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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창종자들] 갱정유도(更定儒道)=일심교(一心敎) 강대성

Gijuzzang Dream 2008. 8. 16. 12:21

 

 

 

 

[한국의 창종자들] 강대성, 처자식과 함께 수련에 들다

 
아들에겐 유교, 부인에겐 산신, 자신은 선도 수행

연신당주 강대성의 초상.

칠월칠석인 지난 8월 7일 갓 쓰고 도포를 차려 입은 30여 명이 계룡산 신도 안에서 산제를 올렸다.

갱정유도(更定儒道) 한양원 교정과 수도인들이다.

옷차림은 조선의 유생과 같지만 갱정유도는 영신당주 강대성(迎新堂主 姜大成, 1890∼1954)이 세운 이 땅의 종교다.

갱정유도의 정식 명칭은 무척 길다.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대도대명다경대길유도갱정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

줄여서 갱정유도, 세칭 일심교(一心敎)가 교의 명칭이다.

  

세칭 ‘일심교’… 동학에서 영향받아


지리산 청학동에서 상투 틀고 전통대로 살기 시작했던 것이 갱정유도인들이다.

세간의 통속적인 관심이 쏠리고 세속화의 밀물이 닥치자 수도인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이 믿는 종교의 특색은 무엇일까.

한국학연구원 종교학과 윤용복 박사는 갱정유도의 종교적 성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유불선의 가르침을 다 담고 있으나 유교적 흔적이 강하고 전통사상을 잇는 면이 짙다.

종교적 계보로 보면 동학에서 영향을 받아 교조인 강대성이 자기 방향을 설정한 종교다.”

강대성은 젊은 시절부터 종교적 관심이 컸다고 한다.

스무 살 즈음부터 세속의 일보다 천지간의 이치를 찾는 데 골몰했다고 한다.

스물아홉에 결혼하고 이듬해인 1919년 아들 용학(龍學)을 얻었는데,

그해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상을 마친 후 정읍군 산내면으로 이사해 본격적으로 도를 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읍 일대는 보천교의 교세가 막강하던 때라 곳곳에서 수도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는 이름까지 기동(基東)으로 바꾸고 맹렬히 수련하던 중 하늘의 소리를 듣는 종교체험을 한다.

다시 순창의 처가 마을로 옮겨 천신에게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한다.

당시 수련이 깊어 인간사의 길흉을 살피는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39세가 되는 해에 홀연히 “금강산 금강암으로 가라”는 천신의 소리를 듣고

회문산의 승강산(勝剛山) 금강암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가삼간를 지어 아들에게는 유교의 도를 닦게 하고, 부인에게는 칠성과 산신을 모시게 하고,

자신은 선도(仙道)를 수행했다. 처자식과 함께 종교적 역할을 맡아 수련한 것은 극히 드문 예다.

마당에 금줄을 쳐 바깥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엄격한 수련 끝에

1929년 7월 어느 날 마침내 득도의 순간을 맞았다고 한다.


54년 국가변란죄로 체포된 후 사망


종교적 득도는 현실의 벽을 넘어선다.

세속의 눈길과 언어로는 납득할 수 없는 비현실의 세계가 종교적 이적의 형태다.

강대성이 득도 이후 보인 몇 년간의 행적은 곧바로 취하고 미쳐버린 모습이다.

갱정유도의 시발을 알려주는 사건과 교리가

'누건수교리(淚巾水敎理) 생사교역(生死交易)'에 담겨 있다고 한다.

'누건수교리'란 강대성이 득도한 후 온 가족이 모여 대성통곡하며 흘린 눈물을

수건으로 받아 짜서 마시고 또 울기를 3일 동안 했다는 내용이다.

이후 부인이 목을 매 숨지자 시신을 방에 둔 채 여섯 달 동안이나 불을 때고 물로 씻어냈다고 한다.

영신당주 강대성과 제자들.


갱정유도 한재훈 포덕사는 그 내용을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삶, 육신과 정신,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선천과 후천의 세계를 바꿔야 하는데 인간적으로는 차마 할 수 없는 아픈 일이라

온 가족이 붙잡고 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강대성의 인간적인 고통과 번뇌를 보여주는 예화라는 것이다.

이후 몇 년간 강대성은 반쯤 미쳐서 보낸다.

아내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게 묻고 순창과 남원 일대를 아들의 손을 잡고 유랑했다.

곳곳에서 병을 고치거나 세상 일을 예언하는 이적을 보여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1934년 진안군 운장산에 머물면서 제자를 얻고 기본경전인 ‘해인경(海印經)’을 내놓는다.

이때부터 신자들이 하나둘 찾아와 기본적인 교세를 갖춘 것은

1942년 회문산 도령동에 최초의 성당(聖堂)을 짓고부터다.

강대성은 종종 일본의 패망과 세계사의 흐름에 대해 예언하기도 했다.

1940년 5월 6일 용산경찰서장은 일심교인 박수남을 불온인물로 체포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일제의 조선신궁(神宮)과 군수물자운송열차에 ‘조선독립만세’ 등의 격문을 썼다는 혐의다.

재판부의 기록에 따르면 일심교는 “일심만능(一心萬能), 군교통일(群敎統一), 세계평화(世界平和)”를

내세우고 독립을 꾀하는 유사종교집단이라는 것이다.

갱정유도의 당시 교세는 미미했지만 반일정서가 뿌리깊고 독립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복이 되자 그동안 기록해 모아둔 경전을 펴내고 포교에 전력했다.

광복 직후의 혼란은 역설적으로 갱정유도의 교세가 정점에 이르는 계기가 됐다.

곧 난세가 닥치고 해인경을 읽어야 난리를 피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1954년 3월 갱정유도인 5명은 ‘세계평화를 이룰 대성인’이 나셨다는 소식을

이승만과 자유당에 전하려다 모두 체포된다.

이후 아시아 반공대회장에 교인 15명이 찾아가 같은 내용을 전하려다 국가위신 손상죄로 체포돼

1개월의 구류를 살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강대성은 갱정유도의 누건수교리를 영문으로 번역해

유엔과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고, 결국 이 일이 화근이 되어 불상사를 겪었다.

1954년 6월 1일 전북경찰국의 무장경찰 50명은 갱정유도 본부로 들이닥쳐 무차별 구타하고

강대성과 57명의 교단 간부를 체포했다. 강대성은 체포 당시의 모진 폭행으로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치료 3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당시 이들에게는 국가를 전복하고

대화중흥국(大和中興國)을 세우려 했다는 국가변란이라는 죄목이 씌워졌다.

1954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는

전라북도 일원에만 갱정유도인의 서당이 157개, 약 1500명의 학동이 교육받고 있으며

이들을 사교를 믿는 무리라고 보도했다. 적지 않은 교세를 펼치고 있었지만

결국 교조의 죽음과 세상의 몰이해, 정부의 가혹한 압박으로

갱정유도는 시류와는 무관한 길을 걷게 된다.

옛 모습을 지키며 수양으로 세상을 구하기를 꿈꾸는 그들은

반세기가 지나서도 여태 세상과 등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 2008 08/19, 경향, 뉴스메이커 788호

 

 

 갱정유도 강대성②

“해인경을 읽어야 난세 피할 수 있다”
강대성이 머물던 남원 일대서 고난에 시달렸던 대중들에 널리 퍼져

1984년 3월 임진각에서 거행한

갱정유도의 남북통일 세계평화 기원대제.


종교는 현실과 비현실의 벽을 넘나든다.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의 해답을 형이상학과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종교다.

대부분 종교는 현실의 모순이 극에 이르러 일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해 보일 때 등장한다.

갱정유도도 마찬가지였다.

강대성은 세상의 고난과 문제가 사라진 이상세계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일제의 가혹한 억압과 패망, 광복의 혼란, 남북의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환란 없는 세상이 온다는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것은 늘 고난 속에 시달려야 했던 대중이었다.

강대성이 머물던 전라북도 남원 일대를 중심으로 해인경(海印經)을 읽어야

난세를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00일 묵언으로 지내는 특별수련


갱정유도의 기본 경전은 부응경(符應經). 모두 365권으로 이루어졌고

강대성이 득도한 후 기록한 내용으로 국한문혼용에 대화체 · 일기체 등이라 읽기가 어렵고

일부는 유실된 채 전해진다. 부응경 중에서 가장 먼저 펼친 것이 해인경이다.

해인(海印)은 모든 물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듯 세상의 이치가 담긴 진리를 뜻한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이룬 경지를 해인삼매로 표현한 데서 유래하지만,

종종 종교적 진리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땅의 종교적 탐구자들이 해인의 비밀을 밝혀내고 얻으려 한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강대성의 해인경은

“우성재야 천지부모 궁을합덕 음시감혜 일심동력 세계소립 오주소립

(牛性在野 天地父母 弓乙合德 牛時感惠 一心東力 世界所立 吾主所立)”으로

모두 28자의 짧은 주문이다.

 

갱정유도인들은 의례 때는 물론이고

일상에서도 반드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한 자씩 신성하게 외우고 있다.

그만큼 교리의 핵심이며 수행의 중심인 것이다.

종교적 상징의 언어라 통속적인 해석은 어렵겠지만 대략의 내용은 천지의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두 천지부모를 알아 마음에 모시면 세상의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강대성의 도맥을 이은

계도선사 김갑조 초상.

강대성은 당대 이 땅의 종교들과 개벽의 시대를 함께 하고 있지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다르게 설명했다.

동학의 최제우와 증산교의 강증산, 원불교의 박중빈은 우리가 사는 절망의 시대 선천개벽의 시운이 끝나고 후천개벽의 시대가 온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강대성은 모든 선이 천상으로 모이고 땅에는 악이 모여 있는 지금까지의 후천음도(後天陰道) 세상에서 천지가 뒤바뀌는 선천양도(先天陽道) 세상이 온다고 주장했다.

이상세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동일하나 그 원리는 달리 본 것이다.

당시까지 유행하던 개벽의 이치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양에서 음으로 변화였다.

갱정유도는 거꾸로 후천이 선천으로 회복되고 음이 지배하는 세상이 양으로 바뀐다고 주장한다.

미래의 시운도 일부에서는 결실의 가을이 온다고 밝히고 있으나 강대성은 세상 기운이 새롭게 움트는 봄과 같은 시대가 온다고 주장했다.

모든 성인과 충효열사, 도덕선심들이 지상에 다시 돌아와 유도(儒道)의 세상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갱정유도는 신앙의 대상으로 선당궁(仙堂宮)을 모신다.

원형의 천문도 주변에 24절기를 표시하고 중앙에 선당궁이란 글자 등을 쓴 도형이다.

신자들은 집 안의 가장 깨끗한 방의 동쪽에 선당궁을 모시고

아침 일찍부터 선당궁을 향해 치성을 올린다. 선당궁은 우주의 신령한 기운이 머무는 곳으로

그곳에서 제불신선과 선한영령이 수련자와 교감하는 곳이라 믿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일상을 수련삼고 24절기에 올리는 치성과 산제, 대제가 갱정유도의 주된 종교 의례다.

개인적인 수행으로 농한기에 100일을 묵언으로 지내는 특별수련을 한두 차례 올리기도 한다.

과거의 복식과 예의범절 회복 강조

10여 년 전 갱정유도에 입도한 수련자 허은성씨는

“머리를 기르고 예법에 맞춰 옷을 갖춰 입는 것 자체가 사람다운 도리를 지키는 기본적인 수련”이라면서

“예스럽게 사는 것은 처음을 잃지 않는다는 수련의 마음을 지켜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갱정유도라는 교명 자체가 “유도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니 그것이 흩어진 시대라

다시 고쳐 바르게 세웠다”는 점을 지적했다.

 

갱정유도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예를 갖추어 사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닦아가는 가장 기본이라는 점이라 했다.

갱정유도의 겉모습보다는 무엇을 지키고 수련해가는지 주목해달라는 것이다.

변화를 기다리며 남들이 과거와 결별을 선언할 때

갱정유도가 오히려 과거의 복식과 예의범절로 돌아갈 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데는

인간의 도리를 되찾자는 영신당주 강대성의 가르침이 있다.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철저하게 전통과의 단절을 경험한 시대라

갓 쓰고 도포를 차려 입은 갱정유도인들의 모습은 차라리 낯설다.

 

한국학연구원의 윤용복 박사는

“전통예절과 한문교육 등으로 갱정유도의 교육적 가치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지만

종교적인 확산은 쉽지 않을 것이다. 전통을 지키는 것이 과거지향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교리를 펼치는 일이 힘에 부친다”고 평했다.

강대성이 순도한 이후 갱정유도는 계도선사 김갑조(繼道先師 金甲祚)가 맥을 이었다.

그는 17살에 갱정유도에 입도한 이래 열심히 수련하다가 1958년에 도통하고

1962년에는 강대성의 딸과 결혼했다.

김갑조는 교조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여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서울에서 대대적인 포덕을 계획했다.

1965년 6월 6일 오전 9시부터 전국에서 상경한 500여 명의 갱정유도 신도는
미리 준비한 30만 장의

전단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용공유인물로 간주하고 강제연행하자 신도들은 중앙청을 향해

‘단군창업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 끝에 전원 연행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5·16 이래 반공이 국시가 되고 아무도 통일을 거론하지 못하던 시절 500명이 넘는 교인이 들고 일어나

외세를 물리치고 삼팔선을 없애 우리 것을 되찾자는 외침은 충격이었다.

 

갱정유도는 이후에도 줄곧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주장한다.

시대에 뒤져 보이지만 세상이 나가야 할 바를 진지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갱정유도가 현실의 가치와 무관한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2008 08/26   뉴스메이커 789호
- 김천, 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갱정유도 강대성③

갱정유도 서당, 교육의 장으로 개방

회문산 경화궁서당 등 청소년에게 전통예절과 한문 가르쳐

갱정유도 한양원 도정.

꽃은 피면 진다. 꽃이 지면 화려한 시절은 사라져가지만, 다시 영화로운 세월을 기다리는 씨앗은 남아 있다.

한때 50만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도덕세계의 완성을 꿈꾸며 신앙하던 갱정유도는 지금은 그 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다. 대략 3만 명으로 추산되는 신자와 전국 36개 교당, 6곳 정도 남은 수련당이 있을 뿐이다.

전성기에 비하면 몹시 위축된 모습이다.

그래도 갱정유도 신자들은 미래를 낙관한다.

광복 직후 전성기의 갱정유도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했다. 교조 강대성이 순도하게 된 ‘대화중흥국 사건’이나 제2세 교조 김갑조가 주도한 외세 배척과 통일 주장의 만세 시위 사건 등은 도덕문명시대를 주도적으로 이루려 한 갱정유도의 현실 참여로 볼 수 있다.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시운의 변화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외쳤던 것이다.

전국 36개 교당에 신자 3만 명

현재 갱정유도를 이끌고 있는 한양원 도정은 갱정유도가 대외적 발언과 실천에 앞섰던 이유를 설명했다.

“갱정유도는 민족과 인류의 시운이 암흑에서 광명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바뀐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봄이 되면 씨를 뿌리고 밭을 일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원하는 미래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교단 간부들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고 언론은 갱정유도를 사교로 몰아갔다.

1954년 8월 16일 동아일보는 내무부에서 갱정유도의 근거가 되는 서당을 폐쇄하도록 문교부에

요청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당시 정권은 한자교육을 금지해야 한다는 법적인 논란까지 벌이면서 갱정유도를 압박했다.

영신당주 강대성의 친필.

경찰의 발본색원 방침에 따라 교세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열성적인 신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지리산 자락 청학동 골짜기나 여천, 논산, 변산, 거제도, 고창 등의 오지를 찾아 몇 가구씩 모여 살며 농사 짓고 글을 가르치는 은둔과 수양의 시간을 보냈다.

세상의 몰이해를 피해 높은 담을 쌓은 것이다.

최근 남원의 갱정유도 총본산과 몇몇 지부에는 젊은이의 발길이 하나 둘씩 늘었다. 낯선 삶의 방식과 가르침에 관심을 갖고 갱정유도에 입도하는 이도 생기고 있다.

10여 년 전 20대 초반에 갱정유도에 입도한 허은성씨는 “일반 학문은 지식을 가르치지만 갱정유도의 교육에서 인성과 사람의 근본을 배울 수 있었다”면서 “몸과 마음을 함께 수양할 수 있어 종교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했다.

낡아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실용의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농사짓고 글 가르치며 은둔과 수양

한국학연구원 윤용복 박사는

“물질만능의 현대 사회에 인간을 중시하고 도덕과 전통의 가치를 주목하는 갱정유도의 주장은

귀 기울여볼 만하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상적 가치가 현실 속에서 반드시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며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갱정유도의 의미가 분명해졌다고 지적했다.

회문산 경화궁서당, 군산 인원한문학원, 고창 용추골서당 등 갱정유도 서당은

청소년에게 전통예절과 한문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으로 개방돼 주목받는다.

학교와 사회에서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갱정유도가 최근 주력하는 것은 도덕성과 민족얼 회복 운동이다.

영신당주 강대성은 부응경에서 “도덕은 곧 선함에 마음이 그쳐, 모두에게 측은한 마음을 두어

하나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다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밀려오는 서양의

물질문명에 얼을 빼앗겨 우리 것을 잃으니 세상의 대립과 모순이 더 커졌다고 했다.

 

갱정유도는 우리 얼을 되찾아 조화를 이루어야 상생의 시대가 온다는 것을 주장한다.

갱정유도의 낡아 보이는 옷과 가르침 속에는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신념의 씨앗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인터뷰 / 한양원 도정
“폐쇄성 극복, 현대화 방안에 주력”


한양원 도정은 5년 전부터 도정으로 추대돼 갱정유도를 이끌고 있고,

한국민족종교협의회를 결성하여 24년째 회장을 맡고 있다.

갱정유도의 현안은 무엇인가.
“여타 민족종교와 마찬가지로 갱정유도는 현대화·세계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

폐쇄성을 극복하고 현 시대에 다가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데 주력하려 한다.

젊은이에게 전통뿐 아니라 현대 학문을 가르치고 서양철학을 접목하도록 하고 있다.

교리와 경전을 현대적으로 펴기 위해 불가결한 일이다.

동·서양 학문의 조화는 교조인 영신당주의 가르침이기도 해 절실하다.”

현대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설명해달라.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을 전하는 것이 우선이다.

서구적인 가치와 물질을 추구하면서 매몰된 전통 예절과 인간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민족의 얼과 정기를 살리는 일도 시급하다.

이것은 지금까지 갱정유도가 올곧게 지켜오고 있다고 자부한다.

현대인에게 정신적 가치와 삶의 목표를 되찾아주는 일에서 첫발을 내딛겠다.

세상이 필요한 것을 돌려주는 게 종교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를 결성한 배경과 취지는 무엇인가.
“민족종교를 통합하려는 노력은 몇 차례 있었다.

상해임시정부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 장군이 광복 직후 통정원(統整院)을 만들어 민족종교를

통합하려 했지만 6·25 때 납북으로 지리멸렬됐다.

5·16 직후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이찬영씨가 민족신앙총연맹을 만들었지만 변질되고 말았다.

두 차례의 실패를 지켜보고 만든 것이 한국민족종교협의회다.

겉모습은 다르지만 민족종교는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세계 평화와 인류 구제라는 공통된 이념을 지향하고 있다. 민족정신을 지키고 겨레의 활로를 찾기 위해 종교의 차이를 떠나 함께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갱정유도와 민족종교의 전망을 어떻게 보는가.
“물질과 정신의 관계는 동양과 서양, 몸과 마음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둘 중 어느 하나에 치우쳐 있으면 건강할 수 없다.

지금은 돈과 물질에 관심이 치우쳐 있지만, 진정 행복해지려면 정신적인 가치도 살려야 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물질문명이 극에 달했으니 정신과 도덕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때는 민족의 정신과 갱정유도가 힘을 더하리라 믿고 있다.

모두 평화롭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갱정유도가 추구하는 것이다.”

- 2008 09/02 경향  뉴스메이커 790호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