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90) 강화도가 함락되다, Ⅱ

Gijuzzang Dream 2008. 7. 20. 21:03

 

 

 

 

 

 (90) 강화도가 함락되다, Ⅱ

 

 

술 취한 장수는 도망가고… 죄 없는 백성은 어육 되고…

 

청군은 강화도 공격을 처음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

도르곤(多爾袞)은 심양에서 데려오거나 한강 일대에서 사로잡은 조선인 선장(船匠)들을

활용하여 다량의 병선을 만들었다. 크기는 작지만 매우 빠른 배들이었다.

청군은 그 배들을 갑곶(甲串)까지 육로로 운반하여 조선군의 허를 찔렀다.

한강이 얼어 있던 당시, 강화도의 조선군 지휘부는

청군이 육로로 배를 운반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다 할 방어 태세를 갖추지 않고 오로지 천연의 험세(險勢)만을 믿고 또 믿었다.

‘준비된 군대’의 의표를 찌르는 작전 앞에서

강화도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갑곶 방어선이 무너지다

 

 

이상길의 신도비.

갑곶은 육지와 강화도를 잇는 바다의 폭이 매우 좁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작은 거룻배만으로도 건널 수 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김경징 등은 갑곶 방어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청군이 상륙작전의 출발지를 갑곶으로 정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청군이 도해(渡海)를 시도하던 날 갑곶에 배치된 방어 전력(戰力)은 충청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병선 7척과 수군 20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당시 해안 방어의 주력은 주사대장(舟師大將) 장신(張紳) 휘하의 수군이었는데,

광성진(廣城鎭) 부근에 머물고 있었다.

강화성 방어를 맡은 초관(哨官)들 대부분도 장신의 선단에 소속된 배에 타고 있는 상태였다.

 

1637년 1월21일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경징은

장신에게 휘하의 수군을 갑곶으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했다.

장신은 급히 선단을 움직였지만

마침 조금(潮水가 가장 낮은 때인 음력 스무사흘)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조금 때문에 전진이 여의치 않았던 장신의 선단은 이튿날 새벽까지도 갑곶에 도착하지 못했다.

 

청군의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강진흔은 중과부적인 상태에서도 분전했다.

적선 3척을 침몰시켰지만 자신의 배 또한 청군의 화살과 대포에 맞아 죽은 군졸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신의 수군이 도착했다.

장신은 정포만호(正浦萬戶) 정연(鄭) 등을 시켜 청군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했다.

덩치가 훨씬 큰 조선 전함이 들이받자 적선 한 척이 침몰했다.

 

강화도에서 순절한 이상길 영정.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많은 청군 병선들이 방향을 바꿔 자신의 선단을 향해 몰려들자 장신은 겁에 질리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정연 등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하고, 광성진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주하기 시작했다. 변변하게 싸워 보지도 않고 퇴각을 결정했던 것이다.

강진흔이 발을 동동 구르며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장신은 끝내 외면했다.

 

‘인조실록’과 ‘병자록’ 등에는 격앙된 강진흔이 장신을 질타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장신, 네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를 베어 죽이겠다.”

하지만 장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정연 등은 전진하여 강진흔을 구원하려 했으나 장신의 위세에 밀려 물러서고 말았다.

갑곶 방어선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청군이 강화성을 포위하다

 

갑곶에서 강진흔의 수군이 무너지자 청군이 상륙을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해안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섣불리 건너오지 않았다.

척후병이 먼저 상륙하여 주위를 둘러본 뒤,

이렇다 할 저항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다를 건넜다.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던 김경징 등은 당황하여 해안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성 안으로 달아나려고 획책했다.

청군 대병력과 해안에서 직접 맞서봤자 승산이 없다는 핑계를 댔다.

호조좌랑 임선백이 봉림대군에게 달려가 호소했다.

‘어찌 천연의 요새를 버리고 허물어진 성안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나라의 존망이 이 한번의 싸움에 달려 있는데

대장이 물러나 위축되어 군사들의 마음을 꺾어서는 안 됩니다.’

봉림대군도 김경징을 말렸지만 그는 이미 상황 판단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상길을 모신 충렬사.

 

 

지휘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해안에 배치된 병사들은 인근의 산 등지로 물러나 버렸다.

임선백은 봉림대군에게

진해루(鎭海樓) 아래를 비롯한 험한 곳에 진을 치고 결전을 벌이자고 건의했다.

그러는 사이에 갑곶 건너편에 있던 청군의 대병력은 이미 바다를 건너 상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병자록’ 등에서는 ‘청군이 마치 나는 듯이 바다를 건너 달려들었다.’고 적었다.

 

여러 곳에서 조선군의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이 지휘하는 병력은 진해루 아래에서 적 9명을 살해하는 등 분전했다.

하지만 이미 청군에게 도해를 허용하여 사기가 저하된 데다 중과부적이었다.

황선신과 천총(千摠) 강홍업(姜弘業), 초관 정재신(鄭再新) 등 항전하던 말단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했다. 그럼에도 장신의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초관들은 바라만 볼 뿐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경징과 이민구는 이미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배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도주했다.

격분한 천총 구일원(具一元)은 장신을 꾸짖고 물에 빠져 죽었다.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 등의 휘하에서

강변을 수비하던 병력들도 모두 바다나 산으로 달아났다.

전투를 해본 적이 없던 유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청군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갑곶 나루를 돌파한 청군은 사시(巳時·오전 9∼11시) 무렵 강화성으로 밀려들었다.

청군은 성을 포위하고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성안에서는 원임대신 김상용(金尙容) 등이 중심이 되어 방어군을 배치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조선군은 조총과 활을 쏘며 저항했지만,

집중 포격을 앞세워 몰려드는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강화성보다 몇 배나 견고한 대릉하성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는 그들이었다.

 

김경징 등 최고 지휘부의 오판과 태만,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수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상륙을 허용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강화성의 북문(北門)이 가장 먼저 무너지고 청군은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이어지는 자결, 그리고 죽음들

 

불과 한나절여 만에 강화성은 함락되고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저항하거나 도망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청군에게 희생되었다.

또 ‘오랑캐’가 몰려오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남문에 머물던 김상용은 화약 궤짝에 불을 질러 스스로 폭사했다.

그의 장렬한 죽음과 함께 문루도 사라져 버렸다. 김상용 말고도 우승지 홍명형(洪命亨),

도정(都正) 심현(沈俔), 봉상시정(奉常寺正) 이시직(李時稷), 주부(主簿) 송시영(宋時榮),

전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 등이 자결했다.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순절한 것이다.

 

이시직이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글은 비감했다.

“장강(長江)의 험함을 잃어 북쪽 군사가 나는 듯이 건너오는데,

술 취한 장수는 겁이 나 떨며 나라를 배반하고 목숨을 지키려 드는구나.

파수(把守)가 무너져 만백성이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하물며 저 남한산성이야 조석간에 무너질 것이다.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결하려 한다.

살신성인하려 하니 땅과 하늘을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아 내 아들아. 삼가 생명을 상하게 하지 말라.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 지내고,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거라. 그리고 깊숙한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구구한 나의 유원(遺願)을 잘 따르기 바란다.”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이 한마디 속에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삶의 가치가 함축되어 있었다.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삼가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술에 취해’ 자신의 임무를 팽개쳤던 관인들 때문에 ‘도마 위의 고기’가 되어야 했던

수많은 생령들의 희생은 과연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성인(成仁)을 도모했던 관인들의 이면에는

너무도 많은 보통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이 가리어져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2008-09-24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