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중요유형문화재 64호 - 두석장 박문열

Gijuzzang Dream 2007. 11. 17. 12:25

 

 

 ■ 두석장 박문열  

 

 

두석장(豆錫匠, 중요무형문화재 64호) 박문열

그는 3남 4녀가운데 막내로 경북 경주시 황성동에서 태어난 그는

휴전 이듬해 목수였던 아버지를 잃고 다섯살 무렵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의 가족은 마포구 도원동 효창공원 인근에 있는 방공호에 터를 잡았다.

일어서면 어른들은 머리가 닿을 것 같은 키 낮은 방공호에서 어머니는 시장에 떡 팔러 나가고

형과 누나들은 학교로 뿔뿔이 흩어지면 어린 그가 혼자 깡통을 들고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다.

“당시에도 잘사는 집은 호사스럽게 살았지만 인심이 후하지는 않았다”는 그는

구호소에서 주는 옥수수죽을 타다 혼자서 방공호에서 먹었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공부는 재미가 없었다. 그림만 좋고 만드는 것만 좋아서

남들이 버리는 크레파스를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도 곧잘 상을 타곤 했다고 한다.

 

쇠붙이와의 인연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용산에 있는 주물공장에 들어가면서 이어졌다.

그는 일당 55원을 받고 주물공장에서는 쇳물 녹이는 일을 했다.

아동 노동을 단속하는 공무원이 나오면 창고에 갇히기도 하고

쇳물을 빼기 위해 끓어오르는 흙을 잘못 밟았다가 발이 부풀어 올라 신도 못 신고

맨발로 도원동까지 걸어온 적도 있었다. 지금도 잘 살진 않지만 그는

“여유있는 장인은 나태해지고 오히려 돈 벌 궁리를 하지만 가난한 장인은 돈 생각이 없기에

작품이 나온다”고 말한다.

 

두석이란 황동이나 주석을 부르는 옛말이다.

조선조 법전인 <대전회통>에 따르면

두석장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놋쇠로 장석을 만드는 장인을 일컫는다.

 

'장석'은 목가구나 나전가구의 몸체에 부착하는 금속장식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

옛날에는 동과 주석의 합금재를 사용하여 장식물을 만들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지만

조선시대에 이미 황동, 백동 동은 물론 시우쇠(철을 일컫는 두석장 용어)까지도 다 장석재로 쓰였다.

 

박씨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장석을 만든 기법으로 금속제 가구를 만들기도 한다.

전통 목가구의 비례를 살린 구조로 백골(나무 가구골조)에 백동이나 황동 금속판을 싸서

각게수리(금고)나 반닫이를 만든다.

 

 

또 전통 건축물의 철물작업까지로 두석장의 역할을 넓히고 있다.

부여 정림사지의 황동철물장석이나 양산 통도사 대웅전 금강계단의 비녀쇠 돌쩌귀,

안동 봉정사 대웅전의 등자쇠, 영광 불갑사 대웅전의 철물을 모두 그가 복원했다.

 

용산의 주물공장에서 호되게 일을 하던 그가 진짜 장석의 길로 들어선 것은 68년이었다.

어린 동생이 몸까지 상해가며 일을 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던 큰 누이가 시가쪽 인척인

윤희복(1931~2002)씨를 소개해준 것이다.

윤씨는 당시 인사동에 공방을 두고 고가구의 장석을 만들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니 시골부엌만한 방에서 윤씨 혼자 조그만 정으로 동판을 쪼고 있었는데

“이 정도라면 배울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합금이 된 황동이나 백동 재질을 사다가 작두로 잘라서 모양을 만들지만

당시만 해도 금속을 녹여 쇠까치(금속덩어리)를 만들고 이것을 망치로 두들겨 편 후

일일이 정으로 쪼아서 형태를 잘랐다.

 

정 종류도 많지 않아 이쑤시개보다 조금 크고 두꺼운 정 하나로 장석을 자르기도 하고

무늬를 새기기도 했다. 특히 평안도 박천에서 유래한 숭숭이반닫이는

시우쇠를 일일이 정으로 쪼아 무늬를 투각시키는 작업이라 보통 어렵지 않았다.

 

장석에는 상감도 들어가니까 상감기술도 배웠다.

표면을 절반 정도 끌정으로 긁어내서는 날정으로 만든 글씨나 태극문양을 박아 넣는 면상감이나

쇠에 은선을 넣는 입사, 바탕을 투각한 후 글씨나 태극문양 같은 무늬를 집어넣는 박상감 등 기법은

오묘했지만 그는 일이 어렵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나면 인사동을 돌면서 전통적인 금속기명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선비들이 외출할 때 붓과 먹을 넣어 다니게 만든 묵호, 금속연적, 필세, 먹상, 붓을 올려놓는 필가,

철 연적 등 금속제품의 세계도 무궁무진했다.

 

그는 79년 홍은동에 전세 공방을 차리고 독립을 했다.

박씨의 장기는 숭숭이 반닫이 장석과 자물쇠이다. 그는 숭숭이 반닫이 장석으로

1998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숭숭이 반닫이는 평안도출신인 스승 윤씨에게서 솜씨를 물려받았다.

자물쇠는 인사동에서 일할 때 독학으로 익혔다.

 

“우리 전통 자물쇠는 모양도 예쁘고 잠그는 방법이 기미묘묘한 것이 많다”는 박씨는

“솜씨 좋은 도둑이 키박스(현대적인 자물통)는 열겠지만 전통 자물쇠는 건드리지 못한다”고 자신한다.

3단만 되어도 광두정(단추 모양의 자물통 걸쇠)을 올려야 열쇠 들어갈 자리가 나타나는데다가

열쇠를 시계방향과 역방향으로 잇달아 돌려야 열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통 자물쇠는 7단까지 있다.

 

박씨는 “지금 장인은 옛날보다 재료나 공구가 낫기 때문에 이걸 연구개발해서 10단까지는 가야

조상한테 면목이 선다”고 말한다. 현재 8단까지 완성했는데

“단수만 높이는 게 아니라 기능성이나 장식성을 높여가며 만들어야 하기에” 작업이 더디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물쇠 복원에 나선 것은 1990년 무렵부터이다.

전통가구에 달리는 것은 기역자로 구부러진 쇳대를 넣어서 고삐를 빼는 2단 자물쇠가 보통이다.

가구가 미려해지면 자물쇠도 정교해진다.

7단 자물쇠는 진주의 장석수집가인 태정 김창문(1922~2003)씨가 소장한 것이었다.

 

1979년부터 매년 장석 관련 유물을 한 종류씩 재현해서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던 박씨는

1992년 자물쇠를 주제로 삼고 김씨가 설립한 사립 박물관인 태정박물관으로 찾아갔다.

장석만을 따로 모아 수집하던 김씨라 원래의 가구는 볼 수 없었고 자물쇠만 남아있었다.

“처음에는 보여주지도 않으려고 했어요. 담배도 사들고 자주 찾아갔더니 보여주기는 했는데

사진도 스케치도 안 된다고 하더군요.” 일본인이 700만원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안팔았다는 자물쇠였다.

 

김씨는 자물쇠를 열어서 다시 끼워보고는 개폐 방법과 쇠의 두께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그 길로 터미널로 달려가서는 그림을 그리고 서울로 오자마자 공방으로 직행했다.

사흘동안 침식을 잊고 7단 자물쇠를 재현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치수는 다 맞추었는데도 쇳대가 자물통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지를 않았다.

다시 시도하기를 여러 차례. 마침내 그는 무릎을 쳤다.

쇳대를 45도 각도로 구부려야 안으로 들어가게 설계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7단짜리 자물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전통 자물쇠의 재현으로

그는 1993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자물쇠는 이루 셀 수가 없다.

이제는 “어떤 자물쇠든 겉모양만 보면 내부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진다”고 했다.

대전의 과학관에는 그가 만든 3단에서 7단까지 40여 종의 전통 자물쇠가 전시돼있다. 

“자물쇠는 조선시대 과학의 백미”라고 그는 강조했다.  

부여 정림사지 철물을 복원할 때는 4킬로그램이나 하는 자물쇠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는 작년부터 경기 벽제로 작업실을 옮겼다.

홍은동 시절, 그는 새벽 4시에 공방으로 출근해서는 9시까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9시부터는 밥벌이가 되는 장석일을 했다. 지금도 서울 마포에 있는 집에 가지 않고

벽제의 콘테이너 공방에서 주로 기거하면서 잠이 깨면 일어나 주물을 두드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가끔 눈이 시리면 밖에 나가 텃밭을 살피는 것이 유일한 여가생활이다.

주수입원인 목조가구에 붙이는 장석일은 주문이 오면 하고 시간만 나면 자물쇠를 만지니

자물쇠 제작이 그에게는 취미이자 업인 모양이다.

전통 자물쇠란 자물쇠는 다 보고 신기한 것은 그대로 재현해보는 게 꿈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자물쇠는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청동제라고 알고 있는데

열람도 할 수 없었다. “겉모습만 봐도 좋겠는데”라고 아쉬워하는 박씨는

“내가 자물쇠를 열심히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인연이 닿을 것”이라고 마음을 달래고 있다.

- 한국일보, 2004년 5월11일, [빛나는 손끝 - 한국의 장인들] 서화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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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석장 박문열, 쇠를 작품으로…‘만드는 불가사리’  

  

 

     저녁 9시, 사찰 대웅전의 불이 꺼지고 나면 자물쇠 한 개가 법당을 지킨다. 

      전통의 양식을 한껏 살려낸 법당에 걸린 현대식 자물쇠는  

      왠지 ‘안 어울리는’느낌을 준다. 마치 한복에 구두를 신은 느낌이다.

   

지난 5일,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박문열(56)씨를 만나러

경기 고양 벽제역 인근에 위치한 작업실을 찾았다.

서울을 벗어나 벽제로 들어서자 도심과는 사뭇 다른 전경이 펼쳐진다.

벽제역 인근에 위치한 낡은 컨테이너 박스와 비닐하우스 한 동, 그리고 작은 텃밭. 두 평 남짓의 작업실

한 벽면에는 각종 작업도구가 벽면을 메우고 있었다. 한쪽에 쌓아놓은 도면이 눈에 띈다.

 

“장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야. 물질에 빠지면 작품을 만들지 못하지.

불교에서는 초발심이라고 하잖아. 여유가 생기면 나태해지기 쉽고, 초발심을 잃게 되지.

그건 기술자에 불과해.” 박문열씨의 고집이 묻어나는 말이다.

박씨는 쇠를 두드려 자물쇠를 만드는데,

6단, 7단의 잠금장치를 가진 자물쇠는 공구로 끊을 수 없는 견고함과 멋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박씨는 전통 목가구에 쓰이는 장식과 철물도 만들어 낸다.

부여 정림사지의 황동철물장석, 양산 통도사 대웅전 금강계단의 비녀쇠 돌쩌귀,

안동 봉정사 대웅전 등자쇠, 영광 불갑사 대웅전의 철물, 구인사 조사전의 철물 등

사찰 곳곳에 그의 작품들이 남겨져 있다.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박씨는 목수였던 아버지를 통해 어릴때부터 불교를 접했다.

일 때문에 자주 사찰을 찾으면서 박씨도 자연스럽게‘불자’가 됐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용산의 한 주물공장에 취직한

박씨는“옥수수죽만 먹어가며”일을 배웠다.

키가 150cm를 조금 넘을 정도로 작은 체구는 어려서 못 먹은 때문이란다.

 

주물공장을 전전하다가 고가구 장석을 만드는 윤희복씨를 만나 동판공예를 배우기 시작한 박씨는

솜씨를 인정받으며 보다 많은 장인들을 소개받았다.

쇠에 은선을 넣는 입사, 금속에 무늬를 넣는 상감기법 등 “쇠와 관련한 기술은 보는대로” 익혀나갔다.

그러던 1992년. 한 사립박물관에서 조선시대 제작한 7단 자물쇠를 보고는“너무 흥분돼”

잠을 잘 수 없었단다. 자물쇠를 7번을 조작해야 열쇠가 들어갈 자리가 나타나는 자물쇠였다.

라면만 먹으면서 꼬박 4일간 연구한 끝에 자물쇠를 재현해 낼 수 있었단다.

그 열정이, 박씨의 작업실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 [불교신문 2260호/ 9월9일자]  벽제=안직수 기자 jsahn@ibulgyo.com

 

   

*** Tip 1

 

장석(裝錫)이란

목공품같은 생활용품을 제작할 때 기능의 필요성에 의해 목공예품 몸체에 부착하는

금속재료의 장식을 말하며, 금, 은, 동, 철, 백동 등 여러 금속 재료 가운데

주로 동과 주석의 합금재를 사용하여 제작된다.

 

두석장 박문열 기능 보유자는 윤희복 선생님의 문화생으로 입문해 7년 동안 가구장석과

금속공예 기술을 배운 이후 여러 가지 작품을 50여 년 동안 제작하여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과거 장석을 만들기 위한 쇠판은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든 후 망치로 두드려 넓게 늘려서 사용했으나

지금은 기계로 제작된 편편한 쇠판을 구입해 사용한다.

먼저 쇠판에 제작하고자 하는 장석의 본을 대고 그음쇠로 선을 긋거나

송곳처럼 끝이 뾰족한 그림쇠로 그림이나 글씨를 그린다.

다음 이렇게 그려진 도안의 모양에 따라 정(재단, 절단, 투각 등에 사용)으로 그으면

입체적인 문양이 드러난다. 이때 장석의 내부문양은 날정을 사용하며 구멍을 비롯한 투각된 부분은

망치로 따낸 다음 표면을 골라 다듬고 줄로 형태를 다듬어 광을 내주고 마무리한다.

 

  

*** Tip 2

   

종목 : 중요무형문화재 64호

분류 : 공예기술

소재지 : 전국

 

목가구나 건조물에 붙여서 결합부분을 보강하거나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 등의 금속제 장식을

총칭하여 장석(裝錫)이라고 하며,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황동(놋쇠) 장석을 만드는 장인을 두석장(豆錫匠)이라고 부른다.

 

두석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장식장이라 해야 옳지만, 장식이라는 말이 아주 광범한 뜻을 가진 데다가

금속장식이라 하더라도 황동 이외에 철·은·오동 등 다양한 재료를 포함하고 있어서

장식이란 말 대신 '장석'이라 표기해 구별하고 있다.

두석장이라는 용어는 『경국대전』 공조(工曹)의 경공장(京工匠) 가운데 포함된 두석장에서 연유한다.

 

장석재료로는 황동과 백동이 주류를 이루는데 일반적으로 황동이 쓰이며

보다 사치스런 장석으로 꾸미기 위해서는 백동을 쓴다.

 

제작과정을 보면 먼저 주석이나 백동을 넣은 도관을 불독 위에 얹어서 가열하여 녹이고

이것을 골판에 부어 식힌 다음 쇠까치를 만든다.

이것을 모래둑에 놓고 망치로 두들겨서 0.5㎜ 정도의 판철로 늘려 깎칼로 면을 반듯하게 깎아낸다.

여기에 본을 대어 그리고 작도와 정으로 오려서 줄로 다듬은 후

굽은 장석은 톰박 위에 놓고 두들겨 곱치고 다시 활비비로 구멍을 뚫고, 정으로 문양을 새기어

사기분말을 묻힌 걸레로 문질러 광택을 낸다.

 

장석의 종류로는

부착하는 물건에 따라 농장석, 궤장석, 의걸이장석, 벼락닫이장석, 모반장석, 전통장석 등이 있으며,

문양은 팔봉(八峰), 사모, 아자(亞字), 나비, 박쥐, 붕어, 학 등이 있다.

자물쇠는 귀자(貴字)쇠통, 비각쇠통, 거북장쇠통, 타래쇠통, 네모희자쇠통 등이 있다.

 

장석은 그 자체가 완전한 하나의 물품이 되지 못하고 한갓 부품에 지나지 않아서

소목장의 주문에 따라 특별제작되었다.

근래에는 이미 제작된 주석, 백동, 스테인레스의 판과 봉으로 장석을 만들기 때문에

전통장석의 수요부족과 함께 한국전통목가구의 전통과 맥에 커다란 문제점을 안겨주고 있어

김극천, 박문열 씨를 기능보유자로 인정하여 보전하고 있다. - 문화재청(http://www.ocp.go.kr)

 

 

   - 예물함(박문열, 두석장 보유자)

2007년 7월16일 부터 12월 30일까지 주미대사관 코러스하우스에서

한국전통무형문화재진흥재단이 주관하고 문화재청이 특별후원하는

한국 최고의 전승 공예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