>
<오림화기아만경주(烏林火起阿瞞驚走)>
<장장군수익주성(張將軍守益州城)>
<관흥참장구장포(關興斬將球張苞)>
<와룡선생승전고(臥龍先生勝戰告)>
이 작품은 원래 서울동묘(보물 제142호)에 있던 유물들로 원래 보관 장소도 명확하고
민화풍 그림 가운데,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그린 그림으로서 매우 뛰어나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각 화폭에는 편액형식으로 제목을 적어 놓아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삼국지연의는 중국 원말 · 명초 때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장편 역사소설로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이다. 원명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인데
삼국의 정사(正史)를 알기 쉬운 말로 이야기한 책이라는 뜻이다.
이 소설은 조선시대에 국내로 유입되어 널리 읽혀졌던 작품으로,
특히 그 속에 담긴 유비 현덕을 중심으로 한 한실(漢室)에 대한 충성이나
제갈공명의 지략, 유비 · 관우 · 장비의 결의 등은 유교적 이념을 중시했던 조선시대에
크게 환영 받았던 요소이다. 더구나 관우의 장한 의기와 절개는 민간신앙으로까지 발전하여
관제교(關帝敎)가 생겨나고, 관제묘(關帝廟)가 곳곳에 세워지기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중국의 원본이 수입되어 읽혔으나, 곧 수많은 국역본이 출간되며 인기를 더해갔는데
이 과정에서 삼국지연의도와 같은 작품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소설 『삼국지연의』의 중요한 장면들을 그린 삽도적 성격의 그림인 만큼,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발생된 소설 속의 사건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구성되어 있다.
즉 지그재그형의 구도를 많이 사용하면서,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과 사건의 동적인 전개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유입되었던 삼국지연의류의 판화물 삽도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화풍상으로도 대게 민화적 요소가 강하나, 전반적인 묘사수준을 볼 때,
작가의 회화적 기량은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묘사수준 뿐 아니라 그 크기를 고려할 때,
이 작품은 소설 삼국지연의에 귀속된 삽도적인 성격에 머무르지 않고
독립된 하나의 회화작품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이 대량, 대작인 만큼 한 작가가 그렸다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참여한 공동 작품으로 생각된다. 화풍상으로 궁중회화에서 보이는 세밀한 필치와 섬세한 세부묘사, 경물 표현 등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는데, 국가에서 건립하고 의례를 주관하는 동관왕묘, 즉 동묘의 작품임을 감안하여 국가에 소속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은 소장처가 명확하며,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소재로 한 수준 높은 궁중화풍의 그림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회화사상 보기 드문 예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그림으로는 국내에서 제일 크며, 도화서 화원이 그린 걸작품으로
삼국지의 관우를 모시는 ‘관악묘’의 사당벽에 일반적으로 걸었던 벽화대신 붙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관운장을 모시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전국을 침범하였지만 관악묘 사당이 있는 곳은 전화(戰禍)를 입지 않았다고 하며,
그 후 방방곡곡에 관악묘가 생기게 되었다고 전한다.
(1) 제갈공명초용병(諸葛孔明初用兵)
크기 : 230×170.5㎝
제갈량(諸葛亮)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받아들인 후
처음으로 박망파(博望坡)에서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하후돈을 앞세운 조조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제갈량은 조운, 관우, 장비를 박망파로 보낸다.
박망파는 골짜기가 좁고 山과 川이 매우 가까우며, 수목이 빽빽한 곳이다.
제갈량은 박망파의 이러한 지리적 환경을 이용하여
조조의 군사들을 불로써 공격하여 승리를 이끌어내게 되고,
제갈량을 못미더워했던 관우와 장비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
이 그림의 상단에는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있는데, 제액은 상단 중앙에 배치한 다른 그림들과 달리
상단 좌측에 유비 곁에서 작전을 지시하고 있는 제갈량의 무리들이 위치해 있는 이유로
상단 우측에 배치하고 있다. 제액에는 제갈공명의 “孔”자를 “公”으로 표기하고 있다.
화면 중단에 큰 산을 배치하여 화면을 크게 상․하로 구획하고 있는데,
산 밑에는 나무와 갈대가 불타고 있고
그 아래는 제갈량의 군사들에게 쫓기는 하후돈을 비롯한 조조의 군사들을 표현하였다.
손권과강파황조(孫權跨江破黃祖) - 손권이 양자강을 건너 황조를 깨다
공명유계구유기(孔明遺計救劉琦) - 제갈량이 계책을 주어 유기를 구하다
원래 황조의 부하 소비(蘇飛)가 감녕을 기용한 후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감녕에게 황조를 깨뜨릴 계책을 물었다.
유표의 후계자 쟁탈전에서 밀려난 큰아들 유기(劉琦)는 채부인의 핍박을 받게 되자
208년 7월, 조조는 하후돈(夏侯惇)에게 군사 10만을 주어 신야를 공격하게 하였다.
제갈량박망소둔(諸葛亮博望燒屯) - 제갈량이 박망에서 언덕을 불태우다 | ||||
"형님, 왜 제갈량을 불러 적을 막으라 하지 않소?"
유비는 장비의 무례함을 꾸짖으며 말했다.
"지혜는 제갈량에 맡기면 되지만 용맹은 두 아우가 내야 하는데 왜 남에게만 미루나?"
제갈량은 고참 장수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을까 걱정하여
전권(全權)을 부릴 수 있도록 검(劍)과 인(印)을 달라고 하여 받았다.
제갈량은 신야 북쪽 박망파(博望坡)라는 좁은 산간지역을 결전의 장소로 택했다.
많은 적을 상대해 싸우는 데에는 좁은 산지가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조자룡을 선봉으로 보내 하후돈의 군사를 만나면 후퇴하게 하였다.
적의 군대를 좁은 계곡으로 끌어들인 다음
양쪽에 매복한 관우와 장비 군대가 협공하게 하였다.
하후돈은 유비군을 가벼이 여기고 박망파까지 들어왔다.
이때 갑자기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화염이 하늘을 불태웠다.
조조군은 사람과 말이 어지러이 불탔다.
하후돈은 샛길로 빠져나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제갈량의 첫 승리였다.
유비군이 크게 이기고 돌아오자 관우와 장비가 탄복하였다. "제갈량은 진정 영걸(英傑)이오!"
마침 제갈량이 수레를 타고 단정히 앉은 채 다가오자
관우와 장비가 황급히 말에서 내려 수레 앞에서 절하였다.
그림은 박망파에서 화공을 당하여 달아나는 하후돈이다.
'둔(屯)'은 원래 '모으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언덕을 가리킨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
(2) 와룡선생설전군유(臥龍先生舌戰群儒)
크기 : 230×139㎝
상단 중앙 제액에 <와룡선생설전군유>라는 주제로 그려진 이 그림은
제갈량이 여러 儒者들과 설전하는 장면을 묘사하였으며,
왼쪽 편에 수직으로 솟은 커다란 오동나무, 그 뒤에 나무와 사선방향으로 전각을 배치하고
그 앞에는 전각과 평행방향으로 문을 배치하였다.
전각, 문의 왼쪽 처마는 단축법을 처리한 반면, 전각 마루부분은 역원근법을 구사하여
제갈량과 群儒들이 앉아있는 공간을 확장시켰고,
바위는 다소 도식적인 형태와 태점으로 마무리하였으며
인물묘사는 윤곽을 굵은 묵선으로 그리고 안쪽으로 엷은 채색을 바림하였다.
전각 안에는 제갈량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오의 儒者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전체 화면에서도 제갈량은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황개로 보이는 오의 장수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문 밖에는 제갈량을 태우고 온 수레가 놓여 있고
화면 하단 좌측에는 청록기법으로 그려진 언덕이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민화적 요소가 강한데, 보기 드문 큰 폭의 화면에 지그재그형 구도를 많이 사용하여
동적이면서도 다양한 인물의 모습과 운동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삼국지연의>내용에 의하면,
노숙은 손권이 시킨대로 제갈량을 강동의 인걸들이 모두 모인 장막으로 데려가는데,
그곳에서 제갈량은 장소, 고옹, 우번 등을 비롯한 스무 명 남짓의 문무관원들과 설전을 벌인다.
뒤늦게 동오의 장수인 황개가 끼어들어 제갈량을 데리고 손권에게로 간다.
제갈량은 손권을 만나기 전에 문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생각이 먼저 이겨야 실제 싸움도 이긴다.
(3) 와룡선생용기계차전(臥龍先生用奇計借箭)
크기 : 230×139㎝
이 그림은 적벽대전(赤壁大戰) 당시 제갈량(諸葛亮)이 기이한 계책을 사용하여
조조군으로부터 화살을 빼앗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림의 상단 중앙에는 장면의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그 아래로 화면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는 사선 구도로,
지그재그로 배치된 경물 사이사이에 안개구름과 물결로 배경을 채워 넣었다.
우측 하단에는 북과 나팔을 불며 조조의 군사들을 혼동케 하는 동오의 군사들과 제갈량이,
중앙에는 짚을 가득 실은 동오의 배가, 좌측 상단에는 조조의 군사들이
청록기법과 태점으로 표현된 언덕 위에서 동오의 배를 화살로 공격하는 장면이
사선방향으로 평행되게 배치되어 있다.
제갈량계복주유(諸葛亮計伏周瑜) - 제갈량이 계책으로 주유를 굴복시키다 |
제갈량조차 이 일을 모를 거라며 노숙더러 가서 한번 알아보라고 하였다.
노숙이 만나보니 제갈량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에 주유는 제갈량을 그냥 두면 동오에 불리하게 될 것이라 여겨
제갈량을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주유는 참모 회의를 열고 제갈량에게 10일 안에 화살 10만 개를 만들어달라고 하였다. 제갈량은 태연스레 말하길 오히려 3일이면 가능하다고 하였다. 주유는 화살 만드는 장인들에게 일부러 일을 지연시켜, 제갈량이 기일 내에 만들지 못하게 하여 이를 명목으로 죽이려 하였다.
제갈량은 이틀 동안 아무 일도 않다가 사흘 째 새벽에 노숙에게 20척의 배를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배마다 군사 30명씩 태우고 배 위에 청색 천으로 휘장을 두른 뒤
짚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제웅 1000개를 양옆에 세워달라고 하였다.
사흘째 새벽, 강에는 안개가 짙었다. 제갈량은 20척의 배를 끈으로 연결해 조조 영채 앞에 일자(一字)로 늘어서게 하였다.
그리고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게 한 후 노숙과 술잔을 기울였다.
조조는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만여 명의 궁수에게 명하여 화살을 쏘게 하였다. 안개가 걷힐 무렵이 되니 배에는 이미 10만 개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초선차전(草船借箭)"이라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이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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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성단제갈제풍(志星壇諸葛祭風)
크기 : 230×139㎝
이 그림은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손권, 유비 연합군이 조조의 군대를 화공(火攻)하려 할 때
이를 성공시킬 수 있도록 제갈량이 제단을 쌓아놓고 동남풍이 불도록 하늘에 비는 장면을 묘사한 것.
상단 중앙에는 이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그 아래로는 그림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는 사선구도로, 하단에는 양 옆으로 태점이 있는 청록기법의 언덕이
사선방향으로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고, 그 중앙에 조운을 태운 배가 표현되어 있다.
상단에는 이 언덕들과 평행되게 역원근법으로 처리된 3단의 제단을 배치하였다.
제단의 제일 상단에는 제갈량이 도의(道衣)를 입고 맨발에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으로
동남풍을 기원하고 있고 제갈량 주위에는 네 사람을 세웠는데,
제갈량의 뒤쪽 좌측에 있는 사람은 보검을 받쳐 들었고, 우측에 서 있는 사람은 향로를 받들고 서 있다.
보검을 받쳐 들고 있는 사람의 우측에는 장대 끝에 닭털을 단 일산(日傘)을 들고 서 있으며,
그 옆에는 칠성호대(七星號帶)를 단 장대를 들고 있는 사람이 서 있다.
상단 주위에는 팔괘(八卦)가 그려진 고조기(高照旗)를 둘러 세웠다.
『삼국지연의』내용에는 누른 기 예순넷으로 64괘를 벌이되 여덟 방위로 나누어 세웠다고 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좁은 화면의 특성상 팔괘 깃발을 한 면에 8개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중단에는 군사들이 나부끼는 깃발을 들고 빽빽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데,
이 깃발들은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것으로 푸른 기, 검은 기, 흰 기, 붉은 기이다.
화면에는 북쪽에 검은색 기 하나, 동쪽에 푸른색 기 하나, 남쪽에 붉은색 기 8개가 표현되어 있다.
제일 하단에는 모절(旄節), 금월부(金鉞斧), 은월부(銀鉞斧), 대극장과(大戟長戈), 주번(朱旛) 등의
의장구가 세워져 있다.
주유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이 찾아가 처방전이라며 글자를 적어주었다.
칠성단이 만들어지자 제갈량은 네 사람을 단 위에 오르게 하여,
(5) 방사원의연환계(龐士元議連環計)
크기 : 230×139㎝
동오의 주유가 조조의 배들을 화공하기 위해,
방통을 보내어 조조의 배들을 연결시키도록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주유는 조조를 깨뜨리기 위해 방통에게 계책을 묻고,
조조의 첩자 장간을 이용해 방통을 조조에게 보낸다. 거기서 방통은 조조에게 연환계를 알려준다.
그러자 조조는 영을 내려 쇠사슬과 큰 못을 만들어 배를 서로 얽어놓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림의 상단 중앙에는 제액이 있고, 그 밑으로 장면을 묘사한 화면이 있다.
화면 하단부는 V자로 구획되며, 좌측에 바위, 우측에 물결을 묘사하고,
그 안에 사선으로 연결된 배들을 포치하고 있다.
배 위에는 군사들과 장막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방통과 조조를 묘사하고,
그 주위를 구름이 에워싸고 있다.
구름 너머로 공간을 두고 상단부에 물결과 구름에 둘러싸인 진영의 윗부분을 묘사하고 있다.
서산에 연금된 장간이 한가하게 산책하고 있을 때 우연히 방통을 만났다.
방통은 "와룡과 봉추 가운데 한 사람만 얻어도 중국을 얻을 수 있다"는 사마휘의 말에
나오는 바로 그 봉추였다. 방통은 동오에서 식객으로 지내고 있었다.
방통은 일부러 장간에게 주유는 재주만 믿고 도량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장간은 조조에게 투항하라 권했고,
방통은 장간을 따라 강 건너 조조 진영으로 갔다.
조조는 오래 전부터 방통의 소문을 들어온 터라 친히 마중을 나갔다.
조조가 군영을 안내하며 계책을 묻자, 방통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않은 북방 병사들은
배 멀미로 전투를 제대로 할 수 없으므로 배들을 쇠사슬로 연결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면 병사들이 넘어지지도 않거니와 말을 타고 배 위를 다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조조가 방통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참모 정욱이 진언하였다.
"쇠사슬로 배들을 이으면 안정은 될지 몰라도 만일 화공을 당하면 크게 위험합니다."
조조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불은 바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같은 겨울에 서북풍만 불고 있으니 적이 불을 쓴다면
오히려 자신들을 태우지 않겠소?"
조조를 속이기 위해 먼저 황개의 고육계(苦肉計 : 자신의 육체를 상하게 하여 적을 속이는
계책을 말함), 감택의 사항계(詐降計)에 이어, 다시 방통의 연환계(連環計)가 사용되었다.
여러 계책이 고리처럼 이어져 조조의 목을 조르는 형국이었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6) 오림화기아만경주(烏林火起阿瞞驚走)
크기 : 230×139㎝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한 후, 오림(烏林) 부근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운를 만나
도주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상단 중앙에는 이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그 아래로는 화면이 배치되어 있다.
화면 좌측과 중앙에 산을 포치하여 상․ 하 구도를 나눈 다음,
그 아래 도주하는 조조, 장요, 허저, 서황 등의 조조편의 장수들과 군사들을 배치하였으며,
그 위쪽에는 조조의 뒤를 쫓는 조운이 보인다.
상단 우측 언덕 너머에는 많은 군사가 따라 오고 있음을 암시하듯 창과 칼이 여러 기 표현되어 있다.
주공근적벽오병(周公瑾赤壁鏖兵) - 주유가 적벽에서 격전을 벌이다
조조패주화용도(曹操敗走華容道) - 조조가 패하여 화용도로 달아나다
갑자기 바람의 기세를 탄 불은 활활 번지기 시작하였고
주유는 水軍을 네 개의 부대로 나누고, 각각 한당 주태 장흠 진무가 이끌어 나가도록 하였다. 감녕은 채중을 앞세워 조조 진영의 곡식 창고를 찾았고,
삽시간에 물 위와 강가는 불로 한 무더기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조조는 경황이 없이 좌충우돌)하면서 도주하였다.
오병(鏖兵)은 본래 병사들을 번철에 지지듯 한다는 뜻으로, 격렬한 전투를 의미한다. 오전(鏖戰)이나 오살(鏖殺)이라는 말도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한참을 달린 조조는 새벽이 되어서야 산세가 험준하고 수목이 울창한 곳에 이르렀다.
조조의 부장들이 힘써 조자룡을 막는 사이 조조는 몸을 빼내
(7) 장장군수익주성(張將軍守益州城)
크기 : 230×170.5㎝
장비가 익주성을 지키고 있다는 표제 내용을 근거로 할 때,
이 장면은 이는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장비가 익주성을 지키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림 상단 중앙에는 이 장면의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그 아래로는 화면이 배치되어 있다.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익주성을 화면 전체에 꽉 차게 표현하였고
성을 중심으로 위부분을 제외한 좌․우측과 하단은 산과 언덕 나무들이 말발굽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성문 위 누각 현판에 “익주성(益州城)”이라 쓰여 있어, 이 성이 익주성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성문 위에는 수비하는 장비의 군사들이 창과 깃발을 들고 성벽을 따라 나란히 서 있다.
성문 앞 우측 하단에는 해자를 가로지르는 화려한 문양의 다리가 배치하고 있다.
유현덕평정익주(劉玄德平定益州) -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다
서천 정벌의 공로자 법정(法正)이 법률을 관대하게 실시할 것을 제안하자
유비는 스스로 익주목(益州牧)에 올라 공훈에 따라 직위를 나누었으며,
(8) 관흥참장구장포(關興斬將球張苞)
크기 : 230×170.5㎝
이 장면은 장비가 죽은 후, 유비가 원수를 갚기 위해 손권을 정벌하려 일으킨 전쟁에서
관흥(關興, 관우의 아들)이 오나라 군사에 의해 위험에 빠진 장포(張苞, 장비의 아들)를 구해주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상단 중앙에는 이 장면의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배치되어 있다.
화면 좌측 상단과 우측 하단에 사선으로 평행하게 나무와 언덕이 있고
그 반대편 모서리에는 도식적인 구름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가운데에 장면의 주제가 표현되어 있다.
화면 중앙에서 좌측에 화살을 맞아 날뛰는 말에서 떨어지는 흰 전포를 입은 인물은 장포이며,
큰 쇠도끼를 쳐들고 장포에게로 말을 몰아가는 장수는 오나라 장수인 이이(李異)로 보인다.
큰 칼을 들고 이이를 바짝 따라가는 인물은 죽기 직전의 장포를 구할 관흥이다.
화면 우측 상단에서 말 위에서 활을 매고 있고 이를 지켜보고 있는 장수는
장포의 말에 화살을 쏜 오나라의 비장(裨將) 담웅(譚雄)으로 보인다.
『삼국지연의』 내용에서는 관흥과 장포가 은투구, 은갑옷에 흰 전포를 입고 흰 깃발을 앞세웠으며,
관흥은 큰 칼을, 장포는 한 길 여덟 자의 정강으로 만든 창을 들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 그림에서도 관흥과 장포는 흰 깃발을 앞세우고 흰 장포를 입고 있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전투 초기에는 장포와 관흥의 활약으로
장포는 동오의 장수 사정(謝旌)을 죽이고 최우(崔禹)를 사로잡았다.
손환이 황급히 구원병을 청하자
(9) 와룡선생승전고(臥龍先生勝戰告)
크기 : 214×134.5㎝
이 장면은 다른 그림들처럼 주제를 나타내는 특징적인 인물 표현이나 사건 묘사가 드러나 있지 않아
어느 장면인지 정확하게 찾아낼 수 없지만,
『삼국지연의』의 여러 주제 중 제갈량의 승리를 나타낸
98회 2절 주제인 “습진창무후취승(襲陳倉武侯取勝)”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단 중앙에는 이 장면의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그 아래로는 화면이 배치되어 있다.
화면 상․하단에 성문과 성벽을 횡으로 배치하고 우측에 청록과 태점으로 그린 산으로 연결하였다.
상단 성벽 너머에는 2층의 전각이 있으며,
1층 전각 안에는 한 폭으로 된 가리개가 휘장 사이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연극무대처럼 마련한 중앙의 공간에 인물들을 배치하였다.
화면 중앙 좌측에 긴 검을 잡고 서 있는 장수가 있으며,
그 우측 아래 학 한 쌍이 날개를 펴고 마주 보고 있다.
학 밑에는 삼지창을 들고 있는 장수와 사모관대를 한 인물 2명이 배치되어 있다.
상단에는 구름과 안개에 가리워진 물결이 표현되어 있다.
◆ 참고 : <삼국지(三國志)>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 《삼국지(三國志)》/ 본서 성립 285년 진수(陳壽: 233-297)
우리가 흔히 《삼국지(三國志)》라고 알고 있는 것은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정사《삼국지(三國志)》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정사《삼국지(三國志)》는 진(晋)나라의 사료편찬관 진수(陳壽, 233-297)가 280년 편찬하였으며,
「위서(魏書=魏志)」30권, 「촉서(蜀書=蜀志)」15권, 「오서(吳書=吳志)」20권 총 65권으로 구성하였다.
《삼국지(三國志)》는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이다.
기전체란 역사 편찬의 한 방법으로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으로 나뉘어 인물이 행한 일을 중심으로
사건을 서술하는 방법인데,
《삼국지(三國志)》는 위서에만 본기 4기(紀)가 있고
나머지 61편은 모두 전(傳)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수의 구성에서 보이듯이 『삼국지연의』가 촉(蜀)을 정통으로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정사《삼국지(三國志)》는 위, 촉, 오 삼국 중 위(魏)나라를 한(漢)의 정통으로 하여 서술하였다.
정사《삼국지(三國志)》는 공식적인 왕조기록으로 인정받는 역사서로,
그 내용과 문장이 간결하고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남북조 시대 때인 429년 송(宋) 문제(文帝)는 중서시랑 배송지(裴松之, 372-451)에게 명하여
《삼국지주(三國志註)》를 편찬하게 하였다.
당송대에는《삼국지주(三國志註)》에 민간의 야담과 설화가 혼합된 삼국지가 구전된다.
元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는 전문 이야기꾼에 의해 구전되던 이야기 대본이 집약되어
책으로 출간되는데, 현재까지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3권과
《지원신간전상삼분사략(至元新刊全相三分事略)》등 2종이 전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삼국지 계열의 희곡 출현과 잡극 공연으로 인해 삼국의 이야기가 더욱 대중화 된다.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최고 간행 1522년 나관중(羅貫中: 1328-1398)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중국의 사대기서(수호지, 삼국지연의, 서유기, 금병매) 중 하나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등장한 것은
원말 나관중(원말~명초)이 『전상삼국지평화』를 기본 틀로 삼아,
정사『삼국지』,『삼국지주』,『후한서』등을 참고로 하여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원제》를 완성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最古) 판본은 明 가정(嘉靖) 임오년(壬午, 1522)에 간행된 가정본(嘉靖本)으로,
明 홍치(弘治) 갑인년(甲寅, 1494)의 서문이 있다.
그리하여 홍치본(弘治本)이라고도 하며, 촉(蜀)나라가 정통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후 명말까지 주왈교본(周曰校本),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 등 여러 판본이 쏟아져 나왔으나,
淸 강희(康熙) 연간(1662-1722) 모종강(毛宗崗)과 그의 부친 모륜(毛綸)이 가정본에 수정을 가한
모종강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가장 유행하는 판본이 되었다.
삼국지연의는 한(漢)나라 말기에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는 서기 184년부터
오(吳)나라가 진(晋)에게 멸망당하는 280년까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주된 이야기는 동탁이 소제(少帝)를 폐하고 헌제(獻帝)를 세운 189년부터
촉(蜀)나라가 위(魏)에게 항복하는 263년경까지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현재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삼국지연의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유비가 어머니를 위해 차(茶)를 사려고 강가에서 기다리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번 나누어진 것은 언젠가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는(分久必合) 서사를 시작으로
노식(盧植)선생 밑에서 공손찬(公孫瓚)과 유비(劉備)가 동문수학하는 것을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다.
둘 다 처음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인 내용이 모두 같지만, 근래에는 후자 쪽이 훨씬 더 널리 퍼져가고 있다.
◆ 참고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인
《수호전(水滸傳)》,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의 하나인
《삼국지연의》는 중국 원나라 때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 : 1330?-1400)이 지은 장편 역사소설로서,
원명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 하며,
또한 삼국의 정사(正史)를 알기 쉬운 말로 이야기한 책이라는 뜻에서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라고도 부른다.
‘연의(演義)’라는 것은 사실을 부연하여 자세하고 재미있게 설명한다는 뜻이다.
서진(西晉)의 역사가 진수(陳壽 :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에 서술된
위(魏), 촉(蜀), 오(吳) 3국의 역사에서 취재한 것으로,
옛날부터 중국인들 사이에 흥미 있는 이야기로 전하여 오다가
9세기(당나라 말기)경에는 이미 연극으로 꾸며진 흔적이 있고,
송대(宋代 : 11-13세기)에는 직업적인 배우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야기의 내용은 대략 전, 후반으로 나누어지며,
전반에서는 유비(劉備: 玄德), 관우(關羽), 장비(張飛) 3인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중심으로
나중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 가담하게 되는데, 절정은 유비와 손권(孫權)의 연합군이
조조(曹操)의 대군을 화공(火攻)으로 무찌르는 적벽대전(赤壁大戰)이며,
이것이 위(魏 : 조조), 오(吳 : 손권), 촉(蜀 : 유비)의 3국이 분립(分立)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후반에서는 관우, 유비, 장비가 연이어 죽은 다음 제갈공명의 독무대가 되고,
공명이 6차에 걸친 북정(北征)에서 병사(病死)하는 <추풍오장원(秋風五丈原)>의 1절이 절정을 이룬다.
한편, 수레 위에 학창의를 입고 윤건(倫巾)을 쓰고 부채(羽扇)를 들고 조용히 앉아 신선처럼 행동한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 : 181-234, 자는 公明)은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아 사람들은 ‘복룡(伏龍)’이라 불렀으며,
또 와룡강(臥龍江)이라 불리는 주변 융중(隆中)에 살아서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고도 불렀다.
207년(建安 12)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劉備 : 玄德)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는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 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하였는데,
적벽대전의 동남풍(東南風)과 10만개의 화살, 화용도(華容道)의 예언 등이 《삼국지연의》에 나타난다.
그 후에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는데,
221년(章武 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재위에 오르자 재상이 된다.
위(魏)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후출사표(後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 참고 : 깃털부채
한국 부채는 예로부터 소문나 있었다.
당나라에서는 놓아두기만 해도 냉방이 되었다는 ‘용피선’이 있었는데,
어피(魚皮)로 만든 부채로 신라 유학승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었다 한다.
소동파는 부치면 향에 취하는 고려 '백송선'을 읊었으며,
성종실록에는 무명 사백필 값에 호가하는 부채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는 이집트 투탄카멘 왕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호아금 봉(俸)에 타조의 깃털을 붙인 것으로서
벌레가 갉아먹긴 했지만 3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형체를 확인할 수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 유물은
경남 의창군 다호리(義昌郡 茶戶里)의 고분에서 출토한 옻칠이 된 부채 자루이다.
전체 길이 33.6㎝, 머리 부분의 폭 9.6㎝, 지름이 5㎜, 깊이 1㎝의 구멍 12개(깃털을 꽂았던 부분)가
있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것 1점과 이보다 크기가 작고 보존이 좋지 않은 것을 합한 2점이다.
이 유물은 원삼국(原三國) 초기인 기원전 3, 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황해도 안악군 유설리의 안악 3호 고분 벽화의 인물도는 깃털로 만든 부채를 손에 들고 있다.
이 고분은 영화 13년(永和 十三年; 357) 10월에 조성된 것이므로
4세기 이전부터 깃털로 만든 부채가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고려불화에서도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는 인물상이 가끔 보이며,
「삼국사기」에 "고려 태조가 즉위하자 후백제 왕인 견훤이 공작선(孔雀扇)을 축하의 선물로 보냈다"
는 기록이 있다. 이때가 918년이니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공작새가 없었거나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여
길렀을 것이므로, 화려한 공작의 꽁지깃으로 만든 부채는 귀중한 선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때의 공작선이 지금의 공작선과 같은 모양은 아니겠지만
지금가지도 베트남이나 중국, 인도 등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이나 중국, 인도 등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공작의 꽁지깃만 수입하여 공작선을 만드니 이 부채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다.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이
언제나 흰 학의 깃털로 만든 백우선(白羽扇)으로 삼군을 지휘하며 안개를 걷히게 하기도 하고,
바람도 불게 하는 조화도 부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역시 깃털 부채의 역사는 오래 되었음이 확실하다.
지금은 자연 보호법이 생겨 야생조류의 깃털을 구하기 쉽지 않아 깃털부채의 제작이 뜸한 형편이다.
그러나 백여 년 전만 해도 독수리, 부엉이, 학, 꿩, 매, 까치, 까마귀 등 몸집이 큰 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가 많이 사용되었음을 기록이나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부채가 공예품으로 멋을 부리며 여러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발달된 것은
종이가 발명된 시대부터 시작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닥나무 한지는 질기고, 가볍고 수명이 길어
'지천년 포오백(紙千年 布五白)' 이란 말이 있듯이 세계에서도 부채 만들기에 가장 좋은 종이이다.
따라서 종이부채의 시작은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오래 전일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제작된 종이부채의 상황은 문헌이나 유물이 전하지 않고 있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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