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28. 세종은 '선춘령'을 찾지 못했던 것일까

Gijuzzang Dream 2008. 8. 1. 20:21
 

 

 

 

 

 

[간도 오딧세이] 세종은 ‘선춘령’을 찾지 못했던 것일까

  

 

 

드라마 ‘대왕 세종’을 보면 귀화한 여진인들의 모습이 나온다.

세종은 역대 왕 중 북방 영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왕으로 꼽힌다.

세종은 두만강과 압록강 지역에 4군6진을 개척했다.

이것을 보면 세종에게 ‘대왕’이라는 호칭이 그냥 붙은 것이 아니다.

 

세종실록지리지(왼쪽)

선춘령에 ‘고려지경’을 새긴 비를 세우는 그림인 척경입비도(오른쪽)


 

세종이라고 하면 ‘세종실록지리지’를 금방 떠올릴 수 있다.

가수 정광태가 부른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에는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줄’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우산과 무릉이라는 두 섬이 있는데

신라 지증왕 때 우산국 사람들이 항복해 신라 땅이 됐다는 내용을 말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서문에는 “우리나라 지지(地志)가 대략 삼국사(三國史)에 있고,

다른 데에는 상고할 만한 것이 없더니, 우리 세종대왕이 윤회(尹淮) · 신장(申檣) 등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의 연혁을 상고하여 이 글을 짓게 했다”고 나타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물론 북방 영토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고려)예종 2년에 중서시랑 평장사 윤관을 원수로 삼고,

지추밀원사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동여진을 쳐서 몰아내고,

함주에서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9성을 쌓아서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공험진의 선춘령에 세웠다.

(…) 동쪽은 큰 바다에 임하고, 남쪽은 철령에 닿고,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하였다.

준령이 백두산에서부터 기복(起伏)하여 남쪽으로 철령까지 뻗쳐 있어, 천여 리에 긍한다.

북쪽은 야인(野人)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은 철령으로부터 북쪽은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천7백여 리다. (…)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선춘현이니, 곧 윤관이 비를 세운 곳이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胡人)이 그 글자를 깎아버렸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김종서에 비문 찾아라” 세종실록에 기록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조선 초기의 영토의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백두산이 나타나 있고, 공험진 · 선춘령이 언급돼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식인인 사대부들은

조선의 영토가 고려 때 윤관이 세운 선춘령 비까지 뻗어 있다고 생각했다.

선춘령은 두만강 건너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지만 이 비석은 없어졌다.

이곳이 현재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한다.

중국 쪽 학자는 선춘령이 지금 북한 땅에 있다고 하지만,

한국 쪽 역사학자는 이곳이 만주지역에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면에서 박학다식했던 세종이 선춘령비 또한 간과했을 리 없다.

 

세종실록(세종 21년 8월 6일 기사)에는 이 같은 기록이 잘 나와 있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경은 공험진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이 장백산 북록에 있다 하나, 역시 허실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관이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이 선춘령의 어느 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김종서의 답은 세종실록에 나타나 있지 않다.

4군6진을 개척했던 김종서는 과연 선춘령을 찾지 못했던 것일까?

이미 흘러가버린 600년 전의 일이지만 세종의 질문은 정말로 궁금한 물음이다.
- 2008 09/23 경향, 뉴스메이커 792호

- 윤호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