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98) 인조, 백성에 사죄하다

Gijuzzang Dream 2008. 7. 20. 21:05

 

 

 

 

 

 

 (98) 인조, 백성에 사죄하다

 

 

“나 때문에 죄없는 모든 백성에 화 끼쳐 책임 통감”

 

전란은 끝났지만 인조 정권 앞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당장 도성 안팎에 버려져 있는 시신들을 치우고,

하나 둘씩 모여드는 생존자들을 구휼(救恤)하는 문제가 시급했다.

또 전쟁을 불러오고, 임금으로 하여금 일찍이 없던 치욕을 겪게 만들었던 책임 소재를

규명하는 것도 현안으로 떠올랐다. 당장 척화신들의 ‘경거망동’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척화신들을 처벌하는 것만으로 흉흉한 민심을 달랠 수는 없었다.

백성들은 청군에게 죽고, 붙잡혀 끌려가고, 삶의 터전까지 잃어버렸다.

그들의 아픔과 분노를 다독이려면 결국 인조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화약이 맺어지고 인조가 환궁한 직후 조정의 분위기는 미묘했다.

우선 무신들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병조판서 신경진(申景진)은 회의석상에서 문관들을 매도했다.

“쥐새끼 같은 자들이 나라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며 목청을 높였다.

‘쥐새끼 같은 자들’이란 문관들, 그 가운데서도 척화신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충남 논산에 있는 척화신 윤황(1572~1639)의 재실.

 

구굉(具宏) 또한 척화신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인조의 인척이자 반정공신이기도 했던 그는

“윤황(尹煌)이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그의 목을 베어야만 한다”

고 일갈했다. 일찍이 정묘호란 당시부터 후금(청)과의 화친 시도를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던 윤황을 정조준했던 것이다.

나만갑은 ‘기세가 오른 무인들이 문신들을 종이나 하인들처럼 여기고,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것이 마치 무슨 중흥의 계기나 된 것처럼 여긴다.’고

귀경 직후의 조정 분위기를 적었다.

 

 

병자호란 당시 사간(司諫)으로 척화를 주장한

조경(1586~1669)의 위패가 있는 경기 포천의 용연서원.

한국전쟁 때 강당과 동재 · 서재가 불타 사우(祠宇)만 남았다.

 문화재청 제공

 

 

벼랑 끝으로 몰린 척화신들

 

호전될 기미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 위기 상황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점차 답답한 현실에 짜증을 내게 되고 편안한 것을 찾기 마련이다.

더욱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병사들을 이끌고 산성의 방어를 담당했던 무신들이 보기에

문신들, 그 가운데서도 척화신들은 목소리만 컸을 뿐,

성을 방어하거나 나라를 지키는 데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만도 했다.

 

이미 1637년 1월, 지친 병사들 사이에서 ‘척화신을 묶어 보내라.’는 시위가 일어난 바 있었다.

추위와 기아에 시달리던 그들에게는 거창한 대의명분보다는

당장 따뜻한 밥 한 그릇과 편안한 잠자리가 더 절실했다.

그럼에도 ‘전원 옥쇄(玉碎)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척화신들의 주장이야말로 비현실적이고 우활(迂闊)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항복이 다만 ‘시간 문제’가 되고, 청이 전쟁의 책임을 척화신들에게 돌리고

그들을 묶어 보내지 않으면 항복을 받아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판에

척화신들의 결사 항전 주장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조가 항복했던 직후, 도성의 민심은 척화파에게 부정적이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도성으로 돌아온 백성들 앞에 보이는 것은

시체가 나뒹굴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처참한 모습뿐이었다.

절망 속에 눈에 핏발이 설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자신들을 유린한 청군에 대한 적개심과 아울러

대의명분을 앞세운 척화신들의 ‘경거망동’ 때문에

자신들의 삶이 망가졌다는 원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2월19일

김류, 홍서봉, 이성구, 신경진, 최명길 등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나라를 그르친 사람들의 죄를 따지는’ 자리였다.  

윤황, 이일상(李一相), 유황(兪榥), 홍전(洪 ), 조경(趙絅), 유계(兪棨) 등 척화신들의 ‘과오’가

도마 위에 올랐다. 논의 결과를 보고받은 뒤, 인조는 이들 모두의 관작을 삭탈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조경은 문외출송(門外黜送), 윤황 · 유황 · 홍전 · 유계 등은 유배,

이일상은 가장 무거운 절도(絶島) 정배의 명령을 받았다.

척화신 대부분을 조정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바야흐로 척화신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인조, 백성 원성에 위기감

 

척화신들을 처벌했지만 인조 또한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2월8일, 심양으로 끌려가는 소현세자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인조는 한 노파의 원망 섞인 통곡 소리를 들었다.

‘여러 해를 두고 강화도를 수리하여 백성들을 의지하게 했는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더냐.

나라의 책임을 맡은 자들이 날마다 술 마시는 것을 일삼아 백성들을 모두 죽게 했으니

이것이 누구 탓인가? 자식 넷과 남편이 모두 죽고 다만 이 몸만 남았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 이런 원통한 일이 있단 말인가.’

 

가족을 모두 잃은 노파의 한탄은 사실 인조를 향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이번 전란 때문에 삶이 망가진 모든 백성들의 원망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조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월19일 인조는 내외의 군인과 백성들에게 내리는 교유문(敎諭文)을 발표했다.

 

‘덕이 부족한 내가 대위(大位)에 있은 지 15년에 오직 대의(大義)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뜻밖의 화를 만나 외로운 성에서 포위 당한 채 봄을 맞았다.

나는 지금 해진 갖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는 것이 일반 천민과 다름이 없고,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은 천성인데

나는 지금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모두 북쪽으로 떠나보냈다.

돌아보건대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  

군사들은 전장의 원혼(魂)이 되게 했고, 죄 없는 백성들은 모두 포로가 되게 하여,

아비는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아비는 지어미를 보호하지 못하게 하여

가슴을 치고 하늘에 호소하게 하였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

이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머금고 오장이 에는 듯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솔직하고 처절한 내용이다.

‘나의 죄’ 운운하며 전란 발생과 백성들의 고통이 모두 자신 때문에 빚어진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고 백성들에게 머리를 숙인 국왕은 일찍이 없었다.  

인조는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다짐했다.

‘이제 묵은 폐단과 가혹한 정치를 모두 없애며, 사당(私黨)을 없애고 공도(公道)를 회복하며,

농사에 힘써 남은 백성들을 보전하려 한다.

그대 팔도의 신민들은 지난날의 잘못 때문에 나를 버리지 말고,

상하 합심하여 어려움을 널리 구제할지어다.’

이제 잘 해보겠으니 도와달라는 당부이자 호소였다.

 

 

의심받는 인조의 진정성

 

처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과 성명’을 읽으면

인조는 분명 병자호란을 계기로 대오각성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성명 발표 전후 인조가 취한 조처들을 보면 그리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강화도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 여유를 빼앗고, 엄청난 수의 백성들을

죽거나 포로가 되게 했던 장수들에게 군율 적용을 기피하려 했던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1637년 2월 삼사 신료들은,

특히 죄가 무거운 김자점 · 김경징 · 장신 등에게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라고 촉구했다.

종사를 위태롭게 하고 수많은 생령들을 죽거나 끌려가게 만들었느니 복주(伏誅)해야만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김경징과 장신에게 극형을 내리는 것을 꺼려했다.

신료들의 채근에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고,

장신은 조수(潮水) 때문에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며 두 사람을 비호했다.

강화도를 방어할 준비를 내팽개쳤고, 함께 싸우자는 부하들의 호소도 묵살하고 달아났던

두 사람의 실제 행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 인식이었다.

인조는, ‘제대로 정죄(定罪)하지 않으면 종묘사직의 영혼을 위로할 수 없고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 수 없다.’는 신료들의 거듭된 요청에 밀려 마지못해 두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

하지만 김자점은 끝내 유배형에 그치고 말았다.

김경징과 김자점이 모두 인조를 왕위에 올려놓는 데 앞장섰던 공신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인조의 태도가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을 비호하려 했던 인조의 자세는

‘사당을 없애고 공도를 회복하겠다.’던 교유문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나왔다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이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11-19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