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동 고분 발굴조사 기록
1984년 7월 23일 월요일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발굴조사 현장에서 발굴 작업을 경험한 날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나는 고고미술사를 공부하는 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의 부속박물관에서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사적 제243호)”의 제3호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석촌동 3호분
... 송파구 일원에는 광주풍납리토성(사적 제11호), 방이동백제고분군(사적 제297호),
몽촌토성(사적 제270호) 그리고 석촌동 고분군 등 백제초기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송파구 일대가 백제 초기 도읍으로 추정될 만큼 과거에는 훨씬 많은 유적이 있었지만
개발에 밀려 지금까지 상당수가 사라졌다. 석촌동 일대 역시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적석총을 비롯해 100기에 가까운 고분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 발굴조사 대상이었던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의 제3호분(이하 ‘석촌동 3호분’)은
석촌동에 남아 있던 고분들 중 가장 큰 것으로서
만주의 옛 고구려 지역의 무덤 형식(기단식 적석총)을 따르고 있어,
백제 초기의 지배세력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자연석을 다듬어 층단을 이루면서 3단의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 올렸는데,
동서길이 49.6m, 남북 폭 43.7m, 높이 4m로서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보다도 규모가 크다.
현재 약 50,000㎡에 이르는 석촌동 고분군 전체가 도심 속에서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이 즐겨 찾는 안식처가 되고 있다.
지하철 8호선을 이용, 석촌역 6번 출구로 나오면 약 400m거리에 있다.
... 1984년도의 석촌동 고분 발굴은 정비 복원을 위한 학술자료를 얻기 위한 것이었는데,
방학 중 실습을 위해 학생들의 참여를 권장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고고학이란 학문을 접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햇병아리로 발굴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당시 내가 살 던 집도 현장에서 멀지 않은 방이동백제고분군 바로 옆이었다.
삽질
... 그날은 오전에 날씨가 찌뿌드드했다가 오후에는 햇볕이 따가울 정도로 활짝 개었었다.
나는 발굴현장을 지휘하는 조교와 약속을 하고 오후에 현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후에 현장에 도착하니 조교를 비롯해서 선배 · 동기 등 학부생 4명과 대학원생 1명이
인부아저씨들과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동기생 중에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인 김용민도 있었다.
... 인사를 마친 나에게 잠시의 여유도 없이 한 자루 삽이 쥐어졌고,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인부아저씨와 조를 이루어 흙과 잡초 속에 묻혀있는 적석총의 돌을 잘 보이게 노출시키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말 그대로 적석총(積石塚)은 시신과 부장품을 안치하기 위해
수 천, 수 만개의 돌을 모아 쌓아서 만든 무덤이다.
그런데 발굴하기 이전 석촌동 3호분 정상에는 몇 채의 무허가 집이 자리했었고
그동안 돌 사이사이로 쌓인 토사와 토사에서 자라난 초목으로 인해 외관상 원형을 잃은 상태였다.
... 작업에 들어간 나는 더운 날씨와 생전 처음해보는 땅과의 씨름으로 상당히 힘들어했다.
처음 잡아보는 삽이 영 익숙지 않았고 돌 틈사이로 삽질을 해대려니 여간 불편하고 힘든 게
아니었다. 돌 사이사이의 흙을 제거하고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들을 뽑아내기에는
삽보다는 차라리 호미가 낫다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초년병이라 군소리 못하고
할아버지뻘 되는 인부아저씨들 핀잔까지 들어가며 그날 작업이 끝날 때까지 “삽질”만 해댔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발굴의 기본은 땅파기고 땅파기의 기본은 삽질이다.
그날의 삽질은 기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조교의 배려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고학자의 모험을 다룬 ‘인디아나존스’라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이후 흔히 발굴을
굉장한 보물을 찾는 흥미로운 작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발굴은 힘들고 위험하고 궂은 3D업종임에 분명하다.
... ‘흙을 파헤치고 적석총의 돌들을 노출시키는 일을 했는데 생각보다 힘들었다.
특히 무수한 개미, 지네, 기타 벌레들이 나의 삽질에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났음을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모두 모두 성불(成佛)하기를......’ 그날 일기의 일부 내용이다.
지금 읽으면 웃음이 나오니 대목이지만
불자로서 삶의 터전을 잃고 죽어가는 미물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너희들 조상무덤이나 파!
... 해도 기울고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양장을 한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을 해가지고는 다짜고짜로 울타리를 넘어 발굴현장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 “아주머니! 여기는 발굴현장입니다.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나가주세요.” 조교가 소리쳤다.
... 그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갑자기 욕설을 퍼부으며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조교도 이 난데없는 불청객을 제지하기 위하여 다가가고 있었다.
우리 발굴단 모두는 심상치 않은 사태에 정리하던 일을 멈추고 주시하고 있었다.
조교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주머니께서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을 해드리려 했지만 아주머니는 막무가내였다.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그 분 말씀인즉, 발굴현장 옆에 소유한 토지가 있는데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 보호구역으로 정해 놓고는 건물도 못 짓게 하는 등
규제를 해서 아무 일도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규제를 한 관청과 우리 발굴단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감정이 매우 격해 있었다. 조교가 발굴단의 입장을 설명했다.
... “저희는 의뢰를 받아서 이 고분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어려우신 것은 이해하지만, 그런 문제는 담당 관청과 해결하셔야지요.”
... “이게 무슨 지랄들이야? 이게 고분이라구? 이 돌멩이를 파헤치느니 너희들 조상 무덤이나 파!”
... 조교가 맞서서 아무리 설득을 하고 설명을 해도 말을 듣지도, 이해하려 들지도 않으셨다.
한참을 지나서야 제풀에 말씀을 거두시고 밖으로 나가셨다.
... 발굴현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 ‘발굴하는 게 지랄?.... 조상 무덤이나 파라니....’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아주머니가 한 말씀이 계속 귓가에서 쟁쟁거렸다.
문화재를 보호하고 우리 역사를 복원하고 선양하기 위한 선량한 작업이
사유재산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비하될 수 있다니......
... 예기치 못한 이 충격적인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기억 속에 잠재해 있게 되었지만,
한참이 지난 후 유사한 사건들로 확대재생산 되었다.
... 대학을 졸업하고 문화재청 소속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학예연구직으로 채용된 나는
지난 2000년 5월, 당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에서 발굴업무를 맡고 있던 중
풍납토성내 재건축부지의 보존문제로 주민들에 의해 발굴현장이 훼손되는 아픔을 겪었다.
... 23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문화재청 발굴조사과에 근무하면서
여전히 발굴과의 질긴 인연을 지속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서 개발이 급증하고 있고
이에 따라 발굴 수요도 크게 늘어 조사기관이 감당을 못 할 정도이다.
개발에 따른 유적의 보존문제와 사유재산 침해, 민원발생도 해결해야 할 고민거리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때와 비교해 보아 상황은 더 열악해져 있다.
... 정부가 하는 일은 국민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정부가 수행해야 할 수많은 기능 중에는 과거 우리 국토에서 삶을 이어갔던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적 흔적들을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고, 이러한 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개인의 재산과 권리에 제한을 가할 밖에 없는 것이 가슴 아픈 현실이다.
... 나의 발굴현장에서의 첫 날은 어수선하게 정리되었다.
... 무슨 일이든 첫 경험은 중요한 것이다.
그 단 한 번의 일이 선 것을 익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되풀이 될 악몽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23년 전 발굴 첫 날 접했던 그 아주머니의 욕설과 고함이 나에게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