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조선시대 고지도 - 세계 속의 우리나라, 우리나라 속의 세계

Gijuzzang Dream 2007. 11. 16. 00:37

 

 

 

 선조들이 만든 세계 속의 우리나라

 우리나라 속의 세계  

 

 

 

지도는 지구 표면의 전체나 일부를 지면에 그린 것으로

지역 공간의 투영일 뿐만 아니라, 땅 위에서 이루어진 정치, 사회, 문화적 모든 현상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새긴 그림이다.

그러므로 지도는 작성하는 목적이나 시기에 따라 수록한 정보의 내용이 각기 다르며,

이러한 지도를 통해 지도가 제작될 당시 그 시대 사람들의 인식 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세계지도인 「5천축국도(五天竺國圖)」


우리나라에서 처음 지도(地圖)가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에 국경이 확정된 후 영토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된 뒤부터였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현종 때 10도의 행정구역을 5도양계로 개편한 후, 전국지도를 작성하였다.

이 「5도양계도」는 조선 성종 때 양성지의 상소문에 나타나듯,

여러 차례에 걸쳐 그려져 조선 전기 지도 제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세계지도는

고려시대의 불교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세계지도가 그 처음이다.

당시 윤포(尹 )는 당나라의 현장이 인도를 여행하고 귀국하여 제작한

「5천축국도(五天竺國圖)」를 받아들여, 그 내용을 수정 보완한 「5천축국도」를 제작하였다.

이 지도는 지금까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젖어 있던 고려인들에게

불교적 세계관을 접하게 하였고, 저 멀리 인도까지 시야를 넓힐 수 있게 하였다.





동양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지도인  「역대제왕혼일강리도」

조선 초기에는 두 갈래의 세계지도가 있었다.

하나는 세계 지리에 관한 자료를 과학적으로 수집하여 편집한 지도이고,

다른 하나는 중화관에 입각하여 상상적인 세계관을 표현한 중국 중심의 추상적인 세계지도이다.

전자는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이고, 후자는 「원형천하도」이다.

 

 
「역대제왕혼일강리도」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지도로서 조선 초기 태종 때에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지도는 현재 인촌기념관에 소장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 교토시 류코쿠 대학본(龍谷大學本)은

길이 171cm, 너비 164cm의 대지도로서 견지에 그려진 채색지도이다.

이 지도는 선명한 색채가 그대로 살아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다.

도시는 적색으로 표시하되, 수도는 원형으로 다른 도시는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하천은 청색으로 바다는 녹색으로 그려져 있다.

또 지도 하단에는 권근의 발문이 기재되어 있어,

이 지도의 제작 과정을 밝혀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그의 발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천하는 아주 넓다.

안으로는 중국으로부터 밖으로 사해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 리인지를 알 수 없다.

이것을 줄여서 수척의 폭원으로 된 지도를 만들면 상세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지도를 만들면 대부분 소략해지게 된다.

 

오직 오문(吳門) 이택민(李澤民)의「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가 조금 자세하게 그려졌고

역대 제왕의 국도 연혁은 천태승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건문 4년 여름에 좌정승 상락 김공(金士衡)과 우정승 단양 이공(李茂)이

나라를 다스리는 여가에 이들 지도를 참고하여 연구하고,

이를 검상 이회(李 )에게 명하여 자세한 교정을 가해

이들 지도를 합쳐 일도(一圖)를 만들게 하였다.

 

그 요수 동쪽과 본국의 강역은

택민의 지도에도 역시 빠지고 소략한 부분이 많으므로

이번에 특히 본국지도를 크게 그려 넣고 일본지도를 첨부하여

정돈하여 새로운 지도를 작성하였다.

정연하고 보기에도 좋아 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도적(圖籍)을 보고 지역의 원근을 아는 것은 통치에 도움이 된다.

이 해 가을 8월 양촌 권근(權近)이 적는다."

 

 

이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 지도는 4개의 지도를 합쳐서 만든 지도이다.

 

즉, 중국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와 천태승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하나로 합친 후에

우리나라 지도를 특히 크게 그려 넣고,

새로 입수된 「일본도(日本圖)」를 첨부하여 제작한 지도였던 것이다.

 

「혼일강리도」의 「조선도(朝鮮圖)」 부분은

태종 2년(1402) 5월에 이회가 만든 「본국지도」일 것이다.

이 지도에서 한국과 일본의 크기를 비교하면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몇 배는 크게 그려져 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일본을 왜국으로 생각하고 무시하였던 일본 인식의 표현일 것이다.

 

「역대제왕혼일강리도」는

중국, 일본,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여러 지도를 종합하여 제작한 매우 뛰어난 세계지도이다.

「역대제왕혼일강리도」는

이 시기에 우리나라의 지도 제작 기술이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중국만이 아니라 인도 멀리 아라비아 지역까지 인식 세계를 넓힌

조선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 발달한 또 하나의 세계지도는 「원형천하도」이다.

 

 


  

이 지도는 중앙에 대륙이 있고 그 주위에 내해가 있는데, 내해에는 수많은 섬들이 산재해 있다.

또 내해 밖에는 환대륙이 있고, 그 환대륙을 바다가 둘러싸고 있으며,

동쪽에는 유파산 서쪽에는 방산이 있다.

내해에는 삼신국(三身國), 일목국(一目國), 대인국(大人國) 등 45개국의 가상적 국명이 있다.

유파산에는 부상(扶桑)이라는 나무가 있어 해가 뜨는 곳을 의미하며,

서쪽 방산에는 반격송(盤格松)이 있어 해가 지는 곳을 표시한다.

 

이 원형천하도는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데,

이는 동양의 전통적 세계관에

서양 중세의 「T-O지도」의 영향을 받아 고안해낸 지도인 듯하며,

조선시대의 확대된 세계관을 반영한 지도일 것이다.

 

 


17세기 초, 중국 사행에 의하여 수입된 한역(漢譯) 세계지도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에 의해 17세기 초에 제작된 한역(漢譯) 세계지도는,

중국 사행(사신 행차)에 의해 신속하게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빠져 있던 우리나라 학자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조선 후기에 수입된 한역(漢譯) 세계지도는

마테오리치(Matteo Ricci)의 「곤여만국전도」,

알레니(Giulio Aleni)의 「만국전도」,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의 「곤여전도」,

최한기의 「지구전후도」 등이 있다.

 

 

   

마테오리치(Matteo Ricci)의 「곤여만국전도」

1602년에 북경에서 제작되었는데,

그 이듬해인 1603년에 북경사행 이광정(李光庭)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 지도를 접한 놀라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 지도는 몹시 정밀하고 정교하며 서역지도는 아주 자세하다.

우리나라 8도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섬세하게 그렸다.

소위 구라파국은 서역의 가장 먼 곳에 있는데 중국에서 8만 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의 「곤여전도」

1674년에 북경에서 초간되고 난 후,

1856년에 광동에서 재판이 나왔다.

 

광동본이 나온 지 4년째 되던 해,

우리나라에서는 이 판을 가져다가 중간하여 우리나라만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특히 이 지도는 평사방위도법(平射方位圖法)에 의해

동반구와 서반구로 나누어 제작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양반구도(兩半球圖)의 전래로 “지구는 둥글다”는 개념을 접하게 되며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김정호의 역사지리 인식과 「대동여지도」의 특색

우리나라 고지도를 집대성한 사람은 김정호이고 그의 최대의 작품은 「대동여지도」이다.

김정호는 다음과 같은 역사지리 인식을 갖고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첫째, 그는 도(圖)와 지(志)를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하였다.

 

그는 역사가 있으면 반드시 지지(地志)가 있어야만 하고,

그래야만 주현과 산수의 고금에 따른 설시분합(設施分合)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지지가 있으면 반드시 지도가 있어야

준산거해(峻山巨海)에 가로막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라도

지도의 분율(分率)을 이용하여 원근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고,

준망(準望)을 통해 피차의 실체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으며,

경위(經緯)와 도리(道里)를 잘 살핌으로써 진상을 충분히 알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결국 김정호는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도(圖)와 지(志)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은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하여 도와 지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동관(童冠) 시절부터 죽는 그날까지

지도를 제작하고 지지를 편찬하였던 것이다.

 


둘째, 지도와 지지는 이렇게 중요한 것임에도 단기(檀箕) 이래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의

군현 설치와 강역의 변동을 알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단군 이래 고려시대까지의

국도, 강역, 풍속, 관제 및 제국과의 전쟁 상황을 별도로 편찬하여

지지의 첫머리에 둔다고 하였다.

 

 

셋째, 조선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만들어져 비로소 도적(圖籍)이 확실해졌지만,

자신이 살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동국여지승람」이 만들어진 지 30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주현 진보(鎭堡)의 혁치(革置)나 호구, 전부(田賦)의 증감 등이 차이가 많이 생겼으므로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동여도지」를 만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제가(諸家)의 지도를 참고하여 경위선식으로 지도를 작성하고,

 전해 오는 사서들을 모두 모아 「동국여지승람」의 예에 따라

문목을 더하고 깎아 42문 85편의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42문은 각 주현의 연혁·방면 등을 42개 항목으로 나누어 편찬했음을 말한다.

 

 

넷째, 김정호가 도와 지를 제작한 것은 치국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동여도지」에서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사원 등 42개 편목을 상술하거나 표기하여,

도와 지가 서로를 체용(體用)함으로써

나라가 다스리는 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한다는 간절한 소원을 표명하였다.

이로써 평생에 걸쳐 지지와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일신상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로 매진한 그의 뜨거운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의 걸작품인 동시에 우리나라의 고지도를 집대성한 최고의 고지도이다.

   


한국 고지도의 특색

조선시대 고지도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첫 번째 그룹은 지도 제작의 전문가들이었다.

정척은 세종의 명으로 함경· 평안· 황해 등지의 산천을 직접 조사하여

8도지도를 제작한 지도 제작의 전문가였다.

또한 지도 제작에 밝았던 양성지는 고려사 지리지 편찬도 담당하였고,

동국여지승람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하삼도(下三道)를 조사한 후 8도지도를 만든 조선 초기 최대의 지리학자였다.

 

두 번째 그룹은 화가 그룹이었다.

강희안은 학자이며 화가로서 유명하였고, 안귀생은 화공이었다.

 

세 번째 그룹은 풍수지리가들이었는데, 안효례는 산천형세를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상지관이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그룹은 측량가였는데, 박수미는 계산에 밝은 산사(算士)였다.

  

위와 같이 4개의 그룹에 의해 제작된 한국 고지도는

서양이나 중국, 일본 등의 고지도와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다른 특징이 있다.

 


첫째 산맥과 강줄기를 중요시하여 그렸다.

「조선방역도」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고지도들은 백두대간을 비롯해 산맥과 강줄기를 반드시 그렸다.

중국의 고지도나 일본의 고지도 등에도 산과 강을 표시하고 있지만,

그들 지도가 산맥이 아닌 산을 단독적으로 그렸는데 비해

우리나라의 고지도는 산을 연첩하여 산맥으로 표시하였다.

 

이것은 신라 때 수입된 풍수지리의 영향이며,

지도 제작시 풍수가인 상지관들이 꼭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세조가 보현봉에 올라가 ‘서울 지도’를 그릴 때에도 상지관인 안효례를 데리고 갔으며,

정척과 양성지가 전국을 측량하여 ‘동국지도’를 만들 때에도 상지관을 대동하였고,

조선 후기 산성을 쌓고 ‘산성도’를 제작할 때에도 상지관이 참여하였다.


둘째 백두산을 반드시 표기한 점이다.

우리 민족은 백두산을 민족의 발상지로 여겨 신성시하였으며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

이첨이 조선 초기에 ‘삼국도’를 만들고 쓴 서문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철령에 이르러 갑자기 솟아오르며 금강산이 되고 거기서 중첩하여

태백산, 소백산, 죽령, 계립령, 추양산이 되고 한 갈래는 운봉으로 뻗어 지리산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셋째 고지도 제작시, 화공들이 참여하여 그렸기 때문에

지도라기보다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과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일례로 세조가 보현봉에 올라 ‘경성도’를 그릴 때 화가 강희안이 참여하였으며,

정척이 ‘이북삼도’를 양지하여 산천형세를 살필 때에도 화공을 대동하였다.


넷째 조선시대 선조들은 우리나라를 삼천리가 아닌 ‘만리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만주까지 포함하는 지도를 그렸다.

당시 지리학의 제일인자였던 양성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우리의 국경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나라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이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나라의 크기는 거의 만리(萬里)이다.”라고 하였다.

 

또 노사신(盧思愼)이 쓴 「동국여지승람」 전문에서도

우리의 국토가 만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밖에 서거정은 「동국여지승람」 서문에서

“고려의 서북지방은 압록강을 못 넘었지만

동북지방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해서 고구려 지역을 더 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에는

우리나라의 영토가 만주까지 포함하는 만리의 나라라는 영토 의식이 있었다.

이를 반영한 것이 바로 「조선방역도」인 것이다.




- 글 / 사진 : 이상태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전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 사진 제공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 2007년 11월14일 

▶기주짱이 사진자료 추가 정리

 

 

 

 

 

- 전수연 / 자작나무 숲길로 (With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