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정제두가 생각한 하늘과 땅의 크기

Gijuzzang Dream 2008. 8. 28. 22:40

 

 

 

 정제두가 생각한 하늘과 땅의 크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17세기가 되면 서양의 과학지식이 중국을 거쳐 조선에 전래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당시 전래되기 시작한 서양 과학지식들 가운데서도 특히 지구설(地球說 ; 땅이 공처럼 둥글다는 설)은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 17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땅의 모양이 정확히 어떤 모양인지,

그 크기가 정확히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대다수 지식인들은 땅의 모양이나 크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도 없었다.

설혹 그런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 유별난 학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극한과 관련된’ 문제들의 해답을 얻을 방도를 알지 못했다.

 

물론 고대 이래로 동아시아에서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의 설이

널리 퍼져 있었고, 주희(朱熹) 같은 유학자는 천원지방설을 발전시켜

땅의 모양을 ‘물 위에 떠있는 널빤지’와 비슷한 것으로 상정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땅의 모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전적들을 뒤져본 학자들이라면

대부분 이들 경전의 구절과 선현들의 논의를 읽고서 지평설(地平說)을 받아들였거나,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논의를 전개하기보다는 문제를 보류해두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땅의 모양을 명백하게 구체로 상정하는 지구설이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지자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은 지구설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을 검토하고 논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땅과 하늘을 둘러싼 보다 근본적인 자연철학의 개념과 우주론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당시 지구설이 유학자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또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서울에서 먼 지방의 유학자들이 지구설을 접하고

땅의 모양에 대한 다양한 논쟁을 진행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강화도에서 살았던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 또한 이런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다.

젊은 시절 잠시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이내 강화도로 물러나와

평생을 양명학(陽明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던 그는

늘그막(83세인 1731년)에 “역법(曆法)이 어그러질 것을 걱정하며 바로잡고자”

『선원경학통고(璇元經學通攷)』라는 책을 지었는데,

그 내용의 상당부분은 지구설과 관련된 것들이다.

 

‘천문학의 근원과 경학(經學)을 꿰뚫어서 논의하는 글’이라는 제목의 이 책에서

그는 동아시아의 전통 천문학과 서양 천문학 지식, 그리고 주역(周易)의 이론을 함께 융합하여

통일적으로 꿰뚫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지구설을 비롯한 서양과학 지식들을 취사선택하여 구미에 맞게 변형하고 수정하였다.

 

예를 들어 당시 서양과학 지식을 전하였던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대부분은

지구의 지름을 3만 리, 지구의 둘레를 대개 9만 리 내외로 상정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 원주 4만km와 10% 내의 오차밖에 나지 않는 값이다.

이에 비해 정제두는 지구 지름을 4만2천 리, 지구 둘레를 12만9천6백 리로 확대하여 설정하였다.

그가 지구 둘레를 12만9천6백 리로 제시한 이유는 이 수치가 주역(周易)의 이론,

특히 선천역(先天易) 이론에서 등장하는 숫자와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정제두는 또한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하늘의 크기가 지구의 2배가 되어야 하며,

지구는 하늘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되면 지구는 하늘과 모든 방향에서 2만1천 리의 간격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그는 만약 하늘과 땅 사이의 간격이 이보다 더 넓으면

땅과 땅 위의 만물이 하늘로부터 기운을 받을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일견 황당하게 느껴지는 정제두의 논의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단지 강화도의 하늘을 보면서 공상을 펼친 학자일 뿐일까?

정제두가 전개한 자연철학적 논의의 역사적 맥락은 무엇인가?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17-18세기 동안 서양에서 전래된 과학지식들 속에는

고대와 중세 이래의 낡은 지식들과 과학혁명 이후 새롭게 전개되었던

근대과학의 지식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과학지식들 모두가 동아시아 고유의 과학지식들보다

우월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과학지식들을

‘전적으로 올바른 지식’으로 여기거나 ‘반드시 수용해야 할 지식’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들은 새롭게 전래된 서양 과학지식들에 대해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태도를 철저히 견지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새로운 지식들을 이용하여 변형하여

자신들의 자연철학 체계와 사상체계 속에 통합하려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지구설을 둘러싼 정제두의 논의 역시

이와 같은 ‘외래지식의 주체적인 수용과 활용과 통합의 노력’을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