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삼국지인가?
난세의 인간 드라마에서 삶의 지략을 읽는다
삼국지엔 모든 것이 들어있다. 넓은 중국 땅을 무대로 근 백년간 스케일 크게 벌어지는 장대한 드라마다.
영웅호걸들의 꿈이 있고, 도모와 경영함이 있고, 흥망성쇠가 있다.
그 전란의 와중에서 살아간 무수한 사람들의 삶의 역정과 회로애락이 있다.
그래서 삼국지는 언제 읽어도 재미있고 읽을 때마다 맛이 다르다.
나이에 따라 시절에 따라 또 개인 형편에 따라 각기 다르게 와 닿는다.
재미뿐 아니라 많은 지혜와 교훈을 준다. 어떤 땐 모범적 사례로서, 어떤 땐 반면교사로서
우리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재미있는 무용담뿐만 아니라 세상 이치에 관한 것이 다 들어있다.
정치 · 군사 · 외교 · 행정은 물론 재무 · 인사 · 홍보 · 선전 · 과학기술까지 망라하고 있다.
높은 차원의 국가전략에서부터 개인적 처신 문제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다.
난세를 사는 뭇인간들의 승부정신과 향상 욕구,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 실감있게 배어 있다.
대개 삼국지는 처음엔 싸움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고 나이가 들수록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인간드라마에 더 흥미가 끌리게 된다.
삼국지는 중국소설이지만 이미 동양의 고전으로 자리잡아 우리의 언어나 문화 속에 깊숙이 배어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삼국지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읍참마속(泣斬馬謖)· 도원결의(桃園結義)· 수어지교(水魚之交)· 출사표(出師表)를
비롯하여 ‘죽는 것은 조조군사다’, ‘조자룡이 헌 창 쓰듯 한다’ 는 말들이 대표적이다.
삼국지는 서기 2세기부터 3세기까지 중국을 무대로 한다.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가 그 수명을 다해 스스로 무너지는 대목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국 각지에서 야심가들이 일어나 천하대란이 벌어지고 그들 사이에 피나는 싸움이 거듭된다.
이들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승자가 위(魏)와 오(吳)·촉한(蜀漢) 세 나라를 세우고,
이들 삼국이 다시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한 삼파전을 벌이다가 마지막에 진(晋)나라로 통일된다.
그 과정을 박진감 있게 그린 것이다.
중국역사를 보면 통일과 분열을 거듭하는데, 한 왕조의 평균수명이 약 2백년이다.
첫 통일자가 진(秦)나라의 진시황(秦始皇)이고, 가장 최근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뚱(毛澤東)이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도 기업의 그것과 비슷하다.
처음엔 참신한 기운이 충만하고 도전정신과 창조성이 넘치지만
차츰 오래될수록 지도층 타락과 무사안일에 빠져든다.
군주의 역할이 핵심적이어서 그 그릇됨과 운에 따라 왕조의 부침이 결정된다.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호걸들도 스스로의 운과 역량에 따라 기반과 영역을 잡아간다.
때를 잘 만나 좋은 터를 잡고 좋은 사람을 잘 모아 잘 쓴 사람은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멸망했다.
소위 천시(天時) · 지리(地理) · 인화(人和)의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 때는 한 제국이 무너지고 신질서가 잡히기 전의 천하대란 시대였다.
온 사회가 소용돌이 치고 기존질서나 윤리의식, 가치관도 달라졌다.
문벌이나 계급 등 기득권보다 실력이 모든 것을 말했다. 찬스의 시대였다.
질서가 꽉 잡힌 시대는 벼락출세나 신분상승이 어려우나,
이럴 땐 밑바닥 신분에서 왕후장상(王侯將相)이나 심지어는 황제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패업(霸業)을 이루기 위해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좋은 자리와 좋은 사람을 잡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인재들도 좋은 주인을 만나 한 찬스 잡으려고 애를 썼다.
격변의 시대였기 때문에 영웅들의 흥망성쇠도 심했다.
시대의 흐름에 안 맞으면 금방 무너지기도 하고, 무명으로 있다 혜성같이 나타나기도 했다.
천하의 인심이란 게 무서운 것이어서 한번 인망을 잃고 나쁜 소문이 퍼지면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그래서 열심히 홍보를 하고 손님들을 잘 대접했다.
삼국지 시대엔 많은 영웅호걸 중에서도
위나라의 조조(曹操), 오나라의 손권(孫權), 촉한의 유비(劉備)가
가장 출중했는데,삼국지는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삼국지란 말도 위 · 오 · 촉한 세나라가 형성되고 싸우고 마지막에 하나로 통일되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삼국지엔 정식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와 이야기체로 쓴 '연의(演義)' 두 가지가 있는데,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연의를 가리킨다. 삼국지정사는 촉한 사람 진수(陳壽)가 편찬한 것이다.
진수는 글을 잘 써 촉한이 망한 후엔 진나라 궁궐에서 역사기록원 노릇을 했다.
이때 사실을 바탕으로 삼국지를 저술했는데,
촉나라 사람이지만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공정하게 기록했다.
사실 위주로 기술하여 재미가 별 없다.
삼국시대의 드라마는 워낙 흥미로웠기 때문에 민간에 구전되어 내려 온 것도 있고
그것이 흥미롭게 각색돼 길거리의 이야기꺼리로 인기를 모았다.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는 전해가는 과정에서 윤색되고 과장되어 사실과는 다르게 되어버린 것도 많다.
사람들의 꿈과 이상, 흥미에 맞게 변해 가는 것이다.
실제 어떻게 된 것과는 상관없이 가장 이상적인 방향으로 일들이 전개되고 결말이 지어진다.
그렇게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을
명나라 초 나관중(羅貫中)이란 사람이 소설로 엮은 것이 삼국지연의, 흔히 말하는 삼국지다.
진수의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고 위 중심으로 기록한데 비해
<삼국지연의>는 오히려 촉나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삼국지에 보면 항상 옳은 쪽은 촉나라로,
제갈공명이 귀신같은 재주를 부려 위나라의 조조 군사를 깨부수는데 사실과는 다르게 과장된 것이 많다.
나중에 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위나라의 국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인구나 면적·국부 면에서 도저히 비교가 안 되었다.
그래서 항상 오나라와 촉한이 연합을 해서 위나라에 대항하는 전략을 썼다.
오늘날 압도적인 실력과 규모를 가진 대기업에 중견기업이 연합해서 대항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오나라나 촉한이 그 정도나마 버틴 것은 선전한 것이다.
당시 중국의 문명 중심지는 황허(黃河) 주변이었고, 양자강 이남이나 서쪽 지방은 아직 변경이었다.
위나라는 인구가 많고 비옥한 황허 북쪽 지방, 즉 중원을 기반으로 했다.
오나라는 양자강 하류와 강동 지방을 근거지로 했다.
촉나라는 당초 양자강 중류인 형주에서 시작했다가 오늘날의 사천지방인 익주 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근거지를 정하고 옮기는 과정에서 많은 드라마가 펼쳐지고 영웅호걸들의 용호상박이 벌어진다.
주군을 중심으로 많은 참모와 책사가 활약하고, 용장들이 전장을 누벼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외교전과 첩보전이 벌어지고, 허허실실의 책략들이 종횡무진으로 펼쳐진다.
그야말로 지혜와 투지, 또 정성을 다해 천하의 주인 자리를 다투는 것이다.
주인은 부하들을 잘 만나야 하고 부하는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천하의 인재가 주인을 잘못 만나 아까운 재주를 써 보지도 못하고 중도 좌절하는 경우도 많다.
삼국지는 주인이 아랫사람을 어떻게 잘 써야 하는지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어떻게 잘 모셔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주군과 신하의 관계도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논리 이전의 그 무엇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괜히 싫은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업사회에서도 통하는 일이다.
삼국지는 운(運)의 중요함을 가르친다.
작은 부자는 스스로 만들고 큰 부자는 하늘이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천하의 패업을 다투는 일에 있어선 하늘의 뜻이 중요함을 많이 느끼게 한다.
그 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넘어서느냐에 따라 사람이나 나라의 명운이 결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업 경영과 다를 바가 없다.
- <삼국지경영학> 최우석 前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을유문화사
- 중앙일보, Forbes Korea
삼국지의 주요 장면
① 복숭아밭에서 의형제를 맺다 [도원결의(桃園結義)]
유비 ․ 관우 ․ 장비 세 사람이 황건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기투합하여
장비의 집 뒤에 있는 복숭아밭에서 의형제의 결의를 맺는 장면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유비 ․ 관우 ․ 장비 세 사람이 복숭아밭에 모여
검은 소[烏牛]와 흰 말[白馬]을 제물로 삼아,
이 제물의 피를 섞어 서로 나누어 마신 뒤, 향을 사르고 맹세의 글을 읽으며 결의를 했다.
민화에서는 인물을 표현할 때 얼굴의 경우
유비는 흰색, 관우는 대추색, 장비는 검은색으로 각자의 개성에 맞게 나타내며,
옷의 경우 유비는 사모관대, 관우와 장비는 평상복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장면의 가장 큰 특징은 복숭아나무와 제단, 제물들이라 할 수 있다.
② 호뢰관에서 세 영웅이 여포와 싸우다 [삼전여포(三戰呂布)]
호뢰관(虎牢關)에서 동탁의 심복인 여포와 유비 ․ 관우 ․ 장비가 대결하다 여포가 도망가는 장면이다.
『삼국지연의』 내용을 살펴보면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관우는 청룡도로, 장비는 장팔사모로, 유비는 쌍고검으로
여포를 에워싸고 공격하자, 여포가 무기인 방천화극을 거꾸로 잡고 달아난다.
이 장면의 가장 큰 특징은 유비 ․ 관우 ․ 장비의 개성있는 무기들이라 할 수 있다.
③ 관우가 홀로 천리길을 달리다 [단기천리(單騎千里)]
조조는 관우를 사로잡은 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극진히 대접하나,
관우는 유비의 소식을 듣자 그를 찾아 떠나게 된다.
이때 조조는 성 밖 파릉교까지 나가 관우를 배웅하며 장료를 시켜 옷을 선물하니
이를 관우가 청룡도로 받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파릉교에서 조조가 사람을 시켜
관우에게 황금 한 쟁반을 올리게 하나 관우는 이를 거절한다.
또한 금포도 받쳐 올리게 하는데, 관우는 이마저 거절할 수 없어
말 위에서 청룡도 끝으로 금포가 든 옷 보퉁이를 꿰어 받는다.
이 장면의 특징은 관우가 파릉교로 보이는 다리 위에서
조조의 무리로부터 옷을 청룡도로 받는 장면이라 하겠다.
④ 관우가 채양의 형제를 죽이고 의심을 풀다
조조로부터 탈출한 관우가 장비의 의심을 풀기 위해
장비가 북을 세 번 칠 동안 조조(曹操)의 장수인 채양(蔡陽)을 죽이는 장면이다.
『삼국지연의』내용을 살펴보면
관우를 의심한 장비가 유비의 부인인 감부인과 미부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북을 세 번 치는 동안 적장 즉 채양의 목을 가지고 돌아오도록 관우에게 요구하는데,
이 때 장비가 손수 북채를 잡고 북을 울린다.
그런데 겨우 첫 번째 북소리가 났을 때 관우의 청룡도가 번쩍 들렸다 내려치니 채양의 목이 달아났다.
민화에서 이 장면은 장비가 성문 위에서 북을 치고,
적토마를 탄 관우는 그 아래서 청룡도를 들고 채양을 쫓거나 목을 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그 중 가장 특징적인 장면은 장비가 성문 위에서 북을 치는 모습이라 하겠다.
⑤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가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삼국지연의』내용 중 적벽대전과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내용일 것이다.
유비가 숨어 있는 현사(賢士) 제갈량을 얻기 위해 관우와 장비를 데리고
그의 초당을 세 번 찾아가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는 내용을 묘사한 장면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관우와 장비는 유비가 세 번씩이나 제갈량을 찾아가는 것을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유비는 제갈량이 초당에서 낮잠을 잔다는 시동의 말에
관우와 장비를 문 옆에 세워두고 그가 깰 때까지 댓돌 아래에서 기다린다.
그 광경을 본 장비가 분을 참지 못해 씨근거리며 관우를 부추긴다고 묘사되어 있다.
⑥ 조운, 장판파에서 홀로 아두를 구하다 [장판구주(長板求主)]
조운이 당양 장판벌 싸움에서 유비의 부인과 아들 아두를 구하고자 적진에 들어가 미부인을 찾았으나,
허벅지에 창을 맞은 미부인이 지체되는 것을 두려워해 마른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조운은 조조의 군사들이 그 시체를 훔쳐갈까 염려되어 우물을 덮어버리고,
엄심갑(가슴을 보호하는 쇠판) 아래 아두를 품고
열 겹 스무 겹 에워싼 조조의 군사들을 뚫고 빠져나오는 장면이다.
민화에서는 주로 조운이 우물 옆에서 미부인에게 아두를 넘겨받는 모습으로 묘사되거나
말 위에서 아두를 가슴에 품고 에워싼 적들을 물리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⑦ 장비가 고함소리로 조조군을 물리치다 [장판교장비(長板橋張飛)]
조운이 적진에서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해 가슴에 품고 간신히 장판교로 도망쳐 오자,
장비가 장판교 위에서 대군이 있는 듯 목청껏 소리를 내질러
조운을 쫓아온 조조군을 쫓아내는 장면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장비가 머리칼과 호랑이 수염을 빳빳이 곤두세운 채 손에 창을 잡고 말 위에 홀로 앉아 있으며,
다리 동쪽 숲 뒤에는 자욱이 먼지가 일고 있어, 마치 수만 복병을 숲속에 숨겨놓은 인상을 준다.
이에 조운을 쫓던 문빙과 하우돈, 허저 등 조조편의 맹장들은 감히 장판교로 다가서지 못하고
장비가 눈을 부릅뜬 채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지르자
조조 곁에 있는 하우걸이란 장수 하나가 말에서 거꾸로 굴러 떨어진다.
이를 계기로 조조군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자 장비는 장판교를 부수고 유비를 쫓아 뒤돌아 간다.
이 장면의 가장 큰 특징은 말 탄 장비가 장판교 위에서 홀로 서 있는 모습이다.
⑧ 제갈량이 화살을 빌리다 [와룡차전(臥龍借箭)]
제갈량이 꾀를 내어 풀을 잔뜩 실은 배와 군사를 이용해 조조군의 화살을 빼앗아오는 장면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주유가 제갈량을 죽이려고 계책을 내어 열흘 안에 화살 십만 개를 만들어 달라고 청하자,
제갈량은 배 스무 척과 군사 육백 명을 동원하여 노숙과 함께 조조군의 진영으로 간다.
제갈량의 명으로 군사들이 북을 두드리고 요란스럽게 하자
풀 천 다발을 양쪽으로 쌓아 푸른 휘장으로 둘러씌운 배에
조조 군사들의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박힌다.
약속대로 화살 십만 개를 가져오자 이에 주유가 감복한다.
와룡차전을 표현한 대부분의 민화는 조조의 군사들이
제갈량과 동오의 군사들이 타고 있는 짚이 가득 실린 배를 향해 화살을 쏘아대는 장면으로 표현된다.
이 장면의 가장 큰 특징은 화살이 잔뜩 박힌 짚을 실은 배이다.
⑨ 제갈량이 칠성단에서 동남풍을 빌다 [칠성단제갈제풍(七星壇諸葛祭風)]
제갈량이 火攻을 성공시키기 위해 칠성단에서 동남풍을 비는 장면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칠성단에 대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南屛山에 七星壇이란 祭臺를 쌓는데, 둘레가 스물네 길이고,
한 층의 높이는 석자로 삼층을 올리니 전체 높이가 아홉 자이다.
맨 아래층에는 이십팔 수 별자리에 따른 기를 꽂았는데
동쪽 일곱 면에는 푸른 기를 角, 亢, 底, 房, 心, 尾, 箕 자리에 꽂아 蒼龍의 모습을 꾸미고
북쪽 일곱 면 검은 기는 斗, 牛, 女, 虛, 危, 室, 壁 자리에 꽂아 玄武 기세를 지었다.
서쪽 일곱 면 흰 기는 奎, 婁, 冑, 昴, 畢, 觜, 參 자리에 꽂아 白虎의 위엄을 펼치게 하고,
남쪽 일곱 면 붉은 기는 井, 鬼, 柳, 星, 張, 翼, 軫 자리에 꽂아 朱雀의 형상을 지었다.
둘째 층은 누른 기 예순넷으로 육십사 괘를 벌이되 여덟 방위로 나누어 세웠고,
맨 위층에는 네 사람을 세웠는데 그들의 차림은 머리에는 束髮冠을 하고,
몸에는 皁羅袍(검은 비단으로 지은 포)를 걸쳤으며,
鳳衣를 입고 띠를 두르고 後綬를 길게 늘어뜨리고 붉은 신발을 신었다.
네 사람 중 앞쪽 왼편에 있는 사람은 긴 장대를 들었는데,
장대 끝에는 닭털을 일산 모양으로 달아 바람의 방향을 보게 하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七星號帶를 달아 원하는 바람의 형태를 나타냈다.
뒤편 왼쪽에 있는 사람은 보검을 받쳐 들었고 오른편에 선 사람은 향로를 받들고 서 있다.
그리고 단 아래 또 스물넷이 섰는데,
각기 旌旗와 寶蓋, 大戟長戈와 黃毛, 白鉞. 朱旛, 皁纛을 나눠 잡고 사방을 빙 둘러싸고 있다.
제갈량은 머리를 푼 채 맨발에 道衣를 입고 칠성단에 올라가
향로에 향을 사르고 사발에 물을 붓고는 동남풍을 불게 하는 주문을 왼다.
(李文烈 評譯, 『三國志』6, 민음사, 1988)
민화에서 이 장면은 머리를 풀어헤친 제갈량이 각종 의장기로 치장된 칠성단에서 제를 올리고,
단 아래에는 조운이 배를 타고 제갈량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⑩ 주유가 화공을 놓다 [적벽대전(赤壁大戰)]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거짓으로 항복을 한 황개가 靑龍旗를 꽂은 배를 타고 조조의 수채로 와서
연환계(連環計)를 이용해 쇠사슬로 묶어놓은 조조의 배에 불을 지르자 조조의 진영은 불바다가 된다.
조조가 상황의 위급함을 보고 배에서 탈출하려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장요가 작은 배 한 척을 저어와 조조를 부축해 구한다.
황개가 조조를 죽이러 다가오나 어깻죽지에 장요의 화살을 맞고 물 위로 떨어진다.
불길은 강을 덮어 물 대신 흐르는 듯 하고 함성은 하늘과 땅을 울렸다.
왼쪽에서는 한당과 장흠이 이끄는 두 갈래의 군사가 적벽 서편으로 쳐들어오고,
오른쪽에서는 주태와 진무가 이끄는 군사들이 적벽 동편을 따라 조조군의 수채를 덮쳤다.
그리고 중앙에는 뱃머리에 주유를 세운 동오의 선단이 모두 당도하였다.
이 장면은 불이 붙은 강물과 배를 배경으로 마초나 황개로 보이는 장수를 앞세운 동오의 배들이
조조군의 배를 쫓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때 조조는 장요로 보이는 장수의 도움을 받아 업히거나 부축을 받아서 도망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⑪ 조조가 패하여 화용도로 도망가다 [패주화용도(敗走華容道)]
적벽대전으로 패한 조조가 화용도로 도망치는 장면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적벽에서 패한 조조가 오림(烏林)으로 도망가다가 매복하고 있던 조운에게 쫓겨 혼비백산 도망을 간다.
호로구에 이르자 허기가 지고 지칠 대로 지쳐 쉬다가 매복하고 있던 장비에게 쫓겨 화용도로 도망간다.
화용도에서 조조는 관우와 맞닥뜨리게 된다.
민화에서는 주로 조조와 그 무리가 말을 타고 도망가고
조운이 그 뒤를 쫓거나 관우가 매복하고 기다리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장면의 가장 큰 특징은 말을 타고 도망가는 조조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⑫ 관우가 조조를 놓아주다 [화용도(華容道)]
관우가 화용도에서 도망쳐 온 조조를 의로서 놓아 보내는 장면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화용도에 매복해 있던 관우는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쫓기던 조조와 맞닥뜨린다.
관우는 자신이 조조의 오관(五關) 여섯 장수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뒤쫓지 않았다는
조조의 말을 듣고 살려준다.
또한 조조의 군사들이 두려움에 떨며 눈물만 흘리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그들도 놓아주고 만다.
민화에서는 조조가 말 위에서 혹은 땅에 무릎 꿇고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⑬ 유비가 한중왕의 위에 오르다 [유비진위한중왕(劉備進位漢中王)]
유비가 한중(漢中)을 차지한 후 제갈량 등 여러 신하의 권유를 받아
한중왕(漢中王)으로 나아가는 의식을 치르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건안 24년(219) 7월에 면양 땅에다가 둘레가 아홉 리인 단을 쌓고, 5방위에 정기와 의장을 벌여 세운다.
허정과 법정이 유비를 단 위로 올려 모시고 면류관과 옥새를 바친다.
이에 유비는 남쪽을 향해 앉아 문무관원의 하례를 받는다고 되어 있다.
민화에서는 왕의 복장을 한 촉의 황제(蜀漢帝) 유비가 관복을 입은 신하들에게 하례를 받고 있고,
그 옆에 제갈량이 앉아 있거나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⑭ 관흥이 적장 이이를 죽이고 장포를 구하다 [관흥참장구장포(關興斬將球張苞)]
장비가 죽은 후, 유비는 원수를 갚기 위해 손권을 정벌하려는 전쟁을 일으킨다.
이 그림은 전쟁에서 관흥(관우의 아들)이
적장 이이에 의해 위험에 빠진 장포(장비의 아들)를 구해주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삼국지연의』내용에서는
관흥과 장포의 모습을 은투구 은갑옷에 흰 전포를 입은 채 흰 깃발을 앞세우고 있으며,
관흥은 큰 칼을, 장포는 한 길 여덟 자의 정강으로 만든 창을 들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민화에서는 주로 관흥이 장포를 죽이려는 적장 이이의 목을 치는 장면으로 나타난다.
⑮ 제갈량이 거문고를 타며 사마의를 물리치다 [서성탄금(西城彈琴)]
제갈량은 사마의가 쳐들어오자 꾀를 내어 성문 위 누각에서 홀로 거문고를 뜯는다.
한가로움을 가장한 그는 군사가 매복되어 있는 것으로 꾸며
사마의로 하여금 군사를 거두어 물러가게 하는 장면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제갈량은 사마의가 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서성으로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학창의를 입고 윤건(輪巾)을 쓴 채 아이 둘만 데리고 성 밖에서 눈에 잘 띄는 敵樓에 앉아
거문고를 뜯는다. 아이 둘 중 한 사내아이는 보검을 받쳐 들고, 다른 사내아이는 불자를 들고 있다.
그 뜻밖의 광경에 위나라 군사들은 감히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를 본 사마의도 무슨 계략이 있을까 두려워 군사를 거두고 물러가 버린다.
민화에서는 이 장면을 성문 위 누각에서 거문고를 뜯고 있는 제갈량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1) 삼고초려(三顧草廬) = 삼고모려(三顧茅廬)
◆◆ 삼고초려의 정성
높은 뜻과 열성에 ‘臥龍’도 감동, 평생을 지극한 충성으로 보답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제갈공명을 맞아들인 것은
유비가 평생 한 일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공명이 참가한 후 유비 진영은 전략과 시스템을 갖추고 천하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그 전의 유비 진영은 뜻만 높을 뿐 의리로 뭉친 임협집단에 가까웠다.
친척들로만 구성된 시골 영세기업이 대기업으로 도약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유비의 제갈공명 영입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스카우트이기도 하다.
CEO가 성공하려면 2인자를 잘 만나야 한다.
훌륭하면서도 1인자가 될 욕심이 없는 2인자를 맞고 잘 쓰는 것은 위대한 CEO의 안목이며 통이다.
삼국지 시대엔 위나라 조조의 순욱(荀彧)이나 오나라 손권의 노숙(魯肅)이 비슷한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제갈공명이 단연 뛰어나다.
유비와 제갈공명은 공식적으론 군신(君臣) 관계지만
실질적으론 같은 이념을 가진 동지요, 가족이며 공동운명체라 할 수 있다.
둘은 맨주먹으로 촉나라를 세운 창업 동지다.
대개 창업 동지도 나중엔 안 좋게 헤어지기 쉬운데 둘은 끝까지 아름답게 갔다.
유비의 삼고초려가 그토록 빛나는 것은
좋은 사람을 모시기 위한 유비의 지극한 정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윗사람이 좋은 사람을 끌어올 땐 이 정도의 정성을 들여야 하고,
아랫사람이 좋은 주인을 정하려면 이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해 준다.
삼고초려 이야기는 사실과는 약간 다르다는 주장도 있으나
오랜 세월 사람들의 머리에서 생각해낸 인재 영입의 이상적 모델이라 보면 될 것이다.
삼고초려는 가장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이상과 뜻이 맞아야 하고 서로의 전략과 인간성에
신뢰를 가져야 하며 마지막으로 절차에 있어서도 정성과 예의를 다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유비가 공명을 찾아 갔을 땐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 얹혀 지낼 때였다.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하나 근거지도 없고 힘도 없었다.
유비 자신 이미 47세의 장년에 달했는데 뜻만 높을 뿐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어 몹시 초조할 때였다.
이때 유비는 형주 명사 사마휘(司馬徽)를 만난다.
사마휘는 형주 지식인들의 대부(代父)같은 존재로서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비가 자기의 고달픈 처지를 하소연 하자 사마휘가 묻는다. “왜 그렇게 고달픈 줄 아십니까”
“제가 박복해서 그렇지요” “그게 아닙니다. 수하에 좋은 사람이 없어 그렇습니다”
“제 밑에도 인재들이 많습니다. 무장으론 관우·장비·조운이 있고
참모로는 미축 간옹·손건 등이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천하를 경영할 만한 전략을 짜고 그 큰일을 만들어 갈만한 큰 인재가 없습니다.
관우 · 장비 · 조운은 1만 명을 대적할 수 있는 명장이나
그들을 부릴만한 사람이 없어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축 · 간옹 · 손건 등은 충직하지만 심부름꾼 정도입니다.”
유비는 사마휘에게 자기 진영에 참여해 도와 달라고 한다.
사마휘는 자기는 그럴 재목이 못된다고 하면서 와룡(臥龍)이나 봉추(鳳雛) 중
어느 한사람만 얻어도 천하를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형주엔 전란을 피해 온 지식인 명사들이 많았다.
공명도 북쪽 산동성 낭야(琅邪) 사람으로 어릴 때 형주로 와서 양양(襄陽) 부근
융중(隆中)에서 농사를 지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준재로서 명성이 높아 젊은 지식인 사회의 대표주자 격이었다.
공부를 위한 공부만 한 게 아니고 국가경영과 치세에 관한 실용적 공부를 많이 했다.
언젠가는 좋은 주인을 만나 천하 사람들을 위해 뜻을 펴 보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엎드려 있는 용 즉, 와룡(臥龍) 혹은 복룡(伏龍)이라 불렸던 것이다.
공명은 자신을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비유하곤 했다.
두 사람 다 좋은 임금을 받들어 나라를 융성케 한 사람들이다.
관중은 재상이고 악의는 장군인데, 공명도 전장에 나가면 장군이 되고 돌아오면
재상이 되는 출장입상(出將入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공명은 창업하거나 왕이 되기보다 좋은 군주를 보좌해 뜻을 펴려는 힘 있는
전문경영인의 길을 처음부터 지향했던 것이다. 공명은 처가가 형주에서 알아주는 명문이었다.
유비에겐 더할 나위 없이 탐나는 인물이었다.
유비가 형주 지식인들을 끌어들이고 널리 인심을 얻는 덴 가장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유비는 서서(徐庶)라는 인물을 만난다.
서서는 공명과 벗하던 인물로 유비의 대의명분과 인품에 반해 한동안 유비 밑에서 일을 한다.
그러나 서서의 어머니가 조조에게 잡혀가는 바람에 유비 밑을 떠나게 된다.
이 때 서서가 공명을 다시 추천한다.
유비는 사마휘에게 공명 이야기를 들었다며 한번 데려오라고 말한다.
서서는 공명은 천하의 인재로서 데려올게 아니라 유비 자신이 모시러 가는 것이 예의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유비는 공명을 찾아갈 결심을 한다. 아무리 공명이 탐나도
유비의 지위에서 자신보다 20세나 어린 백면서생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세 번씩이나 찾아간다. 그런 유비의 겸허함과 정성이 공명을 움직였는지 모른다.
공명이 은거하고 있던 융중은 당시 형주의 수도 양양(襄陽)에선 한 30리 거리지만
당시 유비가 살고 있던 신야(新野)에선 200리 거리다.
겨울 눈보라 속에 찾아갔다가 허행을 하자 봄철 다시 찾아간 것이다.
같이 갔던 관우와 장비는 불평이 많았지만 유비는 좋은 사람을 모시려는
나의 정성을 보이는 것이라 말하고 묵묵히 길을 재촉한다.
이런 정성만으로도 공명은 거절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공명으로선 마음속으로 작정을 해 놓고 유비의 정성을 시험해 보았는지 모른다.
어차피 유비 진영으로 가려면 그 정도의 예우는 받고 나가야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을 모시는 덴 절차가 중요하다.
그런 대접을 받고 갔다는 것을 널리 알려야 세상에 권위도 서고 말발도 먹히기 때문이다.
또 모시는 사람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세 번째에야 공명을 만난 유비는 자기의 꿈과 포부를 말하고 자기를 좀 도와 줄 것을 간곡하게 청한다.
유비는 “지금 천하가 어지러워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한나라 왕실은 기울어져 조조가 전횡을 부리고 있지만 말릴 힘이 없습니다.
한실 후손인 저는 한실 부흥을 도모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니
선생의 좋은 재주를 빌려주시기 바랍니다”하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유비의 정성에 감복한 공명은 자기 나름의 시국관과 전략을 이야기 한다.
“지금 천하가 어지러우나 차츰 질서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북쪽은 조조가 강적 원소를 깨고 확고하게 터전을 잡아 잘하고 있으니
당분간 그 세력을 꺾기 어렵습니다. 동쪽 강동(江東) 지방은 이미 손권이 삼대에 걸쳐 기반을 닦고
장강(長江)의 천험(天險)에 의지해 웅거하고 있으니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형주 지방은 천하의 배꼽에 해당하는 요지이지만 형주목 유표는 나이가 많고
패기가 없어 자기 땅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옆에 붙어있는 익주(益州) 지방도 옥야천리(沃野千里) 좋은 땅이나
지금의 주인 유장(劉璋)은 그 땅을 간직할만한 그릇이 못됩니다. 먼저 형주를 차지한 다음 익주를 병탐해
북쪽의 위나라, 동쪽의 오나라와 솥발 같은 3각의 형세를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어 위나라와 대항하면서
차츰 힘을 키워 장차 천하를 통일하는 전략을 써야합니다”라고 말한다.
유명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다.
이제까지 눈앞의 일에만 매달리다가 이런 원대한 전략을 한 번 듣고 나니
유비는 눈앞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유비는 몇 번이나 탁월한 안목이고 전략이라고 감탄한다.
두 사람의 뜻과 이상, 전략이 같음을 확인한 것이다.
유비는 공명에게 같이 가서 그 천하 경영의 실행을 도와 달라고 간청한다.
공명은 처음엔 세상으로 내려갈 생각이 없다고 사양한다. 이때 유비는 다시 예의 눈물을 흘린다.
선생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유비가 어떻게 천하전략을 펴 보며 불쌍한 백성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통곡까지 한다. 공명을 마음이 흔들려 유비와 같이 갈 생각을 한다.
그날 밤 유비는 초려에서 묵으며 공명과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다음날 같이 신야로 간다.
드디어 유비는 공명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정말 큰일을 한 것이다.
공명은 초려를 떠나면서 “내가 유장군의 간곡한 말씀을 저버릴 수가 없어 같이 가기로 했다.
내가 공을 세우고 난 다음엔 다시 융중으로 올 것이니 그 때까지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동생 제갈균(諸葛均)에게 당부한다.
공명으로선 어느 정도 일을 마무리 한 다음엔 돌아오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공명은 그길로 유비를 따라가 54세에 오장원(五丈原) 전장에서 장렬히 병사하기까지
유비는 물론 그 2세에까지 충성을 다한다.
공명 없는 유비 황제나 촉나라는 생각할 수가 없다.
유비로선 공명을 처음 모실 때 삼고초려의 수고를 했지만 그 수고는 크게 보답받은 것이다.
공명은 왜 유비를 택했을까. 유비의 대의명분과 간곡한 정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현실적인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형주의 유표에겐 실망한 뒤고 남은 것은 조조와 손권인데
조조와는 아무래도 궁합이 맞지 않았다.
조조 스스로 총명하고 치밀하여 공명이 자유롭게 재주를 펼칠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다.
조조 밑엔 이미 많은 인재들이 있어 공명이 들어갈 공간이 별로 없다.
또 공명은 근엄하고 성실한 성격인데 조조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패도(覇道)와 기계(奇計)에 능하다. 조조는 한나라 승상으로서 한실을 받들고 있으나
언젠가는 한실을 폐하고 자기 왕국을 세우리라는 것을 지혜로운 공명은 예상했는지 모른다.
손권은 지역적으로 강동을 기반으로 한 수성형 CEO여서 공명의 천하경영엔 아무래도 미흡하다.
또 하나 걸리는 것은 공명의 형인 제갈근(諸葛瑾)이 이미 손권의 참모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명은 한실 부흥을 내세우는 유비가 대의에도 맞고 무엇보다도
유비의 성실한 인품과 관대함에 끌렸을 것이다.
유비라면 통이 커서 폭넓은 재량권을 줄 것이니
한번 마음껏 뜻과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게 아닐까.
공명은 결국 사람과 가능성을 보고 별 볼일 없던 유비를 선택한 셈인데 당시로선 대단한 결단이다.
공명은 세속적 가치보다 일할 보람과 장래에 투자한 것이다.
대기업의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영세 벤처기업에 가서 한번 같이 키워보자는 심정에 비유해 볼 수 있다.
공명도 물론 어려움이 많으리라는 것은 짐작했을 것이다.
이미 확고한 터전을 잡은 조조나 손권의 세력에 대항해 새 터전을 일으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현명한 공명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되고 안 되고는 하늘의 뜻이고 한번 최선을 다해보자는 것이 공명의 심경이고 의기였는지 모른다.
뒤에 사마휘가 공명이 유비에게 갔다는 소식을 듣고
“공명이 좋은 주인을 얻었으나 때를 얻지 못해 애석하도다” 며 하늘을 보고 탄식했다 한다.
중국에선 공명의 인기가 매우 높다.
싸움터에서의 신출귀몰한 재주와 탁월한 전략, 공평무사한 집무태도도 그렇지만
그 위에 당장의 이해를 초월한 그 같은 선택과 애끓는 충성심, 장렬한 죽음 등이 공명의 인기를 더 한층
높이고 있다. 그래서 공명이 유비를 만나기 전에 살았다는 와룡강(臥龍岡)은 신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장소를 둘러싸고 오래전부터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하남(河南)성의 남양(南陽)과 호북(湖北)성의 고융중(古隆中)이 대표적인데
둘 다 청나라 때부터 서로 자기 고장이 삼고초려처임을 주장하고 있다.
양쪽 다 넓은 대지 위에 고색창연한 건물과 유적들을 웅장하게 지어놓고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안에 들어가 보면 공명이 살던 초가집(草廬), 유비와 공명이 만난 방,
옆에서 기다리던 관우와 장비의 조각상, 공명이 독서하던 방, 천문(天文)을 보았다는 관측대,
무릎을 안고 생각에 잠겼다는 바위 등이 그대로 있다.
양쪽 다 “유비가 공명을 세 번이나 찾은 곳”라는 커다란 비석을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또 많은 정치인, 문인들이 찾아와 공명을 기리고 칭송한 시비(詩碑)가 총총히 서있다.
아주 휘기(諱忌)한 것으로 공명 부인의 천연색 초상화도 있다.
전설과는 달리 매우 품위 있고 잘 생긴 얼굴이다.
형주 명사 황승언(黃承彦)의 딸로 박색이었지만 매우 현숙하고 내조를 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명이 그토록 분주하게, 또 훌륭히 나랏일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려 신경쓰지 않게 해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공명 부인 초상 위의 현판도 지혜현숙(智慧賢淑)이라 쓰여 있다.
삼고초려처에 대한 정통 시비는 워낙 민감한 사항이라
중국 정부도 지역감정을 고려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오랜 고증 작업을 거쳐 학술적으론 융중 쪽이 맞는 것 같다는 결론이 났으나
정치적 고려와 관광상의 이유 때문에 명백히 발표는 안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남양 편을 드는 학자들도 있으며 남양 사람들은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공명의 인기가 워낙 높기 때문에 그런 시비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관광객이 많이 몰려들고 있다.
- <삼국지경영학> 최우석 前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을유문화사
- 출처 포브스 코리아 -
서서주천제갈량(徐庶走薦諸葛亮) - 서서가 떠나며 제갈량을 추천하다 |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떠나야겠다고 했다.
참모 손건은 서서를 보내지 말 것을 유비에게 진언했다.
서서가 가지 않으면 조조가 서서의 노모를 죽일 것이고,
서서는 원수를 갚기 위해 유비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비가 말했다.
"남의 손을 빌려 그 어머니를 죽이고 내가 그 아들을 쓴다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
(不仁). 아들을 남겨 모자(母子) 사이를 끊는다는 것은 의롭지 않다(不義).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어질지 못하거나 의롭지 않은 일은 할 수 없다."
유비의 이 말에 모두가 감탄하였다.
유비는 장정(長亭)에서 잔치를 열고 서서를 배웅하였다. 눈물을 흘리는 유비를 두고 말을 타고 가던 서서가 되돌아와,
잊을 뻔했다면서 제갈량(諸葛亮)을 추천하였다.
양양(襄陽) 성 밖 20리쯤 융중(隆中)에 가면 만날 수 있다는 거였다.
사마휘가 말한 복룡(伏龍)이 바로 제갈량이며 봉추(鳳雛)는 방통(龐統)이라고 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서서가 허도에 도착하자 조조가 정중히 맞이하였다. 그러나 서서의 모친은 "밝음을 버리고 어둠에 의탁하였다(棄明投暗)" 며
서서를 꾸짖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림은 서서가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하고 떠나는 장면이다.
오른쪽에서 유비가 아쉬워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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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덕삼고모려(劉玄德三顧茅廬) - 유비가 세 번 초막을 찾아가다 | ||
유비가 제갈량에 대해 묻자 사마휘는 먼저 그의 친구 네 사람을 들었다.
박릉의 최주평, 영천의 석광원, 여남의 맹공위, 그리고 서서였다.
또 제갈량은 스스로를 전국시대 관중(管仲)이나 악의(樂毅)에 비기지만,
사마휘가 보기엔 강태공(姜太公)이나 장량(張良)에 맞먹는 인재라고 하였다.
삼고모려(三顧茅廬)란 말은 우리에겐 삼고초려(三顧草廬)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직역하면 '띠풀로 지은 집을 세 번 돌아보다'는 말로,
'세 번 초막을 방문하다'는 뜻이다.
유비가 융중(隆中)마을에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간 일을 말한다.
이 말은 뛰어난 사람을 모시기 위해서는
정성과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유비는 선물을 준비하고 관우와 장비를 데리고 융중의 와룡강(臥龍崗)으로 제갈량을 찾아갔다.
제갈량이 산다는 초가집에 이르자 유비가 가볍게 사립문을 두드렸다.
조금 후 동자가 나오더니 "선생은 오늘 아침 일찍 외출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으니 동자는 언제 올지 모른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제갈량의 친구 최주평을 만났는데 그 역시 제갈량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제갈량의 운신(運身)은 마치 龍(용)처럼 변화무쌍하다는 비유이다.
그림은 융중을 찾아간 유비 일행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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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벽대전
나관중 ‘삼국지’에는 적벽대전의 원인과 전쟁의 진행과정이 매우 상세히 그려져 있다.
국내에 출판된 어떤 소설 ‘삼국지’에는 무려 200쪽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내용으로 보면 적벽대전은 거의 10회 이상에 걸쳐서 묘사되어 있어
사실상 한권의 책 이상의 분량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나관중 ‘삼국지’의 전체 회수가 120회이니 거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적벽대전과 관련된 나관중 ‘삼국지’의 내용의 90% 이상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 나관중 ‘삼국지’의 경우 적벽대전과 관련된 부분을
역사적 사실과 창작내용 여부를 살펴본다면,
① [43회] 제갈량 설전군유(舌戰群儒) :
동오로 간 제갈량은 손권의 참모들과 설전을 벌리는데
이 과정에서 제갈량은 논리 정연한 언변으로 이들을 굴복시킨다는 내용.
⇒ 동오로 간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하긴 했지만 손권의 참모들과 설전을 벌인 일이 없다.
② [44회] 손권 결계파조조(孫權 決計破曹操) :
손권은 참모들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노숙과 주유의 의견을 좇아
조조군을 격파하기로 결정하는 내용.
⇒ 이것은 확인된 역사적 사실.
③ [45회] 군영회장간중계(群英會蔣幹中計) :
조조가 삼강(三江) 어귀에서 수군에게 패하자 여러 참모들을 모아 대책을 묻는데,
장간이 친구인 주유를 설득하여 굴복시킨다고 찾아 가지만
오히려 주유의 계략에 빠져 조조는 채모(蔡瑁)와 장윤(張允)을 처형한다는 내용.
⇒ 장간이 주유에게 가서 항복을 권유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적벽대전 후의 일이다.
따라서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채모와 장윤이 죽은 일은 없다.
‘삼국지집해’에서는 조조는 청년기에 채모와 친하였고,
조조가 형주로 들어간 뒤 채모의 집을 방문하였다.
④ [46회] 공명차전(孔明借箭) :
주유가 공명을 죽이려고 화살 십만 개를 얻어오라고 하자
제갈량은 유유히 조조로부터 화살을 얻어오고 주유는 더욱 제갈량을 경계한다는 내용.
⇒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얘기로는 ‘위략(魏略)’에
“손권이 배를 타고 정찰을 나가니 조조군이 활을 마구 쏘아 화살 무게로 인해 배가 기우뚱하자
배를 반대로 돌려 화살을 맞게하여 배가 안정되어 물러날 수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제갈량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⑤ [47회] 감택항서(闞澤降書)ㆍ방통교수연환계(龐統巧授連環計) :
오나라의 감택은 거짓밀서(황개가 투항한다는 내용)를 조조에게 보내어 조조를 속이고
방통은 연환계로 조조를 속인다는 내용.
⇒ 황개가 투항의사를 밝힌 사자를 보낸 일은 있지만 그 사자가 감택인 것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방통과 적벽대전은 아무 상관이 없다.
⑥ [48회] 조조횡삭부시(曹操橫槊賦詩) :
조조는 방통의 계책에 따라 배를 묶어두었으며
적벽대전을 앞두고 의기양양하게 노래를 부른다는 내용.
⇒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 내용.
⑦ [49회] 제갈제풍(諸葛祭風) : 제갈량이 동남풍을 부른다는 내용.
⇒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 내용.
⑧ [50회] 관운장의석조조(關雲長義釋曹操) :
관운장이 조조를 사로잡지만 의로써 조조를 살려 보낸다는 내용.
⇒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 내용.
⑨ 제갈량은 주유를 세 번 기절시킨다는 내용 :
[51회] 공명일기주유(孔明一氣周瑜)
[55회] 공명이기주유(孔明二氣周瑜)
[56회] 공명삼기주유(孔明三氣周瑜)
결국 주유는 제갈량으로 인하여 죽으면서
“왜 하늘은 주유를 세상에 나게 하고 또 공명을 세상에 나게 했습니까?”라고 탄식한다는 내용.
⇒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 내용.
◆◆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
“208년, 후베이성 자위현의 북동지역 적벽에서 전쟁이 발생한다.
화북 지역을 평정한 위나라의 조조가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과 대치했으나,
크게 패해 화북으로 후퇴했다."
이상이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의 작은 공통분모다.
이 두개의 사료는 똑같은 역사적 사실도 어떤 시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큰 차이를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먼저 <삼국지연의>는 14세기 원 · 명 교체기에
나관중이란 사람이 위 · 촉 · 오의 역사를 토대로 재구성해 소설로 만든 것.
<삼국지연의>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촉나라의 장수 유비, 관우, 장비와 책사 제갈량이다.
특히 제갈량은 상대방의 속마음을 꿰뚫고 날씨까지 좌지우지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적벽대전에서 그의 총명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황개의 ‘고육계’(苦肉計)를 간파한 것이다.
주유는 조조와의 화평론을 주장했던 장수 황개에게 태형 100대의 벌을 내린다.
총애하던 장수에게 어떻게 그런 벌을 내릴 수 있느냐며 불평을 일삼던 주유의 신하들에게
제갈량은 이렇게 말한다. “주유대독과 황공의 계책임을 알았기에 말리지 않았소.”
오나라로 파견된 조조의 간첩을 속이고 거짓 정보를 흘리려 했던 주유보다
제갈량이 한수 위였던 것으로 <삼국지연의>는 묘사하고 있다.
제갈량과 동맹을 맺었음에도 주유가 자주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도
주유가 제갈량의 총명함을 시기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정사 <삼국지>에서 주목받는 인물은 주유다.
자료에 따르면 그는 “병법에 정통했던 군사학자”로 기록되어 있다.
“외교관으로 활약했을 뿐 군사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제갈량과는 상반된 묘사다.
그는 적벽대전 당시 “조조의 병사들이 수전에 익숙하지 않고, 풍토평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를 들어 위나라와의 전쟁을 반대하던 오나라 참모들의 주장과 각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승리했으니, 그의 예측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또한 주유는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음악을 듣다가 연주가 조금이라도 틀리면
곧바로 지적해 “연주가 틀리면 주유가 뒤돌아본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이처럼 영리하고 재능 많았던 주유이기에 훗날 역사학자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주유가 36살의 나이에 죽지 않았더라면 <삼국지>의 내용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1. 주유(周瑜)
제갈량일기주유(諸葛亮一氣周瑜) - 제갈량이 주유를 한 번 화나게 하다 | |
주유의 부상에 부장 정보(程普)가 후퇴하기를 제안하였다.
그러자 주유는 동한(東漢)의 명장 마원(馬援)이 말한 마혁과시(馬革裹屍)를 인용하여 말하였다. "대장부가 군주의 祿(녹)을 먹고 있으면 응당 전장에서 죽어 말 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간다면 다행이오. 어찌 나 하나로 인해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겠소!"
조인은 매일 수하들을 데리고 군영 밖에서 욕을 해대었다. 주유는 화를 참을 수 없어 출전하였으나 싸우기도 전에 피를 토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동오군은 주유가 독화살에 맞은 상처가 도져 죽었다고 소문을 내고 크게 애도하였다.
그날 밤, 조인의 군대가 기습하자 동오군은 미리 매복해 있다가 적을 크게 물리쳤다.
주유는 여세를 몰아 멀리까지 추격하였다.
주유는 군사를 되돌려 남군을 취하러 갔다. 그러나 한 장수가 성위에서 크게 소리쳤다.
"도독은 나를 탓하지 마시오.
조자룡은 군사(軍師)의 명을 받들어 이미 성을 접수했소이다."(그림)
주유가 크게 노하여 성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성에서 화살만 빗발치듯 날아왔다.
제갈량은 또 조조군의 병부(兵符)를 빼앗아 양양을 탈취하였다. 이 사실을 안 주유는 화가 치밀어 올라,
화살에 맞은 상처가 터지면서 피를 토하고 기절하였다.
'일기주유(一氣周瑜)'에서 '기(氣)'는 '화내다'는 뜻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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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기주유(諸葛亮二氣周瑜) - 제갈량이 주유를 두 번째 화나게 하다 | |
시상(柴桑)의 경계 지역에 들어서니 뒤에서 진무와 반장이 추격해왔고,
앞에서는 주유가 보낸 서성과 정봉이 막아섰다.
위급한 상황에서 조자룡이 세 번째 비단주머니를 열어 유비에게 보였다.
유비는 손부인에게 주유와 손권이 미인계로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사실을 알리며
도와달라고 하였다.
손부인이 주렴을 걷고 나와 서성과 정봉을 크게 꾸짖으니 두 사람은 감히 거스를 수 없어 길을 열었다.
진무와 반장이 도착하여 서성과 정봉을 만나고는
손권의 특명을 어겨서는 안 된다며 함께 추격했다.
이에 조자룡이 옆에 지켜선 가운데 손부인이 다시 네 장수를 꾸짖어 돌려보냈다.
장흠과 주태가 달려왔을 때는 유비의 수레가 지나간 지 한참 뒤였다.
이에 장흠은 손권에게서 받은 검을 들어 보이며
서성과 정봉은 수로(水路)로 진격하고,
자신 등 네 장수는 군사를 데리고 육로(陸路)로 추격하자고 하였다.
유비 일행이 유랑포(劉郞浦)에 이르니 제갈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오 병사들이 추격해왔지만 배가 막 떠나고 있었다.
주유가 수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유비가 배를 버리고 강가에 올랐다.
이때 관우가 나타나 공격하니 주유의 군사는 거의 몰살됐다.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화가 치민 주유는 화살 맞은 상처가 터져 정신을 잃었다.
주유가 두 번째 화를 낸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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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삼기주유(諸葛亮三氣周瑜) - 제갈량이 주유를 세번째 화나게 하다 | ||||||
춘추시대에 진(晉)나라가 괵(虢)나라를 친다고 우(虞)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한 후,
괵나라는 물론 우나라도 멸망시켰다.
주유는 자신이 서천(西川)을 지나면 유비가 반드시 성 밖으로 나와
군사들을 위문할 것이니 그때 유비를 죽이고 형주를 차지한다는 계획이었다.
노숙이 이 말을 전하자 유비와 제갈량은 거듭 노고를 치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주유가 5만 대군을 이끌고 형주에 도착해도 노고를 치하하는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주유가 성 아래 이르니 조자룡이 성 위에서 소리쳤다.
"제갈량 군사께서 이미 도독의 계책을 알고는 저를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소이다."
그때 관우, 장비, 황충, 위연 등이 네 방면으로 동오군을 공격하러 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주유가 화를 참지 못하자 상처가 터지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주유는 서천을 향했으나, 제갈량이 편지를 써서 조조군이 동오의 후방을 공격할까
두려우니 빨리 회군(回軍)하라고 하였다.
이에 주유가 또 격노하자 그는 명이 단축되어 죽게 되었다.
죽기 전에 주유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이미 주유를 내시고 어찌 또 제갈량을 내셨습니까!" 그의 나이 36세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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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대곡주유(諸葛亮大哭周瑜) - 제갈량이 주유의 죽음에 크게 곡하다 | |
제갈량은 주유의 영전에 술을 올리고 꿇어앉아 제문(祭文)을 읽었다.
"아아! 주유여! 불행히도 요절하시다니!
목숨이 길고 짧음은 하늘에 있다지만 이 아니 슬픈 일이오!"
계속하여 주유의 재능 기개 공적 풍채 등을 낭독하고 땅에 엎드려 대성통곡하니
그 모습이 지극히 애절하였다.
동오의 장수들은 처음에는 제갈량을 죽이려 하였으나
제문을 읽는 것을 보고 감동하였다.
노숙도 눈물을 훔치며 제갈량은 정이 두터운데 비해
주유가 오히려 도량이 협착(狹窄)하다고 생각하였다.
주유는 죽기 전에 손권에게 유언장을 써서 후임으로 노숙을 추천하였다. 노숙은 유비 진영과 우호적인 인물이어서,
적벽대전 이후 유비의 형주 점령은 이로써 확고해졌다.
'삼국지(三國志)'는 이후 유비의 서천(西川) 공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노숙은 손권에게 방통(龐統)을 추천하였으나, 짙은 눈썹에 들창코,
검은 얼굴에 짧은 수염의 괴이한 용모로 임용되지 않았다.
방통은 어쩔 수 없이 유비에게 갔다.
유비도 역시 외모가 싫어 뇌양현의 현령을 맡겼다.
방통은 제갈량과 노숙의 추천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은 채
불만을 품고 부임하였다. 방통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부임한 후 공무는 전혀 돌보지 않고 매일 술만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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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을 얻는 날에 이교(二橋)를 데려다가 만년을 즐길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족하리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조조의 대사다.
영화 <적벽대전>에서도 두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건 한 미모의 여인이었다.
조조가 ‘이교’라 일컬었던 이들은 교국로라는 노인의 두딸이다.
언니와 동생 모두 당대의 소문난 절세미인이었다.
훗날 대교(大橋)라 불린 언니는 오나라 손권의 형인 손책과 결혼했고,
동생 소교(小橋)는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와 결혼했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제갈량이 주유의 분노를 사서 오나라를 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해
조조가 지은 노래에 “대교와 소교를 탐하고 싶다”는 내용을 넣어 불렀다는 얘기가 있다.
역사적으로는 이 자매가
양반가의 규수였는지 평민 출신이었는지, 혹은 처였는지 첩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제갈량지세주유(諸葛亮智說周瑜) - 제갈량이 지모로 주유를 설득하다
조금 후 황개 등 장수들도 주유를 찾아와 죽어도 항복하지 않을 결심을 말하였다.
주유가 제갈량에게 의견을 묻자
3. 방통의 ‘연환계’와 참모 감택의 ‘사항서’
제갈량과 주유의 화합과 우애를 그린 <적벽대전>은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적벽대전>에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중 제일은 역시 방통의 ‘연환계’다.
오나라의 참모 방통은 조조에게 접근해
“오나라 군사들이 수중전에 강하니 배를 쇠사슬로 묶어 육지처럼 만든 다음 전투를 하자”고 설득한다.
조조의 부하 정욱은 “화공에 속수무책”이라 말렸지만, 조조는 겨울철이라 남동풍이 불 수 없을 거라며
그의 말을 무시한다. 사상 최대의 수중전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
한편 황개의 '고육계'를 비롯한 주유의 다른 부하 감택의 '사항계' 도 흥미롭다.
감택은 조에게 일부러 붙잡혀가 “황개를 함부로 대한 주유에 실망했다”며 ‘사항서’란 글을 바친다.
의심하는 조조를 감택은 “주인을 배반하는 데 어찌 시간을 정한단 말인가”란 한마디 말로 굴복시켰다.
적벽대전의 승리는 어쩌면 총명했던 참모들보다
몸으로 고군분투했던 오나라의 장수들이 이끌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황개헌계파조조(黃蓋獻計破曹操) - 황개가 조조를 깨뜨릴 계책을 바치다 | |
술을 마시며 조조를 깰 계책을 물었다.
제갈량은 각자 손바닥에 자신의 계책을 쓰자고 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손바닥을 펼치니 똑같이 '火'자가 쓰여 있었다.
화공(火攻)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전황이 계속하여 불리하게 전개되자 조조의 참모 순유가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채모의 동생 채중과 채화를 동오에 거짓으로 항복시켜
적의 동향을 알아낸다는 것이었다. 채씨 형제는 동오 진영에 들어가
형 채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항복하러 왔다고 했다.
주유는 그들이 가족을 데리고 오지 않은 데서 거짓 항복인 줄 알았지만,
일단 믿는 척하고 상을 내린 후 감녕의 선봉대에 편입시켰다.
그날 밤 동오의 노장(老將) 황개(黃蓋)가 주유를 찾아와 조조를 속이기 위해서는 고육계(苦肉計)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고육계란 자신의 육체를 상하게 하여 적을 속이는 계책이다.
다음 날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주유는 지연전을 펼 터이니
3개월치 군량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이때 황개가 거짓으로 반대하면서 속전속결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화가 난 주유는 군심(軍心)을 흐트린다고 참수를 명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간절히 용서를 빌자,
주유는 곤장 백 대 때리는 것으로 참수를 대신하게 하였다.
황개는 곤장 50대에 살이 터지고 피가 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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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택밀헌사항서(闞澤密獻詐降書) - 감택이 거짓 항복서를 몰래 바치다 |
감택은 황개와 절친한 사이로 곧 조조를 속이기 위한 고육계임을 알게 되었다.
감택은 황개의 부탁으로 항복 서신을 가슴에 품고
어부 차림으로 조조 진영으로 숨어들었다.
감택의 항복에 조조는 동오의 계략으로 의심하고 죽이려 하였다.
이때 동오에 숨어들어간 채중과 채화로부터 내통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조조는 황개가 실제로 벌을 받은 사실을 알고는 감택을 믿게 되었다.
조조는 감택을 풀어 강동으로 돌려보내면서 내응(內應)하도록 하였다.
조조는 다시 한 번 장간(蔣幹)을 강 건너로 파견하여 진상을 파악하게 하였다. 장간이 다시 온다는 말에 주유는 크게 기뻐하였다.
주유는 저번에 편지를 훔쳐 자신과 내통하던 채모와 장윤을 죽이게 했다면서
장간을 서산에 연금(軟禁)하였다. 주유는 미리 방통(龐統, 봉추 선생)을 청하여
서산의 암자에 기거하도록 해 두었기 때문에, 장간은 자연 방통을 만나게 되었다.
적벽전이 결정적으로 승패가 갈린 것은 화공 때문이었다.
만약 화공이 아니었다면 조조군이 패하였다고 하더라도
큰 손실을 입진 않았을 터이고, 막강한 실력을 가진 조조는 재기하여
동오와 촉을 지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오가 화공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방통의 계책 때문이었다.
사항(詐降)은 거짓 항복이란 뜻으로 감택의 계책을 사항계(詐降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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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타(華陀)와 관우, 조조
1. 관우(關羽)와 화타(華陀)
... 생략 ...
바둑이 의학과 관계되는 내용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와 전설 속의 신의(神醫)로 소문난 화타(華陀 , 110?-208)이야기이다.
형주에 있던 관우는 219년 조조의 위나라 용맹한 장수인 방덕의 군대와 양양전투를 치루는 중
오른팔에 독화살을 맞아 상처가 심해지는 위중한 상황을 맞게 된다.
즉 상처에서 나는 열로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을 정도로 상처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관우가 위중한 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치료하고자 달려온 사람이 화타였다.
화타는 패국(沛國) 초군(안휘성 박현) 사람으로 자를 원화(元化)라 한다.
이 화타를 맞이한 관우의 양자 관평(關平)은 주태(周泰)를 치료했다는 명의를 직접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리고 화타가 왔으니 부친의 병도 나을 것으로 여겨 관우를 치료하게 했다.
화타는 관우의 상처를 살펴보고 독이 뼈까지 침투했으니오염된 살을 도려내고 독이 침투해 있는 뼈를 긁어내면 완치가 가능할 것이라 설명했다.
관우는 화타더러 곧바로 수술하도록 했다.
관우가 마취도 없이 바둑을 두면서 수술을 받았다고 하나 의학자들은 그런 경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자료 wineho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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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화타는 시술하는 동안 관우가 고통을 참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관우의 몸을 먼저 묶으려 하나 관우가 이를 제지하며 바둑판과 술을
대령하게 한다. 그리고 화타가 한 팔을 치료할 동안 다른 한 팔로
자신의 진영에 있던 마량(馬良)과 아픔을 억누르며 태연히 바둑을 둔다.
화타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상처를 째고,
독에 오염된 뼈를 긁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화타가 오염된 뼈를 모두 긁어낸 다음,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을 무렵,
관우가 두던 바둑도 거의 종국이 되었다고 한다.
관우가 완치되자 관우는 화타에게 큰 상을 내리려 했으나
화타는 거절하였다. 화타는 장군 같은 환자는 처음 보았으며,
명환자가 있기에 명의가 존재할 수 있었다며 유유히 길을 떠난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의 ‘과학향기’는
뼈를 깎는 시술에 마취제도 없이 버티기는 힘든 일로,
중국 특유의 과장이 심한 점을 감안한다면,
시술이 대단치 않은 정도였거나,
아니면 화타가 요즘의 마약류에 해당하는 약제를 분명 국부의 마취제로 썼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최승일은 관우와 같은 경우는 소설에만 나오는 특수한 예에 불과하고,
만약에 정말로 그렇게 수술했다면 관우는 분명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여하튼 관우의 수술이 사실이든 아니든 『삼국지』가 전하는 뜻은
바둑이 정신 집중하는데 매우 좋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생략 ...
- 2005-10-31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 정사(正史)《삼국지(三國志)》〈관우전(關羽傳)〉에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같은 기록이 있다.
「일찍이 관우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그의 왼쪽 팔을 관통 당한 일이 있었다.
뒷날 비록 낫기는 했지만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욱신거리고 아팠다.
의원이 이르기를 ‘화살촉에 독이 있어 그것이 뼛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것이니,
팔을 가르고 뼈를 깎아내면 이 고통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관우는 순순히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를 것을 명했다.
이때 관우는 여러 장수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서로 마주 대하고 있었는데,
피가 흘러내려 받쳐놓은 대야에 가득 넘쳤다.
그러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눌 뿐 태연했다」
물론 이것은《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는
상처 있는 팔의 위치, 바둑을 두고 있었는지에서 차이가 있다.
이 당시 화타는 ‘마비산(麻沸散)’이라는 마취약을 쓰고 있었다.
정사(正史)《삼국지(三國志)》〈화타전(華陀傳)〉에 의하면,
화타는 절개를 필요로 하는 수술일 경우
반드시 마취제를 써서 죽은 듯 만들어놓고 환부를 절개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관우를 수술한 의원이 화타였다면 분명 마취약을 쓰게 하기 위해 죽은 듯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삼국지(三國志)》〈관우전(關羽傳)〉의 일부 내용에도 나와 있듯이
관우는 태연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위의 사실로 미루어볼 때 관우를 수술한 의원은 화타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2. 조조와 화타
조조살신의화타(曹操殺神醫華陀) - 조조가 명의 화타를 살해하다 | |
그러나 매일 잠을 자려 하면 관우의 혼령이 나타났다.
측근이 낙양에는 요귀(妖鬼)가 많으니 궁전을 신축하는 게 좋다고 제안하였다.
조조는 소월(蘇越)이라는 목수를 시켜 설계도를 그리게 하였다.
소월은 대들보 감으로 낙양성 밖에 있는 수백 년 묵은 거대한 배나무를 가리켰다.
조조가 벌목을 명했으나 톱과 도끼로 찍을 수 없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조조는 믿을 수 없어 직접 달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에 신선이 사니 베어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조조가 칼을 빼 나무를 치자 쨍그렁 하는 쇳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그날 밤, 조조의 꿈에 배나무 신이 나타나 칼로 조조의 목을 쳤다.
조조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후 조조는 골이 아프기 시작하였다.
백약이 무효였고 명의들이 속수무책이었다.
화흠이 화타(華陀)를 추천하였다.
화타는 골에서 바람이 일기 때문이라며
두개골을 절개하여 뇌수(腦髓) 속의 풍질(風疾)을 뽑아내야 한다고 진단하였다.
의심이 많은 조조는 화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서 옥에 가두고 죽였다.
화타는 죽음에 임박해 평생에 걸쳐 만든 의술서 '청낭서(靑囊書)'를 옥졸에게 주었다.
그러나 옥졸의 처가 부주의로 불태우고 말았다.
옥졸이 꾸짖으니 그 처가 대꾸하였다.
"화타의 신묘한 의술을 배워봤자 옥에 갇혀 죽기밖에 더하겠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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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우, 화타에 대한 새로운 주장
◆◆ 관우는 호색한,화타는 소인배였다?
중국에 문화반란시대가 오는가?
아니면 조조의 명예를 회복하는 운동이 오는가?
학자들은 역사사실로 소설에서 신격화된 인물들의 진면목을 밝히고 있다.
요즘 중국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관우와 화타를 두고 논쟁이 자자하다.
이는 일부에서 관우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것처럼
의리가 있고, 천하무적이며 여색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예는 좋으나 출중하지는 못하고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이요,
화타는 의덕(醫德)이 높지 않고 사람 또한 소인(小人)이라
병 치료를 빌미삼아 조조를 협박하다가 결국 조조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한 것이 불씨로 되어서이다.
관운장은 호색한?
<삼국지연의>에 보면 관운장은 천하무적일 뿐만 아니라 여색에 눈길 한번 돌리지 않는 사나이다.
더군다나 중국 민간신앙에서는 관운장을 관제(關帝), 관로야(關老爺)라고 신으로 높이 받들고 있으며
사찰들이 있는 곳이면 거의 다 관우를 모신 관제묘(關帝廟)가 있다.
그러나 중국사회과학원 신문과전파소소장이며 연구원인 인윈궁(尹韻公)선생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
인 연구원에 따르면 “관운장은 무예가 일반 명장과 다름없고, 결코 천하무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 연구원은 고증을 거쳐 관운장은 천하무적이 아니라고 하면서
관운장과 비슷한 무예를 갖춘 사람은 관운장 시대에 수두룩하다고 했다.
인윈궁(尹韻公) 연구원은 관운장이 진짜 천하무적의 무예를 가지고 있다면
조조 수하의 명장 방덕의 화살에 이마를 맞지 않았을 것이며, 두 번이나 포로가 되고
나중에는 한낱 이름도 없는 동오(東吳, 즉 손권의 오나라)의 마충의 계책에 빠져
맥성으로 도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관운장은 삼국연의에서 작가에 의해 신격화가 되었다고 했다.
인 연구원은 또 삼국지의 촉서(蜀書)와 위서(魏書) 등을 연구하고 고증하면서
관우는 여색에 눈길 한 번 팔지 않는 사람도 아니라고 했다.
<삼국지>에 보면 조조와 유비가 대군을 거느리고 여포를 공격할 적에
관운장은 여포가 장수로 파견한 진의록에게 화용월태(花容月態, 아름답고 몸매가 빼어난 미인)의 아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조조를 보고 성을 파하게 되면 진의록의 아내를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관운장의 이유라면 자기의 아내가 아직 자식을 낳지 못했으니 진의록의 아내를 자기에게 주어
자식을 보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운장이 너무 조급해하는 것을 본 조조는
진의록의 아내가 아리따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성을 함락하자 진의록의 아내를 불러다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천하절색이라 결국은 자기가 차지했다.
이에 격분한 관운장은 사냥하는 기회에 조조를 죽이려고 했으나 유비가 말리는 바람에 죽이지 못했다.
그러면서 인 연구원은 관운장은 삼국연의에 나오는 관운장처럼 천하무적도 아니요,
여색에 눈 한번 팔지 않는 사나이도 아니라고 했다.
명의 화타는 소인(小人)?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다른 한 사람 역시
요즘 중국 네티즌들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 대상으로 되고 있다.
중국남경회계학원의 쉬사오진(徐少錦)교수와 하북성평천민족학원의 린전칭(林振淸)선생은
삼국지와 후한서 등 사서들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화타가 죽게 된 원인은 조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들의 고증에 따르면 화타는 원래 벼슬길에 오르려 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의술을 배웠는데 남보다 의술이 뛰어나게 되어
당시 천하대권을 잡았던 조조의 병을 치료하게 되었다.
이를 벼슬길을 여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화타는
병 치료를 기회로 조조가 자기에게 벼슬자리를 줄 것을 바라면서 병을 바로 치료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조조가 앓던 두통은 중의학에서 말하는 두풍(頭風)이라는 병인데 완치하기는 어렵지만
화타의 말처럼 치료해보았자 연명이나 하는 정도로 되는 그렇게 중한 병은 아니라는 것이다.
화타가 병세를 과대평가한 것은 어떤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조의 말에서도 입증이 되는데 조조는 화타가 자기의 병을 치료할 수 있으나
소인이라 병 치료를 기회로 뺀다고 했다.
<후한서>에는 화타의 사람 됨됨이를 평가할 때 성질이 더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두 교수는 화타는 사람 됨됨이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고상한 사람이 아니라 벼슬, 그것도 고관대작에 뜻을 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나라의 법으로 보았을 때
아내가 앓는다는 핑계로 조조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죽을 죄를 졌다고 했다.
한나라의 법에는 임금이 부를 때 오지 않는 것 역시 죽을죄인 것이다.
이 세 편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중국의 인터넷 게시판은 시끌벅적 끓고 있다.
옳거니 그러거니 왈가왈부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이 역시 중국 현재의 학술상황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바가 있는 바,
하나는 중국의 학술연구 환경이 전에 비해 많이 편해졌고
또 학자들의 오해된 중국 역사사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전통도덕과 문화 사유 방식에서 탈피하려는 노력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란보라(중국거주 조선족)
- 대자보(jabo.co.kr) 2004-11-19
- 국민일보, 쿠키뉴스 The Kukmin Daily Internet News
(4) 조조와 유비의 패주(敗走)
◆◆ "조조는 영웅, 유비는 배신자”
진수의 ‘정사 삼국지’ 완역한 김원중 교수
“<위지 동이전>만 보고 우리 고대사를 얘기할 수 없어요. <삼국지> 전체를 봐야 위지 동이전이 제대로 보입니다.” 공자님 말씀이지만 <삼국지> 완역자의 말이라 제대로 힘을 받는다.
네 권으로 나온 한글판 <정사 삼국지>(민음사)를 번역한 김원중(45) 건양대 교수(중국언어문화학과). 그는 중국의 24사를 번역해 우리식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패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국가사업으로 번역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학자 200여 명을 동원해 <24사 전역> 88권을 낸 것을 생각하면 우리쪽은 미흡하기 짝이 없는 셈이다.
“나관중의 <삼국연의>가 조조의 위가 아닌 유비와 제갈량의 촉을 정통으로 삼음으로써 역사흐름을 왜곡했다는 점에서 최근에 말썽이 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비틀리기 이전의 ‘원본 삼국지’를 갖게 된 셈이다. 중국의 한 평자는 <삼국연의>가 ‘칠실삼허’라지만 김 교수는 ‘삼실칠허’라고 말했다.
우리가 아는 명장면들,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 관우가 술이 식기 전 화웅의 목을 베는 장면, 천리를 단기로 달리며 다섯 관문의 다섯 장군을 베는 장면, 조자룡이 장판파에서 유비를 구하는 장면,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화살을 빌려오는 장면과 남만의 맹획을 칠종칠금하는 장면 등은 허구라는 것. 정통성을 촉에 두면서 빚어진 현상들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사실처럼 여긴다는 것.
서진(西晉)의 진수(233~297)가 마흔여덟에 완성한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기전체 역사서.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와 함께 3대 중국 고대사로 꼽는다.
김 교수가 저본을 삼은 것은 1959년 중화서국의 표점본. 마오쩌둥이 중국 통일 뒤 사학전공자를 소집해 작업한 것이다. 이번 한글본은 1994년 초역본을 낸 이래 10여년에 걸쳐 재번역한 것이다.
김 교수는 <사기열전>, <사기본기>, <정관정요> 등을 번역하면서 안목을 높인데다 새로운 학문성과를 반영해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번역하면서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수십번도 더 들었다는 그는 교정 보는데만 1년반이 걸렸다고 넌더리를 냈다. 들인 품에 비해 빛이 나지 않는 일이 번역일. “논문이 100이면 번역은 50밖에 연구실적으로 인정을 안해 줘요. 힘은 거의 네 배가 드는데 말입니다.” 관점이 통일돼야 하기에 공동작업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지론이어서 번역작업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배송지의 주석을 왜 번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걸 왜 해야 하느냐고 힐문했다. “그것이 소략한 원본을 풍부하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번잡하고 초점이 없어요. 게다가 엄밀성이 떨어지고 흥밋거리를 많이 삽입해 원전의 의미를 흐렸다고 봅니다.”
한글판은 배송지가 아닌 김원중의 연구결과와 관점이 들어간 것이라는 그의 말에는 자부심이 배었다. “우리도 번역에서 정본을 인정해야 합니다. 서양에서는 1800년대에 이뤄진 제임스 레게의 유교경전 번역본을 정본으로 널리 인용하고 있어요.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어느 것을 정본으로 삼아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는 거죠. 논어만 해도 서로 인정하지 않아 번역본이 50여 종이나 돼요. 그러니 엉뚱하게 양백준이나 리저허우 같은 이의 것이 판을 치는 거죠.” 다른 사서를 일일이 찾아서 만든 ‘삼국지 관직사전’은 독자들한테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인덱스를 못 넣은 게 못내 찜찜하다면서 다음판에라도 넣고 싶다고 말했다.
“조조? 참 대단한 인물입니다. 전략이면 전략, 행정이면 행정, 냉철한 현실감각에다 시인이기도 하지요. 유비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고 배신자에다 부화뇌동자에 불과하죠. 그런데 영웅이라니요.” - 2007-03-16 한겨례신문,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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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운장의석조조(關雲長義釋曹操) - 관우가 의리로 조조를 풀어주다 | ||
병사가 보고하기를 큰 길은 평탄하지만 멀고,
작은 길은 화용(華容)으로 통하는데 가깝지만 험하다고 하였다.
또 작은 길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조는 작은 길을 선택하였다.
수하들이 복병을 걱정하자 조조는
"허(虛)하게 보이면 곧 실(實)이요, 실(實)하게 보이면 곧 허(虛)하다"고 말하며
제갈량의 수작에 속지 말라고 하였다.
길은 좁고 진창이어 노약자와 부상자들이 처지자 조조는 낙오하는 자는 죽이라 했다.
조조는 몇 리 가지 않아 채찍을 들고 또 크게 웃었다.
"만약 저들이 여기에 매복했더라면 우리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관우가 길을 막고 나타났다.
조조는 정욱의 제안에 따라 옛정을 생각해서 봐달라고 사정하였다.(그림)
조조가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생각하고,
또 조조군이 모두 갑옷도 못 입은 채 피로에 지쳐 있는 걸 보고,
관우는 차마 공격하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조조가 지나가도록 하였다.
조조는 수하들을 이끌고 낭패한 모습으로 지나갔다.
곧이어 장료가 나타나자 관우는 우정을 생각하여 장료마저 놓아주었다.
의리를 중시한 관우가 조조를 석방한 이 행위를 보통 '의석(義釋)'이라고 한다.
'의리로 풀어주다'는 뜻이다.
제갈량은 빈손으로 돌아온 관우를 군법에 따라 참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유비가 사정하여 겨우 용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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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형주찬세유종(獻荊州粲說劉琮) - 형주를 바치라고 왕찬이 유종을 설득하다 | ||
조조는 하후돈을 문책하지 않으며 말했다.
"내가 줄곧 염려했던 것은 유비와 손권이야. 나머지 무리는 문제될 게 없지.
지금 이 기회에 강남을 쓸어버려야겠어."
그리하여 50만 군대를 일으켜 5방면으로 강남을 공격하였다.
이때 공융(孔融)이 조조의 출병을 적극 반대하였다. 공융은 유비와 인연이 있는 인물로 그동안 조조의 행태를 자주 비난하였다.
공융은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가 지극히 어진 자를 치니 어찌 패하지 않으리오?" (以至不仁伐至仁, 安得不敗乎!)라 말했다.
조조가 이를 전해 듣고 공융을 죽였다.
공융이 잡혔을 때 집안에선 두 아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람들이 피하라고 하니 태연히 말하였다.
"새 둥지가 부서지는데 새알이 어찌 성하리오?"(破巢之下, 安有完卵乎?)
병이 위독해진 유표는 후계자를 유기로 정하고, 유비에게 형주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유표는 얼마 있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채모와 채부인은 유표의 유서를 조작해 유종(14세)을 주군으로 내세웠다.
조조군이 양양에 이르자 채모 등 중신들이 항복하자고 하였다.
또 난리를 피해 형주에 와서 유표의 우대를 받은 왕찬(王粲)도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유종은 형주 관할 9개 군을 조조에게 바치기로 하였다.
그림은 왕찬이 유종을 설득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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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출 기산(出 祁山) - 제갈량, 기산에 나가다
사마의지취가정(司馬懿智取街亭) |
제갈량은 그가 가정(街亭, 간쑤성 톈수이시 동남)으로 나오리라 예상하고
장수를 보내려 하였다. 이때 참군(參軍)인 마속(馬謖)이 자원하였다.
제갈량이 거듭 신중한 태도를 보이자 마속은 전 가족의 목숨을 걸고 맹서하였다.
제갈량은 군령장(軍令狀)을 쓰게 한 후, 2만5000의 군사를 내주고,
신중한 왕평(王平)을 부장으로 함께 보냈다.
마속은 가정에 도착하여 산 위에 진지를 세우려 하였다. 왕평은 제갈량의 말을 상기시키며
다섯 갈래 길이 모이는 길목에 진지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마속이 병법(兵法)을 인용하며 주장하자 왕평이 물었다.
"만약 적이 급수로를 끊으면 어찌 하겠소?"
마속은 손무(孫武)가 말한 "치지사지이후생(置之死地而後生)",
즉 "죽을 곳에 있어야 비로소 살 수 있다"고 하였다.
위군이 급수로를 끊으면 촉군은 죽기 살기로 싸울 것이란 논리였다.
왕평은 어쩔 수 없이 군사 5000을 이끌고 따로 산 아래에 진지를 세웠다.
사마의는 마속이 산 위에 진지를 세운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였다.
장합을 보내 왕평을 막게 하고, 산을 포위하고 급수로를 끊었다.
마속은 진격 명령을 내렸으나 군사들은 겁에 질려 싸우려 하지 않았다.
마속의 군사는 물이 없자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 틈을 타서 사마의가 불을 지르니 촉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리하여 가정은 사마의의 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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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지퇴사마의(孔明智退司馬懿) - 제갈량이 계책으로 사마의를 물리치다 |
철수를 준비하였다.
자신은 군사 5천을 이끌고 보급 기지인 서성(西城 · 간쑤성 톈수이시와 리현 중간)에 가서 군량을 옮겼다.
제갈량이 막 서성에 도착하니 사마의가 15만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온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대경실색하였다. 주위에는 장수 하나 없고,
병사도 5천 가운데 반은 군량을 운반하러 나가 있어 2천5백 밖에 안 되었다.
제갈량은 한참 생각하더니 계책을 떠올렸다. 성위의 깃발을 모두 거두고 성문을 크게 열어둔 채,
병사들을 백성으로 분장하여 길거리를 청소하게 하였다.
또 경거망동하거나 떠드는 자는 참수한다고 영을 내렸다.
사마의가 성 아래 이르니 제갈량이 홀로 성문 위의 성루(城樓)에 앉아 향을 피우고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좌우에는 동자(童子)가 각각 보검과 먼지떨이(拂子)를 들고 시립해 있었다.
사마의는 의심스러워 잠시 멈추어 생각하였다. 제갈량은 평소 신중한 사람으로 위험한 계책을 쓴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마의는 혹여 매복이 있을까 염려하여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이것이 유명한 '공성계(空城計)', 즉 '빈 성의 계책'이다.
후에 사실을 안 사마의는 저도 모르게 탄식하였다. "내가 제갈량을 당할 수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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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휘루참마속(孔明揮淚斬馬謖) - 제갈량이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베다 |
한중(漢中)으로 돌아가야 했다. 1차 북벌이 실패로 끝나고 공성계로
겨우 후퇴작전을 완료한 제갈량은 전공에 따라 상벌을 내려야 했다.
먼저 왕평(王平)을 불러 마속이 독단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여 패배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마속은 자신의 죄가 큼을 알고 스스로 결박하고 벌을 청하였다.
제갈량은 마속을 자식 같이 아꼈지만 군법에 따라 사형을 명하였다.
이때 참군(參軍) 장완(蔣琬)이 천하가 평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뛰어난 신하를 죽이는 것은 적에게 이롭다며 만류하였다.
제갈량이 말하였다. "예전에 손무(孫武)가 천하를 이겼던 것은 법을 밝게 썼기 때문이오.
만약 법을 폐기한다면 어떻게 역도(逆徒)를 토벌할 수 있겠소?"
제갈량이 말한 손무는 춘추시대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사(軍師)로,
처음 임명되었을 때 오왕이 편성한 미녀 부대가 명령을 듣지 않자
오왕이 아끼는 미녀 부대장을 참수하여 군령(軍令)을 세웠다.
제갈량은 유비가 죽기 전에 마속을 중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상기하며,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마속이 죽었다며 통곡하였다.
이른바 '읍참마속(泣斬馬謖)'이었다.
제갈량은 표를 올려 자신의 벼슬을 3등급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유선은 제갈량을 우장군(右將軍)으로 강등시키고
승상과 군사의 업무는 종전대로 하게 하였다. |
제갈량이출기산(諸葛亮二出祁山) |
위 황제 조예는 조진(曹眞)에게 적을 막으라 명하였다.
조진은 농서(농西) 사람 왕쌍(王雙)을 추천하였다. 왕쌍은 키가 9척에,
웅요호배(熊腰虎背) 즉 곰의 허리에 호랑이 등을 갖춘 장사였다.
조예는 크게 기뻐하며 조진의 선봉으로 임명하였다.
학소가 지키는 진창(陳倉)은 수비가 지극히 엄하였다. 제갈량이 운제(雲梯)와 불화살로 20여 일을 공격하여도 소용없었다.
이때 왕쌍이 나타나 유성퇴(流星槌)를 휘두르니 촉의 장수가 죽고 촉병이 패퇴하였다.
진창으로 나가는 길이 막히니 촉군은 계곡에 갇히는 형국이 되었다.
이에 강유(姜維)가 거짓 항복의 계책을 내었다. 조진에게 밀서(密書)를 보내 자신이 촉에 항복한 죄를 갚겠다며,
촉군의 뒤에서 불길을 올려 공격 신호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조진은 강유의 밀서를 믿고 비요(費耀)에게 군사 5만을 주어 사곡(斜谷)으로 나가게 하였다. 촉군이 세 차례나 나타났다가 계곡으로 숨기를 계속하는 바람에
피로에 지친 비요의 군사는 날이 저물어서야 겨우 솥을 걸고 밥을 하였다.
이때 제갈량이 수레를 타고 나타났다.
위군이 후퇴하는 중에 촉군 쪽에서 강유가 약속했던 불길이 치솟았다.
비요가 군사를 독려하여 공격하였으나 복병에 걸려 대패하였고, 자신은 자결하였다.
이로써 제갈량은 두 번째로 기산(祁山)을 나가게 되었다. |
공명유계참왕쌍(孔明遺計斬王雙) - 제갈량이 계책을 주어 왕쌍 목을 베다 | ||||||||||||||||||||
사마의는 촉군이 군량을 운반하려면 진창을 나와야 하니 위군이 단단히 지키기만 하면 촉은 저절로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
조예가 사마의를 보내려 하였으나 사마의는 동오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며
사양하였다. 위 황제 조예는 조진에게 굳게 수비할 것을 명하였다.
조진의 부장 손례(孫禮)가 군량 수레에 짚과 유황을 싣고 운반하는 척하여
촉군을 유인하겠다고 하였다.
제갈량이 군량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위군이 1000여 대의 군량 수레를 서산(西山)으로 운반한다는 정보가 들려왔다. 제갈량이 계책임을 알고 마대에게 군량에 불지르게 하고,
마충과 장의에게는 복병에 응대하게 하고, 오반과 오의에게는 위군을 공격하게 하고,
관흥과 장포에게는 진영을 부수게 하였다.
이날 밤, 마대가 군량 수레에 불을 지르자 손례는 촉군이 계략에 걸려든 줄 알고 즉각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마충 등이 막아서며 공격하였다.
곧 이어 오반과 오의가 퇴각로를 끊고 관흥과 장포가 위군의 진영을 점거하였다.
위연이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한중으로 돌아가니 왕쌍이 이를 듣고 급히 추격하였다.
막 따라잡으려 할 때 왕쌍의 성(城)에서 불이 일어났다.
왕쌍이 되돌아가려는 찰나 위연이 달려와 한 칼에 왕쌍의 목을 쳤다.
패배한 조진은 장안으로 돌아갔고, 곧 병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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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중왕(漢中王) 유비와 관우, 장비의 죽음
유비진위한중왕(劉備進位漢中王) |
제갈량 등 군신들이 한중왕(漢中王)이 되기를 청하였다.
유비는 여러 번 사양하다가 결국 응낙하여 스스로 한중왕에 올랐다.
제갈량을 군사(軍師)로 임명하여 국사를 총괄하게 하고,
관우 장비 조자룡 마초 황충을 오호대장(五虎大將)에 임명하였다.
유비는 왕이 되었다는 내용의 표(表)를 써서 황제의 인가를 받기 위해 허도로 보냈다. 이를 본 조조가 크게 노하여 다시 서천을 정벌하려 하였다.
사마의(司馬懿)가 계책을 내어 동오(東吳)더러 형주를 공격하게 하여
유비가 구하러 오면 그때 한중을 공격해 취해도 늦지 않다고 하였다.
조조는 이에 따르기로 하였다.
손권은 조조의 편지를 받고 중신들과 의논한 끝에 조조와 연합하여 유비를 공격하는 '연조공류(聯曹攻劉)' 정책을 쓰기로 하고,
관우가 조조군과 싸울 때 형주를 탈취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이 유비에게 전해지자 제갈량은 비시(費詩)를 관우에게 파견하여
먼저 번성(樊城)을 빼앗아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면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다.
관우는 군사를 일으켜 번성을 공격하면서 부사인(傅士仁)과 미방(美芳)을 선봉에
세웠다. 그러나 부사인과 미방이 술을 마시다 불이 나 군량과 병기가 불탔다.
관우가 두 사람을 참수하려 하자 비시가 말렸다.
각각 곤장 40대로 벌하고 미방은 남군을, 부사인은 공안을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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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운장야주맥성(關雲長夜走麥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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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병사들은 여몽이 형주에 있는 가족들을 우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투지를 잃고 동오에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관우를 따르는 군사는 겨우 300여 명에 불과했다.
관우는 작은 맥성(麥城, 후베이성 당양시 동남)으로 가 주둔하며 요화를 상용(上庸)에 파견하여 유봉(劉封)과 맹달(孟達)에게 구원병을 청했다.
유봉은 유비의 양자였기에 숙부에 해당하는 관우를 구원하러 가려 했다.
그러나 맹달은 관우가 예전에 유봉을 박대했던 점을 들고,
적은 병력으로 이기기 어렵다고 말하였다.
이에 유봉은 구원병을 보내면 상용마저 지킬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구원병을 얻지 못한 요화는 울면서 성도로 달려갔다.
맥성은 동오군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동오의 제갈근(諸葛瑾)이 관우를 찾아가 "때를 아는 자를 준걸이라 한다"(識時務者爲俊傑)는 옛말을 들며
관우에게 항복을 권하였다.
그러나 관우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성이 함락되어 죽으면 그만이다. 옥은 부서져도 그 빛이 바뀌지 않으며
(玉可碎而不可改其白),
대나무는 불타도 그 마디는 훼손되지 않는다(竹可焚而不可毁其節).
몸은 비록 죽어도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
제갈근은 손권에게 돌아가 "관우의 마음은 철석(鐵石)과 같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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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왕통곡관공(漢中王痛哭關公) | ||||||||||||
여몽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손권이 친히 술잔을 들어 여몽에게 권하자,
여몽은 술을 마시려다 말고 갑자기 손권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부었다.
"푸른 눈에 붉은 수염을 한 쥐새끼야! 네가 나를 알아보겠느냐?"
손권이 놀라 대신들과 함께 절하자 여몽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관우의 혼령이었다.
여몽은 눈과 귀, 코와 입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손권은 유비가 복수를 할까 두려워 그 허물을 조조에게 떠넘기려고 관우의 목을 상자에 담아 조조가 있는 낙양으로 보냈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관우의 수급(首級)이 담긴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모습이 생시와 같기에 조조가 비웃으며 물었다.
"관운장(關雲長), 그동안 별고 없었오?"
그러자 관우의 눈이 번쩍 뜨이고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조조가 놀라 기절하였다.
한편, 관우의 소식을 모르고 있던 유비는 성도에서 한밤에 책상에서 졸고 있는데 웬 사람이 등잔불 아래 서 있었다. 유비가 자세히 보니 관우였다.
유비가 반기자 관우는 "부디 군사를 일으켜 아우의 한을 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제갈량 역시 천문을 보고 관우의 죽음을 예측하고 있었다.
이때 요화가 달려와 유봉과 맹달이 구원병을 보내지 아니했음을 보고했다.
곧 이어 형주에서 관우가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소식을 들은 유비는 기절하였다.
◆◆ 백제성에서의 유비의 유언
신뢰하는 일, 신뢰받는 일로써 사람은 크게 된다.
일체를 맡길 수 있는 심복이 있는가
이릉에서의 전투에서 패한 후, 유비는 장강 상류에 있는 백제성으로 피신하여 재기를 도모하였다.
승승장구로 추격해온 육손은 백제성 못 미쳐 백 리쯤 떨어진 곳에서 군대를 정확하게 정지시켰다. 오나라 국내는 전승 기분으로 들떠 있었다. 막료의 여러 장수들은 한결같이 손권에게 상신하였다.
"전선사령관인 육손 장군은 어째서 진격을 멈추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단숨에 유비의 맥을 끊어 놓아야 합니다." 손권은 급히 사람을 보내어 육손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육손은 이렇게 회답하였다. "백제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간단하오나, 이 이상 진격을 하면 이번에는 아군과 적군과의 전략적인 입장이 반대 상황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적군의 영토이며, 보급에도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또 이 이상 전진하면, 적의 참모인 제갈량이 나설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전략의 귀재이기 때문에 무서운 상대입니다. 한편 북방에 있는 위나라의 움직임에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사람은 진격을 멈추고 있는 것입니다. 제반 정세로 보아, 지금은 오히려 철퇴하여 후방의 방어를 굳게 해야 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손권은 육손의 진언을 받아들여, 전군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육손이 깊이 추격하지 못한 것은, 공명이 고안한 '팔진지도(八陳之圖)'를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이 '팔진지도'는 병법 칠서인 '이위공 문대'에도 나와 있는 비법의 전술로서, 여덟 가지의 진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갈량은 이 비술로써 오나라의 육손과 위나라의 사마중달을 격파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오나라 군대가 백제성의 바로 앞에서 진격을 중지한 것은, 지휘관인 육손의 전략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을 게다.
촉나라 장부 3년(223) 봄, 백제성에서 중태에 빠진 유비는 성도로부터 정승인 제갈공명을 불러들여, "당신은 위나라의 조비나 오나라의 손권보다 현격하게 뛰어난 인물이시오. 우리 촉나라를 안정시켜서 천하 통일의 대업을 성취할 힘을 가진 사람은 당신밖에 없소. 공명이여, 내가 죽은 후에 황태자인 유선(당시 16세)이 보좌할 만한 인물이거든 육성시켜 주시오. 만약 그럴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되거든 서슴없이 당신이 대신 제위에 오르도록 하시오."하고 뒷일을 당부하였다.
너무나 감격한 공명은 목이 메어 울면서, "폐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불초 제갈량은 어디까지나 수족같은 신하로서 충절을 다하여, 죽는 일이 있더라도 보필하겠습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죽기 전에 뒷일을 당부하고 있다. 이때, 히데요시는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모리 데루토모, 우에스기 카게가쯔, 우키다 히데이에 등 오대 노신을 머리맡으로 불러, "히데요리(秀賴)를 잘 부탁하네."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원하였다.
유비와의 태도와는 전혀 다르지만, 섭정까지 했던 독재자가 수치도 체면도 없이 오로지 부하에게 간원하는 것은, 인간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며, 부모 된 사람으로서는 자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역사가 중에는 이때의 유비의 말이 너무나 훌륭하므로, 이것은 책사가 곧잘 쓰는 잔꾀이며, 이렇게 해둠으로써 공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라 하겠다. 자식들에게 남긴 유서를 보더라도, 유비는 진심으로 공명을 신뢰하였으며,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전면적으로 신뢰받은 사람일수록 강한 우군이 된다
유비는 또 성도의 자식들에게 이런 유서를 보냈다.
- 아버지의 병은 처음에는 가벼운 것이었으나, 그 후 여러 가지 합병증이 발생하여 이제는 회복될 가망성이 없어졌다. 인생 50세까지 살았으면 단명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물며 아버지는 60여세, 만족한 생애였으며 원망할 일도 후회할 일도 없다. 단지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너희 형제들의 문제뿐이로구나... 악한 일은 작은 것이라 해도 행해서는 안 되며, 선한 일은 작은 것이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인생에 있어서는 '현명함과 덕망'이라는 두 가지 품격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다. 아버지는 덕망이 모자랐다. 이 아버지를 배워서는 안 된다. 고전을 많이 읽고 틈이 있으면 공부에 정진하여, 끊임없이 향상되도록 하라. -
마지막 임종시에 유비는 머리맡에 차남인 노왕(魯王)을 불러놓고, "아버지가 죽거든 너희 형제들은 정승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섬기도록 하여라. 무슨 일이든 정승의 말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라고 유언하였다. 공명에 대한 유비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리더십의 중요한 점은, 믿을만한 부하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일이다. 신뢰가 없으면 우정도, 애정도, 충성도 성립되지 않는다. '무사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만 죽는다.'라는 말도 있듯이, 인간은 전면적으로 신뢰받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면, 그 사람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법이다.
유비의 사후 십수년, 공명은 2대째의 유선이 어리석은 군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러 번에 걸쳐 원정을 시도하며, 촉나라와 유선을 끝까지 지키는 데 일신을 다 바쳤다. 이것은 오로지 유비의 신뢰와 베풀어 준 후대에 보답하기 위한 충절심이었다.
'믿을만한 신하를 전면적으로 신뢰하고 일체를 맡긴다.' 여기에 '어진 군주'로서 칭송되는 유비의 진면목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삼국지를 읽으면 사람이 보인다> 松本一男 지음, 이주영 옮김, 이목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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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칠종칠금(七縱七擒)
- 제갈량이 맹획(孟獲)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풀어주다
공명흥병정맹획(孔明興兵征孟獲)
제갈량일금맹획(諸葛亮一擒孟獲)
- 제갈량이 군사를 일으켜 맹획을 공격하다
제갈량은 이간계(離間計)를 써서 옹개가 투항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 제갈량이 첫 번째 맹획을 생포하다
만왕 맹획은 촌장(村長) 금환삼결, 동도나, 아회남을 불러 각기 5만 병사를 이끌고
제갈량은 왕평과 관색을 보내 맹획을 협곡으로 유인하게 하였다.
제갈량이금맹획(諸葛亮二擒孟獲)
- 제갈량이 두 번째 맹획을 생포하다
제갈량은 마대(馬岱)에게 군사 3천을 이끌고 노수의 하류로 수심이 얕은 사구(沙口)로 가 강을 건너 군량 창고를 습격하게 하였다.
맹획은 동도나와 아회남에게 마대 공격을 명하였다.
제갈량삼금맹획(諸葛亮三擒孟獲) - 제갈량이 맹획을 세 번째 생포하다 제갈량사금맹획(諸葛亮四擒孟獲)
제갈량오금맹획(諸葛亮五擒孟獲)
제갈량육금맹획(諸葛亮六擒孟獲)
제갈량칠금맹획(諸葛亮七擒孟獲)
이날 밤, 맹획이 3만 군사를 이끌고 제갈량의 진지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촉군은
맹획이 노수에 이르니 마침 만병(蠻兵) 수십 명이 배를 거느리고 있었다.
맹우도 조자룡에게 사로잡혀 제갈량에게 끌려갔다.
- 제갈량이 맹획을 네 번째 생포하다
제갈량은 남안의 세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면서
맹획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중 조자룡이 퇴로를 끊자 서이하 쪽으로 도망쳤다.
- 제갈량이 맹획을 다섯번째 생포하다
무더운 날씨에 샘이 나타나자 촉군이 다투어 물을 마셨다.
촉군이 해를 입지 않고 독룡동에 들어가자 타사대왕은 신병(神兵)이라 여기며 두려워하였다. 맹획이 대왕을 부추겨 제갈량을 공격하려 할 때
- 제갈량이 맹획을 여섯번째 생포하다
이때 목록대왕이 코끼리를 타고 그의 무사들이 호랑이 표범 늑대 등을 끌고 나타났다. 목록대왕이 주문을 외우며 손에 든 종을 울리니 광풍이 불었고
모형 짐승은 병사 열 명이 탈 수 있는 크기로 모두 백 마리였다.
대래동 동주가 거짓으로 맹획을 포박하여 제갈량에게 바쳤다.
-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 번째 생포하다
제갈량은 오과국으로 내려가 도화수(桃花水) 강을 건넜다.
맹획이 올돌골을 지원하러 가려 했지만, 만병으로 위장한 촉군에게 추격을 당했고
- 이상, ⓒ 국제신문(www.kookje.co.kr),
"서성 교수(열린사이버대 실용외국어학과)의 삼국지 한자읽기"에서 발췌 정리,
- Il Cielo In Una Stanza / Mina (영화 푸른 파도여 영원히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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