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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의궤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Gijuzzang Dream 2007. 11. 15. 14:36
 

 

 

 

 

조선왕조의 의궤(儀軌)

 

   

 

    

 

  - 정조국장도감의궤 중 반차도

 

 

의궤에서 의(儀)는 의례·의식을 뜻하며 궤(軌)는 규범을 의미한다.

의궤는 ‘의식(儀式)의 규범(規範)’이라는 뜻이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일종의 행사 보고서, ‘결과보고서’이다.

지난 6월 기록문화유산을 심의하는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가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제경판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결정했는데

유네스코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방대하고 치밀하면서도

놀라운 예술성을 갖고 있는 것이 놀랍다”며 등재 이유를 밝혔다.

 

조선왕조 의궤만큼

우리에게 자부심과 분노, 부끄러움 등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문화재가 또 있을까.

등재 신청 1년여 만에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자리매김한 의궤는

그러나 서울대 규장각(546종 2940책),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287종 490책) 소장본 어느 것도

국보, 보물 심지어 중요민속자료로도 지정돼 있지 않다.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기록문화의 꽃’이 정작 국내에서는 홀대받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강화도 외규장각 의궤(191종 297책)와

일본 궁내청 소장 오대산본(71종 154책)을 비롯해 해외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2007년 10월 현재 총 7만6143점이다. 이 중 환수된 문화재는 4878점으로 6.4%에 불과하다.

 

프랑스가 병인양요(1866년)때 약탈해간 의궤는 어람용이 다수 포함돼 있어

그 문화재적 가치가 특히 높다.

외규장각 의궤는 1990년대 초반 고속철도(TGV) 구매 대가로 반환받기로 약속받았지만

프랑스는 외규장각 고서 ‘휘경원원소도감’을 돌려준 뒤 고속철도를 팔자

입장을 바꿔 반환을 미루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 7월 외교통상부 주관 하에 외규장각 반환을 위한 정책포럼을 가졌으며,

이와 별도로 외규장각 도서 디지털화 사업을 연내에 마무리해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최종덕 국제교류과장은 “프랑스 측이 우리의 외규장각 유일본 의궤 반환(혹은 임대) 요구에 대해

동일한 가치를 지닌 같은 수의 고서와 맞바꾸자는 조건을 달고 있어

협상에 진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정부는 외규장각 고서를 약탈한 비슷한 시기(1875년)에 뉴질랜드에서 밀수입된

‘마오리족 전사의 두상 미라’를 되돌려주겠다는 루앙시의 최근 결정에

“프랑스 박물관 소장품을 무조건 반환해야 하는 선례를 남길 수 있다”고 제동을 걸기도 했다.

- 2007. 10. 29 세계일보 ⓒ송민섭 기자

 

 

 

 -  경모궁 의궤(1784)

- 경모궁 본궁전도설 / 경모궁 향사반차도설

 

 

 

 - 사직서 의궤(1783)

 

   

 

(1) '조선왕조 의궤'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문화재청 3월 30일 외교통상부를 통해「조선왕조 의궤」와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 경판」등 2건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 신청하였다.

이번에 등재 신청하는 2건의 유산은 지난해 세계기록유산 신규 등록 대상 공모 등을 통해 추천받은

기록유산 총 14건 중에서 전문가 자문회의 및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선정되었다.

 

이번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신청한「조선왕조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 행사의 주요한 내용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으로,

서울대 규장각 소장된 546종 2,940책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287종 490책이다.

조선왕조 의궤는 우리나라 뿐 만아니라 프랑스와 일본 등에도 다수가 소장되어 있으며

우리정부는 프랑스와 일본 소장본도 세계기록유산 신청목록에 추가하기 위해 협의를 진행 중에 있다.

 

의궤는 국왕이 열람할 것을 전제로 편집되었기 때문에

당대 최고 수준의 전문가에 의해 필사되고 장정되었으며 300여 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

국가 의례를 중심으로 조선의 거의 모든 주요 국가 행사에 대한 기록을 정리 집성한 것으로써

유교적 국가의례가 주변 국가의 변화에 따라 어떠한 변용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유산이다.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 경판」은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87,000여장의 경판들로써,

이미 사라진 초기 목판제작술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동북아시아의 정치, 문화, 사상의 흐름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역사기록물이다.

특히 우리에게 팔만대장경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고려대장경판은

고려시대인 1237년에서 1248년까지 12년에 걸쳐서 목판으로 새겨진 불교 대장경판으로

이전의 모든 대장경들의 내용을 총 수집하여, 정리하고 다시 각각의 대장경들을 대조하여

교정, 가감, 배열한 가장 완벽한 불교문헌 목판 인쇄물이다.

고려대장경판은 이후 일본, 중국, 대만에서 간행된 대부분의 대장경의 모본이 되었다.

또한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어

이번에 해인사 대장경판이 세계기록유산 으로 등재되면

대장경판의 보관시설(하드웨어)과 역사적 기록물(소프트웨어)이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게 돼

명실상부한 세계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더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조선왕조 의궤」와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 경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여부는

서류보완 기간과 2007년 상반기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소위원회의 심사평가를 거쳐

2007년 6∼7월경 IAC 정기회의(매 2년)에서 결정되며,

2007년 하반기에 유네스코 사무총장에 의한 최종 승인결정 및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한편 '세계기록유산'은 유네스코 '세계의 기억(Memory of the World)' 사업의 하나로

인류의 소중한 기록유산을 가장 적절한 기술을 통해 보존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기록유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1992년부터 추진해온 사업이다. 현재 59개국의 120건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우리나라는 1997년에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이, 2001년에 승정원일기, 직지심체요절이 등재되었다.

- 2006. 3. 30, 연합뉴스 보도자료

 

 

 

 

 

 

 

 

 

   - 영조정순후 가례도감도청 의궤, 반차도

 가례도감 편, 1759년(영조 35), 2책, 필사본, 45.8X33cm

반차도는 1759년 6월 영조와 정순왕후의 친영(親迎: 별궁으로 가서 왕비맞이하기)을 담고 있다.

영조가 별궁인 어의궁(於義宮)으로 가서 계비 정순왕후(1745~1805)를 모셔오는 장면을 그렸다. 

 

   

 

(2) '조선왕조 의궤'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된 546종 2,940책의 각종 의궤

-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된 287종 490책의 각종 의궤

 

의궤는 조선왕조에서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국가 의례를 중심으로 국가의 중요 행사를

행사 진행 시점에서 당시 사용된 문서를 정해진 격식에 의해 정리하여 작성한 기록물이다.

같은 유교문화군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의궤의 체계적인 편찬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의궤는 조선시대 600여 년에 걸쳐(1392-1910)

왕실의 주요 행사, 즉 결혼식, 장례식, 연회, 사신영접 등 뿐 아니라,

건축물·왕릉의 조성과 왕실문화활동 등에 대한 기록이 그림으로 남아져 있어

600여 년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총 3,895 여권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의궤는 왕실의 주요한 의식이 시기별,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조선왕조 의식의 변화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비교연구, 이해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반차도, 도설 등 행사모습을 묘사한 시각 콘텐츠는 오늘날의 영상자료처럼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예컨대 정조의 능행도(陵幸圖)는 전 여정을 15.4m에 걸쳐 표현하고 있다.

이런 형태(시각중심 visual-oriented)의 기록유산은

뛰어난 미술장인과 사관의 공동작업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의궤는 장기간에 걸쳐 조선왕조의 주요 의식을

방대한 양의 그림과 글로 체계적으로 담고 있으며

이러한 유형은 동서양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기록유산의 가치(outstanding value of documentary heritage)를 지니고 있다.

 

세계사 맥락에서 유교의 중요성이 저평가되고 있는 면이 없지 않다.

유교는 세계의 조그만 한쪽 구석에 존재했던 문화가 아니다.

유교가 지배했던 영토는 그 면적으로 볼 때 서유럽보다도 몇 배나 컸으며

인구수에 있어서도 유럽, 서남아시아 및 중동을 초과하는 큰 규모였다.

유교권은 최소 14세기까지 전세계를 2~3개 권역으로 분할하던 주요 문화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수차례에 걸친 야만족의 침입과 이들에 의한 점령으로 인해

시간이 경과하며 전통 의식은 원형을 점차 잃어갔다.

특히 몽골 침입 기간 동안 유교 의식을 수록한 문헌 상당수가 소멸됐다.

이에 반해 한국은 그러한 침입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전통 유산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며

천 년 동안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고 유교 의식을 봉행하는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의궤는 대부분의 유교사회에서 잊혀진 과거 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기록이다.

또한, 의궤는 조그마한 군주국가의 기록이 아니라,

한때 세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유교 전통의 핵심을 대표하는 기록이다.

 

조선왕조 의궤는

2007년 6월 제8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6.13∼15, 남아공 프레토리아)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문화재청, 게시일 2007년 10월23일 

 

 

★☆★ 세계기록유산 (Memory of the World)

① 훈민정음 (1997.10.1 등재)

② 조선왕조실록 (1997.10.1 등재)

③ 직지심체요절 하권 (2001.9.4 등재)

④ 승정원일기 (2001.9.4 등재)

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2007.6 등재)

⑥ 조선왕조 의궤 (2007.6 등재)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明成皇后 國葬都監儀軌)

 

 

'조선왕실의궤 환수위(공동의장 월정사 주지 정념 · 봉선사 주지 철안 · 국회의원 김원웅)' 위원들이

자리를 잡았다. 2007년 5월 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지방법원 앞 마당.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의 환수를 위해
일본을 상대로 '민사조정신청서'를 접수하기에 앞서 성명서를 낭독하기 위함이었다.

환수위가 밝힌 자료에 의하면,
현재 일본에는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와 <보인소 의궤> 등 총 72종의 조선왕실의궤가 있다고 한다. 
 

을미사변(1895년 10월8일, 양력)으로 시해 당한 명성황후(1851-1895)의 국상에 대한 기록으로

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봉하고 홍릉(洪陵)으로 이장할 때의 국장 절차와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왕비릉은 원래 능호를 숙릉(肅陵)으로 정하고

양주의 숭릉(崇陵: 현재 동구릉의 현종 릉) 오른쪽에 조성했다가 1897년 홍릉으로 바꾸었다. 

이 의궤는 국장이 끝난 1897년 10월 28일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1898년 5월20일 완료하였다.

7건의 의궤는 규장각 · 시강원 · 의정부 · 비서 원 · 장례원 · 정족산사고 · 오대산사고에 각각 보관하였다.

이중 규장각과 시강원에 보관된 것은 궁중용의궤로 5권 5책으로 되어 있고

의정부 · 비서원 등에 보관한 부본(副本)은 4권 4책으로 되어 있다. 

 

2년 2개월간에 걸쳐 진행된 명성황후의 국장은 역대 조선왕실에서 가장 오래 걸린 국장으로,

이 의궤는 조선시대 제작된 국장도감의궤 중 가장 길다.

이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는 일본 국내청 일황궁 서릉부에 보관되어 있다.
 

       

 

 

 

   국장도감 편,1898년(광무 2), 5책, 필사본, 45.4 X 31cm

반차도의 중심내용 그림은 경복궁에 있었던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을 경운궁으로 옮길 때의 행렬과

명성황후의 재궁(梓宮, 관)을 실은 상여행렬이 홍릉으로 가는 행렬의 그림으로

당시 막 서양에서 들어온 초록색 물감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그렸으며,

수행한 군사들의 서양식 총검으로 당시 시대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도판에 수록된 의궤는 시강원에 보관된 것으로,

붉은색의 비단 표지와 화려한 외부 장식은 이 의궤가 어람용으로 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차도는 국장 행렬에서 대여(大擧)부분이다. 

‘명성황후 국장도감 의궤'의 겉표지에는 붉은색 바탕에 ‘오대산 上'이라는 글자가 뚜렷해

이 의궤가 오대산 사고에 보관됐던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 마지막 장에 붉은색 도장으로 ‘대정 11년 5월 조선총독부 기증'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어

1922년 조선총독부가 일본 황실로 의궤를 반출해 간 정황을 짐작하게 한다.   

 

- 보인소의궤

 

함께 공개된 <보인소 의궤>는 고종 13년(1876년) 11월 경복궁에 불이 나 옥새가 소실되자,

같은해 12월 담당 관청인 보인소에서 옥새와 인장 11과를 새로 만들면서

제작과정 등을 기록한 보고서로 옥새 제작에 관한 유일한 자료다. 

 

 

 

 

 

 

 

 

 

 조선왕조 의궤의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Ⅰ. 의궤의 현황

 

조선시대에는 궁중의 여러 의식에 대한 의궤가 많이 만들어졌으나

현재 임난 이전의 의궤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17-1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제작된 의궤는 상당히 많은 양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규장각 소장본 546종 2,940책, 장서각 소장본 287종 490책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규장각본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지방의 정족산ㆍ태백산ㆍ오대산사고 등에 소장되었던

의궤를 주로 하여 규장각을 비롯한 서울의 춘추관ㆍ예조ㆍ의정부ㆍ종부시 등 소장본이 통합된 것으로

1910년에 규장각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취조국으로 이관,

1928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1946년 서울대학교도서관을 거쳐

1992년 서울대학교규장각에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장서각본은 무주 적상산사고에 소장되었던 의궤를 주로 하여 봉모당(奉謨堂)에 소장되었던 의궤와 1911년 이후 이왕직(李王職)에서 제작된 의궤가 통합된 것이다.

이들 자료는 1910년 이왕직 도서실로 이관되어 1945년 구황실사무청 장서각,

1955년 구황실재산사무총국 창경원사무실, 1961년 문화재관리국 창경원사무실 장서각,

1968년 문화재관리국 장서각사무소로 옮겨져서 관리되어 오다가

1981년에는 장서각의 모든 도서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이관됨으로서

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소장처별, 왕조별 의궤의 종수(種數)를 보면 다음과 같다.

(種數에 대한 통계는 조선왕조의 의궤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서에 첨부된 목록을 기준으로 함)

 

-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의궤현황 -

선조

광해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1911년

이후

규장각

5

19

32

12

16

59

11

115

41

63

30

43

9

19

546

장서각

1

6

7

12

34

5

54

19

29

13

16

53

20

18

287

5

20

8

19

28

93

16

169

60

92

43

59

144

29

18

833

 

위 표를 통해서 보면 왕의 재위기간에 따라 의궤의 편찬수가 달라지기는 하나

영조는 통치기간이 길었던 만큼 가장 많은 의궤가 제작되었다.

고종대에는 고종의 모후인 신정왕후(익종비) 조씨가 83세의 장수를 누린 데 대한 이유로

존호(尊號)와 잔치에 관한 의궤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그 수가 많다.

1911년 이후에는 엄비(嚴妃), 고종, 순종의 장례식과 관련된 의궤를 비롯하여

이왕직에서 실행하던 제사와 관련된 의궤들로서 대부분 이왕직에서 제작한 것이며

장서각에만 소장되어 있다.

현재 남아있는 의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 34)에 편찬된

선조비 의인왕후의 『의인후빈전혼전도감의궤』와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이다.

 

 

 

Ⅱ. 의궤의 유형

 

1. 종묘ㆍ사직

종묘사직의 연혁과 구성 및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와 같은 국가의 제사의식

<사직종묘문묘제기도감의궤(社稷宗廟文廟祭器都監儀軌)>, <종묘의궤(宗廟儀軌)>,

<종묘의궤속록(宗廟儀軌續錄)>,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사전별의궤(祀典別儀軌)>,

<종묘영녕전의궤(宗廟永寧殿儀軌)> 등

 

2. 가례ㆍ하례

왕실의 결혼, 즉위 등과 관련된 의식

<(仁祖莊烈后)嘉禮都監儀軌>, <(顯宗明聖后)嘉禮都監儀軌>, <왕세자도감의궤(王世子都監儀軌)> 등,

고종의 황제즉위식인 <대례의궤(大禮儀軌)>,

임금과 신하의 조회(朝會) <친림정부시의궤(親臨政府時儀軌)> 등

 

3. 책봉ㆍ책례ㆍ관례

왕세자ㆍ왕세손의 책봉, 책례 및 관례에 관련된 의식

<(昭顯世子)冊禮都監儀軌>, <(顯宗)王世孫冊禮都監儀軌>, <의왕영왕책봉의궤(義王英王冊封儀軌)>, <은언군은신군관례도감의궤(恩彦君恩信君冠禮都監儀軌)> 등

 

4. 국장ㆍ상례

왕과 왕비의 국장의식과 세자와 세자빈의 예장의식에 관한 의궤

<(宣祖)國葬都監一房儀軌>, <(文孝世子)禮葬都監儀軌>, <(顯穆綏嬪)葬禮都監儀軌>,

<(仁祖)國恤儀軌>, <(獻敬惠嬪)喪禮都監儀軌>, <고종태황제어장주감의궤(高宗太皇帝御葬主監儀軌)>

 

5. 부묘(祔廟)

왕의 3년상을 마친 다음에 그 신주를 태묘(太廟)에 모시는 의식과

세자와 세자빈을 소상 후에 별묘(別廟)에 입묘(入廟)시키는 의식

<(孝宗)祔廟都監儀軌>, <(顯宗)祔廟都監儀軌>, <효명세자입묘도감의궤(孝明世子入廟都監儀軌)> 등

 

7. 장태(藏胎)

왕실의 태실(胎室) 봉안 의식

<원자아기씨장태의궤(元子阿只氏藏胎儀軌)>, <태조대왕태실수개의궤(太祖大王胎室修改儀軌)> 등

 

8. 능(陵)ㆍ원(園)ㆍ묘(墓)

왕릉과 원(園)ㆍ묘(墓)의 조성과 이장에 관련된 의식

<(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 <(孝宗寧陵)天陵都監儀軌>, <건릉천봉도감의궤(健陵遷奉都監儀軌)>,

<강릉개수도감의궤(康陵改修都監儀軌)>, <경원원소도감의궤(慶園園所都監儀軌)>,

<연경묘소도감의궤(延慶墓所都監儀軌)> 등

 

9. 시호(諡號)ㆍ묘호(廟號)

왕실 묘호ㆍ시호를 내리는 의식

<선조묘호도감의궤(宣祖廟號都監儀軌)>, <시호도감의궤(諡號都監儀軌)>,

<민회빈복위선시도감의궤(愍懷嬪復位宣諡都監儀軌)>, <상시봉원도감의궤(上諡封園都監儀軌)>,

<영조묘호도감의궤(英祖廟號都監儀軌)> 등

 

10. 존숭(尊崇)ㆍ추존(追尊)

왕실의 존호ㆍ상호ㆍ추숭 관련 의식

<재존호도감의궤(再尊號都監儀軌)>, <추숭도감의궤(追崇都監儀軌)>,<존숭도감의궤(尊崇都監儀軌)>, <상호도감의궤(上號都監儀軌)>, <가상존호도감의궤(加上都監儀軌)>,

<추상존호도감의궤(追上尊號都監儀軌)>, <추존시의궤(追尊時儀軌)> 등

 

11. 보인(寶印)

금보(金寶)ㆍ옥인(玉印)ㆍ보인(寶印)의 개수, 개조, 보수, 제조에 관한 의궤

<금보개조도감의궤(金寶改造都監儀軌)>, <옥인조성도감의궤(玉印造成都監儀軌)>,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

 

12. 어진(御眞)ㆍ영정(影幀)의 모사(模寫)

왕실 어진과 이모(移模) 제작에 관한 의궤

<영정수보도감의궤(影幀修補都監儀軌)>, <(肅宗)御容圖寫都監儀軌>,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都監儀軌)>, <어진이모도감청의궤(御眞移模都監廳儀軌)>,

<영정모사도감보완의궤(影幀模寫都監補完儀軌)>, <어진모사도감의궤(御眞模寫都監儀軌)> 등

 

13. 영접(迎接)

외국 사신의 영접 관련 의식

<영접도감사제청의궤(迎接都監司祭廳儀軌)>, <영접도감도청의궤(迎接都監都廳儀軌)>,

<영접도감미면색의궤(迎接都監米麵色儀軌)>, <영접도감반선색의궤(迎接都監盤膳色儀軌)>,

<영접도감응변색의궤(迎接都監應辯色儀軌)>, <영접도감연향색의궤(迎接都監宴享色儀軌)>,

<영접도감군색의궤(迎接都監君色儀軌)>, <영접도감잡물색의궤(迎接都監雜物色儀軌)>

 

14. 진연(進宴)

왕실의 잔치의식

<진연의궤(進宴儀軌)>, <(純祖己丑)進饌儀軌>, <진작의궤(進爵儀軌)>, <수작의궤(受爵儀軌)>,

<혜경궁진찬소의궤(惠慶宮進饌所儀軌)>, <자경전진작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

 

15. 군사(軍事)

화약무기 제조 및 활쏘기에 관한 의궤

<화기도감의궤(火器都監儀軌)>,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

 

16. 선원보(璿源譜)

왕실의 족보 제작에 관련된 의궤

<선원보략개간의궤(璿源譜略開刊儀軌)>, <선원보략수정청의궤(璿源譜略修正廳儀軌)>,

<선원보략수정시교정청의궤(璿源譜略修正時校正廳儀軌)>,

<선원보략수정시종부시의궤(璿源譜略修正時宗簿寺儀軌)>

 

17. 실록찬수(實錄纂修)

실록의 제작 과정

<실록찬수청의궤(實錄纂修廳儀軌)>, <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宣祖大王修正廳儀軌)>,

<효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 <현종대왕실록수정청의궤>, <숙종대왕찬수청의궤>,

<단종대왕실록부록찬집청의궤(端宗大王實錄附錄撰緝廳儀軌)>, <영조대왕실록청의궤>,

<경종대왕수정실록의궤>, <정종대왕실록산절청의궤(正宗大王實錄刪節廳儀軌)>,

<순종대왕실록청의궤>, <헌종대왕실록청의궤>, <철종대왕실록청의궤> 등

 

18. 출판

<천의소감찬수청의궤(闡義昭鑑纂修廳儀軌)>, <국조보감감인청의궤(國朝寶鑑監印廳儀軌)>,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儀軌)>,

<국조보감감인소의궤(國朝寶鑑監印所儀軌)>

 

19. 친경(親耕)ㆍ친잠(親蠶)

국왕의 친경(親耕) 및 왕비의 친잠(親蠶)의식

<친경의궤(親耕儀軌)>, <친잠의궤(親蠶儀軌)>, <장종수만의궤(藏種受滿儀軌)>

 

20. 궁궐 영건ㆍ수리

궁궐의 건축 및 수리, 화성건축

<창경궁수리도감의궤>,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 <집상전수개의궤(集祥殿修改儀軌)>,

<인정전영건도감의궤>,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 <경덕궁수리소의궤>,

<경운궁중건도감의궤>, <중화전영건도감의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21. 공신녹훈(功臣錄勳)

공신의 녹훈 과정과 절차에 관한 의식

<(扈聖宣武淸難三功臣)功臣都鑑儀軌>, <(昭武寧社)錄勳都監儀軌>,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 <분무녹훈도감의궤(奮武錄勳都監儀軌)> 등

 

22. 행행(行幸)

왕실의 능행행사 의식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23. 악기

악기조성에 관한 의궤 -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 <악기조성청의궤> 등

 

24. 기타

<추쇄도감의궤(推刷都監儀軌)> 등

 

   

 

 

Ⅲ. 의궤의 형태

 

1. 판본 사항

의궤는 필사본과 활자본으로 제작되었다.

활자본으로 제작된 경우는 정조 말년부터 순조ㆍ헌종ㆍ고종대 까지 정리자판(整理字版)으로 찍은

몇 예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고 대부분 필사본이다.

 

필사본은 문자기록과 현장 그림이 합쳐진 점에서 가장 독특하다.

문자기록도 행사에 사용된 문서를(관청간 업무협조를 위해 오고 간 문서들로서

啓辭, 禮關, 移文, 來關, 稟目, 甘結, 書啓 등) 그대로 전사(傳寫)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림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도설(圖說)’이라 하여 행사에 쓰인 주요도구들이나 행사와 관련된 건물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해 놓았다. 또 하나는 ‘반차도(班次圖)’라 하여 의식과 관련된 참가자들의 행렬모습을

화원(畵員)의 손을 빌어 천연색으로 그린 것이다.

이는 기록화인 까닭에 반차도에 등장하는 인물의 관직을 일일이 써넣었고

참가자들의 복장이나 의장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행렬에는 대개 작으면 수백 명, 많으면 수천 명이 참여하므로

반차도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인 동시에 생동감이 넘치며 규모에 있어서도 크다.

 

필사본에는 임금이 보는 ‘어람용(御覽用)’과

각 관청이나 사고(史庫) 등에 나누어 비치할 ‘분상용(分上用)’으로 나뉜다.

이 같은 의궤는 주제나 지위에 따라 4건에서 9건까지 작성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1-2건이 더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분상처를 보면 정조 이전에 6건이 작성되었을 경우 예조와 사대사고에 분상하였고,

8건의 경우 의정부, 예조, 춘추관 및 사대사고에 분상되었으나,

정조 때 규장각이 설립된 이후 분상처가 의정부에서 규장각으로 바뀌었다.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황태자용 의궤’를 1건 더 만들어 시강원(侍講院)에 분상되었고,

그 후 고종이 태황제로 물러나면서 ‘태황제용 의궤’가 1건 더 늘어났다.

그 대신 규장각에 올린 의궤는 보통 의궤로 격하되었다.

전문 필사자가 필사한 것이므로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한 권 한 권 필사되었기 때문에 유일본의 성격을 갖는다.

 

활자본은 왕실 잔치에 관련한 의궤와 화성건설에 관한 의궤이다.

활자로 편찬되어 발행부수가 필사본 의궤보다 많다.

정조대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한 단계 앞선 활자를 주조하여 출판 인쇄문화를 발전시킨 시기였다.

금속활자로 ‘정리자(整理字)’를 만들어 1798년(정조 22) 원행을묘정리의궤 8책을 간행하고,

부수도 필사본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 되었다. 국가기관에서 배포한 것이 27건이고,

총리대신을 맡은 채제공을 비롯하여 행차에 참여했던 31명의 신하에게도 반사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 수록된 도설과 반차도의 채색이 사라지고 판각해서 찍은 목판본이다.

주요 장면은 채색 병풍으로 제작하고, 두루마리로 된 채색반차도를 따로 제작했다.

 

오늘날 많이 알려진 1795년 정조의 화성행차를 그린 8폭병풍 ‘화성행차도(華城行次圖)’는

『원행을묘정리의궤』속에 포함된 목판본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리움, 일본 京都대학 문학부박물관 등에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규장각에는 ‘화성원행반차도’라는 채색 두루마리가 전해지고 있어

회화적인 부분들은 별도로 제작되었다.

순조 이후에도 정리자 활자본 의궤는 계속해서 편찬하였는데

1801년(순조 1)『화성성역의궤』9책을 간행하여 여러 기관과 대신들에게 반사되었다.

순조ㆍ헌종대의『진찬의궤』와『진연의궤』는 모두 ‘정리자(整理字)’를 이용하여 간행한 의궤들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찍기 위해 만든 정리자는

1794년(정조 18) 창경궁의 옛 홍문관에 새로 설치한 주자소(鑄字所)로 옮겨졌는데

1857년(철종 8) 10월 그 주자소에 불이 나서 정조 때 만든 활자인 ‘정유자(丁酉字)’와 ‘정리자(整理字)’

본 활자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1858년(철종 9)에 동으로 활자를 주조하여 만든 활자가『재주정리자(再鑄整理字)』이다.

고종대 진찬의궤는 모두 재주정리자판으로 인쇄하였다.

이외에도 한글본인『자경뎐진쟉졍례의궤』가 있다.

1827년(순조 27)의『자경전진작정례의궤』는 활자본과 한글본을 만들었는데

한문본인 정리자 활자판과 한글본을 제작하여

대전(大殿, 왕), 중궁전(中宮殿, 왕비), 규장각, 예조, 창덕궁 서고(西庫) 등에 분상했는데

한글본은 왕비인 순원왕후를 위해 만든 것이다.

 

 

2. 형태 사항

의궤는 작성 때부터 의궤의 용도에 따라 제작방식을 달리하였다.

사용 목적에 따라 어람용과 분상용으로 나누어 제작되어 이들 모두 함께 전해지고 있다.

어람용과 분상용의 서지적 차이를 보면,

 

첫째, 어람용은 표지를 초록 혹은 청색 구름무늬비단으로 싸고

놋쇠로 변철을 대고 5개의 박을 못으로 변철을 묶었으며

박을 못 밑에 둥근 국화무늬판을 대어 못이 빠지지 않도록 했다.

두석장으로 문고리 같은 큰 고리가 달려있고

책의 제목을 쓰는 재료는 백색비단을 썼고 사변을 붉은색 비단을 사용하여 테를 둘러 화려하게 하였다.

제첨형식으로『별호도감의궤(別號都監儀軌)』와 같이 제목을 묵서하였다.

대한제국 시에는 어람용이 황제용으로 바뀌면서 황색비단으로,

황태자용이 따로 제작되어 붉은색 비단으로 하였다.

 

분상용은 홍포인데 붉은 무명 혹은 삼베로 표지를 싸고

변철과 박을 못과 고리를 모두 시우쇠(正鐵)로 만들었다.

표지에는『가경오년갑인유월 일 정종대왕건릉산릉도감의궤 오대산상

(嘉慶五年甲日六月 日 正宗大王健陵山陵都監儀軌 五臺山上)』으로 기재되어 있어

정종대왕 건릉도감의궤가 오대산사고에 보내져 보관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활자본은 필사본보다는 부수가 많았기 때문에

장정도 능화문이 있는 표지에 오침안정을 한 선장(線裝)이다.

 

둘째, 지질(紙質)은 어람용은 질이 좋은 부드러운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하였다.

분상용은 저주지(楮注紙)를 사용하였다.

 

셋째, 계선(界線)은 어람용은 ‘주사란(朱絲欄)’이며 분상용은 ‘오사란(烏絲欄)’이다.

오사란은 관청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괴판(槐板)을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손수 그린 것도 간혹 눈에 띈다.

 

넷째, 박을 못이 어람용은 5개이며 분상용은 3개이다.

 

다섯째, 어람용은 당대 최고의 서사자(書寫者)가 해서체로 정성들여 썼으나,

분상용은 행서 혹은 반초서로 쓴 경우가 있고 해서로 쓴 경우에도 글씨수준이 떨어진다.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는 경우라도 어람용은 분량이 많다.

서술 체제에서 왕실관련 용어는 모두 올려 쓰기를 했으며,

품목이나 명단을 기재할 때도 별도로 한 행에 한 품목씩 적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분상용의 경우는 봉안하려는 목적이었으므로 실용적으로 하여 한꺼번에 묶어서 합부하고 있다.

 

 

 

Ⅳ. 의궤의 가치

 

의궤에 기록된 내용은 국가행사 전반에 관한 것으로서 왕실의 주요행사가 모두 담겨져 있다.

의식의 진행사항이 그 준비단계에서부터 사후처리까지 일정한 격식에 의해 정리된 것이며,

의궤 각각은 단회성의 행사를 담고 있지만 전체로서의 의궤는 300여 년에 걸쳐서

의궤의 변천과정 및 시행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기록으로서

특히 채색된 도설과 반차도는 화려하고 기록문화의 꽃이라 불리울 만큼

사료로서의 가치는 물론 자료의 보고라 할 수 있으므로 문화재적 가치는 높게 평가되고 있다.

 

어람용과 분상용의 질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복본이라도 필사본은 유일본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한정된 수량만 제작되었으므로 현존하는 의궤는 희소성을 지니고 있다.

보존상태 또한 표지 등의 부분적인 개장을 제외하면

내용부분에 있어서는 최초 제작된 원형이 대체로 유지되고 있다.

표지는 기록물로서 유래가 없는 특수 장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기록문화유산으로서 국가지정문화재로서도 충분한 가치는 인정된다.

활자본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의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본격적인 정밀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 서병패, 문화재청 전문위원

- 문화재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