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덕수궁미술관] 현대 미술의 거장 "장 뒤뷔페"

Gijuzzang Dream 2007. 11. 10. 19:19

 

 

 

 

 

 

   

2차대전 이전 파리에 피카소가 있었다면,

2차대전 이후 파리의 대표적인 작가는 단연 장 뒤뷔페(Jean Dubuffet)였다고 할 수 있다.

 

한불 수교 120주년을 맞아 파리 뒤뷔페 재단의 협력, 프랑스 대사관의 후원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이번 전시는 뒤뷔페 전 시기 작품을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뒤뷔페는

프랑스의 교과서에 등장하는 화가 순위 1위를 기록하는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국민 작가다.

세계적으로도 '앵포르멜'의 선구자로,

2차 대전 후 폐허의 유럽미술의 진로를 개척한  선도적 작가로 알려져 있다.

미술뿐 아니라, 당대의 사상, 음악, 문학과 폭넓게 교류하며

'예술’이라는 화두에 집중한 장 뒤뷔페는

자기 철학과 사고를 기반으로 창조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

 

그의 세계는 길들여지고 제도화된 기존문화의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들고,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서구 문명의 진로에 멈춤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전후반의 생을 통해, 순수함과 광기와 원시성을 다시금 예술의 영역으로 불러들인

장 뒤뷔페는 오늘날 한국의 문화 현실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난무하는 문화라는 미명 아래 추구되는,

세련되고 다듬어진, 그래서 특별하고 사치스러운 취미인 우리의 문화는

이미 반세기 전 뒤뷔페가 그토록 애써 무너뜨리고자 했던

그 견고하고 재미없는 문명화된 문화인 것이다.

 

제도화된 문화의 영역보다 훨씬 앞서 이미 존재하는 원초적(brut)인 것,

문명의 기치 아래 너무 오래 가려지고 숨겨져 있는 그것이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주변으로 눈을 돌리기만 해도 언제든 문득 발견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을,

예술은 온건히 드러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류가 '즐거이' 감상할 만한 예술을 이번 전시를 통해

장 뒤뷔페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장 뒤뷔페(1901-1985, Jean Dubuffet)

 

10대에 아카데미 줄리앙을 단 6개월 다니고는 "배울 것이 없다"고 그만둔 후,

가업을 이어 포도주 상인이 된 채 반평생을 살았다.

2차세계대전 중인 1942년 42세가 되어서야 돌연 본격적인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에게는

더 이상 반드시 따라야 할 미술사적 전통도, 문화계의 관습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서구문명이 너무나 맹목적으로 좇던 가치에 의문을 표하고,

반대로 너무나 오랫동안 무시되어왔던 것들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즉 그는, "이성과 논리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본능, 열정, 변덕, 격렬함, 광기"의 가치를 존중하는 예술을 지향했다.


"사상이란 이성과 논리의 과정과 접촉했을 때는 물로 변화하고 마는 증기와도 같다"고

믿었던 뒤뷔페는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으로 그림을 그리고

사회적으로 정신병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끌어냈으며,

"단지 즐거움을 위해 스펙터클을 만들고 축제를 벌이는" 광대와도 같이 작업했다.

그는 "문화적 예술보다 더 좋은 원초적 예술(Art Brut)"를 주창했고,

한국화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앵포르멜(Informel, 비정형을 의미함)의 선구자로

칭송되었으며, 2차대전 이후 예술의 기능과 진로에 결정적인 이정표를 제시한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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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 II / 1966년 11월 30일 / 종이에 마커 / 25 x 16.5 cm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1962년 뒤뷔페는 그의 작품 중 가장 길고 가장 독창적인 연작 ‘우를루프(L'Hourloupe)'를 제작한다.

이 연작은 뒤뷔페가 전화 통화를 하던 중 볼펜으로 무심히 낙서하듯 그린 스케치에서 착안한 것이다.

‘우를루프’라는 단어는 불어의 ‘소리지르다(hurler)’,  ‘새가 지저귀다(hululer)’,  ‘늑대(loup)’,

‘곱슬머리 리케(Riquet a la Houppe, 동화작가 샤를르 페로의 동화)’,

혹은 정신적 방황을 그린 모파상의 소설 ‘오를라(Le Horla)’ 등을 연상시키지만,

그 어떠한 단어로도 귀착되지 않는 뒤뷔페 자신의 신조어이다.

 

<자화상 II>는 흔히 파는 저렴한 필기도구 마커의 기본색상(검정, 빨강, 파랑)으로,

마찬가지로 흔하디흔한 종이 위에 빠르게 쓱싹쓱싹 그린 자신의 초상이다.

매우 단순하고 제한된 선과 색채로 명암도 없고 원근법도 없이 시각화된 모든 이미지들은,

뒤뷔페가 만든 ‘우를루프’ 세계에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또 다른’ 어법이다.

뒤뷔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에 말 걸고, 세계에 개입하며, 아예 또 다른 세계를 창안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는 자신의 형상까지도 완전히 동화되어,

마치 이 '자화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금반지 / 1958년 / 100 x 81cm / 캔버스에 유채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각진 머리는 목 없는 몸에 연결되어 있고, 몸은 거의 평평하며 거대하다.

가는 팔은 몸에 접합되어 있는 듯 둥근 형태이며 손은 몸의 중간에서 만난다.

인물의 왼손 세 번째 손가락에는 작품의 제목처럼 금반지가 있다.

 

뒤뷔페가 소위 ‘재질학’에 관심을 집중하던 1857-58년의 시기,

그는 <금반지>와 같은 기념비적 인물 형상을 그려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인물은, 뒤뷔페가 초기부터 종종 그려왔던 초상이나 원형적인 인물 형상들과 연결지점을 지니면서도,

빠른 붓질, 소용돌이치는 물감의 선, 튀기기와 바르기등의 다양한 기법과

텍스처 자체에 대한 극단적인 관심으로 인해,  그 어떠한 기존의 인물상보다 충격적이다.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형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뜻밖의’, ‘낯선’ 이미지는 잊혀지지 않을 생생한 느낌을 자아낸다



  미르 G3 (주룽) / 1983년 12월 22일

 종이에 아크릴, 캔버스에 부착 / 268 x 800 cm / 파리 국립근대미술관 소장 

 

‘미르(mire)’라는 단어는 무한한 연속체 위의 한 점에 초점을 맞춘다는 의미로 쓰인다.

동시에 불어로 ‘미르’는 ‘보다’라는 의미의 동사가 되기도 한다.

사실 ‘본다’는 것은,

짐짓 너무나 당연해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인간의 감각일 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뒤뷔페는, ‘본다’는 것이 실은 우리의 사고를 통해 축적된 자료와 그 자료를 토대로 구축된

하나의 틀 안에서 ‘제한된 채’, ‘안락하게’ 인식되고 믿어지는 것이 아닌지 반문한다.

만약 그러한 틀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코드’가 제안된다면,

우리 기존의 시각과 사고의 틀은 공격받고 무너지며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구상성을 상실한 채, 전혀 세련되지 않는 강렬한 색채와 선들로 완성된 '미르'연작은

어떠한 ‘언어’도, ‘현실의 개념’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작가의 허무주의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한편, 부제의 ‘주룽’은 주룽반도 즉 홍콩을 의미한다.

스스로 “중국풍 장식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노란색을 연상시킨다”며 붙였던 이 부제는,

후에 노란색을 제거한 ‘볼레로’ 연작으로 진행된다.

 

 

   분주한 업무(아홉 사람이 있는 장밋빛 풍경)

  1975년 / 102 x 194cm / 종이에 아크릴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1962년부터 1974년에까지 약 12년간 매몰되었던 우를루프의 세계에서

뒤뷔페는 스스로 빠져나와 다시 한번 자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 간다.

우를루프에서보다 이미지들은 훨씬 알아볼 수 있게 되고,

또다시 그가 사는 주변을 둘러싼 풍경들에 시선이 옮겨진다.

'분주한 업무'에서는 무슨 일인가에 쫓겨 다니며 분주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회색빛 띈 장미빛’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인물과 공간은 어떠한 실재적인 거리감이나 원근감을 상실한 채 배치된다.

익명의, 어떠한 개별성도 지니지 않은 인물들이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자신이 가야한다고 믿게 된 그 길만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뒤뷔페는 이러한 도시민의 삶에 대해 언급함에 있어,

‘애정 어린 시선’과 ‘거리 두기’의 태도를 공존시키고 있는 듯 보인다. 

 

 좌표 / 1978년 205 x 291cm / 종이에 아크릴(36개의 구성재료를 붙임)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1975년 말, 뒤뷔페는 프랜시스 예이츠의 '기억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영감을 얻어

아상블라주 회화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작업실의 한쪽 벽면 전체에 금속판을 붙이고,

작은 자석을 이용하여 조각들을 붙여서 대규모 구성을 완성해 간다.

소위 '기억의 극장' 연작으로 불리는 이 작품들을 통해('좌표' 또한 그 연작 중 하나이다),

뒤뷔페는 인간 기억의 파편들이 잘려지고, 재편되고, 혼합되어

마치 한 편의 연극과 같이 구성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뒤뷔페 자신의 말대로,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행해지는 재편과정, 일종의 혼합스프 속에

다양한 장면과 사건의 추억을 넣어 섞는 재편과정”을 표현하기에,

아상블라주의 기법은 매우 적절했을 것이다.

수많은 조각들은 각각의 다른 기억들을 담아 제작되고 이들은 다시 하나의 거대한 화면에 조합된다.

작품의 ‘완결’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결국 ‘여러 단편들의 느슨한 연합’일 뿐이며,

우리의 ‘사고’라는 것도

결국은 인식과 기억이 뒤죽박죽 섞인 채 나타나고 사라지는 극장과 같은 것일 뿐이다.

뒤뷔페의 이러한 생각은, ‘완벽한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고’를 애초부터 부정했던,

그의 예술에 대한 기본 입장을 여전히 반영하고 있다.

 

 잡담하는 사람 II / 1969-70년

 114 x 85 x 85cm / 폴리우레탄 수지에 에폭시페인트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1962년 소위 우를루프 연작을 시작한 후 뒤뷔페는

모든 사물을 ‘우를루프’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골몰한다.

처음에는 회화와 같은 평면에서만 해오던 이 작업은,

1966년 발포 폴리스티렌을 발견하면서 삼차원적 입체 작업으로 확장된다.

발포 폴리스티렌은 가볍고 조각하기가 쉬운 재료로,

이를 발열 도구를 이용해 자르고 채색하여 하나의 입체물로 완성하게 된다.

이는 ‘채색된 조각’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뒤뷔페 자신은 “차라리 공간으로 돌출하고 확대되는 그림으로 불러야 맞을 것”이라고 말한다.

 

'잡담하는 사람 II'은

안락 의자에 다소 어설프게 기대어 앉아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한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확장된 회화는 평면 회화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그럴 듯하게,

우를루프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점차 현실과 상상 세계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그 경계는 더욱 위태로워진다. 

 

 앉아있는 남자가 있는 풍경 / 1974년

 178 x 140cm / 캔버스에 비닐물감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앉아있는 남자는 분명 엉덩이를 걸치고 몸을 구부린 채 관객을 향해 웃는다.

주변의 모든 대상과 공간은, 앉아있는 인물과 형형색색 뒤섞인다.

빨강, 파랑, 흰색, 검정의 기본적인 색채만으로 환원된 ‘우를루프’의 세계에는,

인간과 사물, 환경이 완전히 통합되고 함께 어울리고, 구별되지 않은 채 공존한다.

뒤뷔페는 점차

“채워진 것과 비어 있는 것, 존재와 비존재, 실재하는 데이터와 상상의 투영에 대한 우리의 개념들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불확실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오가며 하나의 ‘환타즘(Phantasm)'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보고 있고 알고 있다고 믿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면서 . . . 

 


  작은 정원사 / 1955년 / 92 x 73cm / 캔버스에 유채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1955년 뒤뷔페는 건강이 나빠진 릴리의 요양을 위해 프랑스의 남부지방 방스로 오게 된다.

방스에서의 뒤뷔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연과 지형의 원리들에 심취하였는데,

방스의 독특한 지형에서 나오는 돌과 흙, 식물과 나비 모두가 뒤뷔페 작품의 대상이 되었다.

파리에서의 도시적인 삶에서 빠져나와,

마치 스스로 ‘정원사’가 된 뒤뷔페는 '작은 정원사'라는 작품에 은유적으로 등장하는 듯하다.

 

정원’은 뒤뷔페가 지속적으로 활용한 테마였는데, 이 때 정원은 다소 반어적으로 쓰인다.

즉 뒤뷔페의 정원은, 인간이 만든 집에 딸려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곳이라기보다,

자갈이나 잡초들만 무성한 방치된 땅들로 되어 있다.

'작은 정원사'에서도 인물은 넓은 땅과 불규칙적으로 널려있는 자갈, 마구 자란 풀들 사이에서

‘작은’ 존재일 뿐이다. 소박하고 ‘원래 그대로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삶의 태도는,

회화에 있어 재료 자체를 ‘재료 그대로’ 두는 행위와 유비된다

 

 풀 / 1954년 71 x 89cm / 캔버스에 유채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재료에 대한 뒤뷔페의 관심은,

캔버스의 표면에 구상적인 모티프와 추상적인 이미지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들고,

또한 당분간 공존하게 만들었다.

녹색의 다층적인 톤이 화면을 균등하게 가득 덮고 있는 작품은,

어지럽게 널려져 자유분방하게 멋대로 자란 풀의 특징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화면 표면의 질감, 물감의 터치 자체가 주제가 되는 추상적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풀'은 분명히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익숙한 대상이지만,

결코 시간을 들여, 눈여겨 관찰되지 못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뒤뷔페에게 있어, 그를 매료시키는 것은 언제나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대상들이다.

그는 “희귀한 광경을 멀리까지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이 바로 우리 눈앞에, 혹은 우리 발치에 있다.”고 말한다.

그 자체로는 보잘것없는 것들이 자연과 우주의 원리를 일깨워준다는 것, 그래서 이를 표현한 그림은

 ‘무형적’이고, 특히 ‘어떤 형식을 가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무한히 자유롭고 우연적이고 거칠고 자연스러운 표현이 가능하게 되는 것,

그것이 뒤뷔페의 작품에 시종일관 흐르는 원리이다.


 

  미셀 타피에 / 1946년 / 27 x 20.5cm  / 종이에 과슈 / 개인 소장 / 나탈리 세루시 갤러리 승인 

 

뒤뷔페가 그린 미셸 타피에의 초상은, 전후 프랑스 화단의 중요한 작가와 평론가의 만남을 시사한다.

뒤뷔페는 ‘앵포르멜’이라는 용어로 자신의 작품이 규정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타피에는 오히려 뒤뷔페를 ‘앵포르멜’의 선구적 작가로 추앙한 바 있다.

뒤뷔페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기 시작한 이 초상들은,

결코 대상을 미화하거나 사진 같은 사실성에 입각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얼핏’ 보기만 해도, 강력하게 드러나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특성들이

너무나도 예리하게 드러나 있으며, 대상에 대한 애정과 유머가 묻어나 있다.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대상은 죽고 만다”고 생각했던 뒤뷔페는

“무심히, 얼핏, 스치듯이 비스듬하게” 본 대상들을 순간적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방식이야말로 우리의 감각을 건드리고, 우리의 기억에 형태가 남게 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길죽하고 마른 얼굴, 모아진 눈, 짙은 눈썹, 특징적인 콧수염과 깊이 팬 얼굴의 주름은,

어떤 점에서는 세심하고, 어떤 점에서는 성마른 한 이론가의 ‘인상’을 강력하게 전달한다.

 

  모자를 써보는 여인 / 1943년 11월

 캔버스에 유채 / 60 x 73 cm / 파리 파르티퀼리에르 컬렉션 소장 

 

이 재미있는 제목의 작품은,

1942년 뒤뷔페가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바로 이듬해에 제작된 작품이다.

41세의 나이까지 포도주 상인을 살아왔고, 중년의 나이에 뒤늦게 화가가 될 결심을 한 뒤뷔페에게 있어,

더 이상 반드시 따라야 할 미술계의 관습이나 아카데미즘의 아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나 원시 미술의 즉각성,

심지어 정신병자들이 그린 그림의 솔직함에서 영감의 원천을 얻었다.

강렬한 원색의 빨간 소파 위에 앉은 나체의 여인은, 원근법적으로 불가능한 자세로 앉아 있지만,

훨씬 더 ‘직접적으로’ 편안한 소파 위의 안락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가슴과 배꼽의 ‘표시’만으로 ‘간단히’ 여성의 신체를 그리고,

모자를 써보는 동작을 표현하는 손가락은 움직임에 ‘흔들린다’.

진실은 언제나 정말 단순하고 평범한 것에서 발견된다고 믿었던 뒤뷔페의 고스란히 배어있는 작품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기주짱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