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96) 처참한 나날들

Gijuzzang Dream 2008. 7. 20. 21:05

 

 

 

 

 

 

 (96) 처참한 나날들

 

인조가 항복의 예를 마치고 환궁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청군은 아직 철수하지 않았고, 그들은 조선 조정에 이런 저런 요구들을 쏟아냈다.

용골대와 마부대는 말을 탄 채 대궐을 무시로 들락거렸다.

그들은 홍타이지를 전송하는 데 예를 갖추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명을 공격하는 데 필요한 수군과 전함을 내놓으라고 닦달했다.

 

눈앞에 펼쳐진 전쟁의 상처는 참혹했다.

도성의 관아와 인가들은 불타고 여기저기서 시신들이 나뒹굴었다.

살아남은 어린애와 노인들은 굶어 죽거나 얼어죽기 직전의 상황에 몰려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 것인가.

어렵사리 목숨을 부지하고 종사를 보전했지만,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또 다른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창경궁 전경.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의 예를 마치고 46일 만에 환궁했을 즈음,

도성 안에서 살아남은 이는 어린이와 노인들뿐이었다.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살곶이 다리.

청군의 철수가 시작되자

포로로 끌려간 가족을 만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처참한 도성의 모습

 

인조가 창경궁으로 돌아온 것은 1월30일이었다.

46일 만에 돌아온 궁궐은 궁궐 같지 않았다.

백관들은 흩어지고, 서리들과 하인배들도 가족들을 찾아 떠났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을 시작하려 해도 누구에게 시켜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궁궐 바깥의 도성 모습은 참혹했다.

광통교 주변을 비롯하여 곳곳의 관아와 민가들은 불에 타버린 채 방치되어 있었다.

곳곳에는 참혹한 형상의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널려 있는 시신들을 보다 못한 한성부가 인조에게 건의했다.

‘백골(白骨)을 묻어 주는 것이야말로 왕정(王政)의 급선무입니다.

길가에 버려진 시신들을 차마 볼 수 없으니 남정들을 징발하여 매장토록 하소서’.

 

물론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도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0살 미만의 어린애들과

70살이 넘은 노인들뿐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나마 그들은 굶주린 채 추위에 방치되어 죽기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호조에서 긴급 대책을 내놓았다. 노인들은 진휼곡을 풀어 구제하고,

아이들을 데려다 기르는 자에게는 노비로 삼을 수 있는 권한을 주자고 했다.

살아남은 자들, 그 가운데서도 그나마 힘이 남아 있는 어른들은 청군 주둔지 주변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청군의 철수가 곧 시작되려는 판에 포로가 된 가족들을 행여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청군이 몰려 있던 살곶이(箭串) 부근이며,

마포 서강(西江)의 성산(城山) 부근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청군 진영에 있는 사람 가운데 절반이 조선인’이라는 풍문이 돌 정도로

피로인(被擄人)들의 수는 엄청났다.

하지만 청군은 피로인들이 가족과 만나는 것을 엄중히 차단했다.

피로인들이 행여 청군 진영 바깥으로 나가려 하거나,

가족을 찾는 사람들을 향해 두리번거리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청군의 철편(鐵鞭)이 날아들었다.

 

서강 등지를 오가며 피로인들의 참상을 목도한 나만갑은

‘적진에는 이미 죽은 사람, 화살을 맞았는데 아직 죽지 않은 사람,

무엇인가를 기원하며 합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기록했다. 참혹한 장면이었다.

 

거듭되는 인조의 굴욕

 

1637년 2월2일, 홍타이지가 철수 길에 올랐다.

아니 홍타이지의 입장에서는 개선(凱旋)하는 길이었다. 그는 피로인 호송과 가도(가島) 공략 등

조선에서의 나머지 일들을 도르곤을 비롯한 부하들에게 맡기고 먼저 출발한 것이다.

살곶이에서 마장(馬場)을 거쳐 양주 쪽을 통해 북상하는 길을 잡았다.

홍타이지는 철수 길에서도 도르곤 등에게 수시로 전령을 보내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무엇보다 피로인들을 차질 없이 심양까지 끌고 오라고 강조했다.

 

인조는 홍타이지를 배웅하기 위해 거둥해야 했다.

‘인조실록’에는 ‘청한(淸汗)이 철군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니,

상이 전곶장(箭串場)에 나가 전송했다’고만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인조는 홍타이지를 전송하면서 다시 한번 삼배구고두례를 행해야만 했다.

거듭되는 치욕이었다. 인조는 치욕을 삼키며 홍타이지를 배웅했다.

하지만 홍타이지가 멀어져 간 길 위에서는 ‘차마 못 볼 장면’들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피로인들을 끌고 가는 청군 부대가 홍타이지의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청군은 조선인 피로인들을 세 줄로 세워 연행했다.

수백 명의 피로인들이 지나가면 그 뒤에 감시병이 붙고,

다시 수백 명을 줄 세워 끌고 가는 장면이 하루종일 반복되었다.

인조는 이 처참한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오던 길과는 다른 길을 잡아 도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홍타이지가 지시한 상황은 용골대와 마부대가 대궐을 드나들면서 인조에게 전달했다.

그들은 먼저 가도를 공격하는 데 협조하라는 요구를 내놓았다.

공유덕 등이 전선을 수리하는 데 협조하고, 조선의 수군도 동원하라고 했다.

‘요구‘라기보다 사실상 ‘지시’이자 ‘명령’이었다.

한창 기세가 등등한 그들의 요구를 뿌리칠 처지가 아니었다.

조정은 당장 신천(信川) 군수 이숭원(李崇元)과 영변(寧邊) 부사 이준(李浚)에게

황해도의 수군을 이끌고 청군과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인조는 수군을 청군에게 보내라고 지시한 뒤, 호조참의 신계영(辛啓榮)을 급히 강화도로 보냈다.

선박을 수리한다며 서해 연안으로 간 공유덕 일행에게

강화도 등지의 주민들이 약탈당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라는 명목이었다.

더욱이 당시까지 원손(元孫)이 청군을 피해 교동(喬桐)에 은신해 있는 상태였다.

한편에서는 청 측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

다른 한편에서는 그 과정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전전긍긍’이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용골대 일행 가운데는 조선인 통역 정명수(鄭命壽)도 끼어 있었다.

그는 본래 은산(殷山) 출신의 노비였다.

일찍이 청에 투항한 뒤, 홍타이지의 신임을 받아 통역으로 조선을 드나들었다.

이제는 더 출세하여 어엿한 ‘상국의 통사(通使)’가 되어 조선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는 말을 탄 채로 창경궁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정명수에게나, 조선 신료들에게나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소현세자, 심양으로 출발하다

 

병자호란 직후, 인조는 갖가지 치욕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런 그에게 무엇보다도 슬픈 일은 소현세자, 봉림대군과의 이별이었다.

 

2월3일, 소현세자는 창경궁에 들러 부왕에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그의 행차에는 청인 대여섯 명이 감시인으로 따라붙었고,

정명수는 빨리 돌아가야 한다며 성화를 멈추지 않았다.

 

2월8일 소현세자 일행이 떠나는 날, 인조는 창릉(昌陵) 근처까지 거둥하여 배웅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만났을 때 백관들의 통곡 소리가 이어졌다.

인조는 세자 일행을 데려가는 도르곤에게 깎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이제 떠나니, 대왕께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과거 ‘오랑캐’로 치부했던 청인, 그것도 아들보다도 나이가 어린 청 왕자에게

자식의 모든 것을 맡겨야 했던 아비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인조는 도르곤에게 또 다른 부탁을 빼놓지 않았다.

‘자식들이 궁궐에서만 자랐는데, 지금 들으니 여러 날 동안 노숙(露宿)으로

벌써 병이 생겼다고 합니다. 가는 동안 온돌방에서 재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르곤은 그러겠다고 답한 뒤 출발을 채근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절을 올려 하직하자 인조는 눈물을 쏟으며 당부의 말을 이어갔다.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청인들에게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

백관들이 통곡하면서 소현세자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세자 일행은 신하들의 통곡 속에 심양으로 떠났다.

인조와 소현세자의 이별 장면 또한 눈시울을 적시지 않고는 읽기 어렵다.

애틋하고 슬픈 인조의 부정(父情)이 느껴진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심양으로 들어간 소현세자는 이후 인조에게 ‘뜨거운 감자’가 되고 말았다.

청인들은 소현세자를 지렛대로 인조로부터 충성을 이끌어 내려 했다.

‘여차 하면 인조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소현을 즉위시키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 와중에 인조와 소현세자는 서로 ‘경쟁자’가 되고 ‘정적’이 되어 갔다.

그 귀결이 소현세자의 돌발적인 죽음이었다.

병자호란은 그렇게 인조의 부자 관계부터 파괴시켜 가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11-05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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