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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기록문화의 꽃 <의궤> - 자료찾아보기

Gijuzzang Dream 2007. 11. 15. 15:29

 

 

 

 

국립고궁박물관 대강당에서 2007년 10.30『의궤 학술심포지엄』을

의궤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기획하였다.

그래서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의궤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국민과 함께 기념하고,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이루어진 분야별 의궤 연구성과를 검토하며,

현재 의미와 미래 가치를 논의하고,

또한 이 기회에 유네스코의 인류문화유산 지정(등록) 제도에 대해 소개하고,

아직까지 의궤가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의궤의 지정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제안한다.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크게 세 개의 큰 주제로 구성하였다.

첫 번째는 ‘기록유산으로서 조선왕조의궤’,

두 번째는 ‘의궤란 무엇인가’,

세 번째는 ‘의궤의 가치와 현재적 활용’이다.

‘기록유산으로서 조선왕조의궤’(제1 주제)에서는

유네스코가 추진하는 세계문화유산 지정(등록) 제도를 총괄적으로 설명한다.

IAC 위원으로서 의궤 등재 논의에 참여한 서경호 교수(서울대)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이루어지는 논의 과정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생생히 들려준다.

서병패 위원(문화재청)은 이번 심포지엄의 중요한 의제인 《조선왕조의궤》를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하기 위한 공식적인 논의를 제안한다.

‘의궤란 무엇인가’(제2 주제)에서는

의궤의 개념과 종류, 제작과 보관·관리 전통, 의궤의 소장 현황 및 소장처별 성격 등을 통해

의궤의 구체적인 실체에 한걸음 다가서게 하는 디딤판 역할이다.

‘의궤의 가치와 현재적 활용’(제3 주제)은,

의궤는 과연 어떤 가치와 활용 가능성을 갖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한국사, 미술사, 음식사, 건축사 분야 연구자들이

각 분야에서 의궤가 어떻게 연구되고 활용되고 활용될 수 있는가를 통해

의궤 연구의 현재를 되짚어 보게 한다.


의궤는 옛날 책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해하기 힘든 글씨만 빼곡한 책이 아니다.

그 기록의 엄정성도 감탄스럽지만,

엄선된 닥종이에 전문적인 사자관(寫字官)이 붉은 선을 따라 또박또박 쓴 글씨와

당대 손꼽히는 궁중화가가 그린 화려한 채색 그림, 비단이나 물들인 종이로 고급스럽게 표지를 대고

국화동으로 장식한 변철로 제본한 겉모습 등등은

의궤가 ‘조선왕조 기록문화의 꽃’으로 평가되는 이유를 당당히 웅변한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자료 보기  

 

  ebook바로보기>> http://211.57.113.12/EzBookViewer/bookmain.asp?foldername=69695&id=admin 

 

 

 

 

 

 

외규장각의 의궤

 

 

1782년(정조 6년) 2월 당시 국왕 정조의 비상한 관심 아래 추진되었던,

‘강화도 외규장각 공사의 완공’을 알리는 강화 유수의 보고가 올라왔다.

정조가 강화도에 외규장각의 기공을 명령한 지 11개월이 지난 즈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외규장각에는 왕실의 자료를 비롯한 중요 서적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보관되었고,

이후 100여년간 외규장각은 조선 후기 왕실문화의 보고가 되었다.

1784년에 편찬된 ‘규장각지’에 따르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행궁(行宮)의 동쪽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외규장각은 인조 이래 강화도에 행궁과 전각이 세워지고

왕실 관계 자료들이 별고(別庫)에 보관된 것을 계기로,

국방상 안전하고 보다 체계적으로 이들 자료를 관리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어람용 의궤 대부분은 외규장각에 보내졌다.

어람용 의궤는 국왕이 친히 열람을 하는 만큼

사고(史庫) 등지에 보내는 분상용(分上用) 의궤보다 종이의 질이나 장정 면에서 훨씬 뛰어났다.

초주지가 사용된 대부분의 의궤와는 달리 어람용 의궤에는 저주지가 사용되었다.

비단 표지, 놋쇠 변철, 다섯개로 표지를 박은 국화 모양의 장식,

화려한 왕실 행사의 모습을 정성껏 담은 그림 등 품위를 갖춘 책의 모습은

문외한이라도 한눈에 이 책이 범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외규장각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1866년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했던

외규장각 소장 ‘휘경원 원소도감의궤’라는 책을 한국 정부에 반환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이후였다.

1993년 프랑스에서 의궤 2책이 반환되어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의궤의 선명한 글씨와 두꺼운 종이, 화려한 채색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

의궤가 원형의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은 뛰어난 종이로 만든 데다

의궤에 쓰인 그림 물감을 천연의 광물이나 식물에서 채취하여 색채의 생명력이 오래 갔기 때문이었다.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의 프랑스군이 퇴각하면서 의궤를 집중적으로 약탈해 간 것은

벽안의 눈에도 이들 책이 눈에 번쩍 띄었기 때문이었으리라.

2002년 필자는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을 찾았다.

외교통상부의 후원으로 이곳에 소장된 외규장각 의궤의 현재 모습을 직접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의궤의 반환을 요청하는 한국측의 입장 때문에 프랑스측의 극심한 견제가 있었지만

297책의 의궤 실물을 모두 조사할 수 있었다.

10책을 제외한 대부분 의궤의 표지가 원래의 모습이 아니고 개장된 형태여서 아쉬움을 더했지만

의궤들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300~400년의 세월 속에서도 변질되지 않은 지질과 선명한 글씨,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채색화 등은 어람용 의궤의 가치를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당장 이들 의궤의 반환은 어렵더라도 의궤가 한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재임을

해외에 널리 알리는 방안들은 다각적으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1866년 강화도를 침공했던 프랑스 해군 장교 주베르가

‘이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고백했듯이,

조선인들은 누구나 책을 가까이 한 문화민족이었다.

그리고 그 조선문화의 최선봉에 규장각과 외규장각이 있었다.

최근 강화도에서는 외규장각 건물이 복원되었다.

이러한 문화 유산의 현장을 찾아보면서 조상들의 지혜와 저력을 본받는 것은

이제 우리 후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 신병주/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 경향 [샘이깊은물]43, 2004년 09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