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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창종자들] 대한불교 진각종 손규상

Gijuzzang Dream 2008. 8. 16. 12:22

 

 

 

 

[한국의 창종자들] 대한불교 진각종 손규상

 

 

 

1947년 대구에서 신불교 운동 표방
현대 밀교종단의 모태 역할… 재가자 중심의 생활불교 강조

진각종을 창종한 회당 손규상 정사.

 

 

오래됐다고 낡은 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현실을 담는 이념과 실천으로 거듭나 늘 새로운 모습을 유지해간다. 고목에서 새 가지가 뻗고 젊은 나무로 숲을 메우는 것과 같다.

대한불교진각종(이하 진각종)은 광복 직후 이땅에서 창종된 불교의 새로운 종파다.

불교 종파를 현교(顯敎)와 밀교(密敎)로 나누는 경우가 있다. 비유하면 현교는 경전을 통해 전해진 부처의 가르침을 신행의 중심으로 삼고, 밀교는 그 외에 부처의 마음이 비밀리에 전해진 수행을 본질로 삼는다.

진각종(眞覺宗)은 밀교를 표방한다.

 


‘옴마니반메훔’ 외우며 100일간 정진

 

우리나라에 밀교가 들어온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창종한 신인종(新印宗)이

대표적이며 고려시대에도 교세를 떨쳤지만 이내 맥이 끊어졌다.

진각종은 1947년 6월 14일 손규상(孫珪祥, 1902∼1963)이 대구에서 신불교 운동을 표방하며 창종했다.

손규상은 울릉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이름은 덕상(德祥), 법호는 회당(悔堂)이다.

부친은 한약방을 경영했지만 그다지 유복한 형편은 아니었다.

울릉도에서 보통학교를 마치자 집에서 2년간 한의와 약에 관해 배우며 가업을 돕고 있었다.

20세에 규수인 배신(裵信)을 만나 결혼하고 부유한 처가의 도움으로 육지로 유학을 떠났다.

대구의 계성학교에 진학했으나 학교가 폐교되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에서 낮에는 노동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 다니던 것도 잠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그마저도 접고 울릉도로 돌아오고 만다.

이후 울릉도 도동에 가게를 열어 성공하자 포항으로 이사해 잡화상과 포목점으로 큰 성과를 일구었다.

이때 스스로 춘농(春農)이라는 자를 지어 가게 이름을 춘농상회라 불렀다.

사업은 번창했지만 인간적인 큰 슬픔을 겪었으니 울릉도에서 낳은 세 자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교신자였던 모친의 권유로 포항시내 죽림사에서 재를 지내고 불상을 시주한 것이

불교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그는 간간이 죽림사에 들러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신행을 시작했다.

절을 다니기 시작한 후 어느 날 그는 집안에 돌아와 외상장부를 모두 꺼내 불태웠다.

놀라는 가족들에게 “우리가 편히 먹고 지내는 동안 여기 적힌 사람들은 빚 때문에 전전긍긍했을 터이니

이제 그 빚에서 해탈시켜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해방이 되자 손규상은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도덕정치론’이란 글을 써 배포하고 자금을 마련해 서울로 가 수 개월간 머물며

정치에 참여할 길을 모색했다고 한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건강도 잃었다.

애써도 병은 낫지 않고 수의까지 마련할 처지가 되자 가족들에 끌려 찾은 곳이 대구 인근의 농림촌이다.

농림촌은 당시 치병의 이적으로 소문난 박보살이란 노파의 명성으로

난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농림촌에서는 주로 관세음보살을 외우는 기도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신비한 체험으로 병이 낫자 손규상은 이곳에 머물며 49일간 기도를 마쳤다.

이후에 아예 마당에 움막을 지어 ‘옴마니반메훔’을 외우는 100일간의 정진을 시작한다.

진각종 신도들이 ‘옴마니반메훔’ 진언을 외우며 수행하고 있다.


1947년 5월 16일 새벽, 마침내 손규상은 대각의 종교 체험을 이루었다.

이어 6월 14일 그는 창종을 선언했다.

교단이 구체적인 형식을 갖춘 것은 1948년 8월 3일 ‘교화단체 참회원’이란 명칭으로 종교단체로 등록하고

대구시장에 참회원(懺悔園)을 개설한 이후다.

참회원에서는 전통 불교에 비하면 종교개혁에 가까운 파격적인 신행이 이루어졌다.

진각대학원 김경집 교수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내세운 기치는 형식 타파,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행, 복을 비는 의식보다

마음을 밝히는 자각의 불교였다.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기존의 기복적인 불교로는 세상을 구제할 수 없다는 뜻에서

새불교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진언종 · 총지종 등 분파 떨어져나가

 

일제가 물러간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고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민심은 참회원의 혁신에 귀를 기울였다.

회당 손규상은 대중에게 “깨달아 보라. 참회해 보라. 실천해 보라”를 외쳤다.

가장 큰 변화는 법당에서 불상이 사라진 것이다. 의지하려는 외부의 대상을 없앴다.

불교는 마음을 닦아 자성을 밝히는 종교이며 부처는 결국 자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강조하고 나섰다.

종교적 구원이 절대자나 그 밖의 대상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닫고, 참회하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천명했다.

‘교화단체 참회원’으로 시작한 진각종은 몇 차례의 변화와 분열을 거쳤다.

1949년 12월 ‘심인불교(心印佛敎)’로 이름을 고치는데, 마음속 진리인 심인(心印)을 찾는다는 뜻에서다.

전쟁 중인 1951년에는 ‘심인불교 건국참회원’으로 정부에 등록하였다.

전쟁 중에도 손규상은 서울 왕십리에 교당인 밀각심인당(密覺心印堂)을 짓고

1953년 8월 ‘대한불교진각종’이라는 정식 교명을 정했다.

진각종의 초기 구성원은 곧바로 분열하여 진언종(眞言宗)을 이루었고,

1972년 일부가 떨어져나가 총지종(總指宗)을 설립했다.

진언종과 총지종 모두 밀교종단으로 진각종은 우리나라 현대 밀교종단의 모태 역할을 한 셈이다.

최초의 교단본부 대구 남산동 심인당 낙성법회에서 법문하는 회당.


진각종은 여타 불교종단에 비해 재가자 중심의 생활불교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창종 당시에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2원 체제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모든 교직을 재가자가 맡고 있다.

교직자를 통칭 스승이라 하고 남자는 정사(正師), 여자는 전수(傳受)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승려가 되는 출가에 비해, 마음으로 거듭 난다 하여 심출가(心出家)라는 형식을 거친다.

진각종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자리 잡은 데는 회당 손규상의 교육관에 힘입었다.

1953년 대구에 심인공민학교를 지어 이를 기반으로 1957년에 심인중 · 고등학교를 개교했다.

1977년 서울에 진선여중·고를 세우고 1996년 경주에 위덕대학을 설립했다.

그 밖에 전국 심인당에서 운영하는 30여 개의 유치원이 있다.

위덕대학 초대총장은 회당의 아들인 손제석 전 문교부장관이 맡았다.

회당학원 최종웅 이사장은 진각종이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인 배경을 설명했다.

“손규상 대종사는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 혼란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을 가장 우선해야 할 사업이라 했다. 때문에 창종과 동시에 교육에 치중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교육을 통해서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불교가 비구
· 대처 분쟁을 거치며 소모적인 시간을 보낼 때

진각종은 교육을 통해 신세대에 다가서고 모든 경전을 과감히 한글로 바꾸었다.

신행공간을 현대화하고 산중보다는 철저히 마을 한가운데 교당인 심인당을 세웠다.

의식을 통일하고 마음을 닦는 신행법을 만들어 생활불교 · 실천불교를 확립한 것이다.

진각종이 서울에 자리를 잡고 우선한 것은 교리체계를 세우고 경전을 번역한 일이다.

불교 경전 중에서 밀교부에 해당하는 대일경, 금강정경, 보리심론 등을 번역하고

밀교의 역사와 계율 등을 모아 총지법장을 펴냈다.

모두 한글로 펴내 누구나 쉽게 읽고 알 수 있도록 했다.

총지법장 이후 교화에 필요한 실제적인 내용을 엮은 응화성전(應化聖典)을 펴냈다.

지금은 진각교전을 경전으로 쓰고 있다.

 


심인중·고와 진선여중·고 설립

 

일찍 교리를 집대성하고 수행체계를 만들며 교육 중심의 체제를 세운 까닭에

교조의 입적 이후에도 별다른 침체 없이 교세를 이어갈 수 있었다.

창종 60주년을 앞두고 전국에 6개 교구, 120여 개 심인당, 250여 명의 성직자가 있는

한국 불교 4대 종단으로 자리 잡았다. 진각종에서는 신도를 100만 명이라고 주장한다.

2005년 정부의 조사통계에 불교 신자로 응답한 이가 1000만 명이 조금 넘은 것에 비추어 보면

만만치 않은 교세임을 실감할 수 있다.

진각종 내부에서는 앞날을 낙관하고 있다.

물질만능의 시류가 계속될수록 심성을 되찾으려는 반성이 커지고 옳은 길을 보여주면

자연히 그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진각종은 젊은이들로부터 미래를 모색한다.

수원에 어린이도서관을 짓고 8000여 권의 불교 관련 책과 전자도서관을 갖춰

밀교가 어렵다는 생각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종교는 옛 가르침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시대에 맞는 실천으로 낡은 옷을 벗고 새로움을 지속해가는 것이다.

불교는 이 땅에 들어온 지 1500여 년 만에 진각종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세상에 다가서고 있다.

회당 손규상은 “불교는 복을 비는 종교가 아니라 마음속의 깨달음으로 진리에 다가서는 종교”라며

진각종을 창종했다. 그 새로운 실천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 2008 09/09  경향, 뉴스메이커 791호

- 김천, 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