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 삼국지연의도

Gijuzzang Dream 2008. 9. 11. 19:31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

  

- 지정번호 : 시도유형문화재 제139호
- 지정연월일 : 2001년 12월 31일
- 시 대 : 조선시대 후기
小 액자 : 세로 230.0×가로 138.6㎝ 
   大 액자 : 세로 230.0×가로 170.5㎝ 
재 료 : 종이 바탕에 채색
총 9점

 

큰 폭의 화면에 《삼국지연의》의 각 장면들을 묘사한 중국 민화풍 그림으로,

각 화폭에는 편액의 형식으로 제목을 적어 놓아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이런 삼국지도는 한국에서 임진왜란 이후 관우를 ‘관왕’ 혹은 ‘관성제군’이라 하여

무신(武神)으로 모신 관성교(關聖敎) 신앙과 관련이 있다.

당시 그를 모신 사당이 경북 성주(星州)와 안동(安東) 지방에도 남아 있다.

 

그 중에서 1602년(선조 35) 명나라 신종(神宗)의 칙령(勅令)으로 만든 서울 동대문의 동묘(東廟)는

관제를 사주(祀主)로 모신 대표적인 사당이다.

관제를 받드는 관성교 등에서는 그를 지상지존(至上至尊), 삼계(三界)의 복마대성(伏魔大聖)으로

받들고, 병을 고쳐주고 자손을 주는 수음자(授淫者)이며 소원을 달성케 하는 축복자로 여긴다.

 

이 그림의 전체구성은 총 10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9폭이 서울역사박물관에 남아 있다.

각 주제는 다음과 같다.

 

<제갈공명초용병(諸葛孔明初用兵)>

<와룡선생설전군유(臥龍先生舌戰群儒)>

<와룡선생용기계차전(臥龍先生用奇計借箭)>

<지성단제갈제풍(志星壇諸葛祭風)>

<방사원의연환계(龐士元議連環計)>

<오림화기아만경주(烏林火起阿瞞驚走)>

<장장군수익주성(張將軍守益州城)>

<관흥참장구장포(關興斬將球張苞)>

<와룡선생승전고(臥龍先生勝戰告)>

 

이 작품은 원래 서울동묘(보물 제142호)에 있던 유물들로 원래 보관 장소도 명확하고

민화풍 그림 가운데,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그린 그림으로서 매우 뛰어나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각 화폭에는 편액형식으로 제목을 적어 놓아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삼국지연의는 중국 원말 · 명초 때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장편 역사소설로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이다. 원명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인데

삼국의 정사(正史)를 알기 쉬운 말로 이야기한 책이라는 뜻이다.

 

이 소설은 조선시대에 국내로 유입되어 널리 읽혀졌던 작품으로,

특히 그 속에 담긴 유비 현덕을 중심으로 한 한실(漢室)에 대한 충성이나

제갈공명의 지략, 유비 · 관우 · 장비의 결의 등은 유교적 이념을 중시했던 조선시대에

크게 환영 받았던 요소이다. 더구나 관우의 장한 의기와 절개는 민간신앙으로까지 발전하여

관제교(關帝敎)가 생겨나고, 관제묘(關帝廟)가 곳곳에 세워지기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중국의 원본이 수입되어 읽혔으나, 곧 수많은 국역본이 출간되며 인기를 더해갔는데

이 과정에서 삼국지연의도와 같은 작품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소설 『삼국지연의』의 중요한 장면들을 그린 삽도적 성격의 그림인 만큼,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발생된 소설 속의 사건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구성되어 있다.

즉 지그재그형의 구도를 많이 사용하면서,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과 사건의 동적인 전개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유입되었던 삼국지연의류의 판화물 삽도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화풍상으로도 대게 민화적 요소가 강하나, 전반적인 묘사수준을 볼 때,

작가의 회화적 기량은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묘사수준 뿐 아니라 그 크기를 고려할 때,

이 작품은 소설 삼국지연의에 귀속된 삽도적인 성격에 머무르지 않고

독립된 하나의 회화작품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이 대량, 대작인 만큼 한 작가가 그렸다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참여한 공동 작품으로 생각된다.

화풍상으로 궁중회화에서 보이는 세밀한 필치와 섬세한 세부묘사, 경물 표현 등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는데, 국가에서 건립하고 의례를 주관하는 동관왕묘, 즉 동묘의 작품임을 감안하여

국가에 소속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은 소장처가 명확하며,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소재로 한 수준 높은 궁중화풍의 그림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회화사상 보기 드문 예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그림으로는 국내에서 제일 크며, 도화서 화원이 그린 걸작품으로

삼국지의 관우를 모시는 ‘관악묘’의 사당벽에 일반적으로 걸었던 벽화대신 붙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관운장을 모시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전국을 침범하였지만 관악묘 사당이 있는 곳은 전화(戰禍)를 입지 않았다고 하며,

그 후 방방곡곡에 관악묘가 생기게 되었다고 전한다.

  

 

(1) 제갈공명초용병(諸葛孔明初用兵)

 크기 : 230×170.5㎝

 

 

제갈량(諸葛亮)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받아들인 후

처음으로 박망파(博望坡)에서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하후돈을 앞세운 조조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제갈량은 조운, 관우, 장비를 박망파로 보낸다.

박망파는 골짜기가 좁고 山과 川이 매우 가까우며, 수목이 빽빽한 곳이다.

제갈량은 박망파의 이러한 지리적 환경을 이용하여

조조의 군사들을 불로써 공격하여 승리를 이끌어내게 되고,

제갈량을 못미더워했던 관우와 장비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

 

이 그림의 상단에는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있는데, 제액은 상단 중앙에 배치한 다른 그림들과 달리

상단 좌측에 유비 곁에서 작전을 지시하고 있는 제갈량의 무리들이 위치해 있는 이유로

상단 우측에 배치하고 있다. 제액에는 제갈공명의 “孔”자를 “公”으로 표기하고 있다.

화면 중단에 큰 산을 배치하여 화면을 크게 상․하로 구획하고 있는데,

산 밑에는 나무와 갈대가 불타고 있고

그 아래는 제갈량의 군사들에게 쫓기는 하후돈을 비롯한 조조의 군사들을 표현하였다.

  

 

손권과강파황조(孫權跨江破黃祖) - 손권이 양자강을 건너 황조를 깨다

 
한편 강동(江東)에선 손권(孫權)의 사업이 날로 강성해져
양자강에는 70여 척의 전함이 건조되었다.
손권은 주유를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수륙(水陸) 군마를 통솔하게 하였다.
208년 봄, 손권은 강하에 주둔하고 있는 유표의 부장 황조(黃祖)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황조는 아버지 손견을 죽인 원수였다.
손권은 5년 전인 203년에도 황조를 공격했지만
부장 능조가 황조의 부하 감녕(甘寧)에게 살해되어 퇴각했었다.
그런데 마침 감녕이 동오에 투항하겠다고 알려왔다.

원래 황조의 부하 소비(蘇飛)가 감녕을 기용한 후
동오와의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소비가 황조에게 감녕을 추천하며 중용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황조는 감녕이 원래 도적 출신이라 하여 중용하지 않았다.
감녕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동오에 투항하려 했으나,
이전에 능조를 죽인 일로 주저하다가,
"주공(主公, 손권)이 현자를 구하기를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한다"(主公求賢若渴)고 하기에 여몽(呂蒙)을 찾아가 동오에 투항하겠다고 하였다.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감녕에게 황조를 깨뜨릴 계책을 물었다.
감녕은 먼저 황조를 공격한 뒤 이어서 형주를 점령할 것을 권유하였다.
감녕은 선봉장 여몽(呂蒙)의 부하로 들어가 황조군을 대파하고
달아나는 황조를 쏘아 죽였다.
그림에서 오른쪽의 감녕이 왼쪽의 황조를 공격하고 있다.

공명유계구유기(孔明遺計救劉琦) - 제갈량이 계책을 주어 유기를 구하다 

 
황조와 함께 강하(江夏)를 잃은 유표는 유비를 불러 뒷일을 논의했다.
유표는 나이가 많고 병이 위중해 유비에게 형주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유비는 한사코 맡지 않으려 하였다.
물러나와 제갈량이 그 이유를 묻자, 유비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유표에게
그의 어려움을 틈타 이익을 얻고 싶지 않다고 말하였다.

유표의 후계자 쟁탈전에서 밀려난 큰아들 유기(劉琦)는 채부인의 핍박을 받게 되자
유비를 찾아와 구해주기를 간청하였다.
유기는 또 제갈량을 다락으로 모셔놓고 울면서 계책을 호소하였다.
유기가 세 번에 걸쳐 부탁하자
비로소 제갈량은 황조가 없는 강하에 주둔하라고 말하였다.(그림)
이로써 유기는 유표의 허락을 받아 강하에 군사 삼천을 데리고 주둔할 수 있었다.

208년 7월, 조조는 하후돈(夏侯惇)에게 군사 10만을 주어 신야를 공격하게 하였다.
하후돈은 "유비를 생포하고 제갈량을 사로잡겠다"며 호언장담하였다.
순욱은 유비를 가벼이 보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아직 고참 장수들의 인정을 받지 못한 제갈량은 오천 병사로 10만을 대적해야 했다.
유비가 제갈량을 스승으로 대우하자 질투가 난 관우와 장비가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내가 공명을 얻은 건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고 했다.
친밀한 사귐을 뜻하는 '수어지교(水魚之交)'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제갈량박망소둔(諸葛亮博望燒屯) - 제갈량이 박망에서 언덕을 불태우다

 
하후돈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장비가 유비에게 말했다.
"형님, 왜 제갈량을 불러 적을 막으라 하지 않소?"
유비는 장비의 무례함을 꾸짖으며 말했다.
"지혜는 제갈량에 맡기면 되지만 용맹은 두 아우가 내야 하는데 왜 남에게만 미루나?"
제갈량은 고참 장수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을까 걱정하여
전권(全權)을 부릴 수 있도록 검(劍)과 인(印)을 달라고 하여 받았다.

제갈량은 신야 북쪽 박망파(博望坡)라는 좁은 산간지역을 결전의 장소로 택했다.
많은 적을 상대해 싸우는 데에는 좁은 산지가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조자룡을 선봉으로 보내 하후돈의 군사를 만나면 후퇴하게 하였다.
적의 군대를 좁은 계곡으로 끌어들인 다음
양쪽에 매복한 관우와 장비 군대가 협공하게 하였다.
하후돈은 유비군을 가벼이 여기고 박망파까지 들어왔다.
이때 갑자기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화염이 하늘을 불태웠다.
조조군은 사람과 말이 어지러이 불탔다.
하후돈은 샛길로 빠져나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제갈량의 첫 승리였다.

유비군이 크게 이기고 돌아오자 관우와 장비가 탄복하였다.
"제갈량은 진정 영걸(英傑)이오!"
마침 제갈량이 수레를 타고 단정히 앉은 채 다가오자
관우와 장비가 황급히 말에서 내려 수레 앞에서 절하였다.
그림은 박망파에서 화공을 당하여 달아나는 하후돈이다.
'둔(屯)'은 원래 '모으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언덕을 가리킨다.

 

  

헌형주찬세유종(獻荊州粲說劉琮) - 형주를 바치라고 왕찬이 유종을 설득하다

 
하후돈은 자신을 결박한 채 조조 면전에 나가 벌을 청하였다.
조조는 하후돈을 문책하지 않으며 말했다.
"내가 줄곧 염려했던 것은 유비와 손권이야. 나머지 무리는 문제될 게 없지.
지금 이 기회에 강남을 쓸어버려야겠어."
그리하여 50만 군대를 일으켜 5방면으로 강남을 공격하였다.

이때 공융(孔融)이 조조의 출병을 적극 반대하였다.
공융은 유비와 인연이 있는 인물로 그동안 조조의 행태를 자주 비난하였다.

공융은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가 지극히 어진 자를 치니 어찌 패하지 않으리오?"
(以至不仁伐至仁, 安得不敗乎!)라 말했다.
조조가 이를 전해 듣고 공융을 죽였다.
공융이 잡혔을 때 집안에선 두 아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람들이 피하라고 하니 태연히 말하였다.
"새 둥지가 부서지는데 새알이 어찌 성하리오?"(破巢之下, 安有完卵乎?)

병이 위독해진 유표(劉表 : 142-208)는 후계자를 유기로 정하고,
유비에게 형주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유표는 얼마 있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채모와 채부인은 유표의 유서를 조작해 유종(14세)을 주군으로 내세웠다.
조조군이 양양에 이르자 채모 등 중신들이 항복하자고 하였다.
또 난리를 피해 형주에 와서 유표의 우대를 받은 왕찬(王粲)도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유종은 형주 관할 9개 군을 조조에게 바치기로 하였다.
그림은 왕찬이 유종을 설득하는 장면이다.

 

 제갈량화소신야(諸葛亮火燒新野) - 제갈량이 신야를 불태우다

 
박망파 전투에서 패해 주춤했던 조조의 대군은 다시 한 번 남으로 쳐내려갔다.
유비는 신야를 포기하고 번성으로 가서 조조군을 피하기로 했다.
제갈량은 신야의 모든 백성을 번성으로 보내는 한편,
장수들에게 임무를 부여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런 다음 제갈량은 유비와 높은 곳에 올라가 승전보를 기다렸다.

제갈량은 조조의 선봉장 허저(許저)를 작미파(鵲尾坡)로 끌어들였다.
허저는 산위에서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하여 머리를 들어 보니,
유비와 제갈량이 한가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허저가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산에 올랐으나 나무와 돌이 굴러와 패퇴하였다.
선발대의 예기는 이렇게 하여 꺾였다.

이어서 조인이 본대(本隊)의 병사를 이끌고 신야를 공격하니,
성문이 모두 열려 있어 성안에 들어가 주둔하였다.
한밤이 되어 바람이 세차게 불 때 조자룡이 화전(火箭)을 쏘아대자
성안은 불바다가 되었다.
조인이 불타지 않은 東門으로 탈출했으나 조자룡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인이 패잔병을 이끌고 백하(白河)에 이르니 강물이 얕았다.
병사들이 강물에 뛰어들어 그을린 몸을 식히고 말에 물을 먹이고 있을 때
갑자기 큰 물이 천지를 진동하며 내려와 병사들을 쓸어갔다.
알고 보니 제갈량이 관우에게 모래주머니로 상류를 막았다가 트게 했던 것이다.
그림은 신야성에서 화공을 당한 조인이 달아나는 장면이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2) 와룡선생설전군유(臥龍先生舌戰群儒) 

크기 : 230×139㎝

 

-= IMAGE 4 =-

 

상단 중앙 제액에 <와룡선생설전군유>라는 주제로 그려진 이 그림은

제갈량이 여러 儒者들과 설전하는 장면을 묘사하였으며,

왼쪽 편에 수직으로 솟은 커다란 오동나무, 그 뒤에 나무와 사선방향으로 전각을 배치하고

그 앞에는 전각과 평행방향으로 문을 배치하였다.

 

전각, 문의 왼쪽 처마는 단축법을 처리한 반면, 전각 마루부분은 역원근법을 구사하여

제갈량과 群儒들이 앉아있는 공간을 확장시켰고,

바위는 다소 도식적인 형태와 태점으로 마무리하였으며

인물묘사는 윤곽을 굵은 묵선으로 그리고 안쪽으로 엷은 채색을 바림하였다.

 

전각 안에는 제갈량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오의 儒者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전체 화면에서도 제갈량은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황개로 보이는 오의 장수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문 밖에는 제갈량을 태우고 온 수레가 놓여 있고

화면 하단 좌측에는 청록기법으로 그려진 언덕이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민화적 요소가 강한데, 보기 드문 큰 폭의 화면에 지그재그형 구도를 많이 사용하여

동적이면서도 다양한 인물의 모습과 운동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삼국지연의>내용에 의하면,

노숙은 손권이 시킨대로 제갈량을 강동의 인걸들이 모두 모인 장막으로 데려가는데,

그곳에서 제갈량은 장소, 고옹, 우번 등을 비롯한 스무 명 남짓의 문무관원들과 설전을 벌인다. 

뒤늦게 동오의 장수인 황개가 끼어들어 제갈량을 데리고 손권에게로 간다. 

 

 
조조군의 남하에 대해 동오(東吳)는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는가?
노숙은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를 막자고 한 데 반해
장소(張昭) 등 다수의 문신들은 조조에게 항복하자고 하였다.
손권은 제갈량을 만난 후 상황을 보기로 하였다.

제갈량은 손권을 만나기 전에 문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20여 명의 중신들은 제갈량이 주전(主戰)을 주장하러 온 줄 알고 논쟁을 일으켰다.
 
먼저 장소가 제갈량에게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하면서 왜 조조에게 졌느냐고
물었다. 제갈량은 인의(仁義)를 지키느라 유표의 기틀을 빼앗지 않았다고 반박하였다. 이어서 우번은 적은 군사로 어찌 조조의 대군과 싸우려 하느냐고 물었다.
제갈량은 비록 병력이 적다고 해도 도적이 있으면 쳐야 한다고 명분을 강조하였다.
동시에 유비보다 강한 동오가 왜 항복하려 하느냐고 자존심을 자극하였다.
계속하여 보즐, 설종, 육적, 엄준, 정덕추 등이 차례로 제갈량을 공격하였지만
제갈량은 적절하고도 논리적으로 막아냈다. 이 대목은 소설의 백미 중 하나이다.

생각이 먼저 이겨야 실제 싸움도 이긴다.
논쟁과 설전(舌戰)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실제 전투에서도 이긴다.
한참 문신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을 때 노장 황개(黃蓋)가 나타나
제갈량을 두둔하였다. 동오의 무장(武將)들은 대부분 주전론자들이었다.
그림은 문신들과 설전을 벌이는 제갈량의 모습이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3) 와룡선생용기계차전(臥龍先生用奇計借箭)

크기 : 230×139㎝

 

  

   

이 그림은 적벽대전(赤壁大戰) 당시 제갈량(諸葛亮)이 기이한 계책을 사용하여

조조군으로부터 화살을 빼앗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림의 상단 중앙에는 장면의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그 아래로 화면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는 사선 구도로,

지그재그로 배치된 경물 사이사이에 안개구름과 물결로 배경을 채워 넣었다.

우측 하단에는 북과 나팔을 불며 조조의 군사들을 혼동케 하는 동오의 군사들과 제갈량이,

중앙에는 짚을 가득 실은 동오의 배가, 좌측 상단에는 조조의 군사들이

청록기법과 태점으로 표현된 언덕 위에서 동오의 배를 화살로 공격하는 장면이

사선방향으로 평행되게 배치되어 있다.

  

제갈량계복주유(諸葛亮計伏周瑜) - 제갈량이 계책으로 주유를 굴복시키다

 

주유는 자신의 반간계(反間計)가 맞아떨어진 걸 기뻐하며
제갈량조차 이 일을 모를 거라며 노숙더러 가서 한번 알아보라고 하였다.
노숙이 만나보니 제갈량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에 주유는 제갈량을 그냥 두면 동오에 불리하게 될 것이라 여겨
제갈량을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주유는 참모 회의를 열고 제갈량에게 10일 안에 화살 10만 개를 만들어달라고 하였다. 제갈량은 태연스레 말하길 오히려 3일이면 가능하다고 하였다.

주유는 화살 만드는 장인들에게 일부러 일을 지연시켜,
제갈량이 기일 내에 만들지 못하게 하여 이를 명목으로 죽이려 하였다.

제갈량은 이틀 동안 아무 일도 않다가
사흘 째 새벽에 노숙에게 20척의 배를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배마다 군사 30명씩 태우고 배 위에 청색 천으로 휘장을 두른 뒤
짚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제웅 1000개를 양옆에 세워달라고 하였다.

사흘째 새벽, 강에는 안개가 짙었다.
제갈량은 20척의 배를 끈으로 연결해 조조 영채 앞에 일자(一字)로 늘어서게 하였다.
그리고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게 한 후 노숙과 술잔을 기울였다.

조조는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만여 명의 궁수에게 명하여 화살을 쏘게 하였다.
안개가 걷힐 무렵이 되니 배에는 이미 10만 개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초선차전(草船借箭)"이라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이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4) 지성단제갈제풍(志星壇諸葛祭風)

크기 : 230×139㎝

 

 

 

  

이 그림은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손권, 유비 연합군이 조조의 군대를 화공(火攻)하려 할 때

이를 성공시킬 수 있도록 제갈량이 제단을 쌓아놓고 동남풍이 불도록 하늘에 비는 장면을 묘사한 것.

상단 중앙에는 이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그 아래로는 그림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는 사선구도로, 하단에는 양 옆으로 태점이 있는 청록기법의 언덕이

사선방향으로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고, 그 중앙에 조운을 태운 배가 표현되어 있다.

 

상단에는 이 언덕들과 평행되게 역원근법으로 처리된 3단의 제단을 배치하였다.

제단의 제일 상단에는 제갈량이 도의(道衣)를 입고 맨발에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으로

동남풍을 기원하고 있고 제갈량 주위에는 네 사람을 세웠는데,

제갈량의 뒤쪽 좌측에 있는 사람은 보검을 받쳐 들었고, 우측에 서 있는 사람은 향로를 받들고 서 있다.

보검을 받쳐 들고 있는 사람의 우측에는 장대 끝에 닭털을 단 일산(日傘)을 들고 서 있으며,

그 옆에는 칠성호대(七星號帶)를 단 장대를 들고 있는 사람이 서 있다.

 

상단 주위에는 팔괘(八卦)가 그려진 고조기(高照旗)를 둘러 세웠다.

『삼국지연의』내용에는 누른 기 예순넷으로 64괘를 벌이되 여덟 방위로 나누어 세웠다고 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좁은 화면의 특성상 팔괘 깃발을 한 면에 8개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중단에는 군사들이 나부끼는 깃발을 들고 빽빽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데,

이 깃발들은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것으로 푸른 기, 검은 기, 흰 기, 붉은 기이다.

화면에는 북쪽에 검은색 기 하나, 동쪽에 푸른색 기 하나, 남쪽에 붉은색 기 8개가 표현되어 있다.

제일 하단에는 모절(旄節), 금월부(金鉞斧), 은월부(銀鉞斧), 대극장과(大戟長戈), 주번(朱旛) 등의

의장구가 세워져 있다. 

조조군을 화공(火攻)으로 공격하는데 마지막 한 가지 문제는 바람이었다.
조조군은 양쯔강 북안에 있고 연합군은 남안에 있으니,
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어야 화공이 성공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황개의 고육계(苦肉計), 감택의 사항계(詐降計)에 이어서,
다시 방통의 연환계(連環計) 등 모든 준비가 허사로 돌아갈 것이다.
풍향이 변하지 않자 주유는 자신도 모르게 답답하여 피를 토하고 쓰러졌던 것이다.

주유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이 찾아가 처방전이라며 글자를 적어주었다.
"조조를 깨려면 화공을 써야 하는데, 만사가 갖추어졌으되 오직 동풍이 없도다."
주유는 자신의 마음이 간파 당하자 제갈량에게 방책을 물었다.
제갈량은 남병산(南屛山)에 칠성단(七星壇)을 쌓아 법술을 부리면
3일간 동남풍을 불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칠성단이 만들어지자 제갈량은 네 사람을 단 위에 오르게 하여,
각각 닭털, 띠, 보검, 향로를 들게 하고, 자신은 도복을 입고 도술을 부렸다.
과연 삼경(三更)이 되니 기이하게도 깃발이 서북 방향으로 바뀌더니
동남풍이 크게 일기 시작했다.
주유는 한없이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제갈량을 살려두면 후환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정봉(丁奉)과 서성(徐盛)을 시켜 군사를 수륙으로 진격하여
제갈량을 살해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 제갈량은 이미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5) 방사원의연환계(龐士元議連環計)

 크기 : 230×139㎝

 

 

  

   

동오의 주유가 조조의 배들을 화공하기 위해,

방통을 보내어 조조의 배들을 연결시키도록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주유는 조조를 깨뜨리기 위해 방통에게 계책을 묻고,

조조의 첩자 장간을 이용해 방통을 조조에게 보낸다. 거기서 방통은 조조에게 연환계를 알려준다.

그러자 조조는 영을 내려 쇠사슬과 큰 못을 만들어 배를 서로 얽어놓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림의 상단 중앙에는 제액이 있고, 그 밑으로 장면을 묘사한 화면이 있다.

화면 하단부는 V자로 구획되며, 좌측에 바위, 우측에 물결을 묘사하고,

그 안에 사선으로 연결된 배들을 포치하고 있다.

배 위에는 군사들과 장막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방통과 조조를 묘사하고,

그 주위를 구름이 에워싸고 있다.

구름 너머로 공간을 두고 상단부에 물결과 구름에 둘러싸인 진영의 윗부분을 묘사하고 있다.

 

 

 

              서산에 연금된 장간이 한가하게 산책하고 있을 때 우연히 방통을 만났다.

              방통은 "와룡과 봉추 가운데 한 사람만 얻어도 중국을 얻을 수 있다"는 사마휘의 말에

              나오는 바로 그 봉추였다. 방통은 동오에서 식객으로 지내고 있었다.

              방통은 일부러 장간에게 주유는 재주만 믿고 도량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장간은 조조에게 투항하라 권했고,

              방통은 장간을 따라 강 건너 조조 진영으로 갔다.

              조조는 오래 전부터 방통의 소문을 들어온 터라 친히 마중을 나갔다.

              조조가 군영을 안내하며 계책을 묻자, 방통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않은 북방 병사들은

              배 멀미로 전투를 제대로 할 수 없으므로 배들을 쇠사슬로 연결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면 병사들이 넘어지지도 않거니와 말을 타고 배 위를 다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조조가 방통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참모 정욱이 진언하였다.

              "쇠사슬로 배들을 이으면 안정은 될지 몰라도 만일 화공을 당하면 크게 위험합니다."

              조조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불은 바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같은 겨울에 서북풍만 불고 있으니 적이 불을 쓴다면

              오히려 자신들을 태우지 않겠소?"

              조조를 속이기 위해 먼저 황개의 고육계(苦肉計 : 자신의 육체를 상하게 하여 적을 속이는

              계책을 말함), 감택의 사항계(詐降計)에 이어, 다시 방통의 연환계(連環計)가 사용되었다.

              여러 계책이 고리처럼 이어져 조조의 목을 조르는 형국이었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6) 오림화기아만경주(烏林火起阿瞞驚走)

 크기 : 230×139㎝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한 후, 오림(烏林) 부근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운를 만나

도주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상단 중앙에는 이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그 아래로는 화면이 배치되어 있다.

화면 좌측과 중앙에 산을 포치하여 상․ 하 구도를 나눈 다음,

그 아래 도주하는 조조, 장요, 허저, 서황 등의 조조편의 장수들과 군사들을 배치하였으며,

그 위쪽에는 조조의 뒤를 쫓는 조운이 보인다.

상단 우측 언덕 너머에는 많은 군사가 따라 오고 있음을 암시하듯 창과 칼이 여러 기 표현되어 있다.  

 

 

주공근적벽오병(周公瑾赤壁鏖兵) - 주유가 적벽에서 격전을 벌이다

 
208년 11월 21일 동남풍이 불자 주유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선봉대의 깃발을 세운 황개는 거짓 투항하러
오림(烏林)의 조조 진영으로 배를 저어 갔다. 황개가 거느린 20척의 배는
화약과 짚을 가득 채운 채 불을 붙이고 조조군 선박에 부딪쳤다.

갑자기 바람의 기세를 탄 불은 활활 번지기 시작하였고
조조군의 배는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불기둥에 휩싸이게 되었다.
조조군의 진영은 화염 속에 갇혀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유는 水軍을 네 개의 부대로 나누고, 각각 한당 주태 장흠 진무가 이끌어 나가도록 하였다. 감녕은 채중을 앞세워 조조 진영의 곡식 창고를 찾았고,
그곳에 도착하자 채중을 죽이고 불을 질렀다.

삽시간에 물 위와 강가는 불로 한 무더기가 되었다.
이때의 불길로 양자강 건너 남쪽에 있는 석벽(石壁)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붉게 된 석벽을 사람들은 '적벽(赤壁)'이라 하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조조는 경황이 없이 좌충우돌)하면서 도주하였다.
그림은 동오의 화공을 받고 있는 조조군의 모습으로,
왼쪽 배 위에서 창을 든 장수가 황개이고 오른쪽에 관을 쓴 사람이 조조이다.

오병(鏖兵)은 본래 병사들을 번철에 지지듯 한다는 뜻으로, 격렬한 전투를 의미한다. 오전(鏖戰)이나 오살(鏖殺)이라는 말도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조조패주화용도(曹操敗走華容道) - 조조가 패하여 화용도로 달아나다

 
동오군에 대패한 조조는 필사의 후퇴를 감행하였다.
조조가 불더미 속을 헤쳐 나오다 여몽을 만나자 장료가 대응했고,
능통이 가로막자 서황이 나서 막아주었다.
감녕이 나타나자 마연과 장의가 목숨으로 막았다.
부하들이 동오군을 막는 사이 조조는 비로소 오림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린 조조는 새벽이 되어서야 산세가 험준하고 수목이 울창한 곳에 이르렀다.
비로소 한숨을 돌린 조조는 갑자기 크게 웃어댔다.
수하들이 무슨 일로 웃느냐고 묻자 조조가 말했다.
"주유와 제갈량은 아직도 생각이 짧아.
나라면 여기에 군사를 매복해 둘 터인데 말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자룡이 크게 외치며 튀어 나왔다.
"군사(軍師)의 명을 받고서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조조의 부장들이 힘써 조자룡을 막는 사이 조조는 몸을 빼내
호로구(葫蘆口)로 도주하였다.
겨울인데다 비가 와서 병사들은 모두 젖었다.
조조는 병사들에게 밥을 짓게 하고 말에게 풀을 먹이면서 큰 나무 아래 앉았다.
이때 조조가 갑자기 또 크게 웃었다.
"만약 저들이 여기에 복병을 숨겨두었다면 우리 병사는 절반이 죽었을 것이야…."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비가 나타났다.
조조는 깜짝 놀라 갑옷도 입지 못한 채 도망쳤다.
조조는 화용도(華容道)로 달아났다.
조조의 퇴로를 미리 예상한 제갈량은 여기에도 군사를 매복시켜 놓았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7) 장장군수익주성(張將軍守益州城)

 크기 : 230×170.5㎝

 

 

장비가 익주성을 지키고 있다는 표제 내용을 근거로 할 때,

이 장면은 이는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장비가 익주성을 지키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림 상단 중앙에는 이 장면의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그 아래로는 화면이 배치되어 있다.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익주성을 화면 전체에 꽉 차게 표현하였고

성을 중심으로 위부분을 제외한 좌․우측과 하단은 산과 언덕 나무들이 말발굽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성문 위 누각 현판에 “익주성(益州城)”이라 쓰여 있어, 이 성이 익주성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성문 위에는 수비하는 장비의 군사들이 창과 깃발을 들고 성벽을 따라 나란히 서 있다.

성문 앞 우측 하단에는 해자를 가로지르는 화려한 문양의 다리가 배치하고 있다.  

  

유현덕평정익주(劉玄德平定益州) -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다

 
 

익주를 평정한 유비가 공훈에 따라 상을 내리고 있다.

마초를 얻은 유비군은 성도(成都)로 진격하였다.
마초가 항복하라고 크게 소리치자 성 위에서 이를 바라보던 유장이 놀라 기절하였다. 주전론(主戰論)을 펼치는 신하도 있었지만
유장은 백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항복하기로 하였다.
유장은 관인(官印)과 문서를 들고 성 밖으로 나가 유비에게 투항했다.
유비는 유장의 손을 잡고 울며 말했다.
"내가 인의(仁義)를 행할 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사태가 부득이하여 이렇게 되었소이다."
제갈량은 주인이 두 사람 있으면 안 된다며 유장을 형주로 보냈다.

서천 정벌의 공로자 법정(法正)이 법률을 관대하게 실시할 것을 제안하자
제갈량은 법률은 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실에 따라 관직을 주면 직위가 높아질 땐 그 가치를 모르며,
순종한 정도에 따라 은덕을 베풀면 은덕이 끊어질 땐 존경하지 않게 되오.
내가 법으로 위엄을 세우려는 것은 법률이 시행되어야 은덕을 알게 되고,
작위로 차등을 주려는 것은 작위가 더해져야 영예를 알기 때문이오."
더불어 유장이 망한 이유도 은덕을 공정하게 베풀지도 못했고
형벌을 엄정하게 시행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비는 스스로 익주목(益州牧)에 올라 공훈에 따라 직위를 나누었으며,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유비는 확고한 근거지를 갖게 되었고
천하삼분(天下三分)의 계획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때는 214년이었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8)  관흥참장구장포(關興斬將球張苞)

 크기 : 230×170.5㎝

 

  

이 장면은 장비가 죽은 후, 유비가 원수를 갚기 위해 손권을 정벌하려 일으킨 전쟁에서

관흥(關興, 관우의 아들)이 오나라 군사에 의해 위험에 빠진 장포(張苞, 장비의 아들)를 구해주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상단 중앙에는 이 장면의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배치되어 있다.

 

화면 좌측 상단과 우측 하단에 사선으로 평행하게 나무와 언덕이 있고

그 반대편 모서리에는 도식적인 구름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가운데에 장면의 주제가 표현되어 있다.

화면 중앙에서 좌측에 화살을 맞아 날뛰는 말에서 떨어지는 흰 전포를 입은 인물은 장포이며,

큰 쇠도끼를 쳐들고 장포에게로 말을 몰아가는 장수는 오나라 장수인 이이(李異)로 보인다.

 

큰 칼을 들고 이이를 바짝 따라가는 인물은 죽기 직전의 장포를 구할 관흥이다.

화면 우측 상단에서 말 위에서 활을 매고 있고 이를 지켜보고 있는 장수는

장포의 말에 화살을 쏜 오나라의 비장(裨將) 담웅(譚雄)으로 보인다.

 

『삼국지연의』 내용에서는 관흥과 장포가 은투구, 은갑옷에 흰 전포를 입고 흰 깃발을 앞세웠으며,

관흥은 큰 칼을, 장포는 한 길 여덟 자의 정강으로 만든 창을 들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 그림에서도 관흥과 장포는 흰 깃발을 앞세우고 흰 장포를 입고 있다.  



 
 

이이를 베고 장포를 구하는 관흥. 오른쪽 위는 장포.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동오를 공격하면서
'삼국지'의 삼대 전투 가운데 하나인 이릉전(夷陵戰)이 시작되었다.
유비는 장강 상류인 백제성(白帝城, 쓰촨성 펑제현)에 본영을 두고
양쯔강을 따라 동쪽으로 진군하였다.
동오에서는 손권의 조카인 젊은 손환(孫桓)을 주장(主將)으로 하고
주연(朱然)을 부장(副將)으로 하여 이에 맞섰다.

전투 초기에는 장포와 관흥의 활약으로
유비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의도(宜都)까지 이르렀다.
장포가 나서서 이이(李異)와 싸우는데 말이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바람에
장포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틈을 타 이이가 도끼로 장포를 치려는 찰나
관흥이 날 듯이 달려와 이이의 목을 내리쳤다.

장포는 동오의 장수 사정(謝旌)을 죽이고 최우(崔禹)를 사로잡았다.
관흥은 이이를 죽인 후 담웅(譚雄)을 사로잡았다.
장포와 관흥은 승세를 몰아 야밤에 동오의 군영을 기습하니
손환은 크게 패하여 이릉(彛陵)으로 달아났다.
주연 역시 수군을 이끌고 60여 리 하류로 후퇴하였다.
촉군의 대장 오반은 이릉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손환이 황급히 구원병을 청하자
손권은 한당, 주태, 반장, 능통, 감녕 등에게 군사 10만을 붙여 보냈다.
유비는 무협(巫峽)과 건평(建平)에서 이릉까지 700여 리에 걸쳐
40여 채의 진지를 구축하였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9) 와룡선생승전고(臥龍先生勝戰告)

 크기 : 214×134.5㎝

 

 

이 장면은 다른 그림들처럼 주제를 나타내는 특징적인 인물 표현이나 사건 묘사가 드러나 있지 않아

어느 장면인지 정확하게 찾아낼 수 없지만,

『삼국지연의』의 여러 주제 중 제갈량의 승리를 나타낸

98회 2절 주제인 “습진창무후취승(襲陳倉武侯取勝)”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단 중앙에는 이 장면의 내용을 설명하는 제액이, 그 아래로는 화면이 배치되어 있다.

화면 상․하단에 성문과 성벽을 횡으로 배치하고 우측에 청록과 태점으로 그린 산으로 연결하였다.

상단 성벽 너머에는 2층의 전각이 있으며,

1층 전각 안에는 한 폭으로 된 가리개가 휘장 사이로 드러나 있다.

리고 연극무대처럼 마련한 중앙의 공간에 인물들을 배치하였다.

화면 중앙 좌측에 긴 검을 잡고 서 있는 장수가 있으며,

그 우측 아래 학 한 쌍이 날개를 펴고 마주 보고 있다.

학 밑에는 삼지창을 들고 있는 장수와 사모관대를 한 인물 2명이 배치되어 있다.

상단에는 구름과 안개에 가리워진 물결이 표현되어 있다. 

 

 

 

 

◆ 참고 : <삼국지(三國志)>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 《삼국지(三國志)》/ 본서 성립 285년 진수(陳壽: 233-297)

우리가 흔히 《삼국지(三國志)》라고 알고 있는 것은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정사《삼국지(三國志)》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정사《삼국지(三國志)》는 진(晋)나라의 사료편찬관 진수(陳壽, 233-297)가 280년 편찬하였으며,

「위서(魏書=魏志)」30권, 「촉서(蜀書=蜀志)」15권, 「오서(吳書=吳志)」20권 총 65권으로 구성하였다.

 

《삼국지(三國志)》는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이다.

기전체란 역사 편찬의 한 방법으로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으로 나뉘어 인물이 행한 일을 중심으로

사건을 서술하는 방법인데, 

《삼국지(三國志)》는 위서에만 본기 4기(紀)가 있고

나머지 61편은 모두 전(傳)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수의 구성에서 보이듯이 『삼국지연의』가 촉(蜀)을 정통으로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정사《삼국지(三國志)》는 위, 촉, 오 삼국 중 위(魏)나라를 한(漢)의 정통으로 하여 서술하였다.

 

정사《삼국지(三國志)》는 공식적인 왕조기록으로 인정받는 역사서로,

그 내용과 문장이 간결하고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남북조 시대 때인 429년 송(宋) 문제(文帝)는 중서시랑 배송지(裴松之, 372-451)에게 명하여

《삼국지주(三國志註)》를 편찬하게 하였다.

 

당송대에는《삼국지주(三國志註)》에 민간의 야담과 설화가 혼합된 삼국지가 구전된다.

元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는 전문 이야기꾼에 의해 구전되던 이야기 대본이 집약되어

책으로 출간되는데, 현재까지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3권과

《지원신간전상삼분사략(至元新刊全相三分事略)》등 2종이 전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삼국지 계열의 희곡 출현과 잡극 공연으로 인해 삼국의 이야기가 더욱 대중화 된다.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최고 간행 1522년 나관중(羅貫中: 1328-1398)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중국의 사대기서(수호지, 삼국지연의, 서유기, 금병매) 중 하나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등장한 것은

원말 나관중(원말~명초)이 『전상삼국지평화』를 기본 틀로 삼아,

정사『삼국지』,『삼국지주』,『후한서』등을 참고로 하여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원제》를 완성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最古) 판본은 明 가정(嘉靖) 임오년(壬午, 1522)에 간행된 가정본(嘉靖本)으로,

明 홍치(弘治) 갑인년(甲寅, 1494)의 서문이 있다.

그리하여 홍치본(弘治本)이라고도 하며, 촉(蜀)나라가 정통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후 명말까지 주왈교본(周曰校本),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 등 여러 판본이 쏟아져 나왔으나,

淸 강희(康熙) 연간(1662-1722) 모종강(毛宗崗)과 그의 부친 모륜(毛綸)이 가정본에 수정을 가한

모종강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가장 유행하는 판본이 되었다.

 

삼국지연의는 한(漢)나라 말기에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는 서기 184년부터

오(吳)나라가 진(晋)에게 멸망당하는 280년까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주된 이야기는 동탁이 소제(少帝)를 폐하고 헌제(獻帝)를 세운 189년부터

촉(蜀)나라가 위(魏)에게 항복하는 263년경까지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현재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삼국지연의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유비가 어머니를 위해 차(茶)를 사려고 강가에서 기다리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번 나누어진 것은 언젠가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는(分久必合) 서사를 시작으로

노식(盧植)선생 밑에서 공손찬(公孫瓚)과 유비(劉備)가 동문수학하는 것을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다.

둘 다 처음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인 내용이 모두 같지만, 근래에는 후자 쪽이 훨씬 더 널리 퍼져가고 있다.

 

 

 

◆ 참고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인

《수호전(水滸傳)》,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의 하나인

《삼국지연의》는 중국 원나라 때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 : 1330?-1400)이 지은 장편 역사소설로서,

원명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 하며,

또한 삼국의 정사(正史)를 알기 쉬운 말로 이야기한 책이라는 뜻에서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라고도 부른다.

‘연의(演義)’라는 것은 사실을 부연하여 자세하고 재미있게 설명한다는 뜻이다.

 

서진(西晉)의 역사가 진수(陳壽 :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에 서술된

위(魏), 촉(蜀), 오(吳) 3국의 역사에서 취재한 것으로,

옛날부터 중국인들 사이에 흥미 있는 이야기로 전하여 오다가

9세기(당나라 말기)경에는 이미 연극으로 꾸며진 흔적이 있고,

송대(宋代 : 11-13세기)에는 직업적인 배우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야기의 내용은 대략 전, 후반으로 나누어지며,

전반에서는 유비(劉備: 玄德), 관우(關羽), 장비(張飛) 3인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중심으로

나중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 가담하게 되는데, 절정은 유비와 손권(孫權)의 연합군이

조조(曹操)의 대군을 화공(火攻)으로 무찌르는 적벽대전(赤壁大戰)이며,

이것이 위(魏 : 조조), 오(吳 : 손권), 촉(蜀 : 유비)의 3국이 분립(分立)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후반에서는 관우, 유비, 장비가 연이어 죽은 다음 제갈공명의 독무대가 되고,

공명이 6차에 걸친 북정(北征)에서 병사(病死)하는 <추풍오장원(秋風五丈原)>의 1절이 절정을 이룬다.

 

한편, 수레 위에 학창의를 입고 윤건(倫巾)을 쓰고 부채(羽扇)를 들고 조용히 앉아 신선처럼 행동한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 : 181-234, 자는 公明)은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아 사람들은 ‘복룡(伏龍)’이라 불렀으며,

또 와룡강(臥龍江)이라 불리는 주변 융중(隆中)에 살아서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고도 불렀다.

 

207년(建安 12)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劉備 : 玄德)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는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 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하였는데,

적벽대전의 동남풍(東南風)과 10만개의 화살, 화용도(華容道)의 예언 등이 《삼국지연의》에 나타난다.

그 후에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는데,

221년(章武 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재위에 오르자 재상이 된다.

위(魏)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후출사표(後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 참고 : 깃털부채 

한국 부채는 예로부터 소문나 있었다.

당나라에서는 놓아두기만 해도 냉방이 되었다는 ‘용피선’이 있었는데,

어피(魚皮)로 만든 부채로 신라 유학승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었다 한다.

소동파는 부치면 향에 취하는 고려 '백송선'을 읊었으며,

성종실록에는 무명 사백필 값에 호가하는 부채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는 이집트 투탄카멘 왕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호아금 봉(俸)에 타조의 깃털을 붙인 것으로서

벌레가 갉아먹긴 했지만 3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형체를 확인할 수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 유물은

경남 의창군 다호리(義昌郡 茶戶里)의 고분에서 출토한 옻칠이 된 부채 자루이다.

전체 길이 33.6, 머리 부분의 폭 9.6㎝, 지름이 5, 깊이 1의 구멍 12개(깃털을 꽂았던 부분)가

있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것 1점과 이보다 크기가 작고 보존이 좋지 않은 것을 합한 2점이다.

이 유물은 원삼국(原三國) 초기인 기원전 3, 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황해도 안악군 유설리의 안악 3호 고분 벽화의 인물도는 깃털로 만든 부채를 손에 들고 있다.

이 고분은 영화 13년(永和 十三年; 357) 10월에 조성된 것이므로

4세기 이전부터 깃털로 만든 부채가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고려불화에서도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는 인물상이 가끔 보이며,

「삼국사기」에 "고려 태조가 즉위하자 후백제 왕인 견훤이 공작선(孔雀扇)을 축하의 선물로 보냈다"

기록이 있다. 이때가 918년이니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공작새가 없었거나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여

길렀을 것이므로, 화려한 공작의 꽁지깃으로 만든 부채는 귀중한 선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때의 공작선이 지금의 공작선과 같은 모양은 아니겠지만

지금가지도 베트남이나 중국, 인도 등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이나 중국, 인도 등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공작의 꽁지깃만 수입하여 공작선을 만드니 이 부채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다.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이

언제나 흰 학의 깃털로 만든 백우선(白羽扇)으로 삼군을 지휘하며 안개를 걷히게 하기도 하고,

바람도 불게 하는 조화도 부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역시 깃털 부채의 역사는 오래 되었음이 확실하다.

지금은 자연 보호법이 생겨 야생조류의 깃털을 구하기 쉽지 않아 깃털부채의 제작이 뜸한 형편이다.

그러나 백여 년 전만 해도 독수리, 부엉이, 학, 꿩, 매, 까치, 까마귀 등 몸집이 큰 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가 많이 사용되었음을 기록이나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부채가 공예품으로 멋을 부리며 여러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발달된 것은

종이가 발명된 시대부터 시작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닥나무 한지는 질기고, 가볍고 수명이 길어

'지천년 포오백(紙千年 布五白)' 이란 말이 있듯이 세계에서도 부채 만들기에 가장 좋은 종이이다.

따라서 종이부채의 시작은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오래 전일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제작된 종이부채의 상황은 문헌이나 유물이 전하지 않고 있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