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95) 三學士의 최후

Gijuzzang Dream 2008. 7. 20. 21:05

 

 

 

 

 

 (95) 三學士의 최후

 

인조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상징되는 치욕적인 항복과 함께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귀천을 막론하고 조선 사람들의 참혹한 고통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인조를 대신해 볼모로 끌려가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화친을 방해하여 전쟁을 불러왔다는 ‘죄목’으로 연행되는 삼학사,

경향 각지에서 청군에 붙잡힌 수십만의 포로.

그들은 청군의 엄중한 감시 속에 심양(瀋陽)을 향해 걷고 또 걸어야 했다.

그들 앞에는 과연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고통 속에 끌려가는 사람이나, 슬픔을 삼키며 그들을 보내는 사람이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통곡했다.

그리고 곧바로 삼학사의 죽음 소식이 날아들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에는 청에 끌려간 삼학사 말고도

많은 척화신(斥和臣)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 꼽히는 유계(유棨)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남 부여의 칠산서원.

 

 

홍익한, 윤집, 오달제

 

삼학사 가운데 가장 연장이었던 홍익한(洪翼漢 · 1586~1637)은 당시 52세였다.

그의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진사 홍이성(洪以成)과 안동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습(습)이었는데 뒤에 익한으로 개명했다.

이정구(李廷龜)의 제자였던 그는 1615년 소과(小科)를 거쳐,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주에서 정시(庭試)에 급제했다.

이후 언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병자호란 직전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윤집(尹集 · 1606~1637)은 당시 32세였다.

본관이 남원이었던 그는 현감 윤형갑(尹衡甲)과 황씨의 소생으로

일찍이 백형 윤계(尹棨)에게 수학했다.

1627년 소과에 급제하고 1631년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했던 그는

1636년 당시 홍문관 교리(校理)였다. 윤집은 김상헌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3남을 두었는데,

후일 증손녀가 홍익한의 손자에게 출가하여 사후에 홍익한과 사돈 관계로 인연이 이어졌다.

 

 

삼전도비.

 

오달제(吳達濟 · 1609~1637)는 당시 29세였다. 그는 해주가 본관으로

오윤해(吳允諧)의 셋째아들이자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吳允謙)의 조카였다.

1627년 소과를 거쳐 1634년 별시 문과에 급제했고,

병자호란 당시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조정에는 삼학사 말고도 많은 척화신들이 있었다.

윤황(尹煌), 유철(兪 ), 이일상(李一相), 유계(兪棨), 정온(鄭蘊), 조경(趙絅) 등이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이 세 사람이 청군에 넘겨지는 ‘희생양’으로 낙점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홍타이지의 칭제건원(稱帝建元) 사실이 알려진 직후 이들이 누구보다 격렬하게

홍타이지의 ‘참월(僭越)’을 비난하고 주화신(主和臣)들을 성토했기 때문이다.

 

홍익한은 1636년 2월

‘홍타지이가 보낸 사신의 머리를 베어 명나라에 보내든가, 그것이 싫으면 나의 머리를 베라.’는

극렬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오달제는 1636년 10월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고 거리낌없이

화친을 시도하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최명길을 겨냥하여 직격탄을 날렸다.

윤집은 더 나아가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하고 오랑캐와 화친을 주도하는 최명길은 진회(秦檜)보다 나쁜 자’라고

극언을 퍼부은 바 있었다.

 

 

홍익한의 절개

 

청군이 철수할 때, 홍익한은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있었다.

조정은 2월12일 증산현령(甑山縣令) 변대중(邊大中)을 시켜 홍익한을 적진으로 압송토록 했다.

변대중은 홍익한을 결박하여 심한 모욕을 주었고, 음식물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홍익한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결박을 풀어 달라고 호소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조정은 청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 그를 신속하게 압송했는데,

2월20일에 벌써 만주의 통원보(通遠堡)에 도착했다.

통원보의 청인들은 그가 끌려온 사연을 듣고 음식물을 내어 후히 대접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나만갑은 ‘병자록’에서

‘개돼지 같은 청인들이 변대중 같은 조선사람보다 훨씬 나았다.’고 통탄했다.

 

심양에 이르러서도 홍익한은 의연했다.

용골대가 그에게 ‘너의 나라 신료들 가운데 척화를 주장한 자가 퍽 많은데,

어찌 유독 너만 끌려왔는가?’라고 묻자

홍익한은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라고 응수했고, 용골대는 웃으며 가버렸다고 한다.

 

홍타이지는 홍익한을 회유하기 위해 그를 별관에 가두고 연회도 베풀어 주려고 시도했다.

과거 수많은 명나라 이신(貳臣)들을 받아들인 경험이 있는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홍익한은 ‘전향’시켜야 할 중요한 대상이었다.

‘조선의 골수 척화파까지도 결국 홍타이지의 은덕에 감화되었다.’는 소문은

향후 조선을 제어하는 데 커다란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익한은 단호했다. 그는 글을 써서

자신을 회유하려는 홍타이지의 기도를 정면에서 반박했다.

‘대명조선국(大明朝鮮國)의 잡혀온 신하 홍익한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므로 감히 글로써 밝힌다.

지난해 봄 금나라가 맹약을 어기고 황제라 칭한다는 말을 들었다.

맹약을 어겼다면 이는 패역한 형제이고, 황제라 칭했다면 이는 두 천자(天子)가 있는 것이다.

한집안에 어찌 패역한 형제가 있을 수 있으며, 천지간에 어찌 두 천자가 있을 수 있는가.

그리하여 본래 예의를 숭상하고 직절(直截)을 기풍으로 삼는 언관으로서

맨 먼저 이 논의를 주장하여 예의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상소 한 장을 올림으로써

가정과 나라에 패망을 초래하였으니 만 번 도륙당한다 할지라도 진실로 달게 받을 뿐,

달리 할 말은 없다. 속히 죽여 주기를 바랄 뿐이다.’

 

‘대명조선국의 신하.’

이 말 속에 이미 홍익한의 의지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나는 조선의 신하이자 명의 신하이니 그대들 오랑캐와는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이

홍익한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였다. 홍익한의 의지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곧바로 그를 처형했다.

 

 

윤집과 오달제의 최후

 

윤집과 오달제는 청군 후발대에 이끌려 1637년 4월15일 심양에 도착했다.

홍타이지는 두 사람도 회유하려고 시도했다.

4월19일 용골대가 두 사람을 앉혀 놓고 홍타이지의 말을 전했다.

‘너희들이 척화를 외쳐 두 나라의 틈이 생기게 했으니 그 죄가 매우 중하다.

죽여야겠지만 특별히 살려주고자 하니 처자를 데려와 이곳에서 살겠는가?’

 

윤집은 ‘난리 이후 처자의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했고,

오달제는 ‘고통을 참고 이곳까지 온 것은 만에 하나라도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노모를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면 죽는 것만 못하다. 속히 죽여 달라.’고 응수했다.

 

격분한 용골대는 그들을 묶어다 심양 서문 밖에서 죽였다.

청인들은 시신을 수습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뒷날에도 뼈들이 쌓여 있는 형장에서 두 사람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집안의 종들을 시켜 초혼(招魂)하여 온 것이 전부였다.

 

오달제에게는 노모와 임신한 아내가 있었다.

심양으로 끌려갈 때 그가 남긴 시구(詩句)들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그는 인조와 노모를 생각하면서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 임금님 깊으신 은혜에 죽음 또한 가벼워라.

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홀로 계신 어머님 날 기다리는 거라오”라고 읊었다.

 

아내에게 부치는 시도 절절하다.

“부부의 은정 중한데/ 만난 지 두 해도 못 되었구려.

이제 만리에 이별하여/ 백년 언약 헛되이 저버렸구료.

땅 멀어 편지 부치기 어렵고/ 산이 첩첩하여 꿈조차 더디오.

나의 살길 점칠 수 없으니/ 뱃속의 아이나 보호 잘하오”

 

윤집 집안의 사연도 처절하다.

병자호란 당시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있던 윤집의 형 윤계 또한 전란 중에 순절했다.  

그는 의병을 일으켰는데 기습을 받아 붙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윤계 또한 청군 앞에서 무릎 꿇기를 거부하다 혀가 잘리는 등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후손들은 왜란 당시 순절한 할아버지 윤섬(尹暹)과 윤계, 윤집의 글을 묶어

‘삼절유고(三節遺稿)’를 펴낸 바 있다.

 

어쩔 수 없이 죽이기는 했지만 청조는 이후 삼학사의 절의를 인정했다.

그들은 삼학사를 기리는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강희제(康熙帝)는 훗날 ‘조선이 명나라 말년에도 끝까지 배신하지 않은 것은 본받을 만한 일’

이라고 찬양한 바 있다.

삼학사로 대표되는 조선의 ‘절의’는 청인들이 보기에도 분명 이채로웠던 것이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2008-10-29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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