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부여 왕흥사지 - 사리장엄구 발굴 , 1400년만에 빛 보다

Gijuzzang Dream 2007. 11. 17. 10:14

 

 

 

 부여 왕흥사지

 

 완벽한 백제의 예술혼 1400년만에 ‘빛’ 보다

 

“당대 세계 최고의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여 왕흥사지(사적 427호)에서 발굴된 금은동 사리기를 비롯한 사리장엄구 등을 본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감격에 겨운 듯했다.

노중국 계명대 교수 등 전문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이후 최대 발굴성과”라고 극찬했다.


 

◇ 금 · 은 · 동 사리기

우선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1990년대 중반 능사에서 사리석감이 왔지만 사리기는 없었다”고 전했다.  

완벽한 원형보존 상태로 발견된 사리기는

석함으로 만들어진 사리공(16×12×16㎝) 안에 

가장 큰 청동의 사리함(폭 7.9㎝, 높이 10.3㎝)이 들어 있었고,

그 안에 작은 은제 사리병(외병, 6.6×4.4㎝)을 넣고,

그 은제 사리병 속에 받침대까지 완벽하게 구비된 가장 작은 금제 사리병(내병, 4.6×1.5㎝)을

그 안에 다시 집어넣는 4 겹 중첩형식이다.

 

발굴 당시 사리기는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심초석(가로 100㎝, 세로 110㎝) 밑에

별도로 깔린 사리 안치용 넙적돌에 뚫린 작은 구멍(사리공) 안에 담겨 있었다.

이는 심초석에 사리공을 뚫고 기둥을 세우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라

백제시대 사리 봉안수법과 목탑 축조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석함 뚜껑 개봉 직후의 사리함 모습

 


김과장은 “석함까지 하면 돌-청동-은-금 등이 4중으로 중첩된 완벽한 사리기의 출토”라고

의미를 두었다. 하지만 사리는 들어있지 않았다. 금·은 사리병엔 맑고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과연 1400년 이상 버텨왔을지 모르는 그 액체는 무엇일까.

유홍준 청장은

“사리가 녹아 액체로 변한 것인지, 결로현상 때문에 빚어진 것인지 성분 분석을 해봐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금제 사리병은 순금에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

이규훈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원래 금의 비중값은 19인데 출토된 금제 사리병의 비중은 18”이라면서

“순금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고 전했다.


 

◇ 당혹감과 연구 과제를 안겨준 ‘명문’


또 하나 백제사 연구의 획기적인 자료는 청동제 사리함에 새긴 명문이다

명문은 청동 사리함의 외벽에 5자 6행의 음각체로 새겨져 있었다.
노중국 교수는 “기록이 부족한 우리 고대사 연구에 명문 발견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고 밝혔다.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

청동 사리함 동체부에 새겨진 명문 기록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오아 창이 절을 세웠다…’는 내용으로

왕충사의 축조 연대가 서기 577년임을 말해준다.

 

 

명문에 나오는 ‘창(昌)’은 백제 위덕왕(재위 554~598년)을,

‘정유년 2월’은 577년 2월을 각각 지칭한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왕흥사는 법왕 2년(600년)에 축조되어 무왕 35년(634년)에 낙성되었다”고 기록해놓았다.

 

따라서 새 명문은 왕흥사의 실제축조연대가 위덕왕(창왕) 24년(577년)으로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이나 빠르다는 것을 알려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또하나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 태자(일본 쇼도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말고도 577년 사망한 또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확인되었다.

 

노교수는 “고대사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23년의 차이는 당혹감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원래 왕흥사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사망한 뒤 신하들에게 넘어간 권력을 되찾기 위해,

즉 왕권의 흥융을 위해 창건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번 명문 발견으로

왕흥사는 위덕왕이 왕권쟁취 등의 목적이 아니라

죽은 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창건한 이른 원찰이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결국 위덕왕은 능사(567년)는 죽은 아버지 성왕을 위해,

그리고 왕흥사는 죽은 아들을 위해 각각 지은 것”이다.

남는 수수께끼는

명문에 따르면 사리병에 넣은 2매의 사리가 감쪽 같이 사라졌다는 점.

유청장은 “사리기와 사리병을 열 때 쉽게 열리지 않았을 정도로 도굴 흔적은 없었다”면서

“사리가 물로 변했는지, 혹은 처음부터 넣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 진단구 및 어도

전문가들은
진단구(탑, 건물을 지을 때 붕괴방지와 액막이용으로 넣는 장신구 등 생활용구)의

화려함에 넋을 잃었다.

진단구는 심초석 남쪽변을 중심으로 다량출토됐다.

 

목걸이 및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곡옥 등 장신구로 사용했던 구슬류,

옥류, 금동제품, 은제품, 관모장식 등이 보였다.

또한 철도자(칼), 운모로 만든 연꽃은 물론,

중국 남북조시대인 북제(550~577년)에서 사용된 상평오수전 등 다량의 유물들이 확인됐다.


강순형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장은

“특히 1㎜도 되지 않게 깎아 투명한 운모로 연꽃 모양을 만들어 사이사이에 금박을 입힌 형태는

처음 확인되며, 그 수법이 너무도 정교하다”고 감탄했다.

 

또한 화석화한 목탄에 금을 두른 탄목금구는 무령왕릉 출토품과 같다.

유리와 옥을 직경 5㎜도 되지 않은 알갱이로 만든 목걸이, 팔찌 등과 호랑이를 형상화한 목걸이 등은

걸작 중 걸작으로 꼽힌다. 대부분은 실생활에 사용된 것들을 그대로 묻었다.

황흥사지 심초석 남쪽에서 출토된 진단구들


유홍준 청장은 “당대 중국은 수나라 통일(589년) 전의 북제·북주시대인 과도기였고,

유럽은 중세 이전의 암흑시기였다”면서

“따라서 이번 유물들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품”이라고 단언했다.

 

한편 이번 발굴에서는 왕이 백마강을 통해 행차, 배를 대고 왕흥사에 들어온 것을 알려주는

어도(御道·남북 길이 62m, 동서 너비 13m)도 확인됐다.
- 경향, 2007년 10월 24일,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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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흥사 사리함 명문은 刀子로 쓴 것"

 

 

 

손환일 박사 -  "새긴 것 아니다" 주장

부여 왕흥사지의 목탑 심초석 사리공에서 출토된

백제 위덕왕(=창왕) 시대 청동 사리외함 명문(銘文)은

새긴 것이 아니라 도자(刀子)라는 필기 도구를 사용해 "쓴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서예사 전공인 손환일 박사는

왕흥사지 조사단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왕흥사지 사리기 발견을 기념해

국립부여박물관과 함께 마련하는 특별전 개막(2007년 1월28일)에 맞춰

29일 박물관에서 개최하는 국제학술대회 발표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주최측이 미리 배포한 발표문에서 손 박사는

"서체는 북조(北朝)체가 주류이나 남조(南朝)체 필법을 가미한

무령왕릉 묘지(墓誌)와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면서

"이런 현상은 당시 백제문화가 중국 남조보다는

북조의 서사(書寫) 문화에 익숙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손 박사는 또 명문은 "붓 대신 도자를 사용해 쓴 것이며

도자 모양은 경남 다호리 유적 출토품과 같다"면서

"반면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의봉'(奉義)이란 문구가 들어간 백제시대 목간이

칼로 글자를 새긴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부여박물관에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의 의미'를 주제로 열릴 이번 학술대회에는

이 외에도 모두 7편에 이르는 주제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불교미술사 전공인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원통형 청동제 사리외합과 은제 사리호, 금제 사리병의 3중 구조로 된 사리기 중 청동 사리합은

중국에 전래된 인도식 사리용기를 원형으로 6세기 무렵 백제에서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면서,

국내 처음 확인된 금제 사리병은 당시까지 유리용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도입되지 않아

그 대신 등장한 사리용기라고 추정했다.

고고학자인 대전대 이한상 교수는 심초석 사리공 주변에서 출토된 일괄유물은

땅의 동티를 막기 위한 소위 진단구(鎭壇具)가 아니라

사리장엄구와 맥락을 같이 하는 사리공양품으로 간주하면서

"이들 공양품은 매납된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사비시기 백제 문물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이 교수는 이들 공양품이나 사리기는 명백히 백제 자체 기술로 제작됐으며,

그 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중국에서 제작된 것을 수입했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부여 능산리 절터 백제금동대향로를 백제 장인들이 제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주는

명쾌한 방증자료가 된다고 덧붙였다.

일본 도후쿠대학 사가와 마사토시(佐川政敏) 교수는

왕흥사 목탑 기단을 구축한 기술과 사리용기, 그리고 사리장엄구가 안치된 형식을 고찰한 결과

중국 남북조 및 고대 일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특히 "심초석이 지하에 위치하는 점 등은 6세기말-7세기 무렵 일본 목탑과 매우 유사한 형태"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리 안치시설을 마련한 석재를 심초석으로 보는 견해와

그렇지 않고 그 위에 별도의 심초석을 설치했다는 주장이 엇갈려

이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청동제 사리합 명문에 대해 줄곧 문제 제기를 해온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이번 학술대회에서도 백제 창왕이 왕흥사(혹은 그 목탑)를

'亡王子'(망왕자. 죽은 왕자)를 위해 세웠다는 대목을

'三王子'(삼왕자), 즉, 세 왕자라고 해석하고자 했으나,

이에 동조하는 연구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08년 1월 24일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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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詩의 雲母병풍과 "왕흥사 운모판"

 

 


"왕흥사지 운모판 국보급 손색없어"

중국 동진시대 저명한 도사 갈홍(葛洪. 283-343?)은
그의 호를 딴 저명한 신선도교학 이론서인 포박자(抱朴子) 중에 선약(仙藥) 권 제11에서
약물을 상ㆍ중ㆍ하 3등급으로 분류하면서
그 중 약효가 가장 뛰어난 상약(上藥)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으뜸은 단사(丹沙)다.
그 다음이 황금(黃金)이며, 백금(白金=은), 영지(靈芝), 오옥(五玉), 운모(雲母), 명주(明珠), 자황(雄黃),
태을우여량(太乙禹余糧), 석중황자(石中黃子), 석계(石桂), 석영(石英), 석뇌(石腦), 석유황(石硫黃)…."

영지 버섯만 빼놓고는 모두가 광물이며, 나아가 그 대부분이 지금은 독극물로 분류된다.

이 중 운모에 대해 고대중국 약학서의 대표주자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은
"맛은 달거나 밋밋한 편이다. 신체의 은 피부, 중풍한열(中風寒熱)을 치료하며
사악한 기운을 제거하고 오장(五臟)을 안정케 하며 남자의 정력을 증강케 하고 눈을 밟게 하며
몸을 가볍게 하고 수명을 늘린다.
운주(雲珠), 운화(雲華), 운영(雲英), 운액(雲液), 운사(雲沙), 인석(麟石. 비늘돌)이라고도 하며,
산곡(山谷)에서 난다"고 했다.

운(雲)이라는 공통분모는 그 색깔을 염두에 둔 것이며,
인석(麟石)이라고도 한 것은 그 생김새가 마치 물고기 비늘 같은 데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순한국어로 '돌비늘'이라 하는 까닭도 같은 맥락이다.

도교의 대장경에 해당하는 도장(道藏) 중 태평부(太平部)라는 곳에 수록된
당대 초기 의사이자 도사인 손사막(孫思邈. 581?-682) 저서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
첫머리에서는 "약물 사용을 논한다"는 제목 아래 의료 활동에 꼭 써야 할 약물을
옥석(玉石), 초(草), 목(木), 수(獸), 충어(蟲魚), 과(菓), 채(菜), 미(米) 등 8부(八部)로 나눈 다음,
그 중 옥석에서는 주사(朱砂), 유황(硫黃), 종유(鍾乳) 등과 함께 운모를 거론했다.

이 때문인지 운모를 복용해서 영원불사(永遠不死)하는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각종 문헌에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예컨대 전한 말기 때 유향(劉向)이란 사람이 정리했다는
신선 전기인 열선전(列仙傳)에는 방회(方回)라는 요임금 때의 은자(隱者)가
"운모를 가공해 (그 자신이) 복용(煉食雲母)" 하는 한편,
그것을 병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변신술을 부릴 수도 있었다고 했다.

서진시대 장화(張華)가 지었다는 지리학서인 박물지(博物志)에는
강룡도사(降龍道士) 유경(劉景)이란 사람이 운모구자환(雲母九子丸)이라는 약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
그것을 복용함으로써 300살까지 살았다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으며,
태평광기(太平廣記) 권 제4에 인용된 신선전(神仙傳)에는
위숙경(衛叔卿)이란 사람이 "운모를 복용해서 신선이 되었다"는 일화가 수록돼 있다.

한데 운모는 이처럼 약물로 주로 사용됐지만 은색 찬란한 특성 때문에 장식물로도 애용되곤 했다.

헌종(憲宗) 13년(1847) 홍석모가 편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4월 초파일에 열린 연등회 풍습 중 하나로 "등을 만들 때 종이로 바르기도 하고
붉고 푸른 비단으로 바르기도 한다. 운모를 끼워 비선(飛仙)과 화조(花鳥)를 그리기도 하고
평편한 면마다 모가 진 곳마다 삼색의 돌돌 만 종이나 길쭉한 쪽지 종이를 붙이기도 하니
펄럭이는 모습이 매우 멋있다"고 했다.

연등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물품 중 하나로 운모를 거론한 것이다.

운모를 장식품으로 활용하는 전통은 이미 당시(唐詩)에도 더러 보인다.

당말을 대표하는 저명한 시인 이상은(李商隱.812-858)은 '상아'(嫦娥)라는 시 첫 구절에서 읊기를
"운모 병풍에 촛불 그림자 깊어가고"(雲母屛風燭影深)라고 했는가 하면,
시불(詩佛)로 일컫는 중당(中唐)의 대시인 왕유(王維.699-759)가 남긴 시 중 하나는
아예 제목 자체가 '친구의 운모 병풍에 적어주다'(題友人雲母障子)이다.

전당시(全唐詩) 권 제128에 수록된 이 시는 왕유 자신이 붙인 설명문에 의하면 15살에 쓴 것이라 하며, 그 전문은
"자네 집 운모병풍 / 마침 바깥뜰로 펼쳐놓으니 / 절로 산골 샘물 흐르는 듯 /
채색 그린에서 나온 게 아니라네'(君家雲母障/ 時向野庭開/ 自有山泉入/ 非因采畵來)로 되어 있다.

이상은이나 왕유가 노래한 운모병풍은 그 실물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실상은 알기 어려우나,
운모가 병풍을 장식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음을 증명한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부여 왕흥사지 일대를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백제 창왕 시대에 목탑을 조성하면서 그 심초석 주변에 넣은 운모 장식판을 발견됐다.
이 운모판은 같은 시기에 출현한 '창왕명 사리기'(昌王銘沙利器)가 워낙 각광을 받는 바람에,
그 중요성이 아직은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으나, 연꽃을 본뜬 그 모양으로 보아
사람 몸을 치장하는 장식품으로 사용됐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부여문화재연구소는
"사리기 만큼이나 왕흥사지 운모판은 귀중한 '국보급' 유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 2008년 1월 27일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1400년 견딘 사리함의 비밀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1400여 년 전 사리함, 명문과 유적들이 논란거리 던져

 

1400여 년 전 비명에 간 백제 왕자의 추모용 사리함이 후대 역사를 뒤흔들고 있다.

백제 27대 위덕왕이 즐겨 찾던 사비 도읍(충남 부여) 왕흥사 절터의 목탑터 심초석 밑에서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한자 글씨가 새겨진 사리함과 그 안의 금은 사리병,

그리고 이들을 땅에 묻을 때 액운 없기를 빌며 같이 묻은 진단구 장식들이 세상에 다시 나왔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6세기 백제 유일의 사리장엄구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0년부터 8차례 발굴 끝에 찾아낸 것이다.

이들 유물은 흙층 속에서 도굴의 손길을 타지 않고 1400여 년을 견뎠다.

생생한 보존 상태와 예상 밖의 이른 연대 때문에 도굴되어 돌아다녔다면

모두 가짜 판정을 받았을 것이란 말까지 나왔다.


△부여 왕흥사 목탑터에서 나온 6세기 백제 사리장엄 용기.

맨 오른쪽 용기가 명문이 새겨진 청동 사리함.

보주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뚜껑으로 덮였다.

이 함 안에 중앙의 은제 사리병이 외병으로 들어갔고,

이 병 안에 다시 맨 왼쪽의 금제 사리병(내병)이 들어 있었다.

글씨는 사리함의 명문. (사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서릿발처럼 준엄하고 단순한 원통형 청동 사리함과 내부의 귀금속 사리병,

고졸한 함의 명문 29자, 정교함과 다채로움을 겸비한 진단구 유물들은

사료가 부실한 백제학계에 단비를 뿌렸으나 풀어야 할 수수께끼 또한 한 무더기다.

전문가들에게 자문해 이번 발굴이 남긴 수수께끼들을 추려보았다.

 

명문과 <삼국사기>의 내용 달라

 

왕흥사터 사리함 명문은 국내 최고의 역사서로,

역사 편년에 관한 한 무오류의 정전으로 통했던 <삼국사기>의 정확성 논란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크다.

왕흥사 창건 연대에 대한 사기의 기록이 사리함 명문의 기록보다 23년이나 뒤처지기 때문이다.

 

명문에는 ‘정유년(577) 2월15일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고 음각한

한자로 새겼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5권’은 위덕왕의 다음 임금인 법왕 2년(600) 정월에

왕흥사를 창립해 그 다음 왕인 무왕 35년인 634년 2월 준공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문이 거짓을 쓸 수 없으니 사서 기록이 잘못됐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발굴품 명문의 연대가 <삼국사기> 기록과 엇갈린 사례는 처음 있는 일이다.

 

학계에선 사서가 완전히 틀렸다는 단정론,

탑만 일단 세운 것을 절을 세운 것으로 명문이 해석했다는 견해 등이 나온다.

사서에 언급된 왕흥사보다 선행하는 형식의 건물이 있었고,

그게 후대 법왕 때 왕흥사란 절로 낙성됐다는 주장이다.

 

명문 가운데 ‘입찰본사리이매장시’(立刹本舍利二枚葬時),

곧 사찰을 세우고 본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라고 해석되는 대목은 논쟁적이다.

이런 행위만으로 절을 건립한 것으로 볼 것인지,

절을 지을 때 탑을 먼저 세운 뒤 나머지 금당, 강당들을 잇따라 세운 것을 절을 세운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모든 사찰이 탑, 금당, 강당을 한 짝에 갖춰야

온전한 절의 건립으로 고대인들이 간주했는지를 따져보는, 간단치 않은 문제다.

 

고대사 연구자인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사찰을 만든 시기, 세운 이유와 주체도 사리기 명문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각각 달라

격론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됐다”며

“하지만 사서가 무조건 틀렸다고 단언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한 학예관도 “<삼국사기>의 왕흥사 건립 연대가 완전히 틀린 것으로 확인되면

<삼국사기> 기년의 신빙성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며 “결론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문화재청 쪽은 이와 관련해 연말까지 임시 특별전과

중국, 일본 쪽 학자들을 초청한 국제 학술대회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백제 위덕왕의 원찰로 드러난 부여 규암면 왕흥사터 발굴 복원도.

백마강변에 있는 선착장과 어도를 통해

곧장 1탑1금당 양식의 절 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사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사라진 사리, 놀라운 마이크로 미학

 

백제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황금 사리병 안에는 사리가 없고, 맑은 물만 고여 있었다.

후대에 사리기를 손댄 흔적이 전혀 없어 사리의 행방을 놓고도 말들이 많다.

 

김용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사리기에 사리가 없는 경우는 꽤 된다. 부식된 구멍으로 사리알이 빠져나가거나

외부의 압력이나 화학작용에 의해 녹거나 사라지는 경우도 가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공예사 연구자인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학예관은

“단단한 사리는 고온의 화장을 견뎌 생긴 것으로 물에 녹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리병 뚜껑 덮개의 긴 틈 등을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갔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추측했다.

황금 사리병을 싼 은 사리병 속에서 작은 알갱이 한 개가 발견된 것을 학계는 주시하고 있다.

연구소 쪽은 사리병 속 물과 은병에서 나온 알갱이의 성분분석을 벌이기로 했다.

 

사리구를 묻은 심초석 남쪽 땅속에서 쏟아져나온 수천 점의 장신구, 장식물 등의 진단구들은

당시 동아시아 문명권을 대표하는 초정밀 미세공예품들이다.

목걸이, 귀고리, 장식 버클, 관대 등 백제 귀족들이 평소 썼을 법한 장신구들이다.

투명한 운모를 미세하게 다듬어 연꽃 모양을 만들고

금줄까지 두른 미세 장식, 작은 고리들을 여러 개 이어붙여 마치 축구공처럼 만든

구체 액세서리 장식물들은 디자인, 기법의 독창성 측면에서 전례가 거의 없는 최고 명품이다.

 

고대 장신구를 연구해온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고리를 이어붙인 금동구체 장식물의 경우

중간중간 연결된 접점에 1㎜ 정도에 불과한 금속 알갱이들을 붙이는 마감 방식까지 사용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정밀 광학기기도 없던 시절, 백제의 장인들은 어떻게 상상을 초월하는 마이크로 미학을 실현했을까.

이 교수는 “6세기 초 무령왕릉의 공예품보다 더 뛰어난 기술력과 조형 수준을 보여준다.

금동대향로를 만들었던 6세기 중엽의 능산리 사찰 건립 시기를 지나면서

전체적으로 나라의 문화적 역량이 정비된 상황에서 이런 제작 양상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작은 금고리를 무수히 이어 만든 공 모양 금동 장식물과 투명한 운모로 만든 미세한 연꽃 장식물. 당시 동아시아 미세 공예미술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지고의 명품들이다.

임금의 직통 참배로가 60m 넘어

 

백마강 어귀의 왕흥사터 발굴은

백제 왕실이 자주 찾은 이른바 강변 가람의 특이한 얼개를 처음 드러냈다.

폭이 13m, 길이만 60m가 넘는 장대한 어도(임금이 다니는 참배로)가

절터 정문 바깥 축대에서 확인된 것이다.

진입로와 목탑 금당이 일직선을 이룬 특유의 가람에

왕이 배를 타고 그 앞 어도로 들어와 곧장 진입할 수 있는 얼개인 셈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왕 등이 백마강을 건너 왕흥사에 수시로 행차해 향을 피우고 참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고학자인 박순발 충남대 교수는

“일당일탑 가람지 바로 앞에 선착장에서 오는 참배길이 직통으로 이어진 구조는

중국, 일본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왜 물가 근처에 진입로를 두고 원찰가람을 배치했는지 그 배경을 밝히는 것도 흥미진진한 탐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왕흥사지에서 남쪽 어도의 아랫부분은 선착장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데,

행차에 쓰였던 배의 파편이나 선착장 시설의 발굴이 기대되고 있다.

백제 왕실은 왜 강변 선착장에서 절까지 직통 참배로를 대는 원찰을 꾸렸을까.

위덕왕이 왕흥사터에 남긴 유물과 유적들은 새 논란거리를 던지면서

백제 문화사의 장막을 조금씩 걷어내리고 있다.

- 2007년11월01일 한겨레 21, 제683호,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리기 봉안은 왕권 위한 이벤트였나

 

국내 최고 청동 사리함으로 떠들썩하게 발굴된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사리알 존재에 의견만 분분

 

병에 넣은 부처의 사리(화장한 유골) 세 알은 어디로 갔는가?

백제 27대 임금 위덕왕이 1400여 년 전인 577년 먼저 이승을 떠난 아들을 위해

사리 세 알을 넣어 바쳤다고 한문 글씨로 새긴 국내 최고의 청동 사리함과 금은제 사리병은

물음 앞에서 침묵할 뿐이다.

 

지난해 10월 초 백제 도읍지였던 충남 부여(사비) 왕흥사 목탑터 땅속 기둥돌 구멍에서 생생하게

발굴(<한겨레21> 683호)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유물의 가장 흥미로운 수수께끼는

영영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짙어졌다.

유물을 발굴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월29일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부여 왕흥사지출토 사리기의 의미’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문화재 전문가들과 이 의문에 대한 논의를 거듭했다.

하지만 학문적 차원에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결론만 확인했다.

연구소 쪽은 발굴 당시 사리함과 사리병을 분석한 결과

한 알의 사리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 왕흥사 목탑터에서 출토된 사리기 갖춤.

맨 뒤쪽의 제일 큰 용기가 청동사리함이며

그 앞의 두 번째로 큰 항아리가 은제호,

오른쪽 제일 작은 용기가 금제병이다.

금제병이 들어간 은제호가 사리함에 담기는 얼개인데,

정작 사리알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후대에 누가 꺼냈다? 아예 안 넣었다?

 

이날 자리에 토론자로 나온 강순형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불교미술사 전공)이

먼저 이 문제를 치고 나왔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명문을 보면) 백제 임금인 위덕왕이 나라의 큰 절(국찰)에 부처가 열반한 날짜인 2월15일을 골라

사리함을 봉안했다고 나온다. 게다가 사리병에 원래 2매를 넣어 모시려고 했는데,

신의 조화로 저절로 셋이 되었다는 구절까지 나온다.

이렇게 국가적 의미가 중대하고, 신묘한 영험을 내보인 사리가

한 알도 안 나온 발굴 내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는 “합리적으로 보면, 아예 처음부터 넣지 않았거나, 어느 때에 사리만 살짝 꺼냈다는 것밖에

답이 없다”며 “그런데 (공개된) 발굴조사 결과에는 이들 사리함과 사리병은 1400여 년전 넣은 뒤로

한번도 꺼내거나 다시 봉안한 흔적이 없어 보인다기에 더욱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목탑터 땅 표면과 그 아래 땅속에 묻힌, 사리 구멍 있는 기둥받침돌(심초석) 사이 구간에

흙을 되메우고 다진 흔적이 확인됐다는 사실을 이런 맥락에서 문제 삼았다.

앞서 목탑터 사리용기 갖춤에 대해 발표한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학예관이 심초석은 땅 위에 있고,

지하의 돌은 사리를 넣기 위해서만 설치한 시설이라는 가설을 꺼냈기 때문이다.

 

강 소장은 이 가설을 겨냥, 사리를 보관했던 지하의 돌 위를 메우고 다진 흙이 손을 타지 않았다는데

의문을 표시하는 발굴전공자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후대에 누군가가 흙을 파내고 사리를 꺼내갔을 개연성을 암시한 셈이다.

 

이에 대해 김 학예관은 “만약 땅속에서 사리를 꺼내갔다면, 사리기도 같이 꺼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아예 넣지 않았거나 유기물인 사리가 땅속에서 녹아 사라질 수도 있지만,

현재 사리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없어 각자의 상상력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발굴 당시 사리가 오랜 세월 사리병의 산성 수분 속에 녹은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었으나 최근 연구소의 조사 결과 사리를 입증할 만한 어떤 물질도 사리갖춤에서 검출되지 않았다.

 

김용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발굴 뒤 사리병 안을 가득 채운 물을 분석한 결과 이슬이 맺히는 결로 현상으로 생긴 물이었고,

특정 유기물이 많이 녹은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조사단은 금제 사리병과 이를 싼 은제 사리병 사이 공간에서 미세한 구슬 모양 알맹이도 발견해

분석했으나, 사리와는 관계없는 금속성 물질로 드러났다.

또 사리 수가 신묘한 조화로 바친 것보다 더 늘어났다는 영험 현상은 중국 등지의 사리기 기록에도

간간이 나오는 것으로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종교적 신념의 영역이라는 게

미술사학계의 일반적 인식이다. 이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 왕권 강화책의 하나로 사리는 넣지 않고,

왕의 권위를 과시하는 이벤트로서 사리기 봉안 행사를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 세계에서 유일한 연꽃 모양의 투명 운모장식.

왕흥사 발굴유물을 대표하는 국보급 명품으로

꽃잎 사이에 금박을 넣어 화려함을 더했다.

천으로 만든 관모(모자) 정면에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관모의 주인공은 죽은 왕자일 것이란 견해가 유력하다.

8천여 점의 귀금속·유리 공예품에 감탄

 

사리의 행방에 대한 호기심은 풀리지 않았지만,

학술대회에서는 사리함과 함께 바친 보석, 장신구 같은 고급 공예품에 대한 색다른 분석 성과들도

적잖이 나왔다. 우선 학계를 놀라게 한 것은 청동 사리함에 있는 문제의 명문을 새긴 방식이었다.

얼핏 상식대로 끌 등으로 여러 번 쫀 것이 아니라

‘도자’라 불리는 옛 필기용 칼을 펜이나 붓처럼 놀려 쓴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서예사 전문가인 손환일 박사는 청동사리함 명문의 서체를 분석한 논고에서 이런 분석 결과를 내고,

“사리함 명문은 도자를 써서 한 번 붓질로 한 획을 완성하듯이 쓴 것”이며

“목간의 글씨처럼 여러 차례 칼을 놀려 깎아낸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런 필기 방식이 경이로운 것은 사리함의 재질인 청동이 돌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가는 정이나 끌로 쪼아도 원하는 모양이나 글자를 내기가 힘든데, 얇은 칼날을 꾹꾹 눌러

당시 중국 남북조의 예서 · 해서 글씨체를 조화시키고 토속적 멋까지 가미했다는 것이다.

 

공예사 전공자인 주경미 박사는 “칼로 눌러서 단단한 재질에 글씨를 써야 하므로 손과 팔의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야 하며, 재질에 대한 이해와 조형적 감각은 물론 서예도 어느 정도

섭렵해야 이런 명문 글씨가 가능하다”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리함이 나온 지하의 기둥돌 석재 부근에서 8천여 점이나 쏟아져나온 각양각색의 화려한 귀금속,

유리공예품들 또한 ‘하이테크’ ‘하이컬처’의 칭호를 백제 공예문화에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관모에 붙이는 철제테에 부착된 것으로 추정되는 투명 운모로 만든 연꽃 장식물은

잎 모양 사이에 금박을 겹쳐 만든 것으로, 그 환상적 아름다움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고의 명품으로 칭송받는다.

 

또 쌀알보다 작은 구슬에 샤프심 지름보다 약간 작은 구멍을 뚫은 유리구슬 · 목걸이 등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초정밀 세공술을 보여주는 실례다.

이런 내용의 목탑터 일괄유물의 성격과 의의를 발표한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무령왕릉 출토 유물 이상의 정교한 안목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목탑터 공예품들은

한-중 사이에 제작지 논란이 일고 있는 금동대향로의 경우도 백제가 충분히 제작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된다는 분석했다.

목탑 사리기 주변에서 나온 이 공예품들이 사리신앙 행사에 따른 것인 만큼 땅신을 달래는 예물인

지진구가 아니라 부처에 바치는 공양물이란 데도 참석자들은 대개 견해를 같이했다.

 

발굴 좀더 진행된 뒤로 결론 미뤄

 

한편 목탑의 주기둥돌이 사리기가 나온 지하 석재인지, 지상의 다른 돌인지를 둘러싼 논란과

<삼국사기> 600년 창건 기록과 다른 사리기 명문의 창건연대를 둘러싼 입씨름도 벌어졌지만,

결론은 발굴이 좀더 진행된 뒤로 미루자는 분위기로 돌아갔다.

행사 말미에는 근거가 미흡한 목탑의 3층탑 복원론이 나오는가 하면,

지자체의 사찰터 정비복원 방안 등에 대한 제안이 ‘뜬금없이’ 제기되어

참석자들을 의아하게 만들기도 했다.

 

왕흥사터의 발굴 유물들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4월20일까지·041-833-0305)에서 특별전시 중이다.

금 · 은 · 동 사리기 갖춤을 비롯해, 운모연꽃 장식과 귀고리 등 공양물로 추정되는

갖가지 공예품들이 보존처리를 마치고 선보이고 있다.

- 2008년02월14일, 한겨레21  제697호, 글·사진 부여=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