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시유물에서 보이는 주요 고사성어
제천지도원결의(祭天地桃園結義) / 하늘에 제사하며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다
하북(河北)의 거록에서 장각 형제가 종교와 의술로 영향력을 넓히더니
돗자리를 짜 팔면서 가난하게 살던 유비(劉備)는 의병을 모집하는 방을 보다가
세 사람은 검은 소와 흰 말 등 제물을 준비하고 천지(天地)에 절하며 맹세하였다.
유비, 제갈량, 장비, 관우(무신도)
유현덕참구입공(劉玄德斬寇立功) / 유현덕이 황건적을 죽이고 공을 세우다
삼형제가 상인을 집으로 초대해 술을 대접하며
삼형제는 군사를 이끌고 유주(幽州, 지금의 북경 일대) 태수에게 갔다.
안희장비편독우(安喜張飛鞭督郵) / 안희에서 장비가 독우를 매질하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부임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군(郡)에서 파견한 독우(督郵)가 나왔다.
마을 사람들이 유비의 무죄를 변호하려 독우가 묵는 우정(郵亭)에 몰려갔으나
공직을 이용해 자신의 잇속을 차리거나 법망을 피하여 마구 축재하는 사람들을 보면 장비가 생각난다. 그림 오른쪽은 장비가 독우를 매질한 일에 대해
호뢰관삼전여포(虎牢關三戰呂布) / 호뢰관에서 영웅이 여포와 싸우다
이에 장비가 전광 같은 눈빛에 긴 사모(蛇矛)창을 휘두르며 출전하였다.
이 대목은 보통 '삼전여포(三戰呂布)' 혹은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라고 하는
물은 유비가 여포에게 소패성을 빼앗기고 의형제인 관우,장비와 가족들마저 잃어버린채
조조에게로 몸을 의탁하러 가던 중 잠시 머문 한 시골집에서 만나게 되는 유안은
사냥을 생업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는 말로만 듣던 당대의 영웅 유비가
하룻밤 자신의 집에 은신을 하게 되었다는것만으로도 너무나 놀라고 감격해 한다.
그러나 하룻밤을 묵고 다시 떠나가야 할 유비에게 가난한 자신은 아무것도 대접할 것이 없는 처지.
유안은 고민을 하다가 자신의 젊은 아내를 죽인뒤 그 인육(人肉)을 유비에게 대접하게 되고.
유비는 그 사실을 모른채 유안이 대접한 음식을 감사히 먹고 하룻밤을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하지만 다음날 그 진상을 알게 된 유비는 유안의 정성에 감격하게 되고
허도로 돌아가 조조에게도 그 일을 들려주게 되는데, 조조 역시 유안의 정성에 감읍하여
그에게 상을 내리도록 한다.
"아내는 또 얻을수 있지만 귀하신 손님 유비를 언제 또 다시 자신이 대접할 기회가 올 것인가"
아내를 죽여 그 고기를 유비에게 바친 유안의 생각이었다.
- 유안살처<劉安殺妻, 유안(劉安)이 처의 고기를 삶아 유비에게 바치다>
김덕성 외 <중국소설회모본> 영조 39년(1762) - 할고구군(割股救君) : 넓적다리를 베어 주군을 구하다
여포패주하비성(呂布敗走下丕城) / 여포가 패해 하비성으로 달아나다 |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소패성을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유비는 관우와 장비와 헤어졌으며
처자식을 남겨둔 채 홀로 소패성을 나와 조조에게 도망갔다.
도망가는 중에 들른 마을에서 사냥꾼 유안은 밤이어서 고기를 구하지 못하자
자신의 아내를 죽여 유비에게 대접하기도 하였다.
진등은 서주가 공격당하기 쉬우니 양곡과 처첩을 하비로 옮기라고 하여
진규가 서주를 다스리기 좋도록 하였다. 진등은 여포와 진궁 사이를 오가며
서로 이간시켜 며칠 만에 소패와 서주를 함락시켰다.
소패에서 장비와 관우가 나타나 여포에 대드니
여포는 지친 끝에 투지를 잃고 하비로 달아났다. 조조는 하비성을 포위하였다.
진궁은 여포에게 적을 물리칠 계책을 진언했으나, 여포는 풍족한 군량과 강을 낀 천연의 입지조건에 자만하였다.
진궁은 여포에게 조조군의 보급로를 끊어야 한다고 했지만
여포는 처첩들의 만류에 출전하지 않았다.
여포는 연일 처첩들과 술을 마시며 심란한 마음을 달랬다.
진궁이 탄식하였다. "우리들이 죽는다 해도 묻힐 땅이 없겠군."(吾等死, 無葬身之地矣)
그림은 소패성 전투에서 장비가 여포를 공격하는 장면이다.
언덕 뒤로 관우의 모습이 보인다.
|
현덕필마분기주(玄德匹馬奔冀州) / 유비가 혼자 말 타고 기주로 달아나다
원소는 조조를 타격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개인적인 일에 빠져 객관적인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지휘자는 난세에 살아남을 수 없다.
소패에 있던 유비는 장비의 건의에 따라 조조 군영을 야습(夜襲)하기로 했다.
유비가 업군 경계에 이르니 원소가 친히 부하를 이끌고
관운장천리독행(關雲長千里獨行) / 관우가 천리 길을 홀로 가다 |
"주인을 잊지 않고, 오고 가는 일을 명백히 하니, 참으로 대장부로다.
(不忘故主, 來去明白, 眞丈夫也)."
조조는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장료 등을 데리고 전송하러 나갔다.
조조는 황금과 전포(戰袍)를 선물로 내렸지만 관우는 전포만 받겠다고 했다.
관우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청룡도 끝으로 받았다.
조조에게는 "후일 다시 만날 날이 있겠습니다"라고 사의를 표하였다.
관우와 조조의 인연은 8년 후 적벽대전 끝에 '화용도(華容道)'에서 다시 이어진다.
허도를 떠나 유비를 찾아 하북(河北)으로 천리 길을 가는 중 관우는 다섯 관문을 지난다.
관문을 지키던 장수들은 관우가 통행증이 없다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으려 했다.
관우는 여섯 장수의 목을 베면서 지나갔다.
이 대목을 보통 '다섯 관문을 지나며 여섯 장수를 베다'는 뜻의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이라 부르거나 '천리독행(千里獨行)'이라고 한다.
관우의 장대한 의기(義氣)와 무용(武勇)이 한껏 미화된 부분이다.
'삼국지'에서 관우의 용맹은 무척 과장되었는데 이 부분이 대표적이다. 그림은 다리에서 조조의 전송을 받으며 떠나는 장면으로,
관우가 청룡도 끝으로 전포를 받고 있다. 언덕 뒤의 인물이 조조이다.
|
운장뇌고참채양(雲長擂鼓斬蔡陽) / 관우가 북소리를 들으며 채양을 베다
여남으로 가는 길에 와우산(臥牛山)에서 배원소와 주창(周倉)이 항복해왔다.
|
|
현덕약마도단계(玄德躍馬跳檀溪) / 유비가 말을 뛰어 단계를 건너다 |
유표에게는 전처 소생의 큰아들 유기(劉琦)와
현 부인 채(蔡)씨 소생의 유종(劉琮)이 있었다.
큰 아들을 세우자니 세력이 강한 채씨 집안이 반발할 것이고,
둘째 아들을 세우자니 예법에 어긋났다.
유비는 당연히 예법을 따라야 하며 채씨 일족의 권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의논 중에 측간에 간 유비는 몸을 일으키다 자신의 허벅지에 살이 붙은 걸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유표가 눈물 흔적을 보고 그 연유를 묻자
유비는 예전에는 항상 말을 타고 다녀 허벅지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은 허벅지에 살이 쪘다고 말했다.
장부가 이룬 일 없이 허송세월 하는 게 슬프다는 것이다.
'비육지탄(髀肉之歎)'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髀(비)'는 허벅지이다.
채(蔡)씨와 채모는 양양에서 풍년을 축하하는 잔치 때 유비를 죽이기로 계획하였다. 몸이 불편한 유표를 대신하여 유비가 잔치를 주재하였다.
이적이 귓속말로 상황을 알려주어 유비는 재빨리 말을 타고 군사가 없는 서문 쪽으로
달아났다. 그곳은 단계(檀溪)가 가로막혀 있었다.
유비가 채찍을 때리며 크게 소리 질렀다.
"적로야! 적로야! 오늘 네가 나를 해치는구나!"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적로가 몸을 펄쩍 솟구치더니 강 건너로 뛰었다.
유비를 추격하던 채모는 닭 쫓던 개 지붕 바라보듯 해야 했다.
|
유현덕삼고모려(劉玄德三顧茅廬) / 유비가 세 번 초막을 찾아가다 |
유비가 제갈량에 대해 묻자 사마휘는 먼저 그의 친구 네 사람을 들었다.
박릉의 최주평, 영천의 석광원, 여남의 맹공위, 그리고 서서였다.
또 제갈량은 스스로를 전국시대 관중(管仲)이나 악의(樂毅)에 비기지만,
사마휘가 보기엔 강태공(姜太公)이나 장량(張良)에 맞먹는 인재라고 하였다.
삼고모려(三顧茅廬)란 말은 우리에겐 삼고초려(三顧草廬)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직역하면 '띠풀로 지은 집을 세 번 돌아보다'는 말로,
'세 번 초막을 방문하다'는 뜻이다.
유비가 융중(隆中)마을에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간 일을 말한다.
이 말은 뛰어난 사람을 모시기 위해서는
정성과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유비는 선물을 준비하고 관우와 장비를 데리고 융중의 와룡강(臥龍崗)으로 제갈량을 찾아갔다.
제갈량이 산다는 초가집에 이르자 유비가 가볍게 사립문을 두드렸다.
조금 후 동자가 나오더니 "선생은 오늘 아침 일찍 외출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으니 동자는 언제 올지 모른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제갈량의 친구 최주평을 만났는데 그 역시 제갈량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제갈량의 운신(運身)은 마치 龍처럼 변화무쌍하다는 비유이다.
그림은 융중을 찾아간 유비 일행의 모습이다.
|
현덕풍설청공명(玄德風雪請孔明) / 유비가 눈보라 속에 제갈량을 찾아가다 |
그다지 주의하지 않는다. 유비가 두 번째 융중을 방문한 일을 말한다.
유비는 와룡 선생이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는
바로 관우와 장비를 데리고 눈보라를 무릅쓰며 찾아갔다.
가는 도중에 술집에서 제갈량의 친구 석광원과 맹공위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집에 도착했으나 제갈량은 없고 그의 동생 제갈균(諸葛均)만 있었다.
제갈균이 말하기를 형은 친구와 함께 놀러 나갔다고 했다.
유비는 어쩔 수 없이 편지만 한 통 남기고 돌아와야 했다.
낙담한 유비가 집을 나올 때 나귀를 타고 노래하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비는 가만히 그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하룻밤에 차가운 북풍이 불어, 만리(萬里)에 먹구름이 두텁게 깔렸어라.
드넓은 하늘에 눈발이 휘날리어, 강산의 모습이 온통 바뀌어졌어라.
고개 들어 태허(太虛)를 바라보니, 옥룡(玉龍)이 싸우고 있는 듯.
분분히 흰 비늘 나부끼어, 삽시간에 온 누리가 희게 되었네.
나귀 타고 작은 다리 건너며, 홀로 매화 질까 걱정하노라."
이 노래는 비단 적막한 와룡강(臥龍崗)의 겨울을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풍운이 휘몰아쳐 용과 호랑이의 싸움이 다가옴을 예시하고 있다.
알고 보니 그는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黃承彦)이었다.
그림은 유비가 눈보라 속에 제갈량을 찾아가는 '이고초려' 장면이다.
|
제갈량박망소둔(諸葛亮博望燒屯) / 제갈량이 박망에서 언덕을 불태우다 |
"형님, 왜 제갈량을 불러 적을 막으라 하지 않소?"
유비는 장비의 무례함을 꾸짖으며 말했다.
"지혜는 제갈량에 맡기면 되지만 용맹은 두 아우가 내야 하는데 왜 남에게만 미루나?"
제갈량은 고참 장수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을까 걱정하여
전권을 부릴 수 있도록 劍(검)과 印(인)을 달라고 하여 받았다.
제갈량은 신야 북쪽의 박망파(博望坡)라는 좁은 산간지역을 결전의 장소로 택했다. 많은 적을 상대해 싸우는 데에는 좁은 산지가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조자룡을 선봉으로 보내 하후돈의 군사를 만나면 후퇴하게 하였다.
적의 군대를 좁은 계곡으로 끌어들인 다음
양쪽에 매복한 관우와 장비 군대가 협공하게 하였다.
하후돈은 유비군을 가벼이 여기고 박망파까지 들어왔다.
이때 갑자기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화염이 하늘을 불태웠다.
조조군은 사람과 말이 어지러이 불탔다.
하후돈은 샛길로 빠져나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제갈량의 첫 승리였다.
유비군이 크게 이기고 돌아오자 관우와 장비가 탄복하였다. "제갈량은 진정 영걸(英傑)이오!"
마침 제갈량이 수레를 타고 단정히 앉은 채 다가오자
관우와 장비가 황급히 말에서 내려 수레 앞에서 절하였다.
그림은 박망파에서 화공을 당하여 달아나는 하후돈이다.
'둔(屯)'은 원래 '모으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언덕을 가리킨다.
|
제갈량화소신야(諸葛亮火燒新野) - 제갈량이 신야를 불태우다 | |
유비는 신야를 포기하고 번성으로 가서 조조군을 피하기로 했다.
제갈량은 신야의 모든 백성을 번성으로 보내는 한편,
장수들에게 임무를 부여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런 다음 제갈량은 유비와 높은 곳에 올라가 승전보를 기다렸다.
제갈량은 조조의 선봉장 허저(許저)를 작미파(鵲尾坡)로 끌어들였다. 허저는 산위에서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하여 머리를 들어 보니,
유비와 제갈량이 한가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허저가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산에 올랐으나 나무와 돌이 굴러와 패퇴하였다.
선발대의 예기는 이렇게 하여 꺾였다.
이어서 조인이 본대(本隊)의 병사를 이끌고 신야를 공격하니, 성문이 모두 열려 있어 성안에 들어가 주둔하였다.
한밤이 되어 바람이 세차게 불 때 조자룡이 화전(火箭)을 쏘아대자
성안은 불바다가 되었다.
조인이 불타지 않은 東門으로 탈출했으나 조자룡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인이 패잔병을 이끌고 백하(白河)에 이르니 강물이 얕았다. 병사들이 강물에 뛰어들어 그을린 몸을 식히고 말에 물을 먹이고 있을 때
갑자기 큰 물이 천지를 진동하며 내려와 병사들을 쓸어갔다.
알고 보니 제갈량이 관우에게 모래주머니로 상류를 막았다가 트게 했던 것이다.
그림은 신야성에서 화공을 당한 조인이 달아나는 장면이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
조운(=조자룡)이 당양 장판벌 싸움에서
유비의 부인과 아들 아두를 구하고자 적진에 들어가 미부인을 찾았으나,
허벅지에 창을 맞은 미부인이 지체되는 것을 두려워해 마른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조운은 조조의 군사들이 그 시체를 훔쳐갈까 염려되어 우물을 덮어버리고,
엄심갑(가슴을 보호하는 쇠판) 아래 아두를 품고
열 겹 스무 겹 에워싼 조조의 군사들을 뚫고 빠져나오는 장면이다.
민화에서는 주로 조운이 우물 옆에서 미부인에게 아두를 넘겨받는 모습으로 묘사되거나
말 위에서 아두를 가슴에 품고 에워싼 적들을 물리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장판파조운구주(長坂坡趙雲救主) / 장판파에서 조운이 어린 주인을 구하다
관우로부터 소식이 없자 유비는 다시 제갈량을 강하에 파견하였다.
장비는 장판교(長坂橋)를 경계로 조조군을 제지하면서, 병사들에게 말꼬리에
중상을 입은 미부인은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우물에 빠져 죽었다.
조운절강탈유주(趙雲截江奪幼主) / 조자룡, 강을 막고 어린 주인을 구하다 |
익주의 충신 황권과 왕루가 죽음으로 말렸지만 유장은 듣지 않았다.
유장이 부성에 도착하자 방통이 이 기회를 이용해 죽이자고 하였지만
유비가 반대하였다. 유장과 유비가 부성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을 때
한중의 장로(張魯)가 가맹관(가萌關·쓰촨성 광위안)을 공격하였다.
유장은 유비에게 막아달라고 요청하고 성도(成都)로 돌아갔다.
유비는 쉽게 가맹관을 손에 넣게 되었다.
한편 동오의 손권은 유비가 익주로 들어간 틈을 타 형주를 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국태 부인이 딸을 죽여서는 안 된다며 극력 반대하였다.
이에 장소가 계책을 내었다. 오국태 부인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보내 손부인(孫婦人)과
아두(阿斗)를 데려온 후, 아두를 인질로 삼아 형주와 맞바꾸자는 거였다.
양쯔강을 순찰하던 조자룡은 손부인이 아두를 데리고 떠났다는 보고를 듣고 깜짝 놀라 뛰어가니 배가 떠나고 있었다. 조자룡이 추격하여 동오의 배에 뛰어올라
군사를 물리친 후 손부인에게 아두를 두고 가라고 말하였다.
조자룡은 손부인이 아두를 시녀에게 맡기는 순간 아두를 가로채어 뱃머리에 섰다.
아두가 다칠까 어쩌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마침 장비가 나타났다.
이에 손부인만 동오로 보내고 아두를 데리고 형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장비는 장판교에서 고함소리로 조조군을 물리치다
장익덕거수단교(張翼德據水斷橋) / 장비가 강위에 버티고서 다리를 끊다
장비는 대갈일성(大喝一聲)으로 조조의 백만 대군을 물리쳐
제갈량은 손권을 만나기 전에 문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물었다. 제갈량은 인의(仁義)를 지키느라 유표의 기틀을 빼앗지 않았다고 반박하였다.
이어서 우번은 적은 군사로 어찌 조조의 대군과 싸우려 하느냐고 물었다.
생각이 먼저 이겨야 실제 싸움도 이긴다.
(15) 적에게 묘책을 알려주다
방통진헌연환계(龐統進獻連環計) / 방통이 연환계를 바치다 |
방통은 "와룡과 봉추 가운데 한 사람만 얻어도 중국을 얻을 수 있다"는
사마휘의 말에 나오는 바로 그 봉추였다.
방통은 동오에서 식객으로 지내고 있었다.
방통은 일부러 장간에게 주유는 재주만 믿고 도량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장간은 조조에게 투항하라 권했고,
방통은 장간을 따라 강 건너 조조 진영으로 갔다.
조조는 오래 전부터 방통의 소문을 들어온 터라 친히 마중을 나갔다. 조조가 군영을 안내하며 계책을 묻자,
방통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않은 북방 병사들은 배 멀미로
전투를 제대로 할 수 없으므로 배들을 쇠사슬로 연결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면 병사들이 넘어지지도 않거니와 말을 타고 배 위를 다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조조가 방통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참모 정욱이 진언하였다. "쇠사슬로 배들을 이으면 안정은 될지 몰라도 만일 화공을 당하면 크게 위험합니다."
조조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불은 바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같은 겨울에 서북풍(西北風)만 불고 있으니
적이 불을 쓴다면 오히려 자신들을 태우지 않겠소?"
조조를 속이기 위해 먼저 황개의 고육계(苦肉計), 감택의 사항계(詐降計)에 이어서,
다시 방통의 연환계(連環計)가 사용되었다.
여러 계책이 고리처럼 이어져 조조의 목을 조르는 형국이었다.
|
=기계차전(奇計借箭)=초선차전(草船借箭) - 화살을 선물받다
제갈량계복주유(諸葛亮計伏周瑜) - 제갈량이 계책으로 주유를 굴복시키다 |
제갈량조차 이 일을 모를 거라며 노숙더러 가서 한번 알아보라고 하였다.
노숙이 만나보니 제갈량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에 주유는 제갈량을 그냥 두면 동오에 불리하게 될 것이라 여겨
제갈량을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주유는 참모 회의를 열고 제갈량에게 10일 안에 화살 10만 개를 만들어달라고 하였다. 제갈량은 태연스레 말하길 오히려 3일이면 가능하다고 하였다. 주유는 화살 만드는 장인들에게 일부러 일을 지연시켜, 제갈량이 기일 내에 만들지 못하게 하여 이를 명목으로 죽이려 하였다.
제갈량은 이틀 동안 아무 일도 않다가 사흘 째 새벽에 노숙에게 20척의 배를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배마다 군사 30명씩 태우고 배 위에 청색 천으로 휘장을 두른 뒤
짚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제웅 1000개를 양옆에 세워달라고 하였다.
사흘째 새벽, 강에는 안개가 짙었다. 제갈량은 20척의 배를 끈으로 연결해 조조 영채 앞에 일자(一字)로 늘어서게 하였다.
그리고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게 한 후 노숙과 술잔을 기울였다.
조조는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만여 명의 궁수에게 명하여 화살을 쏘게 하였다. 안개가 걷힐 무렵이 되니 배에는 이미 10만 개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초선차전(草船借箭)"이라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이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
주공근적벽오병(周公瑾赤壁鏖兵) / 주유가 적벽에서 격전을 벌이다
|
선봉대의 깃발을 세운 황개는 거짓 투항하러
오림(烏林)의 조조 진영으로 배를 저어 갔다.
황개가 거느린 20척의 배는 화약과 짚을 가득 채운 채 불을 붙이고
조조군 선박에 부딪쳤다. 갑자기 바람의 기세를 탄 불은 활활 번지기 시작하였고
조조군의 배는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불기둥에 휩싸이게 되었다.
조조군의 진영은 화염 속에 갇혀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유는 수군(水軍)을 네 개의 부대로 나누고, 각각 한당, 주태, 장흠, 진무가 이끌어 나가도록 하였다.
감녕은 채중을 앞세워 조조 진영의 곡식 창고를 찾았고,
그곳에 도착하자 채중을 죽이고 불을 질렀다.
삽시간에 물 위와 강가는 불로 한 무더기가 되었다.
이때의 불길로 양자강 건너 남쪽에 있는 석벽(石壁)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붉게 된 석벽을 사람들은 '적벽(赤壁)'이라 하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조조는 경황이 없이 좌충우돌(左衝右突)하면서 도주하였다. 그림은 동오의 화공을 받고 있는 조조군의 모습으로,
왼쪽 배 위에서 창을 든 장수가 황개이고, 오른쪽에 관을 쓴 사람이 조조이다. 오병(鏖兵)은 본래 병사들을 번철에 지지듯 한다는 뜻으로, 격렬한 전투를 의미한다. 오전(鏖戰)이나 오살(鏖殺)이라는 말도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
관운장의석조조(關雲長義釋曹操) / 관우가 의리로 조조를 풀어주다 |
병사가 보고하기를 큰 길은 평탄하지만 멀고,
작은 길은 화용(華容)으로 통하는데 가깝지만 험하다고 하였다.
또 작은 길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조는 작은 길을 선택하였다.
수하들이 복병을 걱정하자 조조는
"虛(허)하게 보이면 곧 實(실)이요, 實(실)하게 보이면 곧 虛(허)하다"고 말하며
제갈량의 수작에 속지 말라고 하였다.
길은 좁고 진창이어서 노약자와 부상자들이 처지자 낙오하는 자는 죽이라 하였다.
조조는 몇 리 가지 않아 채찍을 들고 또 크게 웃었다.
"만약 저들이 여기에 매복했더라면 우리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관우가 길을 막고 나타났다.
조조는 정욱의 제안에 따라 옛정을 생각해서 봐달라고 사정하였다.(그림)
조조가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생각하고,
또 조조군이 모두 갑옷도 못 입은 채 피로에 지쳐 있는 걸 보고,
관우는 차마 공격하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조조가 지나가도록 하였다.
조조는 수하들을 이끌고 낭패한 모습으로 지나갔다.
곧이어 장료가 나타나자 관우는 우정을 생각하여 장료마저 놓아주었다.
의리를 중시한 관우가 조조를 석방한 이 행위를 보통 '의석(義釋)'이라고 한다.
'의리로 풀어주다'는 뜻이다.
제갈량은 빈손으로 돌아온 관우를 군법에 따라 참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유비가 사정하여 겨우 용서하였다.
|
관운장단도부회(關雲長單刀赴會) / 관우가 칼 한 자루 들고 모임에 참가하다 | ||||||
|
(20) 계륵(鷄肋)
조맹덕기살양수(曹孟德忌殺楊修) / 조조가 양수를 시기하여 죽이다 |
조조는 양평관을 버리고 한중의 북쪽에 있는 야곡(斜谷)으로 달아났다.
이때 그의 아들 조창(曹彰)이 오환(烏桓)을 정벌하고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왔다.
조조는 싸움을 잘하는 그를 누런 수염의 아이란 뜻에서 '황수아(黃鬚兒)'라 불렀다.
그러나 조창도 마초(馬超)의 협공을 받자 힘을 쓰지 못하였다.
조조는 퇴각하자니 웃음거리가 되겠고 계속 싸우자니 마초가 버티고 있어 진퇴양난에 빠져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식사 때 계탕(鷄湯)이 나왔다.
계탕에는 닭갈비도 있었다. 이때 하후돈이 그날 밤의 암호를 물으러 왔다.
조조는 생각에 빠져 '계륵(鷄肋, 닭갈비)'이라고 중얼거렸다.
이리하여 '계륵'이 암호가 되었다.
이를 들은 양수(楊修)가 조조의 의도를 간파하고 부하들에게 행장을 꾸려 철군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하후돈이 그 까닭을 묻자,
양수는 닭갈비는 살이 없어 먹자니 번거롭고 버리자니 아까운데,
바로 아군의 처지가 그러하며,
식량이 부족하기에 내일은 조조가 철군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모든 군사들이 행장을 챙기게 되었다.
순찰하던 조조는 자신의 의도를 알아챈 양수가 얄미워
유언비어로 군기(軍氣)를 문란케 했다는 죄목으로 참수시켰다.
조조는 후퇴하던 중 위연의 화살을 맞아 이를 다쳤고,
마초에게 쫓기며 업성으로 돌아갔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 |
(21)수흡칠군(水潝七軍)=수엄칠군(水渰七軍)
관운장수엄칠군(關雲長水渰七軍) / 관우가 칠군을 강물로 몰살시키다
우금은 방덕이 공을 세울까 경계하여
번성 북쪽 계곡에 주둔하며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곳 지명이 증구천(罾口川)이란 말을 듣고 관우가 말했다.
"물고기가 그물 주둥이에 들어갔으니, 살아날 수 있겠나?"
(증. 罾)은 그물이란 뜻이다.
관우는 수몰계(水沒計)를 쓰기로 하고서,
군사를 높은 지대로 옮기고 양강(襄江)의 수문을 막았다.
'엄(淹)'은 물에 잠기다는 뜻.
폭우가 내리는 밤 관우가 둑을 트게 하자,
조조군은 모두 사나운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평지도 한 길이 넘게 물이 올랐다.
우금과 방덕 등은 산 위로 올라갔다.
날이 밝자 관우가 배를 타고 진격하니
우금은 주위에 부하가 50여 명에 불과한 걸 보고 항복하였다.
오로지 방덕만이 필사로 저항하였다.
관우군이 포위하고 화살을 쏘자 조조군의 태반이 죽었다.
방덕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계속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주창이 배를 뒤집어 방덕을 생포하였다.
관우 앞에 끌려 나간 우금과 방덕은 뚜렷이 대비되었다. 우금은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관우는 죽여 봤자 칼만 더러워진다면서 우금을 형주의 감옥으로 호송시켰다.
이에 반해 방덕은 무릎을 꿇지 않고 꼿꼿이 선 채 항복을 거부하였다.
관우는 어쩔 수 없이 투항하지 않는 방덕을 참수하였다.
- 서성교수, 열린사이버대 실용외국어학과
- 2007.10.23 ⓒ 국제신문(www.kookje.co.kr)
| |
| |
|
(22) 와룡 서성탄금(臥龍 西城彈琴)
- 제갈량이 성 위에 앉아 거물고를 타며 사마의를 속여 물리치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제갈량은 사마의가 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서성으로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학창의를 입고 윤건(輪巾)을 쓴 채 아이 둘만 데리고 성 밖에서 눈에 잘 띄는 적루(敵樓)에 앉아
거문고를 뜯는다. 아이 둘 중 한 사내아이는 보검을 받쳐 들고, 다른 사내아이는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그 뜻밖의 광경에 위나라 군사들은 감히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를 본 사마의도 무슨 계략이 있을까 두려워 군사를 거두고 물러가 버린다.
한가로움을 가장한 그는 군사가 매복되어 있는 것으로 꾸며
사마의로 하여금 군사를 거두어 물러가게 하는 장면이다.
공명지퇴사마의(孔明智退司馬懿) / 제갈량이 계책으로 사마의를 물리치다 |
철수를 준비하였다.
자신은 군사 5천을 이끌고 보급 기지인 서성(西城 · 간쑤성 톈수이시와 리현 중간)에 가서 군량을 옮겼다.
제갈량이 막 서성에 도착하니 사마의가 15만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온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대경실색하였다. 주위에는 장수 하나 없고,
병사도 5천 가운데 반은 군량을 운반하러 나가 있어 2천5백 밖에 안 되었다.
제갈량은 한참 생각하더니 계책을 떠올렸다. 성위의 깃발을 모두 거두고 성문을 크게 열어둔 채,
병사들을 백성으로 분장하여 길거리를 청소하게 하였다.
또 경거망동하거나 떠드는 자는 참수한다고 영을 내렸다.
사마의가 성 아래 이르니 제갈량이 홀로 성문 위의 성루(城樓)에 앉아 향을 피우고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좌우에는 동자(童子)가 각각 보검과 먼지떨이(拂子)를 들고 시립해 있었다.
사마의는 의심스러워 잠시 멈추어 생각하였다. 제갈량은 평소 신중한 사람으로 위험한 계책을 쓴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마의는 혹여 매복이 있을까 염려하여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이것이 유명한 '공성계(空城計)', 즉 '빈 성의 계책'이다.
후에 사실을 안 사마의는 저도 모르게 탄식하였다. "내가 제갈량을 당할 수 없도다!"
|
(23) 한장대전축융부인 - 맹획의 아내
제갈량육금맹획(諸葛亮六擒孟獲) / 제갈량이 맹획을 여섯번째 생포하다 |
은갱동 주위에는 세 줄기 강이 흐르고 있었고 중앙에 삼강성(三江城)이 있었다.
맹획의 처남 대래동(帶來洞) 동주가 목록대왕(木鹿大王)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목록대왕은 법술을 부리고 코끼리를 타고 다니며 독사와 맹수를 부렸다.
촉군이 삼강성을 공격하여 빼앗자, 맹획의 아내인 축융부인(祝融夫人)이 나섰다.
그녀는 비도(飛刀)를 던져 촉장 장의와 마충을 사로잡았다.
다음날 제갈량이 계책을 써서 축융부인을 사로잡은 후 장의와 마충과 교환하였다.
이때 목록대왕이 코끼리를 타고 그의 무사들이 호랑이 표범 늑대 등을 끌고 나타났다. 목록대왕이 주문을 외우며 손에 든 종을 울리니 광풍이 불었고 호각 소리에 맹수와 독사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촉군에 덤벼들었다.
촉군은 삼강까지 후퇴하였다.
제갈량은 촉에서 준비해온 나무로 깎아 만든 거대한 짐승의 모형을
궤 속에서 꺼내게 하였다.
모형 짐승은 병사 열 명이 탈 수 있는 크기로 모두 백 마리였다. 입에 화약을 물고 불을 뿜으며 공격하니 맹수들이 놀라 도망쳤고
목록대왕은 달아나다 죽고 말았다.
대래동 동주가 거짓으로 맹획을 포박하여 제갈량에게 바쳤다. 제갈량이 계책임을 간파하고 몸을 수색하니 과연 몸에 단도를 지니고 있었다.
맹획은 만약 다음에 붙잡힌다면 승복하겠다고 하였다.
제갈량은 여섯 번째로 그를 풀어주었다.
|
(24) 읍참마속(淚斬馬謖)
제갈량이 가정(街亭) 전투에서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싸우다가 패한 부장(部將) 마속을
그 전날의 공과 두터운 친분에도 불구하고 울며 목을 베어 전군의 본보기로 삼았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엄정히 법을 지켜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에 비유한다.
공명휘루참마속(孔明揮淚斬馬謖) / 제갈량이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베다 |
한중(漢中)으로 돌아가야 했다. 1차 북벌이 실패로 끝나고 공성계로
겨우 후퇴작전을 완료한 제갈량은 전공에 따라 상벌을 내려야 했다.
먼저 왕평(王平)을 불러 마속이 독단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여 패배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마속은 자신의 죄가 큼을 알고 스스로 결박하고 벌을 청하였다.
제갈량은 마속을 자식 같이 아꼈지만 군법에 따라 사형을 명하였다.
이때 참군(參軍) 장완(蔣琬)이 천하가 평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뛰어난 신하를 죽이는 것은 적에게 이롭다며 만류하였다.
제갈량이 말하였다. "예전에 손무(孫武)가 천하를 이겼던 것은 법을 밝게 썼기 때문이오.
만약 법을 폐기한다면 어떻게 역도(逆徒)를 토벌할 수 있겠소?"
제갈량이 말한 손무는 춘추시대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사(軍師)로,
처음 임명되었을 때 오왕이 편성한 미녀 부대가 명령을 듣지 않자
오왕이 아끼는 미녀 부대장을 참수하여 군령(軍令)을 세웠다.
제갈량은 유비가 죽기 전에 마속을 중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상기하며,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마속이 죽었다며 통곡하였다.
이른바 '읍참마속(泣斬馬謖)'이었다.
제갈량은 표를 올려 자신의 벼슬을 3등급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유선은 제갈량을 우장군(右將軍)으로 강등시키고
승상과 군사의 업무는 종전대로 하게 하였다.
|
(25) 겁많은 척 뜻을 숨기다
유비가 조조 진영에 머물 때 하루는 조조가 유비를 청하여 술을 마셨다.
그들은 통쾌하게 술을 마셔가면서 천하의 대사를 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여 금방이라도 큰비가 올 것 같았다.
조조는 유비에게 오늘날의 영웅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였다.
유비는 “나는 잘 모르겠소” 말하자
조조가 이어 말하길 “그렇게 겸손해 할 필요 없소”라고 대답하였다.
유비가 “회남의 원술은 병졸들이 정통하고 양식이 충분하니 영웅이라고 할 만하지요”했다.
조조가 웃으며 “그는 무덤 속의 해골과 같소. 언젠가는 내가 수습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유비가 “하북의 원소는 기주를 점거하고 있고,
부하 중에는 유능한 사람이 아주 많으니 영웅이라고 할 만하지요”라고 하자,
조조가 큰소리로 웃으며 “원소는 표면상으로는 대단할 것 같으나,
실제로는 담이 적고 하는 일이 우유부단한 사람이오.
중요한 일을 해야 할 때가 되면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또 작은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을 다하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은 영웅이라 할 수 없소”라고 말했다.
유비는 하는 수 없이 “난 정말로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조가 말했다.
“영웅이란 웅지가 커야 하고 뱃속에는 좋은 술책으로 가득해야 하며
우주의 지혜를 모두 저장하고 있어야 하며, 천지가 하고자 하는 바를 호흡할 수 있어야 하오”
유비는 조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반문하길 “그렇다면 누가 영웅이오?”하였다.
조조는 유비를 가리키고, 자신을 가리키면서
“오늘날 천하의 영웅은 오로지 당신과 나 두 사람뿐이오”라고 답했다.
유비는 조조가 바로 자신을 사탐한 것임을 알고는
마음속이 서늘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져서 젓가락을 땅 위에 떨어뜨렸다.
이때 마침 하늘에서 번개가 치더니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유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뇌성이 크기도 하구나!”하고는
자신이 마음속으로 놀랐음을 감추었다.
그런 후에 사람들을 시켜 땅에 떨어진 젓가락을 집어오게 하고는
조조와 더 한참을 담론하다가 조조에게 이별을 고하고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 <중국역사박물관 3> 중국사학회 엮음, 강영매 옮김, 범우사, 71쪽
청매자주논영웅(靑梅煮酒論英雄) / 매실 안주에 술 데우며 영웅을 논하다 |
일부러 나가지도 않고 정원을 가꾸며 지냈다.
관우와 장비가 국가 대사에 마음 쓰지 않는다며 원망하였지만
유비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조조가 유비를 청하여 매실(梅實)을 안주 삼아 술을 데우며 영웅을 논하였다.
흐린 하늘에서 용이 오르는 걸 보고 조조가 말했다. "용은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고, 오를 수도 있고 숨을 수도 있소.
봄이 깊어진 지금 용이 때를 타고 변화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사람이 뜻을 얻어 사해(四海)를 종횡하는 것과 같으오.
용이란 물건은 세상의 영웅에 비할 수 있소."
그리고선 손가락으로 자신과 유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오로지 公(공)과 나 두 사람뿐이오."
유비는 깜짝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마침 하늘에서 천둥이 치자 유비는 일부러 놀란 척하였다. 조조가 크게 웃으며 "대장부가 천둥을 무서워하오?"라고 말했다.
조조는 유비가 겁쟁이로 천하를 쟁패하려는 웅지가 없다 여기고
더 이상 경계하지 않게 되었다.
남을 잘 속이는 조조마저도 속였으니 유비 역시 교활한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에서 조조와 유비가 영웅을 논하는 가운데 장비와 관우가 왼편에 서 있다.
'자주(煮酒)'에서 '자(煮)'는 '액체를 데우다'는 뜻이다.
|
(26) 머리카락을 잘라 군사들을 바로잡다
조조회병격원술(曹操會兵擊袁術) / 조조가 군사를 모아 원술을 치다 |
동시에 유비, 여포, 손책에게 협공을 요청하고 자신은 군사 17만을 이끌고
수춘(壽春)으로 향하였다. 조조가 예주에 다다르니 유비가 맞이하였고
서주에 이르니 여포가 마중 나왔다. 손책도 양쯔강을 건너와 수춘성을 공격하였다.
대군의 공격에 놀란 원술은 지연전을 펼쳤다. 조조의 17만 대군이 매일 먹어치우는 곡식은 엄청나
불과 한 달이 되지 않아 군량이 바닥났다.
조조는 군수 담당관 王(왕후)에게 명하여 작은 됫박으로 양식을 발급하도록 했다.
군사들의 원망이 일자 조조는 왕후가 군량을 훔쳤다며 그의 목을 베어
군사들의 원망을 가라앉혔다. 대신 조조는 왕후의 처자식을 잘 돌봐주었다.
수춘성은 함락되었고 원술은 달아났다.
유표에게 달아났던 장수(張繡)가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은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남양(南陽)으로 출동하였다.
마침 보리가 익을 때로 삼군(三軍)에 명하여
보리밭을 밟는 자는 목을 벤다고 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조조 자신이 타고 가던 말이 놀라 보리밭에 뛰어들게 되었다.
조조는 스스로 군법에 따른다며 자신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측근들이 만류하자 조조는 목 대신 머리카락을 끊어 삼군에게 보였다.
모두 조조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이다.
그림은 조조가 유비와 여포의 군대와 함께 수춘으로 진군하는 장면이다.
|
(27) 어찌하여 하늘은 주유를 낳고, 왜 또 공명을 낳았는가
제갈량삼기주유(諸葛亮三氣周瑜) / 제갈량이 주유를 세번째 화나게 하다 | ||||||
춘추시대에 진(晉)나라가 괵(虢)나라를 친다고 우(虞)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한 후,
괵나라는 물론 우나라도 멸망시켰다.
주유는 자신이 서천(西川)을 지나면 유비가 반드시 성 밖으로 나와
군사들을 위문할 것이니 그때 유비를 죽이고 형주를 차지한다는 계획이었다.
노숙이 이 말을 전하자 유비와 제갈량은 거듭 노고를 치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주유가 5만 대군을 이끌고 형주에 도착해도 노고를 치하하는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주유가 성 아래 이르니 조자룡이 성 위에서 소리쳤다.
"제갈량 군사께서 이미 도독의 계책을 알고는 저를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소이다."
그때 관우, 장비, 황충, 위연 등이 네 방면으로 동오군을 공격하러 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주유가 화를 참지 못하자 상처가 터지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주유는 서천을 향했으나, 제갈량이 편지를 써서 조조군이 동오의 후방을 공격할까
두려우니 빨리 회군(回軍)하라고 하였다.
이에 주유가 또 격노하자 그는 명이 단축되어 죽게 되었다.
죽기 전에 주유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이미 주유를 내시고 어찌 또 제갈량을 내셨습니까!" 그의 나이 36세였다. |
(28)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그것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 謀事在人, 成事在天, 不可强也
공명화소목책채(孔明火燒木柵寨) / 제갈량이 목책의 진지를 불태우다
만총은 동오군이 행군 온 점을 이용하여 미처 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하여
한편 기산에서는 사마의가 굳게 지키며 나오지 않자,
(29)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인을 위해 죽는다.
위연(魏延)은 죽음을 맞이해서
"반평생 중원을 떠돌아 주군을 만났고, 이제 그를 위해 죽는다.
후회가 있을 것이 무엇이고, 미망이 있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다만, 허도의 흙을 주군의 토봉에 뿌리지 못하고 가야 하는 것이 진정 아프다"며 죽었다.
공명유계참위연(孔明遺計斬魏延) / 제갈량이 남긴 계책으로 위연을 참수하다 | ||||||
만약 위연이 모반하면 그때 열어보라고 하였다.
양의는 제갈량의 말에 따라 발상하지 않고 유체를 감(龕) 속에 안치하고
입속에 쌀 일곱 알을 넣고 발아래 등불을 켜 두었다.
모든 조치를 취한 양의는 위연에게 후방을 막으라 명하고 군사를 서서히 퇴각시켰다.
위연은 사마의를 막으라는 양의의 명령을 받자 장군인 자신이 장사(長史)인 양의의 명령을 받을 수 없다며
오히려 병권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양의는 이를 예상하고 강유에게 적을 막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위연이 크게 노하여 마대를 보내 양의를 죽이려 하였다.
양의와 강유가 이끄는 촉군이 잔각(棧閣)의 입구에 들어가자 비로소 상복(喪服)을 입고 백기(白旗)를 내걸고 정식으로 발상(發喪)하였다.
병사들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곡을 하였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울다가 지쳐 죽기까지 하였다.
유선은 제갈량이 서거(逝去)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 용상에 쓰러지며 말했다.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이때 위연과 양의가 보낸 군사가 각각 성도로 달려와
서로 상대방이 모반했다는 표문을 올렸다.
비의가 돌아와서야 비로소 위연이 모반했음을 알게 되었다.
위연은 군사를 이끌고 남정(南鄭)을 취하러 진군하였다. 마대는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위연을 돕는 척하고 함께 나갔다.
양의와 강유가 이들을 막아서자 쌍방은 대치하게 되었다.
말 위에서 양의는 제갈량이 남긴 비단주머니를 열어보고는 위연을 향해 소리쳤다.
"네가 '누가 감히 나를 죽이겠나!'를 세 번 외치면 너에게 한중(漢中)을 주겠다."
위연이 껄껄 웃으며 이 말을 세 번 외쳤다.
이때 마대가 옆에서 "내가 감히 너를 죽이겠다"며 단칼에 위연의 목을 잘랐다.
제갈량이 오래전에 예견한 위연의 모반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
(31) 내가 천하를 배반할지언정,
천하사람들이 나를 배반할 수는 없다
조맹덕모살동탁(曹孟德謀殺董卓) / 조맹덕이 동탁을 죽이려 계획하다 |
그는 매일 궁중에서 자면서 궁녀들을 간음하였고,
밖에 나가서는 무고한 농민들을 사냥하듯이 죽이기도 하였다.
사도(司徒) 왕윤(王允)이 측근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할 때
조조(曹操)가 자신만만하게 계책을 내놓았다.
동탁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겠다고 하자 왕윤은 조조에게 칠보도(七寶刀)를 주었다.
마침 동탁의 부름을 받아 승상부(丞相府)로 간 조조는
여포(呂布)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돌아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동탁을 찌르려고 칼을 꺼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동탁은 얼핏 거울에 비치는 인영(人影)을 보고 잠에서 깨어났다.
조조는 꺼내든 칠보도를 얼른 두 손으로 바치며 선물로 가져왔다고 둘러댔다.
조조의 기지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암살 의도가 발각된 조조는 고향으로 도망가던 중 성고(成皐 · 하남성 형양현)에서 부친의 의형제인 여백사(呂佰奢) 집에 묵었다.
조조는 여백사 가족들이 칼 가는 소리에 자신을 죽이려는 줄로 오인하여
그들을 죽였고, 길에서 술을 사오는 여백사를 만나자 그마저 죽였다.
함께 가던 진궁(陳宮)이 힐난하자 조조는
"내가 천하 사람들을 배반할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배반하게 할 수는 없다"
(寧敎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負我)
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
(32) 가짜가 진짜를 놀라게 하다 -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쫓아내다
사제갈주생중달(死諸葛走生仲達) /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쫓아내다 |
제갈량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촉군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제갈량의 계책에 빠질까 주저하여
먼저 하후패를 보내 적의 정세를 알아보게 하였다.
이날 위연은 머리에서 뿔이 자라는 꿈을 꾸었다. 이는 뿔 '角'자의 형상으로, 머리에 칼이 떨어진다는 흉몽이었지만 알아채지 못하였다.
위연은 사마의를 막으라는 양의의 명령을 받자 장군인 자신이
장사(長史)인 양의의 명령을 받을 수 없다며 오히려 병권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양의는 이를 예상하고 강유에게 적을 막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위연이 크게 노하여 마대를 보내 양의를 죽이려 하였다.
하후패가 촉군이 이미 퇴각하였다고 알리자,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다고 판단하고 전속으로 추격하였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숲속으로 촉군의 깃발이 나부끼는데, 제갈량이 백우선(白羽扇)을 들고 사륜거에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사마의는 깜짝 놀라 정신없이 달아났다. 50여 리나 달아나던 사마의는 하후패가
고삐를 잡아당겨서야 비로소 멈추고는 머리를 만지며 물었다.
"내 머리가 아직도 붙어 있느냐?" 이틀 후 사마의는 수레 위에 있었던 것이
제갈량의 목상(木像)임을 알고는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산 사람의 일만 알았지 죽은 사람의 일은 몰랐구나!"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다'는 말은 여기서 생겨났다.
|
(33) 미인계(美人計)
① 초선과 동탁
사도왕윤세초선(司徒王允說貂蟬) / 사도 왕윤이 초선을 설득하다
봉의정포희초선(鳳儀亭布戱貂蟬) / 봉의정에서 여포가 초선을 희롱하다
왕윤수계주동탁(王允授計誅董卓) / 왕윤이 동탁을 죽일 계책을 내려주다 동탁, 여포, 초선. 왕윤이 초선을 미끼로 이간계를 펼치자 여포는 양아버지 동탁을 살해한다.
연회에서 돌아온 사도(司徒 · 명예 승상) 왕윤(王允)은 동탁의 만행이 도를 더해감을
초선은 중국에서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왕윤(王允)은 다음과 같이 여포와 동탁을 차례로 초청하였다.
(1)왕윤이 여포(呂布)를 청하여 연회를 열고 초선을 시켜 술시중을 들게 한다.
만날 방법이 없어 몸이 단 여포는 동탁이 입조(入朝)한 틈을 타 승상부로 가
그림 왼쪽은 여포가 초선과 밀회하는 장면이며,
이유의 말을 들은 동탁이 초선더러 여포에게 가라고 넌지시 말하자, 초선은 울면서
왕윤은 계책을 세워 헌제(獻帝)가 황제의 자리를 양보한다고 속여
② 유비와 손부인과 손권과 주유
유현덕취손부인(劉玄德娶孫婦人) / 유비가 손부인에 장가들다
유비가 손부인과 혼례를 올리고 있다.
금낭계조운구주(錦囊計趙雲救主) / 비단주머니 계책으로 조자룡이 주군을 구하다 | ||||||||
유비가 과연 향락에 빠져 형주로 돌아갈 생각을 잊자,
조자룡이 두 번째 비단주머니의 계책을 꺼내 보았다.
조자룡이 금낭계(錦囊計)를 보고는 황급히 유비에게 달려가 말했다.
"군사(軍師)께서 사람을 보내와 보고하기를 조조가 적벽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5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형주로 내려온다 하니 주공께서는 속히 돌아가소서."
유비가 이 말을 듣고 무척 놀라 형주로 가려고 손부인(孫夫人)에게 말하였다. 놀랍게도 손부인도 남편을 따라 형주로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정월 초하루에 유비의 조상에게 제사하러 강가에 나간다 말하고는 그길로 형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두 사람은 오국태 부인에게 인사하고 양쯔강으로 나갔다.
조자룡이 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권은 초하룻날 술에 취해 다음날 늦게 일어나는 통에 이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는 당장 진무와 반장에게 명하여 잡아오라고 하였다.
옆에서 정보(程普)가 말하기를 손부인 때문에 병사들이 잡아올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손권은 다시 검을 풀어 장흠과 주태에게 주면서
이 칼을 가지고 유비와 여동생의 목을 잘라 오라고 했다.
|
제갈량이기주유(諸葛亮二氣周瑜) / 제갈량이 주유를 두 번째 화나게 하다
손부인이 주렴을 걷고 나와 서성과 정봉을 크게 꾸짖으니
유비 일행이 유랑포(劉郞浦)에 이르니 제갈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③ 이교(二橋)=대교(大橋 : 손책의 부인), 소교(小橋 : 주유의 부인)
“강남을 얻는 날에 이교(二橋)를 데려다가 만년을 즐길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족하리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조조의 대사다.
영화 <적벽대전>에서도 두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건 한 미모의 여인이었다.
조조가 ‘이교’라 일컬었던 이들은 교국로라는 노인의 두딸이다.
언니와 동생 모두 당대의 소문난 절세미인이었다.
훗날 대교(大橋)라 불린 언니는 오나라 손권의 형인 손책과 결혼했고,
동생 소교(小橋)는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와 결혼했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제갈량이 주유의 분노를 사서 오나라를 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해
조조가 지은 노래에 “대교와 소교를 탐하고 싶다”는 내용을 넣어 불렀다는 얘기가 있다.
제갈량지세주유(諸葛亮智說周瑜) / 제갈량이 지모로 주유를 설득하다
|
손권은 여전히 최후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손권은 파양호(파陽湖)에 주둔하고 있는 주유를 불렀다.
주유가 시상에 도착하자 장소 등 문신들이 찾아와 항복할 이유를 말하였다. 주유는 "나는 일찍부터 조조에 항복하려 했소. 공들은 먼저 돌아가시오.
내일 아침 주공(主公)을 만나 뵙고 결정하리다"고 말하였다.
조금 후 황개 등 장수들도 주유를 찾아와 죽어도 항복하지 않을 결심을 말하였다. 주유는 이번에도 "나 역시 조조와 싸울 생각이니 어찌 항복하겠소.
장군들은 돌아가시오. 내일 주공을 만나 뵙고 정하리다"고 하였다.
주유가 제갈량에게 의견을 묻자 제갈량은 상대를 화나게 하여 일을 이루는 '격장법(激將法)'을 사용하였다.
조조가 동오를 치는 것은 이교(二喬),
즉 대교(大喬)와 소교(小喬) 두 미인을 구하는 것이니,
이들만 바치면 조조와 싸우지 않을 수 있다고 하였다.
제갈량은 그 근거로 조조의 아들 조식(曹植)이 지은 '동작대부(銅雀臺賦)'의
'동남에서 이교(二喬)를 데려와 아침저녁으로 즐기고저'를 인용하였다.
언니 대교는 손책의 미망인이고, 소교는 주유의 처였다.
제갈량은 이를 짐짓 모른 체하며 말하자
주유는 화가 나 술잔을 내던지며 조조와의 결전을 결심하였다. - 서성 교수의 삼국지 한자읽기 ⓒ 국제신문(www.kookje.co.kr)에서 정리
|
'더듬어보고(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역사박물관/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 전시이야기 (0) | 2008.10.03 |
---|---|
[서울역사박물관/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 삼국지의 주요 인물 (0) | 2008.09.28 |
[서울역사박물관/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 제갈량의 출사표 (0) | 2008.09.25 |
[서울역사박물관/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 삼국지 주요내용 살펴보기 (0) | 2008.09.19 |
[서울역사박물관/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 특별전 안내 (0) | 2008.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