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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단(先蠶壇)

Gijuzzang Dream 2008. 8. 20.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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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잠단(先蠶壇)

 

 

 

사적 제83호

소 재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4-1

시 대 : 조선 성종 2년(1471)

 

 

선잠단 터는 조선시대 역대 왕비가 누에를 길러 명주를 생산하기 위해

잠신(蠶神, 누에신)으로 알려진 중국 상고 황제(黃帝)의 황후 서릉씨(西陵氏)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곳이다.

 

 

원래 선잠단은 1400년(정종 2) 3월에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하여 달라는 기원을 드리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현재 선잠단 터는 1471년(성종 2)에 동소문(혜화문) 밖에 쌓은 것으로 총면적이 528평으로

사직단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단 남쪽에는 한 단 낮은 댓돌이 있고

그 앞쪽 뜰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

 

 

우리나라 선잠(先蠶)의 의례는 중국의 옛 제도를 본받아 고려 초에 시작되었으며,

 

 

조선시대 왕비의 임무 중 하나는 친잠례(親蠶禮)를 지내는 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주산업이 농업인 국가였다.

따라서 왕실에서도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국왕이 농사를 짓고,

왕비는 누에를 치는 행사를 거행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시범을 보였다.

농업을 주관하는 신(神)을 동대문구 제기동의 선농단(先農壇)에서,

잠업을 주관하는 신은 선잠단에 모시고 국가에서 매년 제사를 지냈다.

나라에서는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기 위해 국왕은 친경(親耕)을 하고,

왕비는 궁중 안에 단을 꾸며 내명부, 외명부들을 거느리고 친잠례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친경의궤>는 국왕이 전농동에 있던 적전(籍田)에 나가 시범적으로 농사를 짓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고,

<친잠의궤>는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여인들이 궁중에서 직접 누에를 치는 행사를 기록한 것이다.

 

 

 

선잠단을 설치한 이후 매년 늦은 봄(음 3월) 길한 뱀날[巳日]에

혜화문 밖의 선잠단에서 풍악을 울리고 제사를 지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10권에

'선잠제는 음력 3월에 풍악을 써서 제사를 지낸다'고 되어 있어

선잠제 거행시 일무와 제례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잠신에 대한 제사는 일반 양잠농가에서도 시행되었으며,

제사지내는 날은 정월 5일이며 잠실의 정남향 쪽에 잠신을 모시고

떡과 차(茶), 향을 갖추고 제사를 지냈다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소개되어 있다.

이 날 조정에서는 선잠제가 국가의식이므로 대신을 보내어 제사를 주관하였다.

 

특히 세종은 누에치기, 즉 양잠을 크게 장려하여 각 도마다 적당한 곳을 골라 뽕나무를 심도록 하고,

한 곳 이상의 잠실(蠶室)을 지어 누에를 키우도록 하였다.

누에실(蠶絲)이 생산되면 국가에서 엄밀하게 심사하는 것을 제도로 삼았다.

 

1506년(중종 1)에는 여러 도의 잠실을 서울 근처로 모이도록 하였는데

현재의 서울 서초구 잠원동과 송파구 잠실동 일대는 그런 잠실이 있었던 지역으로

조선 말기까지 이 일대에는 300년 내지 400년 된 뽕나무가 있었다.

 

양잠의 기원은 상고시대부터 시작되었으나 선잠단을 쌓은 것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성종 8년(1477)에는 창덕궁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신축하여 왕비의 친잠례를 거행하고,

매년 3월 선잠단에 관리를 보내 제향의식을 행하여 왔다.

 

 

단은 사직단(社稷壇)과 같은 방법으로 쌓아 서릉씨의 신위를 모셨으며,

단의 남쪽에는 한 단 낮은 댓돌을 두었다.

융희(隆熙) 2년(1908) 7월 선잠단이 선농단(先農壇)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 배향한 후

중단되었고 선잠단의 그 터는 어느덧 폐허화되었다.

 

선잠단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1939년 10월 18일 보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83호로 재지정되었다.

성북구에서 고증과 자문을 거쳐 1993년 재현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오늘날 큰길과 집들로 둘러싸인 조그만 터전을 ‘先蠶壇址(선잠단지)’라 새긴 표석만이 지키고 있다.

 

 

 

 

 

 

 

  

 

 

 

 

 

 

 

 

 

 

                                                              친잠례(親蠶禮)

 

 

조선시대의 왕비는 국모로서 여성이 갖추어야 할 덕을 상징하였는데,

왕비가 행하는 친잠례는 특히 여성노동을 상징하였다.

남성들이 밭에 나가 땅을 갈고 먹을 것을 생산하는 동안,

여성들은 집에서 길쌈을 하여 입을 것을 생산하였다.

견우와 직녀의 전설도 농업사회 남성과 여성의 노동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길쌈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누에를 쳐야 했다.

봄에 부지런히 누에를 쳐서 실을 뽑아야 그 실로 가을에 좋은 비단옷을 만들 수 있었다.

조선시대 왕비가 내외명부 여성들을 거느리고 잠실(蠶室)에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의식이 바로 친잠례였다.

이 의식은 만물이 자라기 시작하는 3월에 친경례(親耕禮)와 함께 시행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잠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전국에 잠실을 두었는데,

한양에도 동잠실과 서잠실 등을 두어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쳤다.

궁궐 안의 넓은 후원에도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후원에 설치한 잠실을 '내잠실'이라고 하였는데,

왕비는 주로 이곳에서 친잠례를 행하였다.

 

친잠례를 행할 때 왕비는 황색 국의(鞠衣)를 입고 같은 색으로 된 상자에 뽕잎을 따서 넣었다.

조선 초기에는 황제의 색을 사용하는 것이 명분에 어긋난다고 여겨 국의를 청색으로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황색의 의미가 봄에 싹트는 뽕잎의 색을 본뜬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면서

후기에 들어 황색을 사용하였다.

국의를 착용할 때도 가체로 머리장식을 하였으나 이런 차림으로는 사실 뽕을 딸 수 없었으므로

왕비의 친잠례 때는 궁궐에서 뽕밭으로 이동할 때만 국의를 입었고,

뽕밭에 도착하면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조선시대 왕비의 예복인 국의는 노동을 상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친잠례를 행하기 전에 누에의 신인 '선잠(先蠶)'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선잠은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黃帝)의 부인 서릉(西陵)이었다.

<사기>에 따르면 서릉이 처음으로 양잠을 하였으므로 누에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선잠을 모신 곳이 선잠단인데, 조선 초기에 동소문(혜화문) 밖에 있다가

후에 선농단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선잠단에 올리는 제사는 종묘와 사직 다음으로 중요한 중사(中祀) 규모였다.

누에를 쳐서 길쌈을 하는 일이 국가의 정통성 다음으로 중요했던 것이다. 

한편 국가 제사는 중요성에 따라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의 세 종류로 나뉘어졌으며,

대사는 종묘, 사직에 지내는 제사이고,

중사는 선농단과 선잠단 등에, 소사는 명산대천 등에 지내는 제사이다.

 

선잠단에 제사를 올리는 방법으로는 다른 사람을 선잠단으로 보내 대신 행하게 하는 것과

왕비가 친잠하는 장소에 별도로 선잠단을 쌓고 직접 제사를 행하는 방법, 두 가지 였다.

조선시대 친잠례에 관해 영조대에 편찬된 <친잠의궤>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의궤는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 서씨가 경복궁 후원 터에서 행한 친잠례를 정리한 것이다.

 

 

창덕궁 어친잠실 - 서향각에서 친잠식 날 

중앙 윤황후, 그 왼쪽으로 의친왕비, 오른쪽은 흥친왕비

뒷편 좌우는 천일청상궁과 김충연상궁(황후와 의친왕비만 초록 직금당의 차림)

 

 

영조비 정성왕후가 행한 <친잠의궤>에 의한 친잠례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 왕비가 뽕을 딸 장소에는 흙으로 채상단(採桑壇)이라는 단을 쌓았다.

그리고 잔디를 심고 주변에 휘장을 쳐서 다른 곳과 구분하였으며,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머무를 천막을 쳤다.

정성왕후가 경복궁 후원터에 행차하여 친잠할 때 채상단을 마련하기 위해

150명의 군졸이 1개월간 사역(使役)을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일이 적지않은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2) 왕비와 수행여성들이 뽕을 따고 누에를 치기 위해서는

광주리, 갈고리, 시렁, 잠박(蠶箔), 누에 등이 필요했다.

 

왕비 등이 딴 뽕을 담기 위한 도구인 광주리는 대나무를 쪼개서 엮어 만들었는데,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모양이며 색깔은 왕비의 국의와도 같은 황색이었다.

지팡이 모양의 갈고리는 기다란 뽕나무 가지를 당기기 위한 도구로

손으로 잡는 자루와 나뭇가지를 걸기 위한 갈고리로 구성되었다.

왕비가 사용하는 갈고리는 주석으로 만들어 붉게 칠한 가래나무로 자루를 만들었다.

이에 비해 수행 여성들의 갈고리는 숙동(熟銅, 열처리한 구리)으로 만들었는데

자루는 가시나무였으며 색을 칠하지 않음으로써 왕비의 갈고리와 구별하였다.

 

시렁은 잠판(蠶板)을 얹어놓기 위한 구조물로 둘 다 소나무로 만들었다.

누에를 키우는 깔자리는 '잠박'이라고 하는데, 대나무를 쪼개 발과 같은 모양으로 엮어서 만들었다.

시렁 위에 잠판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다시 잠박을 둔 후 누에를 놓아 길렀다.

그리고 때에 맞춰 뽕잎을 따서 누에에게 주었다.

친잠에 사용할 누에는 한성부에서 상등품을 거두어 준비한 것으로 채상단 옆에 친 천막에 두었다.

친잠례 때 왕비를 수행하는 여성들은 왕세자빈을 비롯해 내외명부의 여성들이었다.

내명부는 1품 이상, 외명부는 당상관 이상의 부인들이 선발되었다.

수행여성들은 아청색 옷을 입어 국의를 착용한 왕비와 구별되었다.

 

(3) 친잠례 당일 왕비는 내전을 떠나 친잠할 장소로 행차하였다.

이때 친잠에 사용할 광주리, 갈고리 등의 도구도 같이 가지고 갔다.

왕비가 출궁할 때는 왕과 마찬가지로 왕비의 어보와 의장물과 악대가 따랐다.

 

(4) 친잠할 장소에 도착한 왕비는 우선 선잠단에서 제사를 올린 후

채상단 옆의 천막으로 이동하여 일상복의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왕비는 채상단의 남쪽 계단을 이용해 단으로 올라가

다섯 가지의 뽕나무에서 잎을 딴 후 황색 광주리에 넣었다.

이후에는 수행 여성들이 채상단 주위에서 뽕잎을 따기 시작했다.

왕비는 이 모습을 채상단의 남쪽에서 관람하였다.

왕비를 수행한 여성들이 따는 뽕나무 가지의 수는 품계에 따라 차등 적용되었는데

1품 이상은 일곱 가지, 그 이하는 아홉가지였다.

 

(5)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딴 뽕잎을 누에가 있는 곳으로 가져가는데,

이 때는 왕비 대신 왕세자빈이 수행 여성들을 거느리고 갔다.

누에를 지키고 있던 잠모(蠶母, 누에를 치는 여성)는 이 뽕잎을 받아서 잘게 썰어 누에에게 뿌려주었다.

누에가 뽕잎을 다 먹으면 왕세자빈이 다시 수행 여성들을 대동하고 왕비에게로 돌아왔다.

 

(6) 직접적인 친잠행사는 여기까지였고,

이후에는 왕비가 왕세자빈 이하 모든 여성들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를 위해 왕비와 수행여성들은 다시 평상복에서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예복을 차려입은 왕비가 채상단에 오르면 수행 여성들은 왕비에게 절을 네 번 올렸고,

연회가 끝나면 왕비는 다시 의장물을 갖추어 내전으로 환궁하였다.

 

(7) 궁중에서는 왕이 왕비를 위해 잔치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대소 신료들은 친잠을 위해 고생한 왕비에게 글을 올려 축하와 감사를 표하였다.

친잠례는 조선시대 왕비가 담당했던 역할과 상징을 잘 보여주는 행사였다.

-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신명호, 돌베개, pp 116-120

 

 

 

행사 종목에는 선잠왕비행차와 선잠제향이 있다.

선잠제향이란, 영신례 · 전폐례 · 초헌례 · 아헌례 · 종헌례 · 음복례 · 망료례의 7례를 말한다.

 

- 선잠의 : 풍잠기원 중궁 작헌 고유제의식

- 궁중음악 : 함영지곡

- 채상의 : 중전은 5가지, 혜빈과 세손빈은 7가지, 명부들은 9가지의 뽕을 따는 의식

- 양잠례 : 잠모들이 썰은 뽕을 명부들이 누에에게 뿌려주어 먹이는 의식

- 반상례 : 중궁이 잠모들에게 상으로 비단을 내려주는 의식

- 수견의 : 상궁이 수확한 고치를 중궁에게 바치는 의식

 

 

   

 

 

 

 

 

 

 

 양잠의 신, 마두낭(馬頭娘)

 

아주 오래전 어떤 사람이 멀리 원정을 떠나게 되어 집에는 딸과 그가 기르던 숫말 한 마리만 남게 되었다.

그 딸은 말을 잘 보살펴주었다. 어느 날 그 딸은 아버지가 보고 싶은 나머지 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우리 아버지를 모시고 돌아와 준다면, 내가 장차 너의 배필이 되어 줄거야.”

그러자 말은 고비를 끊고 집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말은 이내 지름길을 달려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아버지는 말을 보고 무척 놀랍고 기쁜 나머지 말에 올라탔다.

그러자 말은 집의 방향을 가리키며 구슬피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딸은 기쁘게 맞이하였고, 아버지는 집안에 별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였다.

이후 아버지는 말이 보통 짐승과 다르다고 생각하여 먹이도 더 많이 주었다.

하지만 말은 더 먹으려 하지 않았으며, 다만 딸이 지나갈 때마다 감정을 내비쳤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아버지는 딸을 불러 물어보았고, 마침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걱정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문의 수치라는 생각이 들어

몰래 활로 말을 쏘아 죽이고 그 가죽을 벗겨 뜰에 널어 말렸다.

얼마 후 아버지가 출타한 참에 딸은 뜰에서 놀며

“너는 축생이야. 근데 어찌 사람을 취해 아내로 삼으려 한단 말이냐.

이렇게 죽어 가죽까지 벗겨진 것은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야. 왜 그런 일을 한거야”라며 말가죽을 밟았다.

그러자 갑자기 말가죽이 일어나 딸을 둘둘 말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얼마 후 여자아이를 돌돌 말은 말가죽이 큰 나뭇가지 사이에서 발견되었고

이내 누에들로 변해 그 나무를 둘러싸고 실을 토하여 고치가 되었다.

이 고치의 실은 아주 가지런하고 두꺼운 것이 여느 고치와 달랐다.

이웃집 여자가 이를 가져다 몇 배의 소출을 거두었다.

 

동진(東晋) 간보(干寶)가 지은 <수신기(搜神記)>에는 양잠의 기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미 중국과 서역의 교역로를 “실크로드(Silk Road)"라고 명명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양잠은 오래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주요한 산업이다.

한대(漢代) 정월 황제가 친정을 하고 선농단에서 제사를 올려 한해 농사의 시작을 알렸다면,

황후는 비빈들과 관료들의 부인을 거느리고

후원에서 뽕잎을 따 잠실에서 누에를 치고, 선잠에 제를 올렸다.

진대(晋代)에는 이 제사를 올리기 위해 “선잠단(先蠶壇)”이라는 제단을 두었고

이 제도는 청대(淸)까지 이어졌다.

오늘날 베이징의 베이하이공원(北海公園)에는 청대의 선잠단이 남아있다.

하지만 “선잠”이 단지 “양잠의 신”이라는 것 외에 어디서 어떻게 기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한구의(漢舊儀)>에 따르면 선잠신은 두 명으로

‘원유부인(苑?婦人)’과 ‘우씨공주(寓氏公主)’라고 하나 이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회남자(淮南子)>에는

“황제(黃帝)의 부인 서릉씨(西陵氏)가 처음으로 양잠을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선잠과는 관련이 없다. 아마도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국가의 예전(禮典)으로 확립된 이후에는

어떤 구체적인 이야기보다도 상징성과 그 의제(儀制)가 더 중요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간의 상황은 다르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인용된 <원화전습유(原化傳拾遺)>에는

‘수신기’의 내용과 유사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대 전설 속의 고신씨(高辛氏) 시대, 오늘날 쓰촨성 중부지역인 촉(蜀)에

아버지와 딸, 그리고 어머니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이웃나라에 잡혀 갔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염려되어 기르던 말에게 남편을 구해서 돌아오면 딸을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말은 이내 마굿간을 뛰쳐나와 아버지를 태우고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아버지와 모의하여 말을 죽였다. 그리고 가죽을 벗겨 뜰에 널어 두었다.

그리고 딸이 그 옆을 지나가는데 말가죽이 딸을 감싸 사라졌고,

열흘 뒤에 뽕나무 위에 걸려진 채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미 딸은 누에가 되어버렸다.

 

앞의 이야기와 거의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가 딸의 농담에서 비롯되었다면

이 이야기는 어머니가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렇게 사건의 발단이 바뀜으로써 딸은 장난끼 있는 여자아이가 아니라

어머니의 그릇된 약속 때문에 자신의 몸을 희생한 효녀가 되었다.

 

그리고 <원화전습유>에는 그 이후의 일까지 덧붙여졌다.

 

그녀의 부모는 후회하며 딸을 그리워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하늘 위 구름에서 말을 타고 있는 딸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딸은 수십명의 시위를 거느리고 땅으로 내려와 부모에게 말했다.

“태상(太上)께서 저의 효심에 감동하셔서 구궁선빈(九宮仙殯)의 자리를 맡겨주셨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하늘에서 살게 되었으니 더 이상 그리워하지 마세요” 그리고는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태상(太上)”이나 “구궁선빈(九宮仙殯)” 등의 용어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듯이,

도교의 신격(神格)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아

본래의 이야기에 육조(六朝)이후 당대(唐代)를 거치며 발전해 온

신들의 위계가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촉(蜀)은 후한(後漢) 이래 비단의 주요생산지였음을 감안할 때, 배경이 되기에 충분하다.

양잠의 기원에 관해 등장하는 또 다른 신 청의신(靑衣神)도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무튼 소녀는 이렇게 잠신(蠶神)이 되었다.

 

이 이야기가 기록될 시점까지도 그녀의 집이 존재하여 매년 사방에서 참배객들이 몰려들었으며,

그중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영험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도관(道觀)과 사찰에서도 그녀를 모셨다.

여자의 형상을 만들고 말가죽을 입혀 '마두낭(馬頭娘)'이라고 불렀다.

 

- <잠신도(蠶神圖), 잠화오성(蠶花五聖)>  淸代 초기 저쟝,

중국미술전집 21-民間年畵, 인민미술출판사, 1985

 

 

한문으로 누에를 '잠()'이라고 하는데, 잠이라는 글자는 '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전은 '감싸다' '묶다' 등의 의미를 가지는데

말가죽이 여자의 몸을 감쌌다고 하는 데에서 그 말이 생긴 것이다.

고대 중국어의 발음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현대 중국어에서 '잠()'은 '찬(can)'으로 발음되고, '전()'은 '찬(chan)'으로 발음되고 있다.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발음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뽕나무를 '상()'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전설과 관련이 있다.

죽어있는 처녀를 보고 '상()심'을 느낀 사람들이 그 나무를 보고 '상()'이라 부른 것이다.

 

후세의 중국인들은 그 처녀가 인간에게 결국 비단옷을 선사하고 죽었다고 하여

그녀를 '잠신(蠶神)'으로 숭배하고 있으며, 마두낭 혹은 '마두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잠신(蠶神)은 지역에 따라 ‘마두낭(馬頭娘)’ ‘나조(螺祖=서릉씨)’ ‘청의신(靑衣神)’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마두낭에 대한 존중은 비단업이 성행한 중국 강남지방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뽕잎을 따 누에를 기르고 고치에서 실을 뽑아 비단을 만드는 노동의 과정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인간적인 신의 모습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 이태희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소식> 2008년 0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