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에도시대의 일본을 여행하다

Gijuzzang Dream 2008. 8. 13. 23:07

 

 

 

 

 에도시대의 일본을 여행하다  

‘가난한 순례자’ 쉬어가는 길

에도시대의 유명한 여행가 마쓰오 바쇼.
마흔에서야 본격 여행길에 오른 그는, 주옥같은 기행문들을 남겼다.
그 중 7개월간 동북지역을 다니면서 쓴 ‘오슈의 좁은 길’은 가장 사랑받는 책이다.
문학적 상상력을 과감하게 발휘한 이 책은,

지금도 그의 족적을 따라가는 여행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바쇼를 좇아 ‘오슈의 좁은 길’로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에도시대의 유명한 하이쿠 작가이면서 또한 유명한 여행가이기도 했다.

에도 바쿠후가 안정되어가던 시기인 1644년에 태어난 마쓰오 바쇼는

젊었을 때는 고향의 봉건영주인 도도 요시타다(藤堂良忠) 밑에서 사무라이로 지냈다.

그가 시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1666년. 스물 둘의 나이였다.

한때 교토에서 기타무라기긴(北村季吟)을 스승으로 모시고 시를 배웠던 그는

당시 수도인 에도, 지금의 도쿄로 올라와 시인이자 비평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지만

아직은 잠재적 여행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것은 1684년, 그의 나이 마흔이 되어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를 생각해보면 절대로 이르다고 할 수 없는 나이였다.

 

그가 여행자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여러 차례의 여행을 거치면서 쓴 수많은 기행문들 때문이었다.

‘노자라시 기행(野紀行)’ ‘사라시나 기행(更科紀行)’ 등 많은 기행문들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것은 7개월간 동북지방을 여행하면서 쓴 ‘오쿠노 호소미치(奧の細道)’이다.

이 책은 지금도 한 손에 책을 들고 그의 족적을 따라가는 여행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는 진정한 여행자답게 나가사키로 가던 여행길에 오사카에서 객사하였다.

1694년, 그의 나이 50이었다.

그는 여행길에서 본 풍광들을 아름다운 하이쿠로 남김과 동시에

하이쿠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유려한 산문을 덧붙였다.

그뿐 아니라 여행하면서 만난 현지의 시인들과 렌가를 짓는 솜씨를 겨루기도 했다.

렌가는 일본의 고유한 시가의 한 장르로, 한 수의 시를 두 사람이 읊는 형태이다.

바쇼는 렌가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는데

‘하이쿠’라는 것 자체가 렌가의 제1구, 즉 홋쿠를 의미하는 말인 만큼

하이쿠의 대가인 그가 렌가에서 얼마나 눈부신 실력을 보였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방랑에 병들어, 꿈은 겨울 들판을 헤메이누나.”

그는 마지막 하이쿠 한 소절을 토해내고는 결국 길 위에서 죽었다.

“세상은 그저 나그네 하룻밤의 주막일 뿐”이라는 또 다른 그의 하이쿠가 저절로 생각나는 인생이었다.

여행자의 눈은 예민하다. 그의 여행의 흔적들이 지금도 사람들을 끄는 이유는

그의 몸 자체가 하나의 눈이었고 하나의 입이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죽은 뒤 1702년에 발표된 ‘오쿠노 호소미치(奧の細道)’는 그의 3대 기행문 중 마지막 기행문이다.

제목은 ‘오슈의 좁은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오슈란 현재의 후쿠시마, 미야기, 이와테, 아오모리현 등을 말한다.

넓은 의미에서 동북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에도에서 오가키까지 6000여 리. 약 150일간 2400㎞를 도보로 돌면서,

그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마음껏 드러냈다.

그는 이 작품을 쓰면서 문학적 상상력을 과감하게 발휘하였는데,

그와 함께 여행하였던 제자 소라(曾良)의 여행기와 비교하면서

그 차이를 발견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를 준다.


여행자들, 순례자들

마쓰오 바쇼가 살았던 당시는 여행이 서민의 생활 속에 의미있게 자리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교통과 숙박시설의 발달은 여행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나그네 차림의 마쓰오 바쇼를 본따 지은

하이세이덴. 마쓰오 바쇼의 고향 미에현에

탄생 300주년을 기념해 1942년에 세워졌다.

당시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에 의사로 파견되어 와 있던 켐펠(Englebert Kaempfer)은

‘에도참부여행일기(江戶參府旅行日記)’에서

“이 나라의 가도에는 매일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있어, 두 세 계절 동안은 주민들이 많이 사는 유럽 도시들의 길거리와 비슷할 정도로 사람들이 길에 넘쳐나고 있다.

나는 일곱 개의 주요 가도(街道) 중 가장 중요한 토카이도(東海道)를 네 번이나 왕래했으므로 그 체험에 근거해 이것을 입증할 수가 있다.

이유의 하나는 이 나라의 인구가 많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다른 나라 국민들과 달리 이들은 상당히 자주 여행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외진 해안지방까지 샅샅이 돌아다니는 여행은 흔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바쇼는 후대 사람들에게 바쿠후의 비밀스파이, 닌자라고 의심받기도 했다.

서민들의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사원참배, 성지순례였다.

오직 도보에 의지해 전국을 다녀야 하는 여행이 단순한 도락일 리 만무하다.

숙박비, 식대 등 여비가 만만치 않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세신궁 참배의 경우 참가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돈없는 하층민들이었다.

그들을 위해 지역의 사람들은 무료로 잠자리를 제공해주거나

짚신 따위를 사찰이나 길거리의 지장보살 앞에 두어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심이 후하던 시절이기도 했고, 범죄를 미리 막겠다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서민들은 ‘고’(講)라는 단체를 만들어 여행을 준비했다.

특정한 사원에 참배를 하거나 영산을 찾아가기 위해 결성된 이 모임은 일종의 여행사 역할을 도맡았다.

통행증을 발급받는 데도 고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유리했다.

후지산에 등반하기 위한 ‘후지고’와

이세신궁을 참배하기 위한 ‘이세고’가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인기있는 고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평생에 한 번은 이세 참배를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단순히 종교적인 열망만은 아니었다.

실제로는 참배의 경로에 인근의 명소를 포함시켜 관광의 욕구도 충족시켜주었다.

대규모 참배단이 처음 생겨난 것은 1650년이다.

그후 1705년과 1718년, 1723년, 1771년, 1830년에 대규모 참배가 있었다고 한다.

대규모 참배단은 지나는 마을마다 축제 분위기를 만들곤 했다.

동네 사람들은 하던 일을 놓고 모두 나와 참배단과 어울리며 먹을 것과 짚신 등을 나누어주었다.

그 중에서도 1830년의 참배단 인원은 최대를 기록했는데, 그 수가 무려 486만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전체 인구가 300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행자들 길을 따라 걷다

이렇듯 여행이 불길 일듯 일어났던 이유 중의 하나는

여행자를 위한 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대 쇼군 이에미쓰가 제정한 ‘산킨코타이제도(參勤交代制度)’가 그 기반을 만들었다.

이 제도를 만든 이유는 사실 여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다이묘들을 통제하고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각 다이묘들은 격년으로 에도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다보니 300여개에 달하는 다이묘들의 행렬이 매년 에도를 향했고,

길의 정비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에도 바쿠후는 적극적으로 교통정책을 펼쳤다.

교통체계는 에도를 중심으로 개편되었고 도로망은 확충되었다.

다이묘의 행렬이 자주 있게 되자 숙박시설도 저절로 생겨났다.

당시 최대의 간선도로였던, 교토와 에도를 잇는 토카이도(東海道)에는

53개의 세키쇼(關所)와 그에 따른 숙소들이 생겨났다.

5대 도로에 잇닿은 중간급 도로들과 작은 지선도로들은 각 한의 한슈들이 관리했다.

가로수를 심고, 1리마다 ‘이치리즈카’라는 이정표를 세우고, 하천에도 배와 나루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무라이든 서민이든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해야 했다. 또한 세키쇼에서 사증도 신청해야 했다.

총 76개의 세키쇼가 길의 곳곳에서 여행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한에는 한슈가 자체적으로 설치한 반쇼가 있어, 세키쇼와 함께 여행자들을 감시했다.

그 중 가장 엄격했다고 하는 하코네 세키쇼에서 여자들이 사증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소총은 절대로 에도로 들여보내지 않고 여자는 절대로 함부로 에도에서 내보내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진 이곳을 통과하려면 온몸을 샅샅이 수색당해야 했다.

여비도 여행을 쉽게 떠나지 못하게 발목잡는 한 요인이 되었다.

돈 없이 순례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흔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도보로 다녔으므로 교통비는 적게 들었지만

그만큼 시간도 많이 들고 숙박비와 식비도 많이 들었다.

특히 바쿠후가 군사적 이유로 나루를 놓지 못하게 한 시즈오카 현에 있는 오이강을 건너려면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인 도하졸의 목마를 타야만 했는데, 그 수고비도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많이 들었으므로 자연히 짐이 많았고, 짐꾼과 말을 고용해야 했다.

그러나 그 돈은 아껴서 마련 못할 만큼의 거금은 아니었다.

에도시대에 여행이 성행했던 이유 중의 하나다.

여행의 성행은 각종 여행안내서와 여행소지품의 발달을 가져왔다.

1655년쯤부터 휴대용 여행가이드북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뒤로 갈수록 그 안에 담긴 정보가 상세하고 풍부하다.

여행안내서는 노끈을 세우면 쓸 수 있는 휴대용 해시계 등 각종 부록들도 갖추고 있었다.

 

여행용품들도 휴대의 용이함과 견고성을 보완한 제품들이 쏟아져나왔다.

접는 삿갓, 휴대용 등과 촛대, 간이경대 등 아이디어 집약적인 이런 물건들은

지금 쓰기에도 유용할 듯, 궁리한 태가 역력하다.
- 2008년 03월 07일, 경향 [지구보다 큰 지도] 연재 中 (8)

- 이명석 manamana@korea.com

 

 

 

 

'나아가는(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방부 선정의 '불온서적'?  (0) 2008.08.16
비빔밥  (0) 2008.08.16
실크로드  (0) 2008.08.13
조선시대 주홍글씨 - 자자형(刺字刑)  (0) 2008.08.08
능지처사 - 더 이상 잔혹할 수 없는...  (0) 2008.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