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는 1627년 4월12일, 서울로 돌아와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
1624년 이괄의 난을 맞아 서울을 버렸다가 되찾았던 경험을 3년 만에 되풀이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어렵사리 정권은 지킬 수 있었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청북에서는 의병들이 계속 저항하는 와중에 모병과 후금병 사이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명은 ‘조선이 오랑캐와 화친했다.’고 의혹의 눈길을 보냈고
후금은 ‘속히 모문룡을 잡아 죽이라.’고 채근했다.
민생 문제가 시급한 와중에 조정 신료들은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에 대해 시비와 논란을 멈추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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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문룡, 후금과 화친 빌미 자신의 발호 정당화
화의가 체결되면서 후금군 대부분은 철수를 시작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의주를 조선에 반환하지 않았다.
후금군은 의주 부근에 주둔하면서 모문룡을 체포하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몽골병을 포함하여 수천 명에 이르렀는데
아예 농사를 지으면서 장기간 주둔할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조선은 사자를 보내 완전히 철수하라고 종용했지만 후금 측은 듣지 않았다.
“조선이 모문룡을 제거해 주면 철수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모병들은 그들대로 청북 주변의 섬과 육지를 오가며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후금군을 습격하는가 하면 조선 관아와 백성들에 대한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단속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모문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문룡은 ‘조선이 후금과 화친했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들의 발호를 정당화하려 했다.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정묘호란 이후 청북은 훨씬 더 위험한 ‘화약고’가 되어 버렸다.
모병과 후금군 사이의 충돌은 다반사가 되었고, 그 와중에 조선은 ‘샌드위치’의 처지로 몰렸다.
화약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사자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문제는 사자들이 서울과 심양을 오가면서 모병들이 득실대는 청북 역을 지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모문룡은 후금 사자를 체포하여 ‘한 건 올리려’ 덤볐고,
후금 사절들은 그들대로 모병들과의 충돌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1627년 5월, 심양을 왕래했던 이홍망(李弘望)의 보고 내용은
‘샌드위치’가 되어 버린 조선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 준다.
“후금 군인이 한인 네 명과 조선인 네 명을 붙잡아 제게 데려왔습니다.
그는 저에게 ‘한인이 조선 사람들을 살해하기에 잡아 왔으니 그대가 직접 한인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럴 수 없다는 뜻으로 말했더니 후금 군인이 말하기를
‘조선은 한인과 마음을 같이하고 있으니 도리상 그러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한인을 죽였습니다.”
●화친에 대한 비판이 격화되다
종묘사직을 지키려고 화의를 맺긴 했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오랑캐’ 후금을 ‘형’으로 받드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와 함께 인조와 화의를 주도한 신료들을 특히 힘들게 했던 것은 명의 반응이었다.
이미 정묘호란이 일어난 직후
명 일각에서는 노골적으로 조선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1627년 5월,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갔다가 귀국했던 김상헌(金尙憲)은
명에서 ‘조선이 누르하치에게 양곡을 원조했던 사실이 있다.
조선이 후금을 두려워하여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관망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1627년 6월, 요동에서는
‘조선이 오랑캐와 혼인을 맺었고, 오랑캐에게 땅을 내주고 거주하는 것을 허용했다.’는
풍문마저 돌았다. 인조와 조선 신료들은 명의 그 같은 태도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오랑캐와 화의를 맺은 것 때문에 인조반정 당시 내세웠던 명분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스스로 찜찜해 하던 차였다.
‘광해군이 후금과 화친했기 때문에 타도해야 한다.’고 외쳤던 인조정권의 입장에서
명의 비난은 극심한 굴욕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이미 척화파 윤황(尹煌)의 발언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바 있다.
윤황은 강화도에 있을 때, 화의에 반대하면서
‘오늘의 화친은 이름만 화친일 뿐 실제로는 항복입니다.
전하는 요행을 바라는 간신들에게 넘어가 더러운 오랑캐 사자를 접견하고도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르십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었다.
‘항복’이란 말에 격분한 인조는
‘유식한 그대들은 오랑캐에게 항복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맞받았다.
그러면서 윤황을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지시했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 논란은 재연되었다.
7월1일, 생원 이흥발(李興渤) 등이 상소를 올렸다.
‘명나라 장수가 우리 경내에서 피살되었음에도 전하는 오랑캐 사신을 객관에 머물게 하고
극진히 예우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적 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보내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중국을 배신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던 인조는 ‘그대들이 가상하다. 나도 후회하고 있다.’며 물러섰다.
화의에 대한 자괴감과 명에 대한 미안함은 신료들에게 엉뚱한 자격지심을 촉발시켰다.
후금군은 철수하면서 강홍립이 조선에 남도록 허용했다.
이어 강홍립이 후금에 억류되었을 때 거느리던 사람들도 조선으로 송환했다.
화의가 이루어진 데 대한 만족감의 표시였다.
송환된 사람 가운데는 강홍립이 후금에서 재취(再娶)했던 부인도 있었다.
그녀는 한족 출신 장군 동기공( 奇功)의 딸이었다.
신료들은 그녀가 강홍립에게 가겠다고 하자 아우성을 쳤다.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를 섬긴 자에게
한족 여인을 다시 거느리게 해 주는 것은 참람하다.’는 것이 반대 명분이었다.
인조는 그녀를 강홍립에게 보내라고 했지만 신료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그녀를 명나라로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기공의 딸은 ‘조선에서 살 수 없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호소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논란이 한창이던 7월27일 강홍립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을 ‘매국노’로 매도하는 분위기에서 비롯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그의 죽음과 함께 논란은 종식되었다.
●이인거, 창의중흥대장 칭하며 병권 요구
화의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던 1627년 9월, 모반 사건이 터졌다.
강원도 횡성(橫城)에 살던 유학(幼學) 이인거(李仁居)가 주도했던 사건이었다.
이인거는 9월26일, 원주목사 홍보와 강원감사 최현(崔晛)을 찾아가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계획을 털어 놓았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조정에서 오랑캐와 화친했으니 내가 의병을 일으켜 곧바로 서울로 올라 가겠다.
전하께 주화파 간신 한 사람의 목을 베도록 청한 다음 서쪽으로 달려가 오랑캐를 토벌하겠다.’
최현 등이 미심쩍게 여겨 반신반의하고 있던 9월29일, 이인거는 군사를 일으켜
횡성현의 무기고를 탈취한 뒤 스스로를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칭했다.
10월1일, 이인거의 상소가 조정에 도착했다.
이인거는 ‘전하는 호란을 맞아 몸소 갑옷을 입고 와신상담하는 자세로 적과 맞서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오랑캐 사신의 접대나 일삼고 눈치만 살폈으니
천지와 귀신이 공분(公憤)하고 나라가 견융(犬戎)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라고 일갈한 뒤,
자신에게 병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인조와 조정은 경악했다. 급히 선전관을 보내 강원감사 최현을 잡아들이게 하는 한편,
서울과 경기도의 병력 수천을 동원하여 전진시켰다.
비변사는 궁성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호위대장이 군관들을 거느리고 대궐 밖에서 숙직하도록 하고,
동대문에서 횡성에 이르는 길의 요소 요소마다 정탐병을 배치했다.
이인거가 거느렸던 병력은 고작 70명 남짓이었다.
그는 9월30일, 횡성읍에서 벌어진 가벼운 교전 끝에 체포되었다. 싱거운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처벌은 참혹했다. 심문 과정에서 모두 20명이 죽고 14명이 유배되었다.
진압 이후 인조는 모든 책임을 윤황에게 돌렸다.
윤황이 ‘항복’ 운운하는 바람에 이인거 등이 민심의 불만을 틈타 일을 저질렀다고 질타했다.
하지만 인조와 화의를 주도한 신료들의 마음은 도무지 편치 않았다.
이인거의 시도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후금과의 화의에 대한 싸늘한 민심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직후 조선의 분위기는 그렇게 어수선하고 착잡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10-17 서울신문