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느끼며(시,서,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 중 '고누놀이'는 '윷놀이'그림

Gijuzzang Dream 2008. 8. 21. 15:51

 

 

 

 

 

 김홍도의 "고누와 나무하기"

김홍도의 작품 ‘풍속화’다.

그림 오른쪽에는 상투를 튼 어른이 나무에 기대어 곰방대를 물고 물끄러미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보고 있고, 그림 중앙에는 아이 둘이 웃통을 벗고 놀이에 한창이다.

그리고 그 왼쪽에 아이 둘 역시 구경을 하고 있다.

그림의 위쪽에는 집채만 한 나뭇짐을 얹은 지게 둘을 언덕에 기대어 놓았고,

그 왼쪽에 다시 더벅머리 아이 하나가 나뭇짐을 지고서 오고 있다.
 

김홍도 ‘고누놀이’

더벅머리 총각들이 길바닥에 주저 앉아 놀이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아무 곳에나 말판 그리고 놀이… 방식도 다양

 

이 그림은 고누 두는 그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누는 흙 마당이나 종이 등 아무 곳에나 말판을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많이 잡아먹거나,

상대의 집을 차지하거나,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이기는 놀이다.

지방에 따라 꼰, 고니, 꼬니, 꼬누 등 여러 가지로 부르고,

그 놀이의 방식도 다양해서 우물고누, 네줄고누, 밭고누, 호박고누, 샘고누, 강고누, 줄고누,

팔자고누, 십자고누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장기와 바둑은 놀이하는 판이 정해져 있지만, 고누는 다양한 이름만큼 말판의 종류도 많고,

노는 방식도 다양하다. 또 말판이 간단하여 언제 어디서나 둘 수 있었다.

필자 역시 어릴 적에 적잖이 즐겼다.

 

한데 이 그림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이 그림의 고누판은 둥근 원을 그리고 그 속에 다시 십자를 그리고 있는데

이런 고누판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사실 이 그림은 윷판으로 보인다.

윷가락이 없으니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둥근 원형 안에 작은 물건 넷이 보이는데, 이것이 윷일 수 있다.

윷은 꼭 나무로 길게 만든 것이 아니라도 된다.

나는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이 작은 고동 껍데기를 윷가락 대신 쓰는 것을 보았다.

땅에 살짝 굴려도 도 개 걸 윷 모가 나왔다.

 

이제 나뭇짐 쪽으로 말머리를 옮기자.

도시에서 나고 자란 50대 이하의 세대는 나무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것이다.

필자 역시 나무를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아버지 세대, 그리고 주변의 시골출신들은 나무 하러 다닌 기억을 종종 떠올린다.

나무가 없으면 취사와 난방을 할 수 없었으니, 나무는 필수적인 생존 수단이었던 것이다.

필자의 직장인 부산대학이 있는 부산 동래는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조 때부터 있던 온천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다.

일제시대에 온천장을 소개하는 사진엽서가 만들어졌는데, 사진 속의 금정산을 보면

완전히 민둥산이다. 왜냐고? 땔감 때문에 나무가 남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산이 우거진 것은 연탄을 연료로 쓰면서부터일 것이다.

물론 적극적인 식목정책도 한몫을 했지만.

 

김홍도가 살던 조선시대는 나무 하기가 쉬웠던가.

조선시대가 지금보다 환경이야 더 깨끗했겠지만, 국토가 온통 나무로 뒤덮인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나무를 할 만한 곳은 모두 개인의 소유로 분할되어 있었고,

그 개인 소유지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불법이었다.

‘경국대전-공전’을 보면 나무하는 곳, 즉 시장(柴場)이란 곳에 대한 흥미로운 조항이 있다.

‘시장’은 땔나무를 하는 곳으로 관청에는 땔나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관청마다 일정한 면적으로 땔나무 하는 곳을 분배해 준다.

예컨대 봉상시· 상의원· 사복시· 군기시· 예빈시· 내수사에는 모두 사방 20리,

내자시· 내섬시· 사재감에는 15리, 사포서에는 5리의 ‘시장’을 지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뒷날 문제를 일으킨다.

 

명종 9년 12월10일 사헌부에서 올린 상소문의 일부를 보자.

 

서울 주위 30리의 꼴과 땔나무가 있는 곳은 모두 세도가가 독점하여,

베어가는 것을 금지합니다. 때문에 근방의 나무를 해서 파는 사람들이 그 위세에 눌려

손을 대지 못하고 개울을 건너고 고개를 넘어 가기 때문에 너무나 고생스럽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파는 나무 값이 극히 비쌉니다.

 

 

나무 할 만한 곳은 모두 권세가들이 독점

 

권세가가 서울 근처의 나무를 할 만한 곳을 모두 독점해 버려 나무 값이 뛰어오른다는 것이다.

이런 권세가를 한 명 밝히자면, 문정왕후의 오라비였던 윤원형이 있다.

박순(1523∼1589)의 상소에 의하면, 윤원형은 수락산 일대를 독차지하여 주민들의 무덤까지

파헤치면서 주민들을 내쫓은 뒤 시장(柴場)을 만들고는 그곳에서 땔나무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중 일부를 세금조로 바치게 했다고 한다.

원래 수락산은 서울에 가깝기 때문에 누구나 땔나무를 하거나 꿩이나 토끼를 잡기 위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산이었는데, 이것을 윤원형이 독점했던 것이다.  

한데 이것은 윤원형과 같은 일부 권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훨씬 전부터 시장의 독점은 있어왔고, 조선후기에도 사정은 동일하였다.

 

성종 연간의 인물인 서거정의 시에 나무꾼을 둘러싼 꽤나 진지한 시가 한 편 있다.

‘토산(兎山)의 시골집에서 농부의 말을 기록하다’라는 제목의 긴 시를 남기고 있는데,

나무꾼의 하소연을 옮겨 적은 것이다. 앞부분을 요약해 보자.

 

이 농부는 불암산 기슭에서 농사를 지으며 겨우 살아간다.

그런데 뜬금없이 간교한 자의 토지 소유권 소송에 걸려든다.

교활한 아전들의 협잡질로 오막살이 한 채만 남기고 땅을 죄다 빼앗기고,

근근이 남아 있는 묵은 땅을 경작해 보지만, 흉년까지 든다.

세금을 낼 형편이 아니건만 아전들은 날마다 찾아와서 세금을 내 놓으라 닦달이다.

급기야 산속으로 달아나 숨어 있자니, 굶주린 뱃속에 불이 붙는 듯 아리고, 얼굴빛은 날마다

까맣게 타들어간다. 그래서 나무를 해다 팔기로 한다. 이제 나무꾼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땔나무 하러 산 속으로 들어가면

산중에 땔나무 무성하지요.

집에 누런 송아지 한 마리 있지만

한 해 내내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해

나뭇짐 나를 수 없기에

한 발짝에 두 번씩 꼬꾸라지며

걸음걸음 내가 지고 이고 나르니

두 어깨살은 벌겋게 부풀어 올랐지요.

해 떨어질 녘에야 성으로 들어와서는

길에서 만난 야박한 장사치가

푼전까지 다투며 나무 값 후리치니

쌀값은 비싸고 내 품삯은 헐하기 짝이 없네요.

 

농부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한 짐 해서 나오는데,

뼈만 남은 몸이라 등에 지고 오자니 그것도 힘이 든다.

시내에 들어와 팔려하지만, 야박한 장사치가 값을 후리치니, 품삯도 안 나온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자신에게 의지하는 가족들이 있다.

 

그래도 집에 있는 열 명의 식구

밥 달라고 소리치는 걸 생각하면

한 되든 한 말이든 어찌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주린 창자를 달래얍지요.

집에 돌아와 마누라 자식놈과 마주 앉아

차츰 죽이라도 먹게 되었지만

이렇게 하여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 삶이 정말 딱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나마 나무를 해 팔아 처자식과 점차 죽이나마 먹게 되었다.

하지만 웬일인가. 사람 고생은 끝이 없다.

 

얼마 전부터 권세가의 힘이

나무며 돌까지 미쳐

산이란 산은 죄다 제 땔나무 밭으로 차지해

사람들 나무 하고 꼴 베는 것을 막고부터

서쪽 집은 땔나무 한 번 한 죄로

매질 마구 하여 피가 철철 흘렀고

동쪽 집은 소가 밭을 밟은 죄로

아비 아들 나란히 묶여 갔지요.

아무런 이유 없이 백성의 재물 약탈해

낫과 도끼까지 모두 빼앗아 갔지요.

 

 

땔나무 한번 잘못하면 가혹한 私刑

 

힘 있는 권세가의 힘이 나무와 돌에까지 미쳐 산마다 줄을 치고 자기 땔나무 밭으로 삼는다.

만약 그 독점 공간에 들어가 땔나무를 하게 되면,

찾아와서 피를 흘릴 정도로 가혹한 사형(私刑)을 가하고, 낫과 도끼까지 빼앗아 갔던 모양이다.

 

시를 지은 서거정은 이 비극적 사태를 보고하면서

시의 끝에서 “나는 지금 이 말을 듣고 나서/ 한밤중에 홀로 흐느끼어 우노라”라고

깊은 동정을 표했지만, 조선조 말까지 백성들의 고통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김홍도의 이 한 장의 그림에도 뜯어보면,

사실 조선조 백성들의 삶과 역사가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2008-04-07 서울신문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단원의 '고누놀이'는 정말 '고누놀이'를 그린 것일까?

 

 

 

단원풍속화첩은 김홍도의 나이 37세 되던 1781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25장의 그림으로 구성된 화첩은 조선후기의 생활사를 매우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를테면 '서당'의 모습에서부터 밭갈이를 하거나 편자를 박고 물고기를 잡는 현장에까지

다양한 민중의 삶을 그려냈다.

 

단원풍속화첩이 보물 제527호로 지정된 것은 결코 단원의 성가(name value)때문만은 아니다.

궁중화원으로서 이름 없는 농투산이와 미장이, 뱃사공과 장사치의 삶에 시선을 던지고,

이들의 진솔한 모습을 과감한 붓질로 생동감 있게 화폭에 담았다는 데 더욱 가치가 있다.

 

단원풍속화첩은 미술사학적 영역, 민중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민속학에서도 매우 유용한 자료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풍속화첩에는 화제(畵題)와 간기(刊記)가 없고 낙관(落款)만 있거나

더러는 낙관마저 없다. 그래서 그림에 제목을 새로 붙여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모두들 소중한 자료이기는 하나 이 가운데, 풍속화첩의 13번째 그림은 '고누놀이'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흔히 그렇게 알고 있는 '고누놀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화제는 단원이 작품을 제작한 후 160여 년이 지나서야 붙여진 이름이다.

그림을 판독하고 정리하면서 '고누놀이'로 작명되고, '고누놀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어떤 과정을 통해 풍속화첩 낱그림들의 화제가 정해졌는지는 모르나,

그림의 내용을 토대로 화제가 붙여진 것만은 분명하다. 화첩을 정리하면서 그림의 내용에 걸맞은

가장 적당함직한 '고누놀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터이다.

지금은 널리 알려져 '고누놀이'라는데 전혀 의심받고 있지 않다.

 

 

일본인 학자가 붙인 이름, '고누도'

 

확인한 바 김홍도의 그림에 '고누놀이'라는 화제를 처음으로 붙인 사람은 '무라야마 지준'이다.

무라야마는 <朝鮮鄕土娛樂>이라는 책에 김홍도의 이 그림을 게재하면서 '토기지도(土碁之圖)'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른바 '땅장기 그림'이라는 뜻이다.

고누놀이를 한자화하여 흔히 '지기(地碁, 땅장기)'라 하는데

이는 '땅에서 노는 장기' 정도로 '고누'를 생각했던 탓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후대의 사람들이 이 명칭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고누놀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고,

마침내 초등학교 읽기 교과서에까지 그대로 수록되었다.

 

 

 

김홍도의 '고누놀이' 그림은 정말 고누놀이를 그린 것일까.

필자는 전에 이 그림을 '고누놀이'로 읽는데 문제가 있다는 부정적 견해를 펼친 바 있다.

김홍도가 그린 것은 고누놀이가 아니라 '윷놀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비판을 받거나 지지되지 않은 채

여전히 '고누놀이'나 '우물고누'로 기술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글을 거듭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밭의 형태와 기물을 새로 봐야

 

단원풍속화첩의 그림을 '고누놀이'가 아닌 '윷놀이'로 보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선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말밭(Board)의 생김새가 되는 윷판이라는 점이다.

그림과 같은 말밭을 가진 고누는 현재 없다.

물론 18세기까지 전승되다가 소멸된 고누라 할 수 있으나 이는 억지이다.

어떤 이는 '우물고누'라 지칭했으나  + 자에 원형을 두른 말밭의 생김새는 우물고누와 닮았으되

목(目)의 수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우물고누'의 목이 5개인데, 그림에서 보이는 목은 수십 개이다.

등장인물에 의해 가려져 목의 수를 정확히 셀 수는 없으나 짐작컨대 29개가 아닌가 한다.

이는 현행 윷판의 말밭이다. 

 

     

                                                                 윷놀이(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 /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

 

 

둘째, 말밭의 목에 기물(器物)이 놓여 있지 않고 말밭 내부에 기물이 놓여져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도 4개의 기물이다. 말밭 위에 기물이 놓여 있지 않고, 말밭 내부에 기물 4개가 놓여 있는 것은

기존의 고누놀이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이다.

따라서 말밭 위에 놓인 4개의 기물은 '말'이 아니라 '윷'이라는 점이다.

윷은 크게 장작윷과 밤윷의 두 종류로 나뉘는데,

그림에 등장하는 4개의윷가락 크기가 작다는 점에서 밤윷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윷판 내부에 떨어져 있는 윷가락은 '이미 던져진 밤윷가락'을 뜻한다는 점이다.

왼쪽 하단의 등장인물, 곧 등을 보이고 오른손을 뻗친 인물이 던진 윷이다.

그러므로 단원의 그림은 '윷놀이' 그림이며, 좀더 세부적으로 지적하면 '밤윷놀이'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단원풍속화첩의 13번 그림은

'고누놀이'가 아니라 '윷놀이'이며,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밤윷놀이'이다.

이 점은 1890년 전후에 제작된 기산풍속도의 그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기산풍속도의 윷놀이 그림은 구도와 내용 면에서 단원의 풍속화첩 그림과 유사하다.

놀이판인 말밭의 생김새도 같고, 떨어져 있는 윷가락도 비슷하다.

분명한 것은 기산 김준근이 풍속도를 그리면서

이 그림이 '윷놀이'라는 화제를 분명하게 적었다는 점이다.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에서 윷놀이 그림은 여럿 있는데,

한결같이 <도사(도사)> <� 뒤고> <아희�뒤기하고> <�뒤는 모양>과 같은 화제를 적고 있다.

 

모두 '윷놀이'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화제가 없는 단원풍속화첩 그림은 '윷놀이'로 교정해야 한다.

 

단원풍속화첩은 국정교과서에 수록될 만큼 옛 생활사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잘잘못을 가리려는 인식은 물론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도 없이 '고누놀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데, 이유는 여러 가지다.

관행적으로 이어온 이름을 함부로 바꿀 수 없는 암묵적 동의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기존의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순종적 태도도 문제이다.

어쩌면 민속학 영역의 '민속놀이'와 미술사학 영역의 '그림'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일일수도 있다.

이를테면 그림은 알되 놀이는 모르고,

놀이는 알되 그림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연구 영역의 한계에 따른 결과가 아닌가 한다.

 

단원풍속화첩의 그림 '윷놀이'이 좀더 비판적으로 검토되어 옳다면

'고누놀이'라는 이름으로 교과서에까지 수용된 오류를 시정하는데 더는 주저할 까닭이 없다.

- 장장식,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 <민속소식> 국립민속박물관, 2008년 07월호

 

 

 

 

 

 

- 양강석 연주/  'Ocarina of My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