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 의궤儀軌)

Gijuzzang Dream 2007. 11. 16. 00:09

 

 

 


 

‘의궤(儀軌)’란,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이다.

 

의궤는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합한 말로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전통시대에 주요한 국가적 행사가 있으면 전왕 때의 사례를 참고하여 거행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국가 행사의 관련 기록을 의궤로 정리해 둠으로써

후대에 일어날 수 있는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왕실 행사의 전범(典範), 의궤


조선시대에는 국왕의 혼인을 비롯해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잔치, 왕실의 장례, 궁궐의 건축 등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관련 기록을 모아두었다가,

행사가 끝난 후 의궤 편찬을 담당할 임시 기구를 만들어 의궤를 편찬하였다.

 

말하자면 국가적 행사를 추진할 전담 기구 설치, 행사 보고서 작성,

국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행사를 마무리했던 것이다.

의궤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철저한 기록 정신이다.

의궤는 행사의 전 과정을 철저하게 기록하는 한편, 행사 참여자의 명단, 소요된 물자와 남은 물자까지 일체의 내역을 기록하여 정치의 투명성과 공개성을 꾀하였다.


의궤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림이다.

사실, 의궤는 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나 각종 건물과 물품의 모습을 그린 도설(圖說)을 수록한 그림책이기도 하다.

통상 천연색으로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 우리는 행사가 진행되던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문자 기록만으로는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물품의 세부사항까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의궤는 기록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적인 행사 보고서라고 할 수 있겠다.



의궤에 기록된 다양한 왕실 행사들


조선시대에는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에 대해 행사의 전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의궤를 만들어 후대에 참고가 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의궤는 조선시대에 거행한 왕실 행사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의궤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의궤 중에는 국왕의 일생과 관련된 의궤가 많이 있다.

왕실에서 새 왕자가 탄생하면 그 태胎를 모아서 땅에 묻는 과정을 기록한 『원자아기씨장태의궤(元子阿只氏藏胎儀軌)』,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된 후 만들어졌던 『세자책례도감의궤』, 왕세손으로 책봉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왕세손책례도감의궤』 등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의 국왕은 대부분 전왕이 사망하고 장례가 진행되는 도중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즉위식은 기쁜 행사가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인지 국왕의 즉위식을 기록한 의궤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종 황제의 경우 왕위에 있다가 황제로 즉위했고,

즉위식 자체가 군주국에서 황제국으로 격상되는 중요한 의식이었기 때문에 이 또한 의궤가 작성되었다. 1897년에 작성된 『고종대례의궤(高宗大禮儀軌)』가 바로 그 책이다.

왕실의 혼인이 있을 때에는 『가례도감의궤』가 작성되었다.

왕비 또는 왕세자빈 선발 시, 전국적으로 금혼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삼차에 걸친 선발 과정이 일차적으로 진행되었고, 다시 여섯 가지 절차를 거쳐 혼례를 치렀다. 의궤에는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 혼수 물품, 국왕이 왕비를 맞으러 가는 과정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고, 국왕이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화려한 행렬이 ‘반차도(班次圖)’라는 그림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왕이나 왕비가 사망했을 때에는 『국장도감의궤』가, 왕세자나 세자빈이 사망했을 때에는 『예장도감의궤(禮葬都監儀軌)』가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장례 절차는 물론이고 장례에 쓰이는 상여, 기물, 부장품 등의 일체 물품이 그림으로 그려져 함께 수록되었다.

 

또한 『국장도감의궤』가 만들어질 때에는

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와 『산릉도감의궤』가 동시에 작성되었는데,

산릉도감은 무덤을 조성하는 공사를 담당한 기관으로서

『산릉도감의궤』에는 조선시대 왕릉 조성에 얽힌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밖에도 국왕과 신하들의 활쏘기 모습을 담은 『대사례의궤』,

국왕이 친히 농사의 시범을 보인 『친경의궤』, 궁궐의 악기 조성 과정을 담은 『악기조성청의궤』,

명나라 사신을 맞이한 외교 의전 관계 기록을 정리한 『영접도감의궤』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의궤에 기록된 혼례식, 즉위식, 궁중 잔치, 사신 영접 등 다양한 왕실 행사들을 문화 콘텐츠로 적극 활용한다면, 품격 있는 조선 왕실 문화의 모습들을 국내외적으로 알릴 수 있을 것이다.

 


어람용 의궤가 프랑스에 간 까닭은?


의궤는 국가 행사가 끝나면 보통 5~8부를 만들었다.

그 중 가장 정성을 들인 1부는 국왕에게 올렸다.

이를 어람용(御覽用) 의궤라 하는데, 왕이 열람한 후

국방상 안전지대로 파악되었던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내졌다.

 

어람용 의궤는 국왕이 친히 보는 만큼

사고(史庫) 등지에 보내는 일반 의궤보다 재료가 뛰어났다.

저주지가 사용된 대부분의 의궤와는 달리

어람용 의궤에는 초주지가 사용되었으며,

비단으로 된 표지, 놋쇠 변철, 국화 모양의 장식 등

품위 있는 의궤의 장정(裝幀)들은

누구라도 한눈에 어람용 의궤를 구별할 수 있도록 최상급으로 만들었다.

1866년 강화도를 침공하였던 프랑스 군대는 의궤에 유독 눈독을 들이고 이를 약탈해갔다.

의궤가 지닌 가치와 예술성이 벽안의 눈에 번쩍 띄었기 때문이리라 !


이로 인해 1993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방한 때 가지고 온

한 책의 의궤(『휘경원원소도감의궤』)만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296책의 의궤는 아직까지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필자는 2002년 1월부터 2007년 6월에 이르기까지 4번에 걸쳐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의궤의 실물 상태를 조사, 연구하는 기회를 가졌다.

12책을 제외한 대부분의 의궤가 원래의 비단 표지가 아닌 상태로 개장된 것이 아쉬웠지만,

정성들여 쓴 글씨와 품격 있는 재질의 종이, 인물의 수염 하나하나까지 자세히 나타내려고 한 그림 등

의궤의 문화재적 가치를 몸소 실감할 수 있었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어람용 의궤들이 하루 빨리 우리의 품으로 돌아와

조선시대 왕실 문화의 진수를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의궤,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다


왕실의 주요 행사를 의궤의 형태로 남긴 것은 조선시대에만 보이는 독특한 전통으로서,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형식의 의궤가 발견되지 않는다.

 

조선의 의궤는 사용된 물품의 재료 · 수량 · 빛깔까지 기록하였으며,

특히 왕실의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하급 행사 참여자의 실명을 기록한 점도 주목된다.

의궤에는 김노미(金老味), 김돌쇠(金乭金) 등 글자 자체로만 보아도 당시 천민 계층이었을

사람들의 이름이 그대로 적혀 있다. 이는 책임감과 함께 자부심을 부여한 조처로 이해된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 행사가 시리즈 형태로 정리되어 있어

왕실 행사의 변천 모습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며,

이러한 점은 세계적인 기록물 의궤의 위치를 한층 더 높이고 있다.

또한 현장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해 주고 있는 의궤 속의 반차도와 도설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전통시대의 살아 있는 모습들이다.


그리하여 2006년 우리 정부는 규장각과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의궤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해 줄 것을 신청하였고,

2007년 6월 14일 마침내 의궤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시 말해 의궤의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오늘에 이르러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기록문화의 정수라고 손꼽히는 의궤! 이들의 세계적인 가치는

영원히 우리 후손들에게 최고의 긍지로 자리할 것이다.




- 글 : 신병주 박사(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사진 제공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문화재청, 문화재포커스, 2007-08-02 

 

 

 

 

 

 

 

 기록문화의 꽃, 의궤

 

5월은 따스한 봄볕이 야외로 발길을 유혹하는 계절이다.

때마침 서울의 궁궐을 주제로 한 하이 서울 행사가 크게 열리고 있어서

도심에서 궁중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경복궁의 세종 즉위식, 창경궁의 왕실의 일상을 재현한 모습을 비롯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의 결혼식, 영조 시대의 잔치 의식 등

문화재청이나 각 지방 단체가 주관하는 왕실 행사가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오랜 역사와 전통만큼이나 풍성한 왕실 행사를 다채롭게 재현할 수 있는 데는

무엇보다 ‘의궤(儀軌)’라는 조선왕실의 기록물이 있기에 가능했다.

 


#기록과 그림이 아우러진 왕실 행사 보고서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 과정을 기록으로 정리한 책이다.

필요하면 그림을 첨부하여 행사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하게 하였다.

한자로 풀이하면 의식과 궤범을 합한 말인데,

궤범의 궤는 바퀴, 범(範)은 모범이란 뜻으로 바퀴의 궤도를 따라 가듯이 유교 이념에 따라 이전 행사를 잘 이어받고 그것을 정리하여 후대에까지 전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모범적인 전례를 만들어 놓고 이를 참고하여 선왕의 법도를 계승하는 한편,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는 것이 의궤를 만든 주요한 목적이었다.

후대인들이 앞 시기에 편찬된 의궤를 참고하여 혼례식이나 장례식, 궁중 잔치 등

국가의 주요한 행사를 원활하게 치르게 하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조선 정조의 장례 절차 등을 기록한 ‘정조국장도감의궤’ 중

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반차도’.



의궤는 조선 왕실의 주요 행사가 끝난 후에 제작하는

행사 보고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왕의 혼인을 비롯하여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잔치, 왕실의 장례, 궁궐의 건축 등과 같이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관련 기록을 모아두었다가,

행사에 끝난 뒤에 임시 기구를 만들어 의궤를 편찬했다.

국가적 행사를 추진할 전담기구 설치, 의궤라는 행사 보고서 작성, 국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 비로소 행사를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의궤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림이다.

의궤는 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나 각종 건물 또는 물품의 모습을 그린 도설(圖說)을 수록한 그림책이기도 하다. 통상 천연색으로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서 우리는 행사가 진행되던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문자기록만으로는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물품의 세부 사항까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의궤는 기록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적인 행사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의궤가 지니는 희소성과 세밀한 기록, 300여년 이상 지속되어 온 기록 등을 근거로,

2006년 우리 정부는 의궤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해 줄 것을 신청하였고,

2007년 6월 규장각과 장서각에 소장된 의궤는 ‘세계기록유산’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기록물로서 의궤는 세계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의궤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의궤에 기록된 각종 행사를 위해서는 도감(都監)이라는 임시기구가 먼저 설치되었다.

도감은 행사의 명칭에 따라 각각 그 이름이 달랐다.

◇의궤의 내용에 따라 재현한

궁중혼례. 문화재청 제공

즉 왕실의 혼례에는 가례도감, 국왕이나 왕세자의 책봉의식에는 책례도감, 왕실의 장례에는 국장도감, 사신을 맞이한 행사일 때에는 영접도감, 궁궐의 건축과 같은 일을 행할 때는 영건도감 같은 이름을 붙였으며, 이들 임시기구인 도감에서는 각기 맡은 행사를 주관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올림픽조직위원회, 월드컵준비위원회,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구성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도감은 임시로 설치되는 기구이므로 관리들이 겸직을 하는 일이 많았다. 도감의 직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총책임자에 해당하는 도제조(都提調) 1인은 정승급에서 임명되었으며, 부책임자급인 제조(提調) 3∼4명은 판서급에서 맡았다.

실무 관리자들인 도청(都廳) 2∼3명, 낭청(郎廳) 4∼8명 및 감독관에 해당하는 감조관(監造官) 6명은 당하관의 벼슬아치들 중에서 뽑았으며, 그 아래에 문서작성, 문서수발, 회계, 창고정리 등의 행정 지원을 맡은 산원(算員), 녹사(錄事), 서리(書吏), 서사(書士), 고지기(庫直), 사령(使令) 등이 수명씩 임명되었다.

이외에 화원, 장인 등 실제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부서별로 배치하였고,

의궤가 만들어질 때 이들의 실명(實名)을 꼭 기록하여 책임감과 함께 자부심을 부여하였다.

도감에서는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 과정을 날짜순으로 정리한 문서들을 수집하였다.

일방, 이방, 삼방 등 부서별로 담당한 업무 내용을 정리하였고,

필요하면 도설과 반차도와 같은 그림 자료들을 첨부하였다.

행사 후 도감과 각 방에서 모아진 문서들을 정리했고, 이를 토대로 의궤가 제작되었다.

 

# 의궤에 기록된 다양한 왕실 행사

의궤에는 조선시대에 행해진 다양한 왕실 행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이 왕조국가인 만큼 주로 왕실 행사와 관련된 것들이며, 왕실의 일생을 보여주는 의궤들이 많다.

왕실의 태(胎)를 봉안하고 주변에 석물을 조성한 과정을 보여주는 태실의궤를 비롯하여,

왕이 자라면서 죽을 때까지 겪는 삶의 과정 대부분이 의궤의 기록으로 구현되었다.

먼저 왕자가 왕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왕세자의 책봉 의식과

선왕을 이어 왕이 되는 책봉 과정에 관한 의궤가 있다.

왕비도 왕과 함께 왕비 책봉식을 하는데 이에 관한 행사는 ‘책례도감의궤’로 정리하였다.

대개 왕세자 시절인 15세 전후에 이뤄지는 왕의 혼례식도 꼭 의궤로 정리하였다.

왕실의 혼례식을 가례라 하였는데, 혼례식을 정리한 ‘가례도감의궤’는

조선 왕실의 최대 축제였던 만큼 그림도 많이 첨부되었고 내용도 풍부하였다.

◇1759년 영조가 계비 정순왕후를 맞이할 때의 혼례절차를 기록한

‘가례도감의궤’의 그림.

계일보 자료사진


의궤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왕실의 장례와 관련된 의궤이다.

유교사회인 조선사회는 왕부터 백성까지 조상의 장례를 잘 거행하고 이후의 제사 의식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이다.

왕이나 왕비가 사망하면 장례식이 엄숙하게 행해졌고,

장례식의 전 과정은 ‘국장도감의궤’로 편찬하였다.

이어 왕의 무덤을 조성한 과정을 정리한 ‘산릉도감의궤’가 편찬되었고, 왕의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은 ‘부묘도감의궤’로 정리되었다.

 


이제 왕이 되면 주관하는 행사가 많아지는 만큼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의궤가 편찬되었다.

 

왕이 친히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종묘의궤’와 ‘사직서의궤’를 비롯하여,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왕이 친히 농사를 짓는 과정을 정리한 ‘친경의궤’가 편찬되었다.

여성이 옷감을 짜는 것이 중시되었기에 왕비는 누에에서 실을 뽑아 옷을 짜는 친잠 행사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행사의 전 과정은 ‘친잠의궤’로 편찬되었다.

왕실 행사 중 잔치의 비중도 컸다.

대왕대비나 왕대비 등 왕실의 최고 여성을 위해 벌이는 잔치 행사, 왕이 40세, 50세, 회갑이 되는 것

등을 기념하는 행사가 추진되었고, 잔치가 끝난 후에는

‘풍정도감의궤’ ‘진연의궤’ ‘진찬의궤’ ‘진작의궤’ 등 잔치 관련 의궤가 만들어졌다.

‘진연’은 ‘잔치를 베푼다’는 뜻이며, ‘진찬’은 음식을 대접한다는 뜻이며,

‘진작’은 ‘작위(爵位)을 올린다’는 뜻으로 모두 경사를 맞이하여 잔치를 베푸는 의식을 말한다.

왕실에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식 후에는 ‘존호도감의궤’가 만들어졌다.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고,

건축의 전 과정과 각 건물의 도면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궁궐의 건축이나 성곽의 건축을 한 후에도 꼭 의궤를 만들었다.

건축 관련 의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조가 지금의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고,

건축의 전 과정과 각 건물의 도면까지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이다.

창경궁, 창덕궁, 경운궁 등 조선의 궁궐을 수리한 과정을 정리한 의궤들도 있으며,

화기(火器) 제작의 과정을 기록한 ‘화기도감의궤’가 제작되었다.

이외에 자격루, 측우기 등 과학기구들을 활용하고 보관하는 건물을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보루각수개의궤’와 ‘흠경각영건의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왕이 성균관에 친히 행차하여 신하들과 활쏘기 시합을 하고

과녁을 맞힌 수에 따라 상과 벌을 주고받았던 의식의 과정을 기록한 ‘대사례의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사신을 맞이한 상황을 정리한 ‘영접도감의궤’,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위하여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화성에 행차하였던 모습을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 궁중에서 필요한 악기를 만들었던 상황을 기록한 ‘악기조성청의궤’ 등을

통해서는 조선시대 다양한 왕실 행사의 생생한 현장 모습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최근 창경궁에서 열린

영조 어연례(御宴禮) 오순잔치 재현행사.



세상에 태어나는 첫 징표인 왕실의 태를 봉안하는 의식부터 시작하여

왕의 혼이 종묘에 모셔져 영원히 기억되게 하는 의식까지, 왕의 일생은 의궤의 기록으로 남았다.

이런 점에서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문화 전통을 복원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다.

서울은 궁궐을 비롯하여, 종묘와 사직, 성곽, 청계천까지

전통의 유산들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계기록유산인 의궤의 기록에 나타난 궁중 행사들이

역사와 문화 공간인 궁궐이나 종묘 등에서 활발하게 재현된다면,

우리만의 독특한 왕실 문화를 내외국인들에게 널리 보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⑫ 2008=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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