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94) 해가 빛이 없다

Gijuzzang Dream 2008. 7. 20. 21:04

 

 

 

 

 

 

  (94) 해가 빛이 없다

 

1637년(인조 15) 음력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가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일찍부터 여진족을 ‘오랑캐’이자 ‘발가락 사이의 무좀(疥癬)’ 정도로 멸시해 왔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그것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 기막힌 장면이었다.

인조와 신료들은 ‘오랑캐 추장’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가장 치욕스런 항복 의식이었다.

그것으로 ‘춥고 배고픈’ 산성에서의 고통은 일단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조와 신료들, 조선 백성들 앞에는

몇 배나 더 아프고 처절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조의 항복장면을 묘사한, 삼전도비 옆의 부조물.

인조는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남색 융의를 입고 서문으로 나오라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가 항복하기로 결정한 뒤,

항복 의식을 어느 수준에서 행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1월28일, 김신국, 최명길, 홍서봉 등이 청군 진영에 갔을 때 전체적인 대강이 확정되었다.

항복의 규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제 1등은 함벽여츤, 제 2등은 3배9고두인데, 

용골대 등은 조선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제 1등 절목(節目)은 면제해 준다고 했다.

그것은 이른바 함벽여츤(銜璧輿櫬)을 면제해 준다는 뜻이었다.

함벽여츤이란 손이 뒤로 묶인 채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메고 나아가 항복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관을 메는 것은 항복하는 사람이 자신을 죽이더라도 이의가 없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함벽여츤(銜璧輿櫬, がんぺきよしん)

옛 중국에서 항복의 예(禮). 팔을 뒤로 묶고 헌물(獻物)로 구슬을 입에 머금고,

죽음을 당하여도 이의가 없다는 뜻으로 관(棺)을 메고 감.> 

‘좌전(左傳)’에 보면 미자(微子)가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함벽여츤을 행했다고 되어 있는데,

선왕의 제기(祭器)까지 모두 바쳐 완전히 신하가 되어 복속하겠다는 것을 맹세하는 의식이었다.   

‘함벽여츤’은 면제되었지만 청 측이 요구한 의식 내용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1월28일, 홍타이지의 칙서를 갖고 왔던 용골대는 조선 신료들과 항복 의식을 논의했다.

하지만 ‘논의’라기보다는 ‘통고’라고 하는 것이 정확했다.

용골대는 먼저 과거 조선이 명 황제의 칙서를 받을 때 어떤 의례(儀禮)를 따랐는지 물었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음에도 조선 신료들을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당시 청 진영에는 범문정(范文程)을 비롯하여 한족 출신 이신(貳臣)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명과 조선 사이의 외교 전례(典禮)에 밝았고,

그 내용을 홍타이지는 물론 만주족 관인들에게 훈수하고 있었다.

 

홍서봉이 ‘칙서를 가져온 명 사신이 남향으로 서고, 조선 배신(陪臣)은 꿇어앉아 칙서를 받았다.’

고 대답했다. 홍서봉이 조선과 명의 전례를 ‘실토’하자

용골대는 자신이 남향하여 서서 과거 명 사신이 하던 방식대로 칙서 전달 의식을 재현했다.

칙서 전달을 마친 뒤 용골대는 동쪽에 앉고 홍서봉 등은 서쪽에 앉았다.

이 같은 좌차(座次) 또한 과거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했던 관례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조선의 상국(上國)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전례 상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남한산성의 암문(暗門, 성벽에다 누각없이 만든 문).

 

용골대는 삼전도(三田渡)에 수항단(受降壇)을 이미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과

1월30일을 항복 의식을 행하는 날로 정했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그는 또한 항복하는 인조가 용포(龍袍)를 착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정문인 남문으로는 나올 수 없다는 것도 통고했다.

용골대는 인조가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수행원은 500명을 넘을 수 없고,

호위하는 군사나 의장대를 거느릴 수도 없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적어도 홍타이지를 황제로 받들고 신속(臣屬)을 맹세하러 나오는 이상,

인조는 철저히 신례(臣禮)를 행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홍서봉 등이 이의를 제기하려 했지만, 용골대의 기세를 꺾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다.

 

 

인조,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다

 

항례(降禮)를 행하는 절차까지 정해지고 난 뒤 남한산성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일부 신료들은 ‘전하는 항복하시더라도 명에서 받은 옥새를 청 측에 넘겨서는 안 되고,

그들을 도와 명을 치는데 필요한 군사를 원조해서도 안 된다.’고 눈물로 간언했다.

일각에서는 각 관아의 문서들을 모아다가 불태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소 각사(各司)끼리 주고받던 문서에서 청인들을 가리켜 ‘적(賊)’, 또는 ‘노적(奴賊)’이라

적어 놓은 것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1월30일이 밝았다. 산성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나만갑은 이 날의 일들을 기록하면서 맨 앞에 ‘해가 빛이 없다(日色無光).’고 적었다.

자신의 주군(主君) 앞에 닥친 치욕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다.

 

일찍부터 용골대와 마부대가 나타나 인조의 출성을 재촉했다.

인조와 소현세자는 남색 융의(戎衣) 차림으로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섰다.

인조의 뒤에 선 신료들 가운데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청군이 양철평까지 들이닥치고, 강화도로 가는 피란길이 끊어졌다는 소식에 놀라

황망하게 산성으로 들어온 지 꼭 46일째 되는 날이었다.

 

홍타이지는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진영에서 나와 군기를 앞세우고 주악이 울리는 가운데

삼전도를 향해 한강을 건넜다.

삼전도에는 아홉 단으로 높다랗게 쌓은 수항단과 크고 작은 황색 장막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인조가 50여명의 수행원들을 이끌고 산성 밖 5리쯤까지 왔을 때 용골대 등이 영접을 나왔다.

 

용골대 일행이 앞장서고 인조는 삼 정승과 판서, 승지와 사관(史官)만을 거느리고

삼전도를 향해 걸어서 나아갔다. 군사를 도열시켜 놓고 장막에서 기다리던 홍타이지는

인조 일행이 도착하자, 그와 함께 배천(拜天) 의식을 행했다.

청의 입장에서 ‘조선이 한 집안이 되었다.’고 하늘에 고하는 의식이었다.

배천 의식을 마치고 홍타이지가 수항단에 오르자 인조는 그 아래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뒤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예를 행한 뒤, 용골대 등이 인조를 인도하여 홍타이지 아래에 마련된 자리로 안내했다.

인조에게 항복을 받은 뒤 홍타이지는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며

조선 신료들에게 활을 쏘아보라고 했다. 조선 신료들이 쭈뼛거리는 와중에

청나라 왕자와 장수들은 떠들썩하게 어울려 활을 쏘면서 놀았다.

 

이윽고 주찬(酒饌)이 나오고 음악이 울려 퍼졌다. 세 차례 술잔이 돌고 잔치가 파할 무렵,

청나라 사람이 개를 끌고 나오자 홍타이지는 직접 고기를 베어 개들에게 던져 주었다.

조선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야만적인’ 모습이었다.

인조는 이런저런 치욕을 겪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왕이시여,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잔치가 파하자 강화도에서 끌려온 강빈을 비롯한 왕실과 대신들의 처자들이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곧 이어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선물이라며 초구(貂, 짐승 가죽으로 만든 방한복)를 가지고 와서

인조 이하에게 주었다. 인조는 그것을 입고 홍타이지 앞에 나아가 사례했다.

다시 두 번 무릎을 꿇고 여섯 번 머리를 조아렸다.

 

홍타이지는 이어 강화도에서 사로잡은 포로들과의 상면을 허락했다.

서로 만난 왕실과 대신들의 가족들이 부둥켜안고 울면서

삼전도는 순식간에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홍타이지가 신시(申時, 오후 3~5시) 무렵 자리를 뜬 뒤에도

인조는 밭 가운데 앉아 그들의 지시를 기다렸다.

해질 무렵에야 도성으로 돌아가라는 통고가 내려졌다.

인조는,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가게 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와 이별한 채 귀경 길에 올랐다.

 

송파 나루에서 배에 오를 때, 신료들이 다투어 먼저 건너려고

인조의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는 소란이 빚어졌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인조가 청군 병력의 호위 속에 도성으로 돌아올 때,

수많은 포로들이 인조를 향해 울면서 절규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인조는 그 절규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밤 10시 무렵 창경궁으로 들어갔다.

인조의 생애에서 가장 길고도 처참했던 하루가 저물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10-22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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