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장욱진 - 길 위의 자화상

Gijuzzang Dream 2007. 11. 22. 11:31

 

 

 

 

 

 장욱진 -  '자화상'의 제비떼

힘든 현실에서의 탈출 욕망을 담은 제비가 곧 자화상
단순 · 천진하게 보이는 그림 속 치밀한 조형미 숨어있어



 

 
 

제비 네 마리를 배치해 기막힌

조형미를 보이고 있는

장욱진의 '자화상'

종이에 유채, 14.8×10.8㎝, 1951

자화상은 물감으로 쓴 자서전이다.

얼굴이 중심 소재인 자화상에는 화가의 성격과 개성, 당시의 감정 상태 등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다.

우리에게 친근한 일상을 소재로 자연과 인간이 합일된 이상향을 추구했던 장욱진(1917~1990).

 

그의 '자화상'(1951)은 일반적인 자화상 스타일이 아니다. 특이하게도 풍경 속에 자신을 그렸다.

 

6·25 전쟁과 턱시도의 사내

시골의 누런 나락밭(보리밭이 아니다!) 사이로 턱시도 차림의 사내가 가고 있다. 유머러스한 폼이 찰리 채플린 같다.

하늘에는 구름이 한가롭고, 제비 떼가 줄지어 날고 있다.

벌건 황톳길로 강아지 한 마리가 사내를 뒤따른다. 평화롭다.

 

이 콧수염의 사내가 바로 장욱진이다.

그런데 '자화상'이 그려진 시기가 놀랍다. 1951년, 6·25전쟁 때였다.

그가 고향으로 피난 가서 그린 그림이다.

그럼에도 전쟁의 흔적이 전혀 없다.

탈속적인 삶의 태도가 뚜렷한 전원목가풍이다.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소재 중의 하나가 제비 떼다.

화면 위쪽으로 네 마리의 제비가 날고 있다. 크기도 엄청나다.

인물과 강아지와 비교해보면 아주 크다.

마치 창공에서 제비를 클로즈업하는 식으로

지상의 자화상과 강아지를 포착한 것 같다. 문득 두 가지 의문이 생겼다.

먼저 왜 많은 새 중에서 하필이면 제비를 출연시켰을까?

 

제비가 왜 하필 네 마리일까

에돌아가보면, 장욱진의 예술세계를 구성하는 주요 소재는

아이(사람)와 나무와 집 그리고 새다. 그 중에서 나무와 아이와 집은 지상의 존재다.

나무는 천상을 향해서 자라지만 뿌리 박은 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하지만 새는 천상의 존재다. 힘찬 날갯짓으로 지상과 천상을 자유롭게 왕래한다.

사람들은 현실이 힘들수록 비상(탈출)을 꿈꾼다. 새는 비상의 욕구를 대신한다.  

새의 크기는 인간이 가진 꿈과 열망의 크기에 비례한다.

 

'자화상'의 새는, 아니 제비는 '흥부의 제비'처럼 희소식을 상징한다.

희망의 박씨를 물고 오는 존재 말이다.

그렇다면 제비는 은유적으로 드러낸 화가의 꿈이 아닐까?

그래서 유독 크게 그린 것이 아닐까?

 

다음은 왜 제비가 네 마리일까?

"그건 지극히 조형적인 이유 때문이다.

적은 숫자 중에서 가장 조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수가 넷이다.

넷은 일정간격(●●●●)으로 나란히 놓을 수 있고,

아니면 하나와 셋● ●●●), 셋과 하나(●●● ●), 둘둘(●● ●●)로

배열할 수 있다."(장욱진)

 

이런 생각은 새가 등장하는 그의 그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 그림이 아주 이성적이다.

 

제비를 위한 구도가 아닐까

장욱진 그림의 매력으로 흔히 단순과 천진난만을 꼽는다.

그런데 그것은 이성적으로 조율된 단순과 천진난만이다. 흥미롭다.

상반된 요소가 한 화폭에 보금자리를 꾸민 것이다.

 

단순과 천진난만은 보통 무계획적인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다.

하지만 그는 그림의 조형미를 치밀하게 설계했다.

이런 작품들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단순과 천진난만을 밑받침하는 이지적인 조형성까지 따져봐야 한다.

'자화상'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것은 제비 떼다.

화면을 상하로 2등분했을 경우, 작품의 중심인 인물은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화면의 무게중심이 아래쪽으로 쏠린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그것은 굳이 넣지 않아도 될 제비 떼를 일부러 넣기 위한 전략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화면의 아래 가장자리로 바짝 붙여서 인물을 그려 넣은 게 아닐까?

 

반대로 비어 있는 위쪽에 제비 떼를 배치해보면,

순간 아래쪽으로 쏠렸던 시선이 균형을 잡는다. 제비는 가시화된 화가의 마음 같다.

그 마음을 은근슬쩍 보여주려고 인물을 아래쪽에 배치한 것 같다.

마치 음식의 간을 맞추듯이 제비로 구도의 간을 맞춘다.

불안했던 그림이 비로소 평화로워진다.

 

그림에 간을 맞추는 조연

장욱진은 어른이면서도 순진한 아이의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형태를 단순화했다. 크기도 작았다.

그림이 커지면 "싱거워지고 밀도가 떨어진다"(장욱진)는 생각 때문이다.

 

작지만 맵다. 양보다 질이었다.

네 마리의 제비는 '자화상'의 또다른 중심이다.

그림의 조형미를 탄탄하게 조율해주고, 희망의 전령사로 호출된 특별한 조연이다.

제비가 동행하는 대낮의 한가로운 외출. 장욱진답다.

- 정민영 (주)아트북스 대표이사

 2008.03.19 ⓒ 국제신문(www.kookje.co.kr

  
 

 

 

 

 

 

장욱진

<길 위의 자화상>은

장욱진이 한국전쟁 중 잠시 고향 충남연기에서 피난하던 1951년에 제작한 초기작품이다.

피폐하고 궁핍했던 전쟁시기에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평화롭고 풍요롭기까지 한 이 작품은 파격적인 구도와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

동양철학이 깃든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장욱진의 예술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품 속 세상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무욕의 삶이자 안빈낙도의 삶

 

1918년 충남 연기 태생인 장욱진은

고희동, 이종우, 임용련 등 서양화 1세대 이후에 서양화 2세대에 속한다.

그는 일본인 교사의 부당함에 항의하다가 고등학교를 퇴학 당하고 집에서 쉴 무렵

서양화가 1세대 작가 이종우 등과 친분을 맺었으며,

양정고보를 나와 1939년 도쿄로 유학해 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활동하였고,

해방 후에는 고국에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대 교수로 잠시 재직하였으나

사직하고 전업화가로서 작품에만 몰두하다 생을 마감하였다.

 

화가 장욱진은 1남 4녀를 둔 가장이었지만

자녀의 양육과 살림을 떠맡은 아내의 내조와 사랑으로 삶 자체를 예술처럼 살다 갔기에,

그의 삶은 그림과 술에 얽힌 이야기의 연속이다.

 

오직 예술가의 삶을 고집했던 그는 도시를 떠나

덕소, 수안보, 신갈 등 자연이 살아있는 시골마을을 찾아 손수 밥을 짓고 작품에만 몰두하였고,

그림을 그리지 않는 시간에는 술로 휴식을 취하며 생활하였다.

큰 그림 보다는 작은 그림을 선호했던 장욱진은

큰 공간보다는 알맞은 작은 공간에 머물기를 고집하며

세속적인 삶을 등지고 예술가로서 삶만을 살다갔다.

 그에게는 그림과 술, 가족이 전부였으며

작품의 소재 역시 주변의 산과 들, 까치와 나무, 마을과 집 그리고 사람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무욕의 삶, 안빈낙도의 삶이 그려진다.

 

작품 속에 연미복 차림에 우산을 들고 황금들판 사이를 걸어가는 신사는

키가 크고 깡마른 콧수염의 화가 자신을 그린 자화상으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있지만 자신을 관조하는 작가의 태도를 보여준다.

제작 당시의 전쟁의 참화 속에 각박한 현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도리어 절박한 생활상 보다는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벼를 통해 시골의 이상적인 풍경을 목가적으로 담아냈는데,

이러한 이상화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예술가의 삶을 포기 하지 않는 치열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

 

장욱진은 이 작품에 대해 

"간간이 쉴 때는 논길, 밭길을 홀로 거닐고 장터에도 가보고 술집에도 둘러본다.

이 그림은 대 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모습이다.

하늘엔 오색구름이 찬연하고 좌우로는 풍성한 황금의 물결이 일고 있다.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고 당시의 심경을 말한 바 있다.

바로 대자연 속에 오직 예술 혼을 불사르다간 그의 삶을 예견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화면의 구성요소는 간결한 구도와

노랑, 빨강, 파랑, 황토, 검정 등의 간결한 색채 구사 등 매우 단순하지만,

각 구성요소들이 배치된 모습과 각 부분의 색채사용에서 작가의 뛰어난 조형 감각을 볼 수 있다.

 

서양화법을 기초부터 충실히 배웠던 장욱진은

향토적 소재를 선택하면서도 명암을 절제하고 배경을 평면화하여

다시점을 표현하는 입체주의적 시각을 소화하였다.

함께 활동하던 김환기, 유영국이 순수 추상으로 나아갔던 반면

형상을 포기하지 않고 도리어 서양화를 공부하면서 익힌 압축, 생략표현법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장욱진 작품세계의 요체인 단순성 속에 깃든 해학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장욱진 張旭鎭  (1917. 11. 26~1990. 12. 27)

충청남도 연기 출신으로 도쿄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김환기, 유영국 등과 더불어 미술 유학 2세대에 속하며

이들과 함께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했다.

1945~1947년에는 국립박물관에 재직했고

1954~1960년에는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했지만 사직하고

오로지 작품 창작활동에만 전념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친근한 소재를  화폭에 담았으며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구성, 원색에 가까운 조화로운 색채로

장욱진만의 뛰어난 조형 감각을 선보였다.

 

 

 

- 박영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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