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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Gijuzzang Dream 2008. 8. 22. 12:58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6곡병

 

 

 

단원 김홍도 作, 1778년, 비단담채, 122.7× 287.4㎝, 국립중앙박물관

 

1778년(정조 3) 12월, <서원아집도> 6폭병풍을 그림. 

고운 비단 바탕에 정성을 다해서 세필로 그린 품위 있는 고사인물도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아마도 궁중용의 병풍으로 사료되는 그림으로

방정한 서체와 인물묘사의 유연성과 구도의 묘사 그리고 구성 및 기량의 정도를 가늠케 하는 명품이다.

궁중용일 가능성은 첫째 엄정하고 격조 높은 필법, 둘째 김홍도라는 성명을 해서로 반듯하게 쓴 점,

셋째 강새황의 화제 문장 역시 진중하기 때문이다.

서원아집도는 본래가 중국 인물들의 고사를 그린 내용으로서 본(本)이 전해오는 그림이지만

김홍도는 강세황의 말대로 중국의 본을 따라 그대로 그리지 않고 나름대로 포치를 살려 자신의 화법을

구사해 그려낸 걸작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중국 작품보다도 오히려 뛰어나다고 한 점이 주목된다.

 

 

<서원아집도>는 대개 1087년(宋, 철종 2년, 고려 의종 4년) 

북송의 개봉에 있던 부마도위 왕선(王詵, 1036-1086 이후)이 자신의 별서정원 “西園”에서

소식(소동파), 미불(미원장), 이공린(이백시)을 비롯 당시의 유명한 시인과 묵객 16명이 모여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담론하는 아회(雅會) 광경을 그린 것으로 생생하면서 품위있게 그렸다.

 

 

모임에 참석했던 미불이 도기(圖記)를 쓰고, 화가 이공린이 그림으로 그리고

“서원아집도(서원의 운치있는 그림)”란 이름을 붙인 뒤 널리 회자되며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그림에서 우리나라에서는 고사인물도의 소재로 유행하였다.

 

특히 미불의 <서원아집도기(西園雅集圖記)>는

그 내용을 파악하는 기준자료로 가장 중요하게 읽혀져 왔다.

이에 의하면, 참가자 16명은 대략 4개의 부분으로 그려졌다 한다.

 

먼저 소식(蘇軾)이 탁자 위에서 글씨를 쓰고,

왕선(王詵)과 채조(蔡肇), 이지의(李之儀)는 옆에서 이를 보고 있다.

두 번째로 이공린(李公麟)이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그린 두루마리를 펼치고 있는데,

그 곁에서 소철(蘇轍), 황정견(黃庭堅), 조보지(晁補之), 장뢰(張耒), 정정로(鄭靖老)가 에워싸고 있다.

세 번째로 진관(秦觀)은 앉아서 진경원(陳景元)이 거문고 타는 것을 듣고 있고,

왕흠신(王欽臣)은 미불(米芾)이 절벽에 글씨를 쓰는 것을 올려다보고 있다.

네 번째로 원통대사(圓通大師)는 유경(劉涇)과 무생론(無生論)에 대해 담론하고 있다.

그리고 이공린이 그린 서원아집도는 이소도(李昭道) 계열의 착색법(着色法)으로 그린 그림이라 하였다.

 

이상이 서원아집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해였으나

이런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는 역사적인 진실이 아니라

후대에 창조된 허구적 이상(理想)이었다는 현대학자의 문헌고증이 제기된 바 있다.

이에 의하면 참가자들의 문집은 물론이요,

11세기의 다른 기록에서도 왕선의 서원에서 그런 아집이 있었음을 언급한 기록이 전혀 없고,

이공린이 그렸다는 설색법의 서원아집도에 대한 기록도 없으며,

미불의 <서원아집도기>는 16세기에야 처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왕선이 서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도 당대에는 없었는데,

만약 황제의 사위인 왕선의 집에서 그런 일류명사들의 아집이 있었다면

이는 대대적으로 언급되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6명의 참석자 명단도 기록마다 출입이 많고,

1087년에 미불은 강남지방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많으며,

기실 16명이 한꺼번에 그렇게 모인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서원아집도”라는 명칭은

1255년(남송, 보우 3년)에 쓰인 유극장(劉克庄, 1187-1269)의 문집에 처음 보이는데,

글이 자세하지 않아 어떤 작품인지는 잘 알 수 없다고 한다.

왕선의 서원에 소식 등이 모인 서원아집도의 내용을 말한 최초의 문헌은 양사기(楊士奇, 1365-1444)가

조백구(趙伯駒)와 범륭(梵隆), 유송년(劉松年)의 서원아집도에 대한 임모(臨模)를 언급한 기록이며,

이후 16세기경에 이르러서야 지금과 같은 내용이 미불의 “서원아집도기”라는 글에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이상의 문헌들을 종합할 때,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는

북송이 망한 남송 초의 고종(1127-1162) 무렵에 신법당(新法黨)이 국가를 멸망시킨 역적으로 몰락하고

그동안 역적으로 지목되어왔던 구법당(舊法黨)의 원우당인(元祐黨人)들이 복권되었으며,

특히 원당인에 속했던 서원아집의 참석자들이 오히려 북송문화의 뛰어난 성취의 표상으로 이상화되면서

허구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西園雅集圖記>

李伯時效唐小李將軍爲著色泉石雲物草木花竹,皆妙絶動人。

而人物秀發,各肖其形,自有林下風味,無一點塵埃氣,不爲凡筆也。

이백시(이공린)는 당의 소이장군을 본받아 색채, 산수, 경치, 초목, 꽃, 대나무 모두 절묘하여

사람을 감동시킨다. 그리고 인물화에 뛰어나 각각 그 형상을 닮았으며,

스스로 탈속한 풍미가 있어 한 점 속세의 기운도 없으니, 범상한 필치가 아니다.

 

其烏帽黃道服捉筆而書者爲東坡先生。仙桃巾紫裘而坐觀者爲王晉卿。

검은 모자 쓰고 누런 도의 입고 붓을 잡고 글씨를 쓰는 이는 동파선생(소식)이다.

복숭아빛 두건과 자주색 옷을 입고 앉아서 보는 이는 왕진경(왕선)이다.

 

幅巾靑衣據方几而凝竚者爲丹陽蔡天啓。捉椅而視者爲李端叔。

복건 쓰고 푸른옷을 입고 방궤에 의지해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이는 단양 채천계(채조)이다.

의자에 앉아 옆으로 기대어 보고 있는 이는 이단숙(이지의)이다.

 

後有女奴,雲鬟翠飾,侍立自然,富貴風韻,乃晉卿之家姬也。

뒤에는 계집종이 쪽진 머리에 비취 장식을 하고, 부귀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왕진경을 모시면서 서있는 모양이다.

 

②  

 

孤松盤鬱,後有凌霄花纏絡,紅綠相間,下有大石案,陳設古器瑤琴,芭蕉圍繞,

오래된 소나무 울창하고 뒤에는 능소화가 얽어져 붉은 빛과 초록이 섞여 있고,

그 아래 큰 상석이 놓여 있어 고기(古器)와 금(琴)을 올려놓았으며 그 주위에는 파초가 드리워져 있다. 

 

坐於石盤旁,道帽紫衣,右手倚石,左手執卷而觀書者爲蘇子由。

돌탁자 곁에 앉아 도인의 모자를 쓰고 자줏빛 옷을 입고 오른손은 의자에 기대고

왼손은 책을 집어든 채 그림을 보는 이는 소자유(소철)이다.

 

團巾繭衣,手秉蕉箑而熟視者爲黃魯直。幅巾野褐,據橫卷畫淵明歸去來者爲李伯時。

둥근 두건 쓰고 비단옷 입고 한손에 파초 부채를 잡은채 자세히 바라보는 이는 황노직(황정견)이다.

복건 쓰고 거친 갈옷 입고 두루마리(횡권)에 도연명의 귀거래를 그리는 이는 이백시(이공린)이다.

 

披巾靑服,撫肩而立者爲晁無咎。跪而捉石觀畫者爲張文潛。

피건 쓰고 푸른 옷 입고 어깨를 만지며 서 있는 이는 조무구(조보지)이다.

무릎을 꿇어 앉아 돌탁자를 잡은 모습으로 그림을 보는 이는 장문잠(장뢰)이다.

 

道巾素衣,按膝而俯視者爲鄭靖老,後有童子執靈壽杖而立。

도건 쓰고 흰옷 입고 무릎을 누른 모습으로 기대어 그림을 보는 이는 정정로이며,

뒤에는 사내아이가 영수장(영수목으로 만든 지팡이)을 잡고 서 있다.

 

二人坐於蟠根古檜下,幅巾靑衣 袖手側聽者爲秦少游;琴尾冠紫道服撥阮者爲陳碧虛。

굵은 가지가 휘감아 올라간 늙은 노송 아래 두 사람이 앉아 있는데,

복건 쓰고 푸른 옷 입고 소매에 손을 넣은 모습으로 듣고 있는 이는 진소유(진관)이고,

금미관 쓰고 자줏빛 도의 입은 모습으로 완(阮, 월금)을 연주하는 이는 진벽허(진경원)이다.

 

唐巾深衣,昻首而題石者爲米元章。幅巾袖手而仰觀者爲王仲至。前有鬅頭頑童捧古硯而立。

당건 쓰고 심의(深衣) 입고 돌벽 위에 시를 적고 있는 이는 미원장(미불)이다.

복건 쓰고 소매에 팔을 넣은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는 왕중지(왕흠신)이다. 

앞에는 흐트러진 머리를 시동이 오래된 벼루를 들고 서 있다.

 

後有錦石橋,竹徑繚繞於清溪深處,翠陰茂密,

中有袈裟坐蒲團而說無生論者爲圓通大師,傍有幅巾褐衣而諦聽者爲劉巨濟,二人並坐於怪石之上,

下有激湍潀流於大溪之中,水石潺湲,風竹相呑,爐煙方裊,草木自馨。

뒤에는 금석교가 있고, 대숲 길은 깨끗한 시내 깊은 곳으로 감겨드니 푸른 그늘이 우거져 빽빽하다.

그 대숲그늘 가운데 가사 입고 부들방석에 앉아 무생론을 이야기하는 원통대사,

복건 쓰고 갈옷 입고 겸손하게 듣고 있는 유거제(유경),

두 사람은 모두 너른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다.

아래에는 빠르게 흐르는 여울이 있어 큰 시내 가운데로 모여 흐르는데, 물과 돌은 잔잔히 흐르고

바람과 대는 서로 어울리며, 향로의 연기는 가늘게 흔들리고, 초목은 절로 향기롭기만 하다.

 

人間淸曠樂不過此。嗟乎!洶湧於名利之場而不知退者豈易得此耶?

세상 청광한 즐거움이 이보다 낫지 않으니

아! 명리에 들끓어 물러날 바를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이를 쉽게 얻겠는가?

 

自東坡而下,凡十有六人,以文章議論,博學辨識, 英辭妙墨,

好古多聞, 雄豪絶俗之姿, 高僧羽流之傑, 卓然高致。

後之覽者,不獨圖畫之可觀,亦足仿佛其人耳。

소동파로부터 모두 열여섯 사람이 문장으로 의논하는데, 박학 변식하고, 훌륭한 말과 절묘한 글이요,

것을 좋아하고 들은 것이 많으며, 영웅호걸의 절속한 풍채와 고승ㆍ도사의 걸출함이 빼어나고 고상하다.

후에 보는 이는 단지 그림이 볼만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사람을 방불하는 것으로 충분할 따름이다.

 

 

▲ <선면 서원아집도(扇面 西園雅集圖)>

지본담채, 26.9×81.2㎝, 국립중앙박물관

 

화제(畵題)가 1777년 음력7월, 즉 초가을에 먼저 씌어지고

그림은 이듬해 여름(음 4,5,6월중) 비오는 어느 날 그렸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묵은 약속을 위해 강세황의 글씨부터 받아 두었다가, 해를 넘겨 더위가 다가오면서

이를 꺼내어 완성했던 듯 싶다. 중국 선비들을 그렸지만 얼굴은 조선 맛이 난다.

 

김홍도 34세 때인 1778년(정조 3) 여름 <서원아집도> 부채그림을 그려

이용눌(李用訥)에게 주었다는 화제기록이 있다 (戊戌夏 雨中寫贈 用訥 士能).

 

조선시대 서원아집(西園雅集) 주제의 그림은 18세기 이후 것들이 전하고 있는데

김홍도의 경우 알려진 것만도 <선면서원아집도>를 비롯해, 8폭병으로 된 것 등 3점에 이른다.

<선면서원아집도>에는 강세황이 등장인물 모두를 열거하고 있다. 

 

시중드는 인물 10명을 포함하여 모두 26명이 등장되는 이 <서원아집도>는 강세황의 화평에서

중국의 이공린이 이 주제의 그림으로선 첫째이나 김홍도가 그와 우열을 다루기 힘들며

오히려 더 훌륭하며,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비록 중국의 이 분야 그림은 도판에 의한 이해이나

알려진 몇 그림과 비교할 때 주제의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화면의 구성 및 구도 그리고 묘사에 있어서도 김홍도 나름의 독자성이 두드러진다.

 특히 도석인물이나 고사인물화에 있어서는 중국에 연원을 둔 내용이기에

중국의 한 아류로 보기 쉬우나 이 분야에서도 화풍에 있어 적지 아니한 차이를 감지하게 된다.

 

6폭을 하나의 화면으로 하여 대각선 구도로 안배하여,

담장만은 비스듬히 들여다보는 시점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버드나무ㆍ오동ㆍ 파초ㆍ소나무ㆍ타작나무ㆍ대나무 등을 비슷한 비중으로 배경에 등장시켰고,

인물은 다소 우측에 치우친 몇 단으로 나누고, 각기 다른 동작과 자세, 표정마저 읽을 수 있도록 나타냈다.

 

한 쌍의 학과 사슴도 각기 인물군과 문 쪽으로 향하게 하여 시선을 양분케 하는 듯 조화를 꾀하고 있다.

바위와 수목처리의 자신감이 있는 강한 필선과 인물 표현의 고른 선 등 여러 측면에서

기량과 격조를 읽을 수 있다. 김홍도의 고사인물화 중에 대표작에 드는 수작이다.

 

강세황(姜世晃, 1716~1791)의 제발(題跋)이 적혀 있는데,

여기서 강세황은 송대(宋代) 문인들의 풍류장면에 대해

"인간 세상에 청광(淸曠; 맑고 밝음)의 즐거움이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아아, 명리(名利)의 마당에 휩쓸려 물러갈 줄 모르는 자는 어찌 쉽게 이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함으로써 문인들의 고아하고 아취 있는 아집(雅集)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였다.

 

강세황의 화평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전에 본 아집도(雅集圖)가 무려수십점에 이르는데

그 중에 중국화가 구영(仇英, 1509~1559, 字 十洲)이 그린 것이 제일이었고

그 외 변변치 않은 것들은 지적할 가치가 없다.

이제 김홍도의 이 그림을 보니 필세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고상하며

포치(布置)가 적당함을 얻었으며 인물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미불(米芾, 1051~1107, 字 元章)이 절벽에 글씨를 쓰고,

이공린(李公麟, 1054~1105, 字 伯時)이 그림을 그리고

소식(蘇軾, 1036~1101)이 글씨 쓰는 것 등에 있어

그 참된 정신을 살려 그 인물과 더불어 서로 들어맞으니

이는 정신으로 깊이 깨달은 것이거나 하늘이 주신 재능인 것이다.

 

구영의 섬약한 필치에 비교하면 이 그림이 훨씬 좋다. 이공린의 원본과도 우열을 다툴 정도이다.

뜻하지 아니하게 우리나라 지금 이러한 신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림은 진실로 원본에 못하지 않은데 나의 필법이 성글고 서툴러 미불에 비할 수 없으니

다만 좋은 그림을 더럽히는 것이 부끄럽다. 어찌 보는 이의 꾸지람을 면할 수 있으랴.

무신년(1778) 섣달 표암이 제(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