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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2006년 봄-간송 탄신 백주년기념 특별대전

Gijuzzang Dream 2007. 11. 10. 22:06

 


    전 시  :  5월 21일(일) - 6월 4일(일) / 제 70회 정기전  

 

    장 소  :  성북동 간송미술관 ☎(02)762-0442

 

    시 간  :  오전 10시-오후 6시 / 관람료 무료

 

    내 용  :  간송 전형필(1906-1962)선생 탄생 100주년기념 특별대전

 

                  (간송미술관의 명품 100선 전시)

 

 

 

■ 전형필 선생 탄생 100돌 간송미술관 특별대전

 

올해는 간송미술관을 세운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62) 선생의 탄신 100돌.

1906년 서울에서 태어난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은 휘문고보 졸업 후 도쿄 유학을 떠나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한 다음 귀국해 위창 오세창과 교우한다. 학자이자 전각가였던 오세창에게 서법과 화법을 수련받고 감식안을 익혔다.

1930년 당시 약관 스물다섯이었던 전형필은 젊은 나이에 10만석의 재산을 상속받아 조선 최대 갑부가 됐고, 그때부터 그는 일제시대 국보ㆍ보물급 골동품과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 등의 작품을 사들인 간송의 문화재 수집에는 서양화가 1호였던 춘곡 고희동, 위창 오세창이 자문을 했으며, 1938년에는 당시 최초의 사립박물관이자 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을 설립했다.

1940년에는 재정위기에 몰렸던 보성고보를 인수했으나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재산을 잃고 힘겨운 시기를 보내다가 1962년 급성신우염으로 타계했다.

이후 1965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됐고,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돼 유물을 본격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하여 1971년 첫 전시가 시작되면서 지금까지 봄과 가을 정기전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은 국보 12점과 보물 10점을 보유하고 있지만 문화재지정 신청을 하지 않았을 뿐 국보ㆍ보물급 문화재들도 상당수 소장돼 있는 문화재의 보물창고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소장하고 있는 국보 12점, 보물 10점을 포함한 간송 미술관의 소장작의 전모를 볼 수 있는 ‘명품 100점’이 ‘간송 탄생 100주년 기념대전’을 맞아 선보인다. 국사교과서와 미술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대하던 국보 12점이 모두 한자리에 나온 것은 지난 1991년 ‘간송 추모 40주년전’이후 15년 만이다.


5월21일부터 6월4일까지 열리는 전시에는 최완수 민족미술연구소장의 말대로 “정기전 10여회를 한꺼번에 모은 것과 맞먹을 정도로 간송 수장품의 정수를 한자리에 펼친” 간송미술관의 ‘국가대표팀’전시회이다.


간송 생전에 그와 교유했던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은 축사에서 간송을 대인(大人)이라 불렀으며, “간송의 생애는 100으로 계산할 수 없다. 간송의 생은 100에 100을 곱해도 모자란다. 간송이 지금도 저 높은 곳에서 겸재(謙齋)와 단원(檀園)의 산수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아니 보이는가. 백자그릇을 쓰다듬는 모습은 100년 후에도 보일 것이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십만석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 부은 간송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문화적 자존의식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100이라는 수(數)가 무슨 대수로운 수인가.

 100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인가. 100의 고개를 넘는 것이 힘들다는 뜻인가.

 100을 넘으면 잊혀진다고 해서 귀하다는 수(數)인가.

 

 어느 누가 100세를 넘기면 장수라고 했나. 어느 누가 100세를 못 살면 단명이라고 했나.

 어느 누가 인생을 100으로 나누었는가. 어느 누가 인생의 가치를 100으로 계산하던가.

 

 간송(澗松)의 생애는 100으로 계산할 수 없다. 간송의 생은 100에 100을 곱해도 모자란다.

 간송은 100년 전에 태어났어도 간송은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태어난다.

 간송의 태산같은 크기에 비하면 100은 조그마한 언덕일 뿐이다.

 

 간송이 지금도 저 높은 곳에서 겸재(謙齋)와 단원(檀園)의 산수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아니 보이는가.

 간송이 지금도 청자 잔에 넘치는 술을 들고 한 잔 하자고 하지 않는가.

 간송의 모습이 여기서도, 또 저기서도 보이지 않는가.

 

 간송의 그 목소리가, 웃음소리가, 또 넋을 잃고 그림을 보는,

 또 가득한 미소와 함께 백자 그릇을 쓰다듬는 모습이 100년이 지난 지금도,

 또 100년이 지난 후에도 보일 것이다.

 


미술관이 특별전과 함께 내놓은 논문집 ‘간송문화’에 소개된 일화도 흥미롭다.

1943년 경상도 안동에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나 1000원에 팔린다는 소식을 접한 간송은 거간꾼에게 돈 1만1000원을 내주며 “1000원은 수고비요”라고 한다.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이던 시절이다. 시세의 열배를 치르고 산 훈민정음 원본은 그래서 미술관의 소장품이 됐고, 지금 국보 70호로 지정돼 있다.


간송은 문화재를 구입할 때 금액을 깎는 일이 없었고, 원주인이 작품가치를 잘 모르고 값을 싸게 부르면 아무 말 없이 두 배, 세배건 자신이 판단한 가치대로 대금을 지불해 주었다. 일급 문화재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던 것.

1937년 간송이 도쿄에 살면서 최고급 고려청자만을 수집한 영국 변호사 존 개스비의 소장품을 한꺼번에 인수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일본이 곧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예견한 개스비는 귀국할 결심을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간송은 화급하게 도쿄로 가서 개스비와 담판하고 소장품을 전부 넘겨받았다. 이를 위해 충남 공주에 있던 5000섬지기 전답을 처분했다.

 

   전시되는 국보는,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 11세기, 국보 73호)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癸未銘三尊佛立像, 563년, 국보 72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13세기 중반, 국보 68호)청자기린형향로(12세기 전반, 국보 65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12세기 후반, 국보 66호)청자원숭이형연적(12세기 전반, 국보 270호)청자압형연적(12세기 전반, 국보 74호)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18세기 후반, 국보 294호) ▲훈민정음 해례본(1466년, 국보 70호)동국정운(1447년, 국보 71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1403년, 국보 149호), ▲혜원전신첩(18세기, 국보 135호)

 

이중에서

삼국시대 작품은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563년, 72호) 1점,

고려시대 작품은 금동삼존불감(11세기, 73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13세기 중반, 68호), 청자기린형향로(12세기 전반, 65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12세기 후반, 66호), 청자원형연적(12세기 전반, 270호), 청자압형연적(12세기 전반, 74호) 등 6점이다.

조선시대 작품은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연국초충문병(18세기 후반, 294호), 혜원전신첩(18세기, 135호), 동국정운(1447년, 71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1403년, 149호), 훈민정음 해례본(1446년, 70호) 등 5점이다.

 

 

   보물은,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靑磁象嵌葡萄童子文梅甁, 보물 286호) ▲청자상감국목단당초문모자합(靑磁象嵌牧丹唐草文母子盒, 보물 349호) ▲백자박산향로(보물 238호) ▲괴산팔각당형부도(보물 579호) 등

 

 

   도자기류

도자기는 1998년 간송미술관 설립 60주년 기념전 때 나온 뒤 8년 만에 공개되는데,

고려 상감청자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구름과 학무늬가 새겨진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비롯하여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국보 66호),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65호)', '청자오리형연적(국보 74호)', '청자원숭이형연적(국보 270호)' 등 청자류와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초국화무늬병(보물 294호)' 등

특히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은 간송 소장품의 얼굴이다. 청자색 바탕의 푸른 창공을 날아오르는 학의 모습이 아름다워 '천학매병(千鶴梅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간송이 1935년 일본인 골동 중개인의 소개로 당시 거금 2만원을 주고 사들였다. 2만원이면 당시 서울에서 어지간한 집 열 채를 살 수 있는 돈이다. 이런 일화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 전통문화의 자존심을 걸고 일본으로 넘어갈 것을 지킨 간송의 힘을 되새기게 하는 간송의 도량과 담력을 읽게 해주는 대목이다.



1936년 11월 서울 경성미술구락부경매장. 저축은행(제일은행의 전신)의 일본인 행장이 갖고 있던 청화백자가 경매에 나왔다. 경매는 500원에 시작했지만, 순식간에 1만원이 넘어갔다. 큰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이던 시절이었다. 경합을 하던 사람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일본의 골동품 회사였던 야마나카 상회의 주인 야마나카와 조선의 최대 지주 간송 전형필 두 사람만이 끈질기게 값을 올리며 붙었다. 야마나카는 1만4550원을 끝으로 두 손을 들었고, 간송은 여기에 30원을 더 붙인 1만4580원을 불러 기어이 이 백자를 손에 쥐었다. 이 자기가 지금 국보 294호로 지정된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이다.



   서화류

간송미술관 컬렉션 중에 비중이 큰 서화류는 한국미술 거장들의 흐름을 따라 엄선됐다.

실물로 잘 보기 힘든 안견의 ‘추림촌거(秋林村居)’, 강희안의 ‘청산모우’, 신사임당의 ‘포도(葡萄)’, 이징이 검은 비단에 금니로 그린 ‘강산청원(江山淸遠)’과 ‘고사한거(高士閑居)’, 김명국의 ‘송하문동(松下問童)’에 이어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인 겸재 정선의 만년 득의작으로 가을의 내금강 전체 경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으로 화폭에 압축해 넣은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總覽)', ‘삼부연(三釜淵)’, ‘단발령망금강(斷髮領望金剛)’등 금강산 그림과 ‘청풍계’등이 전시된다.

 
   - 겸재 정선 '청풍계'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의 작품과 함께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는 ‘월하취생(月下吹笙)’‘마상청앵’ 등이 소개된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마상청앵(馬上聽鶯)’은 진경풍속화풍의 대미를 난만하게 장식하고 있다. 녹음방초 사이로 천자만홍이 곱게 물든 늦봄 어느 화창한 날에 젊은 선비가 춘정에 겨워 문득 말에 올라 봄을 찾아 나섰다가 길가 버드나무 위에서 꾀꼬리 한쌍이 화답하며 노니는 것에 넋을 빼앗긴 채 서서 바라보는 장면을 사생해 낸 그림이다.

     

  

꾀꼬리의 화답장면과 넋 나간 선비의 모습을 돋보이려 하려는 듯 버드나무는 간결하게 처리하여 길섶으로 몰아놓고 선비 일행은 큰길 가운데로 내세운 채 나머지는 모두 하늘로 비워둔 대담한 구도를 보인다. 넉넉하면서도 예리한 옷맵시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작품 '월하취생(月下吹笙)'에서는 단원 자신인듯한 인물이 시서화의 정취를 마음껏 농하다가 그만 한 병 술을 다 비운 취기로 인해 북받쳐 오르는 심사를 달랠 길 없어 달빛 부서지는 방안에서 구슬프게 생황을 불고 있다. 어떤 화가보다도 자의식이 강했던 바로 단원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중인 직업화가의 한계에서 폭발한 울분을 표현한 듯하다. 
단원과 동시대를 살았던 궁중화가 이인문의 ‘산촌우여(山村雨餘)’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의 풍속화 30점을 담고 있는 신윤복의“혜원전신첩”(국보 135호) 중에서는 단오절에 그네를 타는 여인들을 그린 ‘단오풍정(端午風情)’, 여인과 선비가 밀회하는 장면을 그린 '월하정인(月下情人)', 봄날 후원 뜰에 자리를 마련해 조촐한 풍류와 흥취의 한 순간을 그렸다는 '상춘야흥(賞春夜興)' 등 낯익은 풍속화들이 나오며, 조선의 기생을 그린 ‘미인도’ 역시 설명이 필요없는 혜원의 대표작이다.

  
 

 

 

이 명품 100선에는 남영(藍瑛 1585-1664)의 그림과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글씨 등 중국 작품도 2점이 들어가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남영의 그림 ‘여산(廬山)추성’은 같은 여산초당을 그린 겸재 정선의 ‘여산초당’과 비교하기 위해, 옹방강의 글씨는 제자인 추사 김정희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해 중국을 뛰어넘는 우리 예술의 수준을 느끼는 기회도 마련됐다.


한편 위창 오세창, 삼불 김원룡, 혜곡 최순우와의 인연을 엿보게 하는 간송의 안목과 서화 솜씨를 엿볼 수 있는 글씨와 문인화 8점도 함께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간송은 서화에도 능통했는데, 추사의 ‘세한도’에 비길 만큼 절제된 필묵과 채색으로 오래된 연못가의 새벽 정취를 묘사해낸 ‘고당추효(古塘秋曉)’는 일품이다.

 

또 위창 오세창풍의 전서체인 ‘향원익청(香遠益淸) 은 염계 주돈이의 애련 시에서 따온 문구로 연꽃 그림의 화제로 쓴 글씨이다. 


 

최순우의 서재 현액으로 쓴 ‘아락서실(亞樂書室)’등 간송 작품 8점이 출품된다.

간송미술관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 실장은 “간송이 있어서 겸재ㆍ추사 연구가 가능했다”며 “1971년 첫 전시로 겸재전을 할 당시 ‘이거다, 이것으로 식민사관을 극복할 수 있겠다’고 쾌재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이번 간송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는 간송미술관 소장품의 전모를 보여주고 회화사의 흐름을 짚어줄 수 있는 값진 전시가 될 것”이라며 “이번이 70회째 전시지만 시대별 대표작을 총망라해 내놓기는 처음이며, 한국 미술사를 한눈에 정리해볼 수 있는 전시회가 될 것”이라며 “국보가 아닌 다른 출품작들도 아직 국보신청을 하지 않았을 뿐, 대부분 국보급 문화재들”이라고 자신했다.

최 실장은 “이번 전시를 보면 우리 역사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기본 자료를 모아 준 인물이 간송임을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이들 문화재가 없었다면 어떻게 겸재와 추사 연구를 하고, 기록만 갖고 갑론을박으로 식민사관을 바로잡을 수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

- 중앙/ 경향/ 동아/ 조선/ 연합/ 한국/ 헤럴드경제/ 국민일보/ 간송미술관 도록 등에서 종합정리 


 

■ 간송 전형필

 

(1)

1943년 늦여름 오후. 37세의 한 젊은이가 관훈동의 고서점 ‘한남서림’에 들러 더위를 식히고 있을 때 한 책 거간이 바쁘게 지나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필히 곡절이 있을 터. 불려온 거간이 하는 말인즉, 지금 경상도 안동에서‘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돼 돈 마련을 하러 간다는 것인데 액수를 물으니 1000원이라 한다. 젊은이는 1만1000원을 내놓으며“1000원은 수고비요”라고 했다. 당시 종로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다. 국보 70호‘훈민정음’수집에 얽힌 일화이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훈민정음’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자세히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작가나 학자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문화재 수집가다. 그럼에도 그가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우리의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해 보존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많은 문화재가 일본에 넘어갔거나 한국전쟁 중에 소실됐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민족문화재 수집과 보호의 대임을 담당한 선각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골동품 수집에는 막대한 자금이 있어야 한다. 지극한 정성과 전문적인 감식안도 필수다. 조직도 있어야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시대의 명품은 톱클래스의 수집가에게 딱 세 번 나타난다고 한다. 그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그 명품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이 스물다섯에 10만석의 재산을 상속받은 간송에게는 천하의 문화재들을 비장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다. 민족미술에 눈 뜨게 한 스승 고희동(高羲東: 1886-1965)과 전문적인 감식안을 제공한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있었고, 정직한 한국인 거간 이순황(李淳璜)과 일본인 거간 신보(新保喜三)의 도움을 빼놓을 수 없다. 도쿄에 거주하며 최고급 고려청자만을 수집하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가 1937년 2·26사건을 겪고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며 수집한 모든 고려청자를 간송에게 넘겼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간송이 세운 간송미술관은 국보 12점과 보물 10점을 보유하고 있지만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지 않았을 뿐 엄청난 국보· 보물급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년에 두 번의 정기전 외에는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간송미술관은 올해 간송 탄생 100주년을 맞아 21일부터 소장 문화재 100점을 무료로 공개한다.

- 국민일보 / [한마당] 임순만 논설위원

 

 

(2)

도쿄 골동상이 1937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가 고려자기를 팔려 한다”고 알렸다. 개스비는 명품 고려청자를 수십년 모은 수집가였다. 그길로 도쿄의 개스비 집을 찾은 간송은 “조선인인 내게 청자를 넘겨 달라”고 매달렸다. 국보 65호 청자향로, 국보 66호 청자정병, 국보 74호 청자연적 같은 최상품 수십 점이 그렇게 돌아왔다. 간송은 대신 5000석 전답을 팔아야 했다.


△ 일본 상인이 갖고 있던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국보 135호)을 몇 년씩 공 들인 끝에 사들인 것도 이 무렵이다. 눈부시게 약동하는 혜원의 풍속인물화가 한꺼번에 30면이나 담긴 화첩은 당시 담뱃갑에 인쇄됐을 만큼 놀라운 구경거리였다.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거둔 이도 간송이었다.

 

 

△ 간송은 물려받은 10만석지기 재산을 문화재에 쏟아 부었다.

휘문고보 스승이던 서양화가 고희동의 가르침을 받고 문화재 보호를 일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당대 서예가이자 감식안(鑑識眼)인 오세창 문하를 드나들며 안목을 키웠다.

1938년에는 성북동에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保華閣)세웠는데, 오세창은 주춧돌에 ‘서화 심히 아름답고 고동(古董)은 자랑할 만. 일가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精華)로다’ 라고 썼다.


△ 6·25 때 인민군은 간송의 소장품들을 가져가려고 국립박물관 직원에게 포장을 시켰다. 훗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물건을 쌌다 풀었다 하며 시간을 끌었다. 9·28 수복이 되자 인민군은 그냥 도망가 버렸다. 1·4 후퇴 땐 장서 수만 권을 미처 옮기지 못했다. 피란에서 돌아온 간송은 참담한 장면과 맞닥뜨렸다. “아궁이 앞엔 당판(唐版) 진적(珍籍)이 불쏘시개 감으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사방 벽과 뚫린 창문은 고활자본으로 도배를 했다.”


△ 간송 탄생 100년을 맞아 간송미술관이 21일부터 소장품 가운데 최고 명품 100점을 골라 전시회를 연다. 훈민정음 원본과 단원· 혜원· 겸재의 대표작들이 나온다.

간송은 금싸라기 땅을 팔아 ‘사기그릇’을 사는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간송 같은 선지적(先知的) ‘문화 독립운동가’가 없었다면 해방된 뒤에도 ‘문화재 식민지’를 벗지 못했을 것이다. 간송의 분신 같은 소장품들을 접하며 거기에 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향기를 쏘여 볼 일이다.

- 김기철 논설위원 / 조선일보 만물상, 2006년 5월17일

 

 

(3) 아아, 간송(澗松)미술관 …

16세기 말 임진왜란 당시 만일 충무공이 이 땅에 없었더라면…하는 심정으로 나는 20세기 왜정(倭政) 치하에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없었더라면…하는 아슬아슬한 가정을 해보고 그리고선 “하늘이 내린” 두 인물을 우러러보게 된다.

충무공이 없었다면 쑥대밭이 되어 버린 한반도는 이미 조선조 건국 100년 만에 왜의 속방(屬邦)이 됐을지 모른다. 간송이 없었다면 식민지 조선은 역사적 황무지가 되고 겨레의 귀중한 문화유산은 대부분 대한해협 저쪽으로 넘어갔을지 모른다.

간송이 있었기에 우리에겐 '훈민정음' 원본도 있고, 혜원 신윤복의 화첩도 있다. 간송이 있었기에 수도, 값도 헤아릴 수 없는 겸재(謙齋) 단원(檀園)의 명화며, 추사(秋史)의 명필이며, 국보로 지정된 청자 백자의 명품들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일본의 수집상에게 넘어갈 뻔했던, 심지어 아궁이의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국보급 문화재들을 간송은 십만석꾼의 전 재산과 전 생애를 바쳐 사 모아서 이 땅 이 겨레 곁에 고스란히 간수해 놓았다. 그로 해서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문화유산들을 국립중앙박물관 못지않게 수장하고 있는 곳이 그의 간송미술관이다. 나라도 못하는 일을 나라 잃은 식민지 치하에서 한 사람의 간송이 해낸 것이다.

                 

올해는 1906년에 태어난 간송의 100돌 되는 해이다. 그를 기념하여 간송미술관에서는 수천 점의 소장품 가운데서도 최고의 명품 100점을 골라 21일부터 전시회를 연다.

올해는 또 간송미술관이 문을 연 지 40돌, 그 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保華閣) 건물을 지은 지 70돌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936년 간송의 나이 겨우 서른 살 때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부터 10년 전(1996년), 정부가 간송을 ‘이달의 문화인물’로 지정한 것을 계기로 그때도 미술관의 일품(逸品)들로 특별 추모전시회를 마련한 일이 있었다.

간송미술관을 찾을 때마다 나는 놀라움과 고마움의 마음과 함께 다른 한편으론 답답함과 아쉬움의 감정을 억누를 길 없다.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은 우리에겐 4명의 교황과 유럽의 뭇 왕비를 배출한 중세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가(家)가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과도 바꿀 수가 없다. 가령 ‘훈민정음(해례본)’의 초판 원본-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뜻으로 만들었는지가 분명한 인류 문화사상 유일의 문자, 한글 창제의 의도와 해설을 밝힌 ‘훈민정음’의 초판본은 지구상에 한 권밖에 없는 세계 문화유산이다. 이 훈민정음 하나만을 제대로 전시하기 위해서도 간송미술관 건물 공간 전체를 다 써도 넉넉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책을 수장하고 있는 미국 워싱턴의 국회도서관 본관의 메인 로비에는 그 넓은 공간에 오직 두 권의 책을 온갖 경보장치와 함께 유리장 속에 전시해 놓고 있다. 한쪽에는 양피지에 손으로 필사한 성서, 다른 한쪽에는 15세기 독일에서 인쇄한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가 그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초판본이 세계의 유일본인 것과는 달리 구텐베르크의 성서는 47권이나 세계의 여러 곳에 보존돼 있다. 근래에는 일본 나라(奈良)의 호류사(法隆寺)가 구다라간농(百濟觀音)을 따로 모시기 위해 성금을 모아 별채의 사당을 건립한 사례를 보았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국보 보물 등 문화재들이 제격에 맞는 공간을 차지하고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고 넉넉하게 전 세계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피렌체의 메디치가의 미술관 우피치(Galleria degli Uffici)에 못지않은 큰 건물이 마련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가슴이 답답하다. 누가 그 건물을 짓는단 말인가. 마땅히 국가나 재벌이 나서서 지어 간송미술관에 기부해야 된다. 오페라 작품도, 연주할 오케스트라도, 가수 앙상블도 없이 곳곳에 오페라 극장부터 지어 놓고 놀리고 있는 판에 민족문화의 일품들을 수장 전시할 미술관 하나를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마련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나는 권력이나 재력을 추구하지 않은 내 인생이 후회되기도 한다.

- 최정호 칼럼 / 동아일보, 2006년 5월19일  

 

 (4) 최완수 실장이 들려주는 명품감상 포인트

 간송 탄신 100주년을 맞아

국보 12점을 포함한 간송의 수천점 보물 중에서 가리고 또 가려뽑은

‘명품 100선’이 ‘간송탄신백주년기념특별대전’에서 선보이고 있다.

 

최완수 연구실장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며

그 중 몇 점을 뽑아달라는 질문에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단 지난 21일부터 단 2주간만 선보이는 ‘국보급 전시회’를

오랫동안 눈과 가슴에 담아두고 싶은 관람객들을 위해

관람 포인트와 요령을 들려주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명품들을 보면서

그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작품들을 비교하면,

그 시대의 문화와 정신을 미술품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를 국치의 근본으로 삼았던 삼국시대의 대표작은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563년, 국보 제72호)이다.

 

이후 7세기 전반의 금동보살입상(보물 제285호)

7세기 중반의 금동여래입상(보물 제284호)과 비교해보면

불상의 시기별 차이를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청자다.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전반기가 청자의 절정인데,

 

청자기린형향로(국보 제65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

청자원숭이형연적(국보 제270호),

청자오리형연적(국보 제74호) 등이 있다.

 

그러나 간송의 청자 대표선수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으로

어깨의 당당함은 남성미를,

잘록한 허리는 여성미를 물씬 풍기는 수작 중의 수작이다.


최완수 실장은

겸재 정선의 그림과 추사 김정희의 글씨조선시대 대표작으로 뽑았다.

‘풍악산내총람’  ‘청풍계’  ‘독백탄’ 등

진경시대를 연 정선의 그림들이 15점이나 전시되고 있다.

 

글씨만을 따로 모은 1층 ‘서예 진열장’에는

추사의 ‘명선(茗禪)’ 과 함께 안평대군-한석봉-윤순-이광사에 이르는

조선의 명필들만이 따로 모여 있다.

 

특히 여성의 필체라기에는 너무나 힘찬

정명공주의 글씨 ‘화정(華政)’ 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최실장은 “어머니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에 10년간 유폐되었던 한을

글씨에 쏟아부어 승화시킨 듯한 정명공주의 글씨를 보면

중국사람들도 감탄한다”고 말했다.

 

물론 국보 1호 지정논란이 일었던 훈민정음 해례본(1446호, 국보 제70호)

간송에만 있는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빼놓으면 안되는 작품이다.


1층은 비교적 크기가 큰 서화들,

2층에는 크기가 작은 회화와 도자기, 불상들이 전시되고 있다.

 

혜원 신윤복의 같은 작품이라도 비교적 큰 미인도는 1층에,

풍속도가 들어있는 전신첩은 2층에 있다.
- 경향신문, 2006년 05월 25일

 

 

 

(5) 민속미술연구의 산실, 간송컬렉션지킴이 40년 최완수실장

 

간송미술관에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간송 탄생 100돌 특별전(6월4일까지). 망국의 시절,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했던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다.

 

인파를 바라보는 간송미술관 산증인 최완수 연구실장(64)의 감회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올해가 미술관에 발을 들인지 40돌.

전적과 서화에 파묻여 미술사 연구에 연구해온 그의 학문 여정을 들어봤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은 “공부는 모름지기 무지에 대한 두려움을 깨는, 파겁(破怯)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며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강조했다. /남호진기자

24일 오전 10시,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을 찾았을 때 관람객들은 입구에서 30m나 줄지어 서있다.  

인파를 헤치고 보화각(보華閣· 간송미술관의 옛 이름) 2층으로 올라갔다. 낡은 탁자와 서가들에 놓여 있는 고서들은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했다. 크기나 놓인 위치에서 다른 연구원의 그것과 별 다를 게 없는 책상 앞에서 앉아 있는 최완수 실장의 모습은 바로 선비 그대로였다.

 

밖에 관람객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고 귀띔하자 최실장은 “많이 오는 것 좋기는 한데…” 라며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한다.

국내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의 설립자 간송은 누구인가.

 

만해는 위창 오세창을 평가하면서

‘만약 우리가 국권을 되찾으면 위창의 업적이 비문에 새겨질 것’이라고 했는데,

간송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에요. 그 시대 간송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최실장의 표현에 따르면

간송은 ‘ 반만년 문화유산의 멸실을 막아준 위대한 인물’ 이다.

최실장과 간송미술관의 인연은 1966년으로 올라간다.

국립박물관에 학예사로 근무하던 최실장은

당시 미술과장인 혜곡 최순우 선생으로부터 간송미술관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새로 생기니 가서 일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는다. 쭈뼛쭈뼛하던 최실장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은 간송미술관에 ‘신수대장경’(일본에서 간행된 불교대장경)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신수대장경은 국립박물관에서 없는 희귀본으로

당시 불경연구에 관심을 가졌던 최실장은 매번 서울대에서 책을 빌려다봐야 하는 번거로움을 느껴야만 했다. 책 욕심에 간송미술관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수많은 전적· 서화류에 푹 빠지게 된다.

“처음에 와보니 6·25때 피란가려고 싸놓은 유물보따리도 안 푼 상태였어요.

매일 먼지 털어 서가에 책 정리하는 게 일이었지요.

그토록 옆에 두고 보고 싶었던 신수대장경(전100권)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최실장은 일이 끝나기만 하면 신수대장경을 들춰보았다.

책 속에 담긴 내용을 확인하지 않으면 퇴근도 못하는 그에게 연구소가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10년쯤 출근하던 그는 책 읽는 시간을 벌기 위해 아예 연구소에 들어앉았다.

당시 읽었던 신수대장경은 지금 너덜너덜해졌고, 그 결실은 ‘불상연구’  ‘명찰순례’ 와 같은 저서로 이어졌다. 미술관에 소장된 혜원·겸재·단원의 회화, 추사 글씨 등도 좋은 연구 소재였다.

 

1971년부터 봄·가을 정기 기획전을 열고 있는 간송미술관은

매번 전시도록 뒤에 소장 유물에 대한 연구 성과를 싣고 있다.

 ‘간송문화’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고 있는 도록은 이번 전시에 70호를 채웠다.

수많은 문화재 중 최실장은 가장 주목한 것은
겸재 정선의 그림과 추사의 서예 작품들.

최실장은 1971년 미술관 첫 전시를 겸재의 회화로 정했다.

 

최실장은 “우리 문화가 세계 제일이라는 자존심으로 우리 산하를 붓으로 그려낸 겸재의 진경산수는 당쟁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식민사관을 넘어서는 데  가장 좋은 소재였다”면서 겸재를 화성(畵聖)으로 꼽았다. 그의 겸재 연구는 조선 후기 문화예술 전반으로 이어져 숙종~정조시대를 ‘진경시대’로 명명하기에 이른다.

추사의 고택이 있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최실장은

1972년 추사 특별전 때 발표한 ‘김추사의 금석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추사 연구에 뛰어든다. 만 30세에 발표한 이 논문으로 일약 추사 연구가로 알려지게 된다.

이후 3년에 걸쳐 번역한 ‘추사집’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추사 글에 대한 최초의 번역으로 지금도 학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왜 추사인가.

“중국에서는 왕희지를 서예의 대가로 떠받들고 있는데, 왕희지가 필체의 혁명을 가져왔다면

추사는 자체(字體)와 필체 양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냈지요.”

 

최실장은 겸재가 화성이라면 추사를 한국의 서성(書聖)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추사는 서예의 대가만은 아니다. 학문의 방법이 어떠해야 한지를 가르쳐준 선배학자였다.

‘경전을 날줄로 삼고 역사서를 씨줄로 삼아’(經經緯史) 공부했다는 추사의 공부법은 바로 그의 좌우명이다.

연구소에 파묻혀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그림과 글씨, 불상 등을 연구하며
우리 미술사 연구를 한단계 끌어올린 그는 소위 ‘강단 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자료와 문헌을 바탕으로 기존 학계에서 이루지 못한 독특한 성과를 내고 있는 그에게는 학자들이 꼬인다.

‘간송학파’라 불리는 이들은 조선 후기 역사·문화 연구에 중요한 연구집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학교수 같았으면 내년이면 은퇴해야 하지만,
평생을 ‘은일’(隱逸)하며 연구해온 그에게는 은퇴도, 정년도 없다. 그는 요즘 고향인 예산군 고덕면의 면지(面誌) 집필에 3년째 몰두해 있다.

주위에서는 “소잡는 칼을 닭잡는 데 쓰느냐”며 무슨 작은 면지에 눈길을 돌리냐고 핀잔하지만,

그는 “나를 낳아준 고향에 은혜를 갚는 일”이라며 어느 저술보다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석학이 쓴 ‘고덕면지’가 올해 안으로 완성되면 큰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평생을 민족문화 연구에 몰두해온 그에게 문화에 대해 묻자

“쾌적하고 안락한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기후·풍토에 따라 문화가 다른 만큼 문화의 획일화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문화의 특징은 무엇일까.
“한국은 유라시아 대륙 문화의 종착지입니다.

이들 문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돼 원융·조화를 이뤄

우리의 독특한 문화를 일궈낸 것입니다.”

그는 외래문화를 총체적으로 녹여 승화시킨 대표적 사례로 석굴암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서구 과학문명도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며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내비쳤다.

- 경향, 2006년 5월 24일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찾아가는 길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  

                           - 도보 1.5km(10-15분 정도)               

                           - 버스이용 : 성북초등학교 정문 앞 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