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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간 : 2006년 12/27 (수) - 2007년 2/25(일)
시 간 : 11:00-19:00 (매주 월요일 휴관)
: 매일 14시 - 큐레이터가 작품을 설명하는 갤러리토크 진행
장 소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추사 서거 150주년을 기념해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12월27일 개막된
<한국서예사특별전-추사문자반야(秋史文字般若)> 는
서예가로서 단편이 아니라 추사가 쌓은 학예세계의 전모를 밝히는 자리이다.
특별 코너에서는
'이헌서예관 소장 추사명품’과 멱남서당 소장 ‘추사가의 한글’전도 동시에 열리고 있다.
이렇게 세 전시회를 결합하여 추사체(秋史體)가 그의 학문과 예술, 삶과 그 시대의 분위기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태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 詩書畵와 文史哲 꿰뚫는 성취… 추사의 진면목을 본다
- 자화(自畵), 자찬(自讚)한 <자화상(自畵像)> 32.0×23.5㎝
이 사람이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 해도 좋다. 謂是我亦可 謂非我亦可
나라고 해도 나이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나이다. 是我亦我 非我亦我
나이고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것도 없다. 是非之間 無以謂我
제주(帝珠·제석천의 구슬)가 주렁주렁한데 帝珠重重
누가 큰 마니주(摩尼珠) 속에서 상(相)을 집착하는가. 誰能執相於大摩尼中
하하. 과천 노인이 스스로 쓰다. 呵呵 果老自題
‘자화상’을 그린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이렇게 그림에 자찬(自讚)을 붙였다.
추사는 자기가 그린 얼굴 모습에 담긴 내면의 실상을 봐야지,
겉모습이 자신과 닮았느냐, 아니냐는 시시비비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자화상은
지금까지 알려진 추사파 초상화(소치 허유와 이한철의 추사 초상화)와는 다소 다르다.
눈매라든가, 굳게 다문 입술이라든가 하는 부분은 비슷하다.
하지만 예컨대 이한철의 초상화가 온화하고 원만한 모습이라면
추사의 자화상은 극히 사실적이다.
요컨대 추사의 자화상은
전문 화가가 그리는 초상화의 도식화, 양식화 틀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소략한 옷 처리와는 달리 봉황 눈과 얼굴, 봉발에 가까운 털이나 수염 묘사는
리얼리티의 극치를 이룬다.”(성균관대 조선미 교수)
이 작품은 19세기 사실주의적인 시대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공재 윤두서(17세기), 표암 강세황(18세기)의 자화상 계보를 잇는
초상화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동안 선문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었던 이 작품은
도록으로 알려져 있었을 뿐 본격적인 평가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초상화는 <추사문자반야(秋史文字般若)> 특별전에서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학예연구사는
"추사 스스로 거울 앞에 앉아 곰살맞게 그리지 않으면
절대 그릴 수 없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추사학예의 화두’라 할 수 있는 ‘문자반야(文字般若)’ 묵서도 처음 공개됐다.
전형적인 해서로 썼으며, 추사의 화두이자 추사가 가장 좋아했던 문구로,
추사는 이 문구를 가장 아낀 소치 허유에게 주었다.
‘문자반야’는 부처님이 설하신 경(經), 율(律), 논(論) 전부를 가리킨다.
즉 추사는 문자를 통해 모든 사물의 도리를 분명하게 꿰뚫어 보는 깊은 지혜,
즉 문자반야의 경지를 지향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의 제목도 <추사문자반야(秋史文字般若)> 이다.
: 추사학예의 화두’ 로 평가되는 ‘문자반야’ 묵서.
이외에도 전시회에는
‘도덕신선(道德神僊)’‘사서루(賜書樓)’‘문자보리(文字菩提)’‘만휴(卍休)’등
대자서(大字書)를 비롯한 행서 병풍,
파체서(破體書ㆍ여러 서체를 섞어 쓴 글씨)인 '가정유예첩(家庭遊藝帖)',
서예 비평과 감식의 절품인‘완당제산곡신품첩(阮堂題山谷神品帖)’등
분야별 대표작 100 여점이 전시된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거나 사진으로만 선보였던 작품들이 전시된다.
그리고
추사 스승인 박제가(朴齊家)의 지두화(指頭畵)인 ‘한거독서(閑居讀書)’,
정약용(丁若鏞)의 초서병풍 ‘사언고시(四言古詩)’
초의선사의 '문자반야(文字般若)' 시첩 등 사우· 문인관계 작품 50여 점,
청나라 옹방강의 '애련설도(愛蓮說圖)'와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낸 편지 '담계척독(覃溪尺牘)'과
'세한도발문(歲寒圖跋文)’등 한중교류관계 50여 점,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 부친 김노경, 정순왕후 김씨 등
추사가(家) 한글편지 등 가계(家系)작품 50여 점 등 총 250여 점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회는 추사 서거 150년을 기리는
다양한 전시와 학술연구를 마감하는 행사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전시기간 매주 토요일(1월6일-2월24일)에는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유홍준 문화재청장, 안휘준 문화재위원장 등
추사 연구자들이 참가하는 학술세미나 ‘추사학예강화’가 마련돼
추사의 학문예술을 조명한다.
이동국 학예사는 “지금까지는 추사의 글씨에만 포커스가 맞춰진 것은 사실”이라면서
“이번 전시는 시서화(詩書畵), 유불선(儒佛仙), 문사철(文史哲)을 관통하는
전인적인 인물로서의 추사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 2006년 12월27일
- 서울, 매일경제, 한국, 경향신문 등에서 기주짱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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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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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알수록‘큰 인물’ 추사는 대서예사·대학자·대시인 … 추사 김정희를 다루는 기획전시들이 잇달아 마련되면서 “이 가을, 왜 추사인가”라는 질문이 절로 나온다. 의문은 이어진다. “대체 추사는 어떤 인물인가.” 전문가들은 이들 질문에 하나같이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큰 인물’”이라고 밝혔다. 추사 연구 이력 30년이 넘은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실장은 이렇게 표현했다. “추사체를 이룩한 대서예가이고 일격화풍(逸格畵風)을 정착시킨 대화가이며, 고증학 문호를 개설한 대학자다. 시도(詩道)에 정통한 대시인이며, 고금의 각종 문체를 박섭(博涉·널리 섭렵함)한 대문장가다. 불교 선교종지(禪敎宗旨)를 요해(了解·깨달아 앎)한 대선지식이며….” 추사는 알면 알수록, 연구하면 할수록 그 영향력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워낙 다양한 면모를 지녔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추사는 서예사적으로 추사체라는 새로운 봉우리를 탄생시켰다. 거칠게 말해 추사체는 전통시대 동아시아를 장악한 서성(書聖) 왕희지(321~379)의 문자미를 뛰어넘어 한자가 본래 가진 회화미를 절정에 이르게 했다. “당시 옹방강 등 청나라 고증학파가 추구하는 학예일치의 이상적 경지에 도달, 서예를 순수한 조형예술로 승화시킨”(최완수) 것이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학예사는 “추사체는 그의 학문과 사상, 예술의 결정체”라며 “기존 서예사를 뒤집고 중국에서조차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룬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당시 중국 최고 학자들과 교류하며 추사는 국내외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며 “조선 후기의 향토적 정서, 진경풍속화의 흐름을 막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는 당시 세계 속에서 글로벌 마인드를 갖춘 모습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밝혔다. 실제 당시 중국에서는 추사의 작품을 구하려는 ‘완당 바람’이 분 것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유청장은 “아직 베일에 가려진 추사를 밝히는 일은 감히 우리의 자긍심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식인 추사는 법고창신 · 실사구시의 당시 사상 흐름의 한 복판에 있었다. 유봉학 한신대 교수는 “추사는 홍대용·박지원에 이어 외래문물을 받아들여 혁신하자는 ‘북학시대’의 맥을 이었다”며 “추사에게서 오늘날 세계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고 밝혔다. 유교수는 “추사는 청나라 문화예술을 받아들이면서 당대 최고의 일류학자, 문화의 정수를 효율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이라며 “지금 우리가 주로 받아들이는 미국 문화, 그 문화의 수준과 비교해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단순한 문화 수용이 아니라 추사는 우리 것으로 승화시켰다”며 추사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시인으로서의 추사는 아직 그 연구가 활발하지 않다. 워낙 까다롭기 때문이다. 정후수 한성대 교수(한문학)는 “옛 고사를 워낙 많이 녹여낸 추사의 시는 고사를 알아야만 이해된다”며 “더욱이 감성에 호소하기보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 시로 한마디로 어려운 시로 연구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밝혔다. 추사 연구가인 김영복씨는 “추사를 다룬 논문이 200편이 넘지만 자기 전공분야에서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접근한 실정”이라며 “이제라도 본격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추사에 대한 관심은 파란만장한 삶이 주는 흥미롭고 매력적인 호기심도 한 몫 한다. 명문 권력집안에서 태어난 추사는 청나라를 오가며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하고 암행어사 등을 지냈지만, 제주도 유배생활처럼 고난에 빠지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삶이 매력적으로 대중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19세기 동아시아 대표적 지식인인 추사 김정희.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추사를 이번 기획전들이 얼마나 그려낼지 주목된다.
추사체 탄생
20대, 베이징에 가 한나라 비석 예서체에 눈 떠 40대, 당의 해서체 통달 … 추사체 새 경지 개척
추사체는 기괴, 고졸의 조형미를 특징으로 한다. 평범한 아름다움을 거부한다. 깔끔한 글씨에 익숙한 사람은 당황할 수 있다. 추사체는 일종의 대하드라마다. 시간 흐름에 따른 변화상을 꿰뚫어야 한다. 추사의 글씨는 비교적 엄정했던 20, 30대의 도입기, 40대의 과도기, 그리고 파격과 개성의 아름다움을 구현혔던 말년의 서풍(書風) 사이에 적잖은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24세에 아버지를 따라 처음 베이징에 갔던 추사는 중국인 스승 옹방강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왕희지, 구양순으로 대표되는 정법(正法) 서체 외에 옛 한나라 비석에 새겨진 예서체, 즉 왕희지 이전의 서체를 알게 됐다. 추사는 40대에 한나라 예서와 함께 구양순 중심의 당나라 해서 공부에 매진한다. 그리고 추사체의 골격이 된 엄정 단아한 정법(正法)을 체화하게 된다. 요컨대 추사는 한나라 예서에서 진수를 얻었지만, 생애 전시기를 통해 왕희지 이래 중국 명필들의 서체에도 정통했다. 추사체의 탁월한 경지는 추사가 중국 각 시대의 서체를 완전히 습득했기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추사체의 실체는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흔히 추사체의 형성과정을 추사의 생애와 연결해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24세 때의 연행(燕行)과 55세 때의 제주 유배가 그의 생애에 분수령이 된 건 분명하나 서체의 변모와 그대로 일치하는 건 아니다. 연행이 추사가 글씨를 공부하는 데 방향을 돌린 계기가 됐지만 작품에 본격 반영된 건 30대 이후이기 때문이다. 제주 유배 이전인 40대 중반에도 추사체의 징후가 포착되며, 추사체가 완전히 농익는 시기 또한 60대 말 과천 시기이다.
과천 시기의 추사 김정희 - 동아시아 서예문화 최후의 거벽
홍선표(이화여대교수, 한국미술연구소소장)
과천은 조선말기 최고의 문인학자로서 추사체를 창출한 서예의 거장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그 위대한 삶을 마감한 곳이다. 성균관 대사성과 형조참판 등을 지낸 김정희는 안동 김씨 세력의 모함에 의해 제주도 대정과 함경도 북청에서의 10여 년 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60대 후반의 만년을 자신을 낳아준 생부 김노경(金魯敬)의 묘지와 별장이 있는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은거하며 보냈던 것이다. 명대 말기부터 동아시아는 고전의 원류를 직접 체득 또는 탐구하는‘직심(直尋)’과 ‘고증(考證)’에 의해 옛 것을 계승하고 새 것을 여는‘통변(通變)’의 정신으로 창작하는 ‘방고(倣古)’즉 고전을 재창조하는 풍조를 성행시켰다. 특히 청대의 금석고증학파는 서예의 고전적 원천을 성현들의 체취가 깃들어 있는 고대 청동기의 금문(金文)이나 비석문(碑石文)과 같은 영매적 기능을 지닌 성스러운 새긴 글씨체인 전서 또는 예서에서 찾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서풍의 혁신을 도모했었다. 김정희는 금석고증학의 수용과정에서 이러한 새로운 서예사조에 자극을 받아 기존의 법첩에 의존하던 서풍에서 벗어나 고대의 금석문인 예서를 고전의 원천이며 참된 정수로 보고, 이를 사의적(寫意的)이며 심미적인 차원에서 재창조하여 고증학파 지식인들에 의해 새롭게 모색되던 동아시아 왕조말기의 서풍을 대성시키는 위업을 이룩하였다. 우리가 예술사적으로 자랑스러워하는 추사체는 이와 같이 기묘하고 참된 옛스러움을 지닌 ‘기고(奇古)’한 금석기의 예서를 토대로 창출된 것으로, 10여 년 유배생활에서의 연마를 거쳐 과천에서 원숙한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추사체는 예서에서 특히 돋보이는데, 기존의 우미 섬려한 서풍을 벗어나 해행기를 배합하여 강철처럼 굳세고 힘찬 붓놀림과 각지면서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필획으로 특유의 파격적 조형미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 붓놀림의 강도와 속도, 글씨 획들의 구축적 포치와 결구는 그 자체로 독특한 공간적 구성미를 나타낸다. 이와 같이 서툴고 투박한 것처럼 보이는 운필과 필획의 특징은 우주만물을 생성화육하는 자연의 본원적 기운과 융합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 가득한 흉중의 ‘일기(逸氣)’ 또는 ‘성령’을 인위적 기교가 배제된 꾸밈없는 상태 그대로 ‘사출(瀉出)’ 하는 것을 중시했던 사의적 전신론과 결부된 것으로, 동아시아 서화론과 미학의 정수를 구현시킨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추사체는‘졸박기고(拙朴奇古)’한 파격적 조형미와 구성미에 의한 시각적 자극과 함께 창생적 본성을 담아 낸 원초적 생동감을 통해 특별한 감동을 주고 있다. 김정희의 이러한 서풍은 의미 전달에 본질적 기능을 수행해 오던 서예문화를 ‘미도합일(美道合一)’의 예술적 경지로 전환시키는 촉매적 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회화사에도 영향을 미쳐 최초의 붓이 최후의 붓이 되게 하는, 즉 창생적 기세를 구유한 필획의 분해와 구성에 의해 대상물의 정수를 옮겨내는 사의체 화풍을 크게 풍미하게 했었다. 특히 과천시기를 통해 완숙된 김정희의 서화세계는 대원군을 비롯한 왕족 및 고위관료와 비양반 출신의 여항문인들에게 전수되어 근대 초기까지 우리 미술사의 흐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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