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 목가구 제작 30년, 소목장(小木匠) 이정곤
“나무처럼 성찰하며 기다리라, 운명 같은 인연이 다가올 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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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골을 돌아다니다 보면 학생이 없어 문을 닫은 초등학교가 많이 보인다. 풍수에 관심 있는 사람의 안목에서 보면 이들 초등학교 터는 대체적으로 쓸 만한 자리인 경우가 많다. 50∼60년 전 학교부지는 그 동네에서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곳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을 교육하는 터인 만큼 무턱대고 정한 것이 아니라 풍수에 조예가 있는 원로들이 신경 써서 잡았다. 그래서인지 시골 폐교에는 화가, 공예가,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장기 임차해서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산골 마을인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대곡리 기룡분교 터도 격국을 갖췄다.
운동장 앞에 서서 바라보면 멀리 모후산(母后山)이 보이는데, 그 형태가 삼각형이다.
풍수가에서 삼각 모양은 일단 문필봉(文筆峰)으로 본다. 붓끝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터 앞에 문필봉이 바라다보이면 학자와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고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좌청룡 쪽에는 천태산(天台山)이 호위하고 있다. 둥그런 모양의 금체형(金體形)이다.
우백호 쪽에도 천태산보다는 작지만 둥그런 금체형의 봉우리가 받쳐주고 있다.
주변에 바위산도 보이지 않는다.
풍수에선 험악한 바위로 이루어진 악산(惡山)이 없으면 살기(殺氣)도 없다고 본다.
냇물도 적당하게 터 주변을 감아 흐르면서 수기(水氣)를 보충해준다.
이만하면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춘 국세이다. 단 국세가 넓어서 일반 주택으로는 너무 큰 터이고
학교나 여러 사람이 머무르는 공공기관 터로는 좋은 곳이다.
키 작은 코스모스에 온화한 가을 햇볕이 내리쬐는 날,
소목장(小木匠) 이정곤(李貞坤 · 47) 선생은 텅빈 기룡분교에서 혼자 작업하고 있었다.
소목장이라 하면 전통 목가구인 반닫이, 책장, 의걸이장, 문갑, 소반 등을 만드는 장인을 일컫는다.
대목장은 집 짓는 자재인 대들보나 기둥, 서까래 등을 다루는 장인이다.
이 시대의 희귀한 직업 중 하나가 소목장이다.
나무는 기다려야 한다
- 소목장은 나무를 다루는 직업이다. 나무에 대해서는 전문가라 여겨진다.
나무를 다루는 원리나 요령을 설명해달라.
“나무는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 나무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재료가 되는 좋은 나무, 즉 수백 년 된 나무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목가구 재료 중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나무가 오동나무인데, 성장기간이 15∼20년이다.
빨리 성장하는 나무라도 15년을 기다려야 가구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목가구의 재료로 알아주는 느티나무(�木)는 수백년이 걸린다.
500∼700년 성장한 나무를 써야 제대로 된 목가구가 나온다.
둘째, 나무가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원목을 가져다가 말리지 않고 곧바로 만들면 가구가 뒤틀린다. 반드시 일정시간을 말려야 한다.
그런데 말리는 방법에서도 젊은 나무와 늙은 나무가 다르다. 젊은 나무는 성질이 강하게 마련인데,
성질이 강한 나무는 야외에서 2∼3년간 비를 맞혀야 한다. 그러면 강한 성질이 순화된다.
참죽나무, 느티나무, 살구나무 중 수령이 짧은 나무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소나무는 비를 맞으면 상한다. 소나무는 겨울에 켜서 여름이 오기 전에 실내에서 말려야 한다.
은행나무도 소나무와 같다. 한편 늙은 나무는 습기가 없는 창고나 헛간 같은 곳에서 말려야 한다.
이런 곳에서는 몇십 년 동안 나무를 원형대로 온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
나무가 땅바닥에 직접 닿지 않으면 습기로부터 안전하다.
셋째, 나무가 어느 정도 말랐다 싶으면 실내 또는 목재건조실에 들여놓고
18∼20℃의 방에서 나무가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소목장은 방에서 나무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같이 있어야 나무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한다면 ‘나무와의 꾸준한 대화’가 필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노련한 장인은 나무와 대화를 나눈다.
나무는 방안의 온도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데 장인은 그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실내가 건조할 때와 습할 때 나무의 반응이 다르다.
그 미세한 반응을 보면서 장인은 여러 가지 요소를 체크한다.
원래 그 나무가 타고난 성질을 부리는 것인가, 아니면 기후 때문인가 등을 관찰하는 것이다.
20년 수련 끝에 ‘木理’ 터득 |
소목일을 하는 데는 무엇보다 나무의 이치, 즉 목리(木理)를 터득하는 일이 중요하다.
공식은 없다. 직감으로 판단해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소리다.
예를 들어 장마철에 습기가 많을 때는 나무가 늘어난다. 그때 ‘뚝’ ‘뻥’ 하는 소리가 난다.
건조할 때도 소리가 난다. 물론 원목이 아닌 완성된 가구에서도 소리가 난다.
이런 소리를 감지해야 한다. 나도 처음 3년간 목재 건조실에서 잠자면서 나무와 함께 생활했다.
몹시 건조해 기관지가 말라서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이 바닥에 입문한 지 20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목리에 눈을 떴다.
20년이 넘어가는 30대 후반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 이치를 터득했다.
넷째, 실질적인 작업에 들어갈 때도 적절한 시기가 있다.
아무 때나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일년 24절기 중 하지에서 처서에 이르는 기간은 작업하지 않는다.
이때가 일년 중 가장 습기가 많은 시기이다. 습기가 많을 때 가구를 만들면 나중에 변형된다.
건조기가 되면 나무가 수축하기 때문이다. 또 이 시기엔 아교풀이 잘 썩는다.
전통 목가구의 상당부분은 풀로 접착하는데 장마철에는 접착풀이 상하기 쉽다.
따라서 습기철에는 작업을 하지 않고 기다린다. 보통 작업은 가을에 시작해서 봄에 끝내는 게 정석이다.
이처럼 풀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계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섯째, 좋은 목재가 구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좋은 나무가 있다는 정보가 들리면 밥을 먹다가도 나가곤 했다. 불원천리하고 찾아갔다.
막상 가면 원하는 나무도 있었지만, 쓸모없는 하찮은 나무인 경우도 많았다.
설령 마음에 드는 나무를 발견해도 돈이 없어 구하지 못하기도 하고, 겨우 빚을 내서 사기도 한다.
쓸 만한 원목은 1000만원이 넘는다. 600년 된 느티나무는 2000만원 이상 나간다.
경제적 여유가 없을 때면 좋은 목재를 발견해도 구하지 못한다.
25년 전쯤의 일이다. 마음에 드는 용목(龍木 · 오래된 느티나무)을 발견했는데,
나보다 한 발짝 앞서 화순 지역의 유지가 이 나무를 샀다.
그 사람은 귀한 나무를 가지고 탁자를 만들겠다고 구입했다. 아주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놓친 고기가 커 보이는 법이라고, 내가 손에 넣지 못하니까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몇 달 뒤 그 사람이 용목을 처치하기 곤란하다며 내게 사라고 연락을 해온 게 아닌가.
좋은 원목도 인연이 있어야 수중에 들어온다는 이치를 이때 깨달았다.
내가 의욕적으로 구하겠다고 해서 내 손에 들어오는 게 아니다. 인연이 닿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여섯째, 목가구를 제대로 평가해주는 애호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안목있는 구매자는 많지 않다. 안목이 없으면 고가의 전통 목가구를 구입하지 않는다.
안목이 있는 구매자를 만나야만 소목장의 형편도 풀리고 자기 직업에 대한 보람도 느낀다.
역시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과정이 노는 시간은 아니다. 끊임없는 성찰이 이뤄지는 기간이다.”
나무와 목가구의 궁합
자신의 호도 나무에서 따와 ‘오수목(五壽木)’으로 정한 소목장 이정곤 선생.
나무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 분야에도 인생의 인치가 들어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어느 한 분야에 통하면 다른 분야에도 통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기관지가 마르는 고통을 참아가며 나무와 3년 동안 한 방을 쓴 그는
결국 나무의 숨결을 짚어내는 경지에 들어선 것 같다.
그에게 각 나무가 지닌 고유의 성질에 대해 물어보았다.
나무의 성질에 따라 가구도 각기 다를 것 같아서다.
그는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말도 원래 나무에서 나왔다고 말로 풀어간다.
어떤 나무를 어떤 가구에 사용하느냐가 바로 적재적소라는 것.
이 선생이 말하는 나무와 목가구의 궁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귀목(櫷木)나무이다. 나무 목(木)변에 거북 구(龜)자를 합친 글자가 귀(櫷)자로,
장수하는 나무인 느티나무를 가리킨다.
주로 동네 어귀에 심던 나무로 ‘정자수(亭子樹)’ 또는 ‘이정표 나무’ 라 불리기도 한다.
귀목나무의 최대 장점은 빛깔과 문양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어떤 나무보다도 고급스런 무늬와 색감이 나온다.
쪼개지거나 터지는 경우가 드물어 널빤지 용도로도 훌륭하다.
400∼500년 된 늙은 귀목나무를 ‘용목(龍木)’이라고 부른다. 용
목은 혹이 나 있어서 껍질이 울퉁불퉁하다. 나무가 오래 되면 위가 무거워져서 아래로 처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속은 썩어서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겉껍질만 20cm 정도 되면 겉에 혹이 생기며 늙어가는 것이다.
사람도 80이 넘으면 검버섯이 피면서 피부가 쭈글쭈글해지는 것과 같다.
소목장의 눈으로 보면 울퉁불퉁 혹이 난 귀목이 최고의 나무다.
귀목을 자르면 무늬가 기가 막히게 나오는데,
그 무늬가 마치 용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용목인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처럼 늙어야만 최고의 무늬가 나온다는 것이다.
‘늙어감의 미학’이 나무에 있다. 인간은 늙어가면서 천대받지만 나무는 늙어갈수록 대접을 받는다.
귀목나무의 산지는 전국적이다.
그 중에서도 전라남도에서 나는 게 비교적 재질이 좋다.
기후가 따뜻하고 토질이 비옥한 곳에서 자란 것일수록 우수하다.
귀목나무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는 용도로 심어지기도 했는데,
나뭇가지가 부챗살처럼 퍼져 나그네의 눈에 쉽게 뜨이기 때문이다.
전남 주암면의 주암댐 수몰지, 전북 진안의 용담댐 수몰지 등 댐이 들어서면서 생긴 수몰지에서 수백 년 된 귀목나무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먹감나무는 검정색 먹으로 그림을 그린 것처럼 생긴 나무다.
나무 자체에 멋진 자연문양이 있다.
그 문양을 보면 산수문(山水紋), 괴석문(怪石紋), 운악문(雲岳紋)이 나온다.
감나무의 원종에 해당하는 고욤나무의 핵이 검은 빛인데, 이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이면서 먹물이 넓게 번진 형태의 먹감나무가 탄생한 것이다.
즉 먹감나무는 일종의 변종이다.
검은색의 문양이 멋져 나무판에 자연수묵화를 그려놓은 것 같은 효과가 있다. 그래서 주로 경대, 머릿장, 이층롱과 같은 부인들의 안방가구 재료로 사용된다.
살구나무는 단단하고 매끄럽다.
우리나라에는 ‘화류목(樺榴木)’이 없기 때문에 그 대용으로 쓰였다.
자그마한 소품에 주로 사용된다. 벼루와 붓을 집어넣는 연상(硯箱)과 경대 등을 만드는 재료다.
살구나무는 뒤틀리면서 성장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큰 가구보다는 작은 가구에 적합하다. 스님들의 목탁도 살구나무로 만든다.
오동나무는 가벼울 뿐 아니라 방충, 방습 기능이 탁월하다. 탄력도 좋다.
그래서 오동나무로 옷장이나 책장을 만들면 좀이 슬지 않는다.
오동나무 특유의 향이 벌레를 쫓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명주옷을 보관하는 옷장은 오동나무로 만들었다.
‘동천년노항장곡(桐千年老恒藏曲 · 오동나무는 찬년이 지나도 항상 곡조를 머금고 있다)’라는 말이 있듯
오동나무는 예로부터 거문고나 가야금의 재료로 이용됐다.
좋은 재질의 오동나무는 박토에서 산출된다.
돌자갈밭에서 자란 오동나무는 나이테가 촘촘하게 박혀 있다.
어떤 나무든 나이테가 촘촘하면 좋은 재질이다. 그만큼 내공이 축적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돌자갈밭에서 자란 오동을 가리켜 ‘석산오동(石山梧桐)’이라고 부른다.
높게 치는 오동나무다.
소목장에 적합한 해송
참죽나무가 있다. 전라도 사투리로 ‘까죽나무’라 부른다. 대쪽같이 꼿꼿하게 크는 나무다.
가구의 뼈대를 세우는 데 많이 쓴다. 해안가에서 주로 서식하는데,
시골에서 상여를 멜 때 사용하는 장목이 참죽나무이다. 배를 만들 때 ‘돛대’나 ‘노’로 사용하기도 한다.
참죽나무의 특징은 썩지 않고 풍화도 덜 되고 질기며 단단하다는 것, 즉 강도가 높다는 것이다.
반면 약점은 널빤지로 사용하면 잘 갈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구보다는 와상이나 평상의 재질로 적합하다. 그런데 요즘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도시화로 인해 시골에서 이 나무를 심거나 관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소나무는 향기가 좋다. 소나무에 배어 있는 기름기로 찰지고 촉촉하면서 달라붙는 느낌을 준다.
전통 목가구 중 ‘궤장(�杖)’이나 ‘반닫이’에 사용되는 나무가 소나무다.
나무가 자란 곳에 따라 용도도 다르다.
육송(陸松)은 집짓는 데 좋고 해송(海松)은 소목장(小木欌)에 적합하다.
수양버드나무는 정자나무처럼 아름드리나무가 많다. 물가에서 잘 자라 물이나 습기에 강하다.
수질을 정화시키는 작용도 한다. 소나무, 은행나무가 습기를 만나면 변색되는 것과 달리
수양버드나무는 단단하면서 탄력이 있고 복원력도 뛰어나다. 그래서 칼질을 하는 도마에 적합하다.
식료품에서 나오는 습기와 칼질이 주는 충격을 이겨낸다. 식탁에도 적합하다.
숟가락을 놓아도 퉁겨내지 않고 받아주는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단단하다.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나무다.
수양버드나무와 비슷한 종류가 능수버드나무이다. 하지만 용도는 전혀 다르다.
능수버드나무는 가는 가지가 축 늘어져 나무 도시락이나 나무젓가락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산벚나무는 봄에 산속에서 피는 벚나무다. 회갈색이면서 단단하다. 뼈대를 만드는 데 주로 쓴다.
수양벚나무는 활 만드는 재료로 목궁(木弓)에 들어간다.
벚나무 중에서도 크게 자라는 종류로 골재, 상감목, 널빤지에도 적합하다.
주목나무는 굵고 기름지다. 붉은 색을 띤다. 성질이 매끄러워 일본인들은 문패목으로 많이 사용했다.
붉은 색이라서 염라대왕이 왔다가 들어오지 못하고 되돌아간다는 속설이 있다.
이북지역에서 많이 사용된다.
강호에서 만난 세 스승
이정곤 선생이 소목장의 길에 접어든 시기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다.
집안에 소목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사람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 후 광주에 있는 공방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주로 책상이나 책꽂이를 짜는 일이었다.
1974년 서울에 올라와 청계천과 인사동 등에서 골동품 수리를 했다.
이때 수준 높은 골동품을 접했고 그러한 골동품을 만들어내는 전통장인의 솜씨에 감탄했다.
어떻게 이런 물건들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이런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특히 목상감(木象嵌)을 비롯해 전통 소목기법에 호기심이 생겨 장차 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전통 목가구에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생활철학, 미의식, 인생관 등이 함축되어 있다.
그는 이처럼 목가구에 스며있는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된다.
이를 인도해준 스승이 바로 윤양구(尹暘九) 선생이었다.
윤 선생은 조선의 상류층 문화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상류층 문화를 접하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이정곤 선생은 윤 선생을 통해 조선의 사대부 문화에 깃들어 있는 해학과 풍류,
그리고 양반들의 생활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장인이라면 기술뿐 아니라
그 기술을 잉태시킨 민속적 배경도 파악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1979년 그는 고향 광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전남 화순군 동복 지방에 송추만(宋樞萬 · 1902∼92)이라는 소목의 명인이 활동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송추만 선생은 ‘호장태상감’ 분야의 전문가였다.
상감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알고 싶었던 그는 바로 송 선생을 찾아갔고
그해 7월 선생의 공방에 입문한다. 그는 스승의 작업장에서 같이 숙식을 했다.
스승이 거주하던 곳은 당시만 해도 오지였다. 깊은 산골이라 산업문명의 이기가 들어와 있지 않았다.
그런 오지였기에 전통 장인의 공법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다.
처음 공방에 입문해서는 어떤 가르침도 받지 않았다.
스승의 작업을 말없이 지켜보는 것 자체가 공부였다.
스승이 발가락 사이에 나무를 얹어놓고 톱질하는 과정, 나무를 쪼개고 붙이고 끈으로 묶는 작업과정을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특히 상감하는 과정에서 나무를 서로 접합하는 방법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아교풀로 붙이는 것인데, 이 작업의 핵심은 끈으로 장시간 묶어놓는 것이다.
풀칠과 노끈으로 묶어놓는 접합방식은 송추만 선생이 지닌 기술의 정수였다.
또 송 선생으로부터 기술 전수뿐 아니라 조선시대 소목장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이런 것들이 21세기 소목장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조선의 소목장들은 오동나무 궤짝에 연장을 싣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동네 사람들이 농이나 궤짝을 짜달라고 하면 며칠 그 동네에 머물며 가구를 만들어줬다.
그 대가로 겨우 싸라기 몇 말을 받았다고 한다. 기술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던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선배들의 고생에 비하면 나는 편하게 배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또 한 명의 잊을 수 없는 스승이 있다.
1980년대 초반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문화재위원을 지낸 예용해(芮庸海) 선생이다.
이정곤 선생이 경복궁의 전통공예관에 전통 책상인 서안(書案)을 만들어 출품하면서 알게 됐다.
예선생은 그의 작품을 보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자네가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가? 기술은 어떻게 배웠는가? 힘들지 않았어? 이거 얼마여?
그거 받아서 되겠어? 두 배는 불러야 되는 거야! 내가 좋은 사람에게 팔아줄게!”
예선생은 수시로 전화해 생활형편을 물어보는가 하면 후하게 작품을 구입할 애호가를 소개해주곤 했다.
그러면서 “소목장이야말로 우리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장인이니 계속 이 길을 가라”고 격려해줬다.
이정곤 선생은 예용해 선생으로부터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받은 것은 물론
소목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됐다. 장인도 후원자를 만나야 활력을 얻는다.
소목장은 제도권 교육에서 양성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따라서 이정곤 선생은 제도권의 스승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야말로 강호에서 풍찬노숙하며 스승을 만났고 일을 배웠다.
목상감이 주특기인 이정곤 선생은 풀칠을 중시한다.
상감은 시간이 흘러도 변형되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제대로 나무를 접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무 깎는 작업은 기계가 더 정확할 수 있지만 가구 제작의 하이라이트인 접합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못도 필요한 부분에 한해 대나무못만 써야 한다.
그 외는 모두 풀칠에 의한 접합이다.
- 풀칠과 접합에 대해서 설명해달라.
“가장 좋은 풀은 민어의 부레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부레풀’이라고 한다.
부레풀이 가장 탁월한 접착제다. 활이나 화살을 만들 때도 반드시 부레풀을 써야 한다.
아교풀도 많이 쓴다. 요즘은 매운탕을 끓일 때 민어의 부레도 같이 넣기 때문에
부레를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아교풀이 가장 많이 쓰인다.
풀을 붙인 다음 접착을 고정시켜야 한다. 나는 ‘탱개질’이라고 하는 조선 장인의 방식을 사용한다.
노끈으로 접합부분을 당겨 장시간 묶어놓는 방법이다. 그러면 정교하고 완벽하게 붙는다.
이 방법이 송추만 선생이 사용하던 것으로 현재 내가 계승하고 있다.”
- 탱개질을 할 때 사용하는 노끈은 어떤 재료로 만드는가.
“최고의 탱개줄은 사람의 머리카락이다. 머리카락 탱개줄은 늘어나지 않으면서 신축성이 있다.
삼나무 끈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끊어질 수 있지만 머리카락은 끊어지지 않는다.
강함과 탄력, 이 양면적인 기능을 모두 갖춘 것이 머리카락이다.
나는 스승이 사용하던 탱개줄을 물려받았다. 흰 머리카락과 검은 머리카락이 섞여 있다.
스승이 사용하시던 것이니까 100년도 더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멀쩡하다.
머리카락은 썩지 않는다. 그래서 보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은인에게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준다’는 말이 나온 것 같다.”
필자는 사람의 머리카락이 이처럼 쓸모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됐다.
머리카락은 탱개줄을 만들 때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물건도 버릴 것이 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단지 어떻게 쓰이느냐가 문제다.
어떤 물건도 적재적소는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것을 발견하는 지혜가 아닐까.
- 목가구의 원리 내지는 특징이 있다면.
“목가구의 원리 중 하나가 대칭이다. 모든 목가구는 대칭으로 구성된다.
좌우, 상하의 대칭이다. 대칭이라는 개념에는 굵기, 선, 비례가 모두 포함된다.
대칭은 사용하는 사람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예를 들어 아래쪽은 무거운 색감으로 배치하고 위쪽은 가벼운 색으로 배치하는 식이다.
이처럼 전통 목가구를 자세히 보면 모두 대칭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대칭이 주는 미학적, 심리적인 효과를 알았던 것 같다.
시대에 따라 가구도 변해야
기능적인 측면에서 한국 목가구는 좌식(坐式)구조다.
방에서 생활하기에 알맞게 그 구조를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추측이지만
고려시대까지는 입식(立式)가구도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좌식으로 바뀐 것 같다.
예를 들어 불교사찰의 대웅전을 살펴보면
고려시대에는 바닥에 전돌이 깔려 있었지만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마루로 바뀐다.
전돌 위엔 신발을 신고 올라서지만 마루에 올라설 땐 신을 벗는다.
마룻바닥은 앉아서 예불할 수 있는 구조다.
이런 전환 과정에서 좌식 가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지 않았나 싶다.
좌식 구조를 안정시켜주는 결정적인 장치가 바로 ‘족대(足臺)’다.
족대는 가구의 다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로나 세로로 질러서 고정시키는 장치다.
소반을 보더라도 맨 밑에 족대가 있어야 다리가 틀어지지 않고 고정된다.
족대의 발달은 한국의 좌식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이나 서양가구에는 족대가 없다.
그런데 최근 우리 생활도 다시 입식으로 바뀌는 추세에 있다.
밥상에 앉아 밥을 먹기보다 식탁에서 의자에 앉아 먹는다. 방바닥보다는 소파에 많이 앉는다.
고가구를 만드는 장인의 입장에서는 입식에 맞는 전통가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가구도 변해야 한다.”
조상의 임상지혜 스며 있는 목가구
그는 전통 고가구가 사람의 건강에도 유익하게 만들어졌다고 강조한다.
남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목침(木枕)은 대나무 등 찬 나무를 사용했다. 머리를 차게 하기 위해서다.
여자들 가구는 따뜻한 나무를 사용했다.
거울이 달린 경대는 따뜻한 성질을 지닌 배나무나 오동나무를 사용했다.
요즘 그가 즐겨 만드는 ‘ㅁ’자형의 퇴침도 인체공학을 고려한 작품이다. 사람이 누웠을 때 편안한 상태가 되려면 목을 받쳐주는 목침이 필요하다.
가장 편안하게 받쳐주려면 모로 누웠을 때 목과 어깨의 높이 차를 목침이 채워줘야 한다. 그래야 목침을 받치고 누웠을 때 수평이 유지된다.
보통 한국 성인남성이 모로 누웠을 때 목에서 어깨까지의 높이는 15cm이고, 반듯하게 누웠을 때 높이는 11cm라고 한다.
그래서 그가 만드는 전통 퇴침도 가로 15cm, 세로 11cm다.
그가 만드는 가구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이 바로 목침이다.
그 무늬와 접합 부분이 세련될 뿐만 아니라 가지고 놀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아름답다.
남자들이 잠깐 낮잠을 즐길 때 사용하던 목침 중 제왕격 목침이 있다.
삼성출판박물관의 김종규 관장이 소장하고 있던 ‘운용문투각퇴침’ 이라는 목침으로
가로 40.5cm, 세로 13cm에 높이가 12cm다. 정면에는 구름 속으로 용이 비상하는 모습을,
측면에는 복숭아를 든 신선 모습을 새겨놓았다. 모두 장수를 의미한다.
이 목침도 목에 닿는 부분은 머리를 시원하게 해주는 대나무를 사용했다.
그리고 퇴침 속에는 중풍을 예방하기 위하여 한약재를 넣었다.
소국(소국화), 댓검불(대나무를 대패로 문지른 뒤에 나오는 검불), 결명자 등이다.
전통적으로 퇴침 속에 넣어두던 한약재들이다.
우리 조상들은 작은 부채도 건강을 고려해 만들었다.
합죽선만 보더라도 손잡이 부분에 대나무의 울퉁불퉁한 마디가 들어가 있는데,
손으로 이 부분을 잡으면 자동적으로 지압 효과가 난다.
합죽선을 잡으면 수지침 효과를 볼 수 있도록 설계한 셈.
합죽선 손잡이의 돌출부분을 좀 세게 잡으면 머리가 시원해진다.
전통 목가구에는 이처럼 조상들의 임상지혜가 스며 있다.
고가구 중에서 재미있는 것이 한약재를 넣어두는 약장(藥欌)이다. 약장은 선비 집안의 필수품이었다.
필자가 조선 사대부 집안 후손의 집을 방문해 보면 어김없이 약장이 남아 있다.
병원과 의원이 귀하던 시절이니 자가 치료가 성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개는 집안에서 ‘동의보감(東醫寶鑑)’ 을 읽은 어른이 식구들의 병을 알아서 치료했다.
조선시대 자가 치료의 필수품이 바로 이 약장이다.
조선시대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許穆)이 라이벌이자 정적이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의
부탁을 받고 처방전을 써주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송시열의 병을 허목이 치료해줬던 것.
이 일화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조선시대 선비들은 한약처방에 일가견이 있었다.
처방을 쓸 정도라면 한약재를 보관하는 약장은 필수품이었을 것이다.
약장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이동식 약장, 가정용 약장, 전문의원 약장이 그것이다.
이동식 약장은 휴대하고 다닐 수 있도록 접이식으로 만들었다.
가운데에 고리를 달아 양쪽을 접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쪽 면에 6개, 양쪽을 합쳐 12개의 서랍이 달려 있었다.
가정용 약장에는 서랍이 20∼40개 정도 설치되어 있었다.
가정에서 반드시 갖춰야 할 상비약은 거의 다 넣어둘 수 있는 용량이었다.
전문의원 약장은 120∼130개의 서랍이 달려 있다.
약장을 만드는 재료로는 오동나무를 제일로 친다. 좀먹지 않기 때문이다.
- 목가구의 장점은 무엇인가.
“쓰는 사람의 취향에 맞출 수 있다는 점이다. 재료뿐 아니라 형태, 디자인을 사용자에게 맞출 수 있다.
또 쓰면 쓸수록 은은한 정감이 다가오는 것이 목가구다.
손때가 묻을수록 정이 가는 것은 나무의 성질 때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연륜과 품격이 깊어가는 셈이다. 또 낮고 작고 아담해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가구가 크면 사람을 위압하는 맛이 있다. 마지막으로 목가구는 친환경적이고 생태철학에도 부합된다.”
누가 쓰냐에 따라 진가 달라져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목가구는 어떤 것인가.
“서안(書案)이다. 나는 간결하고 단순한 작품을 선호한다.
서안은 이런 취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가구다. 모양이 간결하면서 나무의 숨결이 배어나온다.
복잡한 장식도 필요 없다.
서안도 그렇지만 장인이 만든 모든 목가구는 누가 쓰느냐에 따라 진가가 달라진다.
장인은 50%만 만든다. 나머지 50%는 사용하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어느 정치인에게 반닫이를 팔았는데, 어느 날 그 집에 가보니까 반닫이를 조각 작품을 얹는 좌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혼을 담아서 만들었는데 겨우 좌대로 사용하다니.
되가져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목침도 그렇다. 베개가 아닌 자동차 뒷좌석의 액세서리로
사용하는 것을 목격할 때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이정곤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조교다. 1988년 정부로부터 지정을 받았다.
그렇지만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 않다. 목사동면의 적막한 산골 폐교에서 혼자 밥을 끓여 먹고 있다.
3000평이나 되는 휑한 산골 폐교에서 40대 후반의 남자가 홀로 밥을 먹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부인과 세 명의 자녀는 광주에서 산다. 교육문제 때문이다.
사실 고가구는 비싼 편이다. 그래서 수요가 많지 않다.
하지만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들어간 시간과 정력, 돈을 생각하면 비싼 것도 아니다.
문제는 감식안과 안목이다. 작품을 알아보는 안목이 없는 사람에게 고가구는 비싼 물건이지만,
안목이 있는 사람에게는 두고두고 전통의 향기와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처럼 고가구에 대한 안목을 갖춘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서두르진 않는다. 임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기다리는 것이 인생 아닌가.
필자는 그의 작업실에 놓여 있는 평상이 마음에 들었다.
오랜 세월 풍상을 이긴 참죽나무를 구해서 만든 것이다.
진홍색의 견고한 평상은 조선 선비의 품격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이 평상에 앉아 있으면 조선시대의 고사(高士)로 환원될 것만 같다.
밖으로 나와 보니 운동장 위에 별이 총총하게 빛난다. 별빛을 보면서 강호를 생각했다.
‘한국의 전통 혼맥(魂脈)은 춥고 배고픈 강호의 야인들에 의해서 전승되는구나’ 하고.
- 조용헌(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 신동아 2004년 12월(통권 543 호), [한국의 方外之士 ⑫] 544~5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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