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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박물관] 경주 석굴암 - '굴절'된 원형의 논란

Gijuzzang Dream 2007. 11. 11. 03:26

 

 

 

 

 (1) 1960년대 석굴암 잘못 복원 

 

     성균관大 박물관, 1913년 보수공사 직전 사진 공개 
     입구쪽 팔부신중 한 쌍, 원래는 90도로 꺾어 세워져 
     석굴암 원형 싸고 40년간 논쟁  ‘천장에 창 있었다’ 등 논란 여전

 

 

1960년대 석굴암 복원이 잘못됐음을 뒷받침하는 사진이 발견됐다.

현재 석굴암 입구 좌우에 있는 팔부신중(八部神衆·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 한 쌍은

다른 팔부신중과 함께 일렬로 서 있지만, 원래는 90도 각도로 꺾어져 세워져 있었다는 것이

석굴암 보수공사(1913~1915) 직전에 촬영한 사진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성균관대 박물관이 17일 공개한 이 사진은

석굴암 본존불을 바라볼 때 오른쪽에 있는 금강역사상과 팔부신중을 촬영했는데,

팔부신중은 현재와는 달리 3개만이 일렬로 서 있다. 나머지 하나는 90도 각도로 꺾여 서 있다.

이 팔부신중의 그림자가 바로 앞의 팔부신중에 비쳐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1910년대 초반 일제가 보수하기 직전의
석굴암 팔부신중상 부분(점선으로 표시된 부분).

입구에 있는 팔부신중은 다른 팔부신중과 달리 90도로 꺾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균관대 박물관 제공

 

 

일제는 심한 훼손으로 붕괴가 우려되던 석굴암을 1910년대 해체한 뒤 복원하면서

좌우 입구에 있는 팔부신중 한 쌍을 다른 팔부신중과 90도 각도가 되도록 세워 놓았다.

그러나 문화재관리국이 1961~1964년 석굴암을 다시 복원하면서

이 팔부신중을 다른 팔부신중과 일렬이 되도록 세웠다.

당시 복원 관계자들은 “일제가 석굴암의 원형도 모르고 훼손시켰다”고 주장해

이후 40여 년간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지난 2001년 서지학자 고(故) 이종학씨가 ‘조선미술대관’(1910년 간행)에 실렸던

석굴암 본존불 왼쪽 편의 팔부신중 사진을 공개했지만

당시는 사진 상태 때문에 입구에 있는 팔부신중이 90도 각도로 꺾였다고

100% 장담할 수 없었다”며 “이번 사진은 석굴암의 원형을 찾는 결정적 자료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팔부신중 위치가 잘못됐다는 것은 이제 명확해졌다”며

“그러나 지금 당장 석굴암에 손을 댈 수는 없고, 언젠가 보수할 때 고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사진은 1910년대 경주에서 동양헌(東洋軒)이라는 사진관을 운영하던

일본인 다나카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후지타 료사쿠가 소장했다가

1953년 성균관대가 구입해 소장해 왔다.

 

석굴암 팔부신중의 구조는 명확해졌지만, 석굴암은 여전히 많은 논쟁거리를 품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에 자연 채광할 수 있도록 천장에 창이 있었다는 주장(광창설 · 光窓說)도 그런 예다.

그러나 광창이 천장에 있으면 하중을 견딜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이 문무왕릉으로도 알려진 대왕암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동짓날 해 뜨는 방향이라는 설도 있다.

석굴암이 무리수인 √2의 비례미에 따라 기하학적으로 건축됐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인 측량기사 요네다 미요지가 1940년에 발표한 논문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따랐다.

 

1960년대에 석굴암을 정밀 실측한 결과, 석굴암 본존불을 모신 곳은 요네다의 주장처럼

반지름 3m60 정도의 반듯한 원형이 아니라,

곳에 따라 반지름 길이가 1m 이상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하학적 비례미는 애초 없었던 것이다.
- 2007.09.18 / 조선일보/ 신형준 기자
hj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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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굴절’된 석굴암 원형 논란

 

 

굴절형 前室구조 재확인됐지만 “일렬형이다” 의문 여전히 가져
“8부신중 조각은 6개” 주장도 여덟 神을 여섯 神이라 하는 격

 

 

불국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석굴암의 원형을 둘러싼 논쟁은 지난 40여 년간 계속돼 왔다.

본존불 앞에 있는 전실(前室)의 모습을 둘러싼 논쟁이 첫째다.

전실 맨 앞부분을 장식한 팔부신중(八部神衆 ·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이

지금처럼 일렬이었는가, 아니면 맨 처음에 있는 좌우 한 쌍이 꺾여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최근 성균관대 박물관이

일제가 석굴암을 보수 공사하기 직전인 1910년대 초반에 찍은 사진을 공개하면서

전실 앞부분 좌우 팔부신중 한 쌍은 꺾여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여전히 의문을 제기한다.

1910년대 초반 사진을 근거로, ‘팔부신중’ 조각이 원래는 6개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당시 사진을 보면 전실 입구 꺾인 부분에는 팔부신중 조각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실 입구가 꺾여 있는 굴절형이었다는 사실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 ▲ 일제가 석굴암을 수리하기 직전(1913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    석굴암 본존불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섰을 때,
    •    석굴암 전실 왼쪽 맨 앞부분을 찍었다.
    •    팔부신중상 옆으로 돌을 쌓아 올린 것을 볼 때,
    •    이 부분이 90도 각도로 꺾인 부분임을 알 수 있다.
    •    - - - 나카무라 료헤이의‘조선 경주의 미술’중에서.

     

    사실 규명을 위해선 석굴암의 보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붕괴 위험마저 보이던 석굴암을 보수한 것은 1913~1915년이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석굴암은 조각상들 사이가 서로 벌어져 뒤편에 쌓은 돌이 보일 정도였다.

    일제는 본존불을 제외한 모든 부재(部材)를 해체한 뒤 다시 세웠다.

     

    이후 습기가 차는 문제가 발생하자 1920년대 부분 보수를 다시 했고,

    문화재관리국이 1961~1964년 또 다시 보수했다.

    이때 전실 입구에 꺾여 있던 좌우 팔부신중 한 쌍을 다른 팔부신중과 일렬이 되도록 폈다.

    여기서부터 전실 구조 논쟁이 시작됐다.

    조선시대 이전에 석굴암을 상세히 표현한 그림이나 도면은 없다.

    일제가 보수에 들어가기 직전에 만든 ‘석굴암 재래 기초 평면도’나

    세부 촬영 사진이 가장 오래된 자료다.

     

    최근에 잇따라 공개되고 있는 당시의 사진을 보면

    전실 앞부분은 한결같이 90도로 꺾여 있다. 따라서 석굴암의 ‘원형’을 이야기할 때

    전실 입구 좌우측이 꺾였는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문제는 1910년대의 사진에는 꺾인 부분에 조각상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팔부신중 조각은 8개가 아니라 6개였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근거다.

    이는 “안 보이기 때문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주장이다.

     

    게다가 일제가 석굴암을 보수하면서

    석굴암 ‘주변’에서 발견한 팔부신중상 두 구(具)를 꺾인 곳에 붙였고,

    일제는 이 두 구가 어디에 있던 것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가능했다.

    그러나 불교미술사 어디에도 ‘육(6)부신중’이란 없다.

    신라인들이 팔부신중을 조각하면서 8구가 아니라 6구만 만들었을 까닭도 없다.

    이것은 한 사찰의 일주문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만들면서 3구만 세웠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비슷하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전 국립경주박물관장)도

    “팔부신중에는 팔이 여러 개인 아수라가 있는데,

    일제가 석굴암에서 발견해 붙인 조각상이 아수라였다”며

    “일제가 붙인 팔부신중상은 신라인들이 만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미술사)도

    “일제가 팔부신중 두 구의 좌우측을 바꾸어 붙였을 수는 있지만

    이 팔부신중이 전실에 있던 팔부신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 2007.09.20 /  조선일보 신형준 기자 hj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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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석굴암'

     

     

     

      1907년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 사이에 “경주 토함산 동쪽에서 큰 석불(石佛)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산속 석굴 안에 있는 불상을 우연히 본 우체부가 일본인 우체국장에게 말한 것이 퍼져 나간 것이다. 전국의 도굴꾼이 토함산으로 몰려왔다. 석불 주위 감실(龕室)의 불상 10개 중 2개가 사라졌다. 소네 통감이 다녀간 뒤 석불 뒤 작은 5층 석탑도 없어졌다. 1100년을 평화롭게 앉아 있던 돌부처에게 시련이 시작됐다.  

       

      ▶  첫 총독 데라우치는 토함산에 올라 석굴암을 둘러보고 대대적인 보수를 지시했다. 창건 후 처음 석굴암을 해체한 뒤 다시 정비하는 큰 공사가 1913년부터 3년 동안 벌어졌다. 일제는 석굴을 보호한다며 콘크리트로 두께 2m의 외벽을 세웠다. 공사가 끝나자 석굴 안에 물이 차고 이끼가 끼기 시작했다. 일제는 증기를 뿜어 이끼를 씻어냈다.

       

      ▶ 석굴암 보존·관리는 해방 후에도 골칫거리였다. 1957년 “펄펄 끓는 수증기 세례에 다박솔로 문질러댄 석굴암”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증기 세척을 하청받은 업자가 ‘한 자(尺) 이상 떨어져서 너무 뜨겁지 않게’ 하라는 작업 원칙을 전혀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또 한 번 석굴암 보수공사를 하기로 했다. 1963년 습한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석굴 앞에 목조건물을 만들었다. 그래도 습기가 없어지지 않자 에어컨을 설치하고 관람객의 내부 출입을 금했다.

       

      ▶ 그 보수공사 때 책임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입구 양쪽 팔부신중(八部神衆·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 가운데 맨 앞 한 쌍만 90도 꺾여 있는 것이 원래 모양이냐, 아니면 일자(一字)였던 것을 일제가 첫 보수 때 꺾었느냐는 논쟁이었다. 결국 당시 중앙감독관이던 황수영 박사의 주장에 따라 꺾인 부분을 바로 폈다. 그런데 그제 성균관대 박물관이 공개한 첫 보수공사 직전의 석굴암 사진을 보면 원래 90도로 꺾여 있다.

       

      ▶ 석굴암은 인도 아잔타, 중국 돈황·운강·용문 석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 석굴사원이다. 1909년 전문가로는 처음 석굴암을 둘러본 도쿄대 교수 세키노 데이(關野貞)는 “동양 무비(無比·비할 데 없음)의 작품”이라고 찬탄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올라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광창(光窓) 존재 여부를 비롯해 석굴암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길이 10m의 돌을 자르면서 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던 신라시대 조상님께 죄송스럽기만 하다.

       - 조선일보,[만물상] 2007.09.18  이선민 논설위원 smlee@chosun.com

     

     

     

     

     석굴암, 복원이라는 이름의 파괴  
     - 전시 기획자의 辯 -

     

     

     

    김대식(중세사 1분과)

      

      

    성균관대학교 박물관(관장 송재소)은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 -석굴암ㆍ불국사ㆍ남산- 이라는 주제의 전시회를

    지난 9월 19일부터 개최하고 있다. 

    전시는 석굴암ㆍ불국사ㆍ남산 세부분으로 나뉘는데,

    석굴암의 전시는 일제에 의해 복원되기 이전의 모습,

    1913년에서 1916년까지의 1차 해체복원,

    해방후인 1961년에서 1964년까지의 2차 수리,

    그리고 가장 최근[2002년]에 촬영된 모습과 함께

    1930년대 촬영된 석굴암 내부모습을 해체ㆍ복원되기 이전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실물의 70%로 재현한 체험공간,

    그리고 석굴암에서 발견된 천불보탑ㆍ팔뚝 등 실물이 최초로 공개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국사의 전시는 일제에 의해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진행된 수리ㆍ복원의 모습을

    현재의 모습과 대비하여 보여주고 있다. 

    경주 남산의 전시는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누어 6m의 파노라마 사진 아래에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유적의 모습과 2007년 현재의 모습을 대비하여 전시하고 있다.

    석굴암은 1913년 ‘복원’을 전후한 사진이 한 장 나올 때마다 논란이 되어왔다.

    이번 전시는 ‘석굴암 수리’와 관련된 사진을 12장이나 공개해,

    9월 19일 개막 이전부터 각종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전시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약간의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폭발적인 호응은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석굴암 수리 이전 사진은 처음 공개된 것도 아니고 여러 번

    그것도 성균관대박물관소장 유리원판보다 이전의 것도 여러 번 공개된 적이 있어

    ‘양치기 소년’ 취급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시의 원래 기획은 석굴암보다는 경주 남산에 초점을 맞추어

    1년 동안 남산을 샅샅이 훑어가며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현장을 찾아

    그 모습을 그대로 담아 보여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관심은 몇 안 되는 석굴암의 옛 사진에만 집중될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석굴암에 대해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

    석굴암은 창건 이후 조선말기까지 경주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알려진 곳이었지만,

    전국적인 명소는 아니었다.

     

    석굴암은 1907년 군대해산과 전국적인 의병활동 과정에서 일제의 눈으로 발견된

    조선의 유적이었다. 

    석굴암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09년 6월 이토 히로부미를 이어 2대 통감으로 부임한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의 방문이었다. 이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등이

    석굴암을 ‘조선미술의 핵심이자 동양미술의 정수’라고 부르면서 위대한 유적으로 각인되었다.

    석굴암은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재임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관점이 아닌 일본인들의 시각에서 내린 평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진 1) 소내통감 방문 때의 사진으로 추정  사진 2) 1913년 해체복원 직전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대표적인 조선의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명분을 통해 그들의 능력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석굴암과 불국사를 비롯한 경주지역의 문화재였다. 

    일제의 석굴암 ‘복원’은 문화재가 아닌 일반 건축물의 토목공사라는 시각에서 진행되었고,

    부분적으로 파손된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여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 여기에 조각상을 붙이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무모한 ‘복원’ 공사의 결과는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비가 새고,

    내부에는 이슬이 맺혀 이끼가 끼는 등의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일제는 서둘러 방수공사와 배수로 공사를 했지만,

    이슬이 맺히고 이끼가 끼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사진 3) 1913년 11월                                   사진 4) 1913년 12월

     

    해방후에도 이러한 문제가 지속되자, 전문가들이 파견하여 해결방안을 강구하려 하였다.

    하지만 1961년 성립된 5ㆍ16 군사정부는 이를 군사작전처럼 해결하려 했다.

    일제가 씌워놓은 콘크리트돔에 철근 콘크리트돔을 하나 더 얹어 씌우는 한편,

    전실은 팔부중 조각상 2개를 옆으로 펼치면서 대왕암 방향으로 1°돌려놓았고,

    여기에 지붕까지 씌워 석굴암을 완전히 밀폐구조로 만들었다. 

    이러한 ‘복원’은 국민적 합의는 물론 학계의 합의조차 없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졸속 복원은 1964년 6월 3일 한일협정 반대 시위로 계엄령이 내려진 와중에

    준공식이 치러져 그 비판을 모면할 수 있었다.

     


    사진 5) 1963년 11월                                사진 6) 1964년 6월

      

    석굴암과 불국사는 일제강점기 '복원' 이후 

    조선인에게나 일본인 모두에게 조선을 문화를 대표하는 관광의 명소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러하다.

    경주는 철저한 경찰국가로 지배한 조선총독부가 관심을 가진 지역으로

    발굴과 복원이라는 이름의 파괴를 진행한 지역이다.

    반면 철저한 통제로 인해 개발이 억제되어 특정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온전히 보존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의 전화를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고,

    이후에도 개발이 억제되어 한반도 어느 지역보다 파괴가 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 경주의 어느 곳에서도 남산의 스카이라인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경주, 아니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석굴암은

    일제와 우리 스스로에 의해 두 번이나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콘크리트가 덮어씌워지는 운명을 맞았다.

    이제 우리는 석굴암을 에어컨과 제습기 없이 스스로의 시스템에 의해 조절되는

    원형 복원을 하여야 한다.

    이번 전시는 이를 위한 기초적인 자료를 모두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복원을 위한 논의가 제기되기를 기대한다.



    사진 7) 2002년 촬영  <문화재 전문작가 오세윤씨 사진>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유리원판에 대하여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은 1,876장의 유리원판을 소장하고 있다.

    이 자료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 부여와 공주 등 충청도 지역,

    전주와 해남 등의 전라도지역, 서울과 경기도 지역, 강원도 지역 등의 남한 일대를 비롯하여

    평양의 낙랑 유적은 물론 해주, 함흥 등 북한 지역, 그리고 중국의 집안과 연길 일대의 유적,

    일본 큐슈[九州]의 유적 등 한반도와 주변지역을 망라하고 있다. 

    이 유리원판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관장과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교수를 겸임하며

    조선의 문화재 전체를 관리하는 지위에 있었던 후지타 료오사쿠[藤田亮策]가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이다.

     

    후지타는 식민사학의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한 인물이자 조선ㆍ일본고고학자의 개척자였다.

    또한 그는 자료의 수집에 광적인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후지타는 수집한 자료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자료의 대부분을 포장하여 부산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으로의 귀국선에 휴대 가능한 것은 가방 2개여서 자료의 모두를 가지고 갈 수 없었다. 

    그는 유리원판과 필드노트류를 ‘한국의 농촌출신 사람’에게 적당한 연구기관에 줄 것을 당부하고

    1945년 11월 22일에 부산을 떠났다.

    그 중 유리원판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

    소장자가 1953년 성균관대학교에 매각하였고,

    1958년에는 사학과로, 1968년에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진 8)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유리원판의 현재 상태

     
    - 필진 : 김대식, 한국역사연구회

    -  200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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