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93) 파국의 전야

Gijuzzang Dream 2008. 7. 20. 21:04

 

 

 

 

 

 (93) 파국의 전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가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고,

왕실과 대신의 가족들이 모두 포로가 되어버린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출성(出城)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척화신 가운데 누구를 뽑아, 몇 명을 보낼 것인지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사신을 보내 인조의 신변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으려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척화신을 ‘낙점’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빚어졌다.

 

 

 

● 出城을 결정하고 三學士를 ‘낙점’하다

 

1월27일 김신국과 이홍주, 최명길 등이 국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이전에 가져갔던 국서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신(臣)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여러 날을 머뭇거렸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스스로 나아가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만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이 바야흐로 300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께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국서의 내용은 공순하고 처절했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나가겠다고 ‘굴복 선언’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던 ‘호소’는 사라지고

대신 인조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 달라는 요청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미 강화도마저 함락된 상황에서 출성을 거부하고 버틸 여력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인조가 출성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결을 시도하는 신료들이 나타났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목을 매고, 이조참판 정온(鄭蘊)은 칼로 배를 찔렀다.

두 사람 모두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산성에는 처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출성을 약속했음에도 청군은 포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혹시라도 조선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처절하고 황망한 분위기 속에서 인조와 대신들은 청군 진영으로 보낼 척화신의 숫자를 조율했다.

‘홍익한만을 보낸다고 했기 때문에 홍타이지가 강화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란 우려 속에

일각에서는 열 한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묶어 보낼 대상자로 김상헌, 정온, 윤황(尹煌), 윤문거(尹文擧),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김수익(金壽翼), 김익희(金益熙), 정뇌경(鄭雷卿), 이행우(李行遇), 홍탁(洪琢) 등이 거명되었다.

 

너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내고, 누구를 뺄 것인가?

이 ‘불인지사(不忍之事)’를 둘러싼 논란 끝에

오달제와 윤집 두 사람만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이들 두 사람과 당시 남한산성에 없었던 홍익한을 가리켜 보통 삼학사(三學士)라고 부른다.

 

 

●홍타이지, 항복 조건을 제시하다

 

1월28일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조유문(詔諭文)을 가지고 왔다.

조유는 ‘그대는 짐이 식언(食言)할까 의심하지 말라.

지난날 그대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規例)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君臣) 관계를 대대로 이어가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홍타이지는 향후 인조와 조선이 준수해야 할 조건들을 제시했다.

맨 먼저 명나라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명 황제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반납하고,

명의 숭정(崇禎) 연호 대신 자신들의 숭덕(崇德) 연호를 사용하라고 했다.

조선의 ‘상국(上國)’을 바꾸라는 요구였다.

이어 맏아들 소현세자와 둘째아들 봉림대군뿐 아니라

여러 대신들의 아들이나 동생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인질들을 붙잡아 놓음으로써 조선의 ‘변심’을 견제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홍타이지는 또한 향후 자신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도 보병, 기병, 수군을 동원하여 원조해야 한다고 했다.

당장 자신이 항복을 받고 돌아갈 때 가도( 島)를 공격할 계획임을 밝히고,

조선이 전함 50척과 수군을 내어 동참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군과 화기수(火器手)를

조선으로부터 보충하여 명을 공격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요구는 계속 이어졌다.

성절(聖節), 정조(正朝), 동지(冬至), 중궁천추절(中宮千秋節), 태자천추절(太子千秋節) 등

청나라와 관련된 경조사가 있을 때는 대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심양으로 오는 사신이 지참하는 외교 문서의 형식,

조선에 오는 청 사신에 대한 의전과 접대 절차 등은

한결같이 과거 명나라에 행했던 구례(舊例)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특기할 것은 포로들과 관련된 조건이었다.

홍타이지는 ‘아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너 청 영토로 들어온 뒤,

조선으로 도망쳐 오면 반드시 체포하여 청의 주인에게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포로를 ‘우리 군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얻은 성과’라고 규정한 뒤,

포로들을 데려오고 싶으면 정당한 가격을 치르라고 강요했다.

포로와 관련된 이 조항은 훗날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남기게 된다.

 

홍타이지는 그 밖에 조선이 해마다 바쳐야 할 세폐(歲幣)의 수량을 제시한 뒤,

‘청의 신료들과 조선 신료들이 혼인을 맺을 것’,

‘조선의 성들을 수리하거나 다시 쌓지 말 것’,

‘조선에 사는 우량허(兀良哈) 사람들을 쇄환할 것’,

‘일본과의 무역을 계속 하고 그들의 사신을 심양으로 인도해 올 것’ 등의 조건도 같이 내 걸었다.

 

홍타이지가 제시한 항복 조건은 조선에 대해 이중 삼중의 그물을 쳐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건’을 따를 경우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청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인조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유시문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인조에 대한 협박을 빼놓지 않았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려 주었다.

짐은 망해가던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까지 신의를 어기지 않도록 한다면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란

조선이 명에 대해 그토록 고마워했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다름 아니었다.

이제 청은 조선의 항복을 코앞에 두고,

자신들이 조선에 대해 ‘재조지은’을 베풀었다고 역공을 취했던 것이다.

 

 

●오달제와 윤집을 적진으로 보내다

 

1월28일 저녁, 인조는 하직 인사를 하러 온 오달제와 윤집을 만났다.

인조는 두 사람을 보자 목이 메었다.

‘그대들의 본 뜻은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구나.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인조는 결국 오열했다.

임금으로서 자신의 신하를 붙잡아 적진에 보내고,

적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참담함 때문에 울고 또 울었다.

 

윤집은 오히려 인조를 위로했다.

‘이러한 시기에 진실로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만 번 죽더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렇게 구구한 말씀을 하십니까.’

오달제는 의연했다.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다만 전하께서 성을 나가시게 된 것이 망극합니다.

신하된 자로서 지금 죽지 않으면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인조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울음 섞인 소리로 자책과 회한,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쏟아냈다.

‘그대들이 나를 임금이라고 여겨 외로운 성에 따라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인조는 오달제와 윤집에게 가족 사항을 물은 뒤, 자신이 그들을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윽고 술을 내렸다. 이별주였다. 술을 다 마시기도 전에 승지가 아뢰었다.

사신들이 두 사람을 빨리 내보내라고 독촉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직을 고하는 두 사람에게 인조는 울면서 꼭 살아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출성을 코앞에 둔 남한산성의 밤이 슬픔 속에 깊어가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10-15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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